#37
몸집이 작은 마물들은 대개 마차로 이동했지만, 건물만 한 히페리온을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플로라 보호소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인력이 총동원되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마석 서른 개, 그리고 길게 잘린 필리스 줄기. 이 두 가지만 있다면 히페리온을 옮기기에 충분하단다.
먼저 온실 끄트머리를 필리스로 둘러 원형의 마법진을 만들어 내고, 이후 일정한 간격으로 마석을 올려놓았다. 마지막 마석까지 배열에 맞춰 올리니 베르크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제가 해야죠.”
여러 가지 마법 중에서도 이동 마법은 마력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의식이 없는 자에게 행하는 마법은 특히 까다롭다. 단, 누군가 ‘길잡이’가 되어 대상을 이끌어 준다면 실패할 확률이 확연히 줄어든다.
베르크에게서 설명을 듣자마자 기꺼이 내가 히페리온의 길잡이가 되겠노라고 자원했다. 좋게 말해 자원이지, 사실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전부 마력을 쏟아 넣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호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통로가 나타나면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마 ‘길잡이’인 태오 군은 원하든 원치 않든 히페리온의 기억 일부를 마주하게 될 겁니다.”
“기억의 일부요?”
“네. 하지만 신기루처럼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출구로 나올 때까지 절대 이것을 놓지 마십시오.”
진지한 당부와 함께 베르크는 히페리온의 일부로 보이는 나뭇가지를 건넸다. 한 손에 들어오는 가는 나뭇가지를 소중하게 쥐고 마법진을 둘러싼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그 사이에 아스레인은 없었다. 대외적으로 마법 쓰길 꺼려 하는 그는 이미 히페리온이 옮겨질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
천천히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니 등 뒤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도착하면 아스레인 교수님과 다른 보호소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곳까지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베르크님.”
씩씩하게 대답하며 히페리온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그에게 손을 얹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온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기도문을 외웠다. 비록 자세히 들리진 않았으나,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와 맞물려 마치 요정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귀가 먹먹해지더니 물속으로 들어간 듯 몸이 가벼워졌다. 완전히 외부 소음이 차단된 순간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볕이 들어오지 않는 좁은 상자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온 탓일까.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내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초라한 나뭇가지만 쥔 채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다 보니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멍청한 인간들이 어르신을 해칠 거예요.]
[나를 걱정해 주니 고맙구나.]
[보세요! 저번에도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감히 어르신을 발로 찼잖아요.]
어린 것은 씨앗이라고 쳐도, 울림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주인을 알 길이 없었다. 설마… 히페리온인가? 소리를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니 허공에서 연두색을 머금은 불빛이 피어올랐다. 한여름 밤 숲속에서 우연히 만난 반딧불이 같았다. 이게 베르크가 말한 ‘히페리온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앞서가는 불빛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다시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옛적에 부적이라며 내 가지를 잘라 간 인간을 기억하느냐.]
[그럼요!] [다신 햇빛도 못 보게 없애려 했더니 어르신께서 말리셨잖아요.]
귀여운 목소리로 꽤 살벌한 소릴 한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어린아이의 투정을 듣는 것처럼 여유롭게 말을 돌렸다.
[그럼 기특하게도 나를 챙겨 주던 아이는 기억하겠구나.]
[당연하죠.]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 아이 같진 않아요.]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히페리온은 인간을 경계하는 씨앗들의 편을 들어 주나 싶더니, 곧 그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지가 잘린 다음 날, 마침 그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흙이 묻어 엉망이 된 손으로 새하얀 꽃을 주었지. 그때 아이는 내게 ‘왜 가지가 잘렸냐’며 마치 제가 다친 것처럼 슬퍼했다. 내겐 무수한 가지 중 하나였을 뿐인데…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마음이 참 어여뻤지.]
마물인 히페리온에게 옛적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이자, 어린아이. 세월이 묻어나는 목소리에서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밀려왔다. 히페리온이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느껴졌다. 잠시 숨을 고른 그가 한층 낮아진 음으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네. 그 아이에게서 내 가지를 잘라 간 인간의 냄새가 나더구나. 핏줄이었을 테지. 어린아이는 제 혈육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게야.]
하루는 인간에게 나뭇가지를 뺏기고, 또 하루는 인간에게 꽃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둘이 부모 자식 사이라니 기구한 우연이었다. 씨앗들은 하나같이 ‘우매하고 아둔한 인간’이라고 욕했다. 허허. 너털대며 웃던 히페리온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 아둔함이 오랜 세월 동안 외로웠던 나를 새하얀 꽃으로 물들여 주지 않았느냐.]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쩌면, 여전히 인간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윽고 작은 반딧불이 나타나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출구로 안내했다. 통로 끝에서 쏟아지는 빛무리에 발을 들이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밝은 빛이 몸을 감싸 안았다.
풀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흩어진 무리를 찾는 새 소리, 금속으로 거친 흙을 긁어 내는 소리. 조금씩 단절되어 있던 외부 소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눈을 뜨자 구름 한 점 없이 높은 하늘과 그 사이를 가르는 옅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태오.”
끝이 짧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아득한 정신을 붙잡았다.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아스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제가 왜 여기 누워 있죠?”
“마법의 여파로 기절한 자네를 들판으로 옮겼네.”
“히페리온은요?”
“물론 예정된 장소로 무사히 도착했지.”
“하아, 다행이다….”
성공했구나. 순간 시야에 히페리온이 없어서 잘못된 줄 알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스레인이 내민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연회 전,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았네.”
“할 일이라면….”
“쿠네 숲에서 적응을 끝내고 본디 살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가길 기원하는 걸세. 아드 쿠네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지.”
아스레인을 따라 주위를 돌아보니 언덕 위에 선 무리가 보였다. 말끔한 로브를 입은 사람이 금빛 염료를 엄지에 묻혀 마물의 이마에 발라 주었다. 그 후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기도문을 읊었다.
마치 세례를 받는 것처럼 성스러운 분위기에 젖어 함께 엄숙해졌다. 꽤 많은 양의 마차가 출발한 것에 비해 의식을 진행 중인 것은 저들뿐이었다. 아마 내가 기절한 사이 진행된 모양이다.
아쉬운 대로 끝나 가는 의식이라도 구경하러 가는데, 갑자기 아스레인이 앞길을 막아 섰다.
“자, 받게나. 베르크 교수와 상의는 이미 마쳤네.”
“무슨 상의를….”
아스레인이 금빛 염료가 담긴 나무 그릇을 건네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릇을 받아 드니 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히페리온을 축복해 주게.”
“예?! 제가 그래도 되는 걸까요?”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히페리온도 기뻐할 걸세.”
히페리온에게 축복을 할 수 있다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얌전히 아스레인의 뒤를 따랐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우직한 나무 기둥을 둘러싼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거대한 히페리온이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주변 수풀을 옮겨 심는 중이었다. 삽으로 구덩이를 만들던 이들은 아스레인을 발견하곤 가볍게 인사하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참으로 조용한 숲속이었다. 유리 온실이 아닌 탁 트인 하늘 아래 가지를 뻗은 히페리온은 더욱 웅장한 자태를 뽐내었다. 하지만 낯선 환경 탓에 지금쯤이면 정신없이 재잘거려야 할 씨앗들은 잠잠했다. 단지 바람이 전해 준 언덕 너머 성당에서 울린 종소리만 대앵- 대앵- 울렸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경건한 마음으로 히페리온에게 다가갔다.
“기도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네. 기도엔 정해진 형태가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이라 하니 막막해졌다. 우선 봤던 대로 엄지에 염료를 찍어 밑동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한동안 말없이 기둥에 난 커다란 상처를 바라보았다. ‘길잡이’ 역할을 하며 의도치 않게 히페리온이 가진 기억을 엿보았다. 비록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지금도 인간을 원망하지 않는다.
부디 그 소중한 마음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며.
“아름다운 잎을 피워, 언젠가 바람이 적당한 날… 쉴 곳 없는 이들에게 그늘을 내어 주길.”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상처가 난 밑동 주변에 염료를 발라 주었다. 거친 껍질이 손길을 따라 금색으로 변하는 광경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웠다. 나뭇잎 사이로 햇볕이 들어올 때마다 은은하게 빛나는 껍질이 그의 앞날을 비춰 줄 것이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바닥난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어 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그에게 돌아가니, 아스레인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태오. 그간 수고 많았네.”
“저야말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 놓고 연회를 즐기게나.”
아스레인과 함께 연회 준비가 한창인 곳으로 돌아왔다. 한구석에서는 악기로 선율을 맞추고 있었고, 다른 구석에서는 테이블을 정리하기 바빴다. 그때 연회장을 장식한 꽃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겹겹이 꽃잎이 들어찬 장미를 닮은 새하얀 치자꽃이었다. 아직 옮겨 심어지지 않은 묘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교수님!”
“왜 그러나.”
“저 잠시… 히페리온에게 다녀와도 될까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홀로 오랜 세월을 지낸 히페리온을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아이가 선물한 흰 꽃이었다. 비록 똑같은 꽃은 아니겠지만, 매혹적인 향기를 가진 치자라면 히페리온을 달래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