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잡념을 떨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이라고 했던가.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한시라도 빨리 히페리온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싶어 쉬지 않고 칼질했다. 사다리 아래로 잘린 넝쿨이 소복이 쌓여 가는 걸 보면 전문 원예가 부럽지 않았다.
식사를 챙겨 주려 온실에 들른 베르크는 빠른 작업 속도에 연신 감탄하며 아예 자고 가라고 숙소까지 내어 주었다.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았던 아스레인마저 나를 따라 연회 기간 내내 보호소에 머물겠다고 말했다.
꼬박 하루가 지났다. 고된 작업으로 인해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가 떼니 아침이었다. 숙소로 삼은 자그마한 오두막에선 오동나무 향기가 아늑히 떠돌았다. 보호소에서 준 셔츠와 바지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엔 적막이 흘렀다.
“어라, 교수님? …베르크 님?”
어젯밤까지만 해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바닥 틈으로 들렸는데, 다들 이른 아침부터 나간 모양이다. 아스레인은 온실로 가신 걸까? 거참. 갈 거면 같이 좀 가 주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온실로 걸어가다가 좋지 못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내가 없는 사이 히페리온의 씨앗들이 말실수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제 ‘멍청이’라며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막 온실에 도착해 문 앞을 기웃거렸다. 하필 새벽안개로 유리창이 뿌연 탓에 온실 밖에서 내부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니 통로 너머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흠잡을 것 없는 뒷모습을 보자마자 말을 꺼내려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
거목 앞에 홀로 선 그는 넘실거리는 나뭇잎에게 둘러싸여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딱딱한 정장 차림을 갖춘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아스레인은 품이 넓은 로브를 입었다.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와 얇은 천에 아름다운 골격이 어렴풋이 비쳤다. 하늘거리는 새하얀 천 위로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너울거렸다. 그가 천천히 손을 올리자 떡잎으로 만들어진 작은 나비가 곧게 뻗은 검지에 내려앉았다. 요정의 속삭임을 따라 신비로운 공간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황홀한 광경이었다.
제자리에 서서 오롯이 그를 눈에 담으니 곧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나?”
한참 전부터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퍽 차분한 목소리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교수님. 저도 나름 빨리 왔는데 왠지 지각한 기분이네요….”
하도 부지런한 그 때문에 새벽같이 출근했는데도 눈치가 보인다. 멋쩍게 뺨을 긁적이자 아스레인 주변을 맴돌던 씨앗들이 기다렸다는 듯 코앞으로 다가와 툴툴거렸다.
[맞아. 늦었어.] [지각이야!]
눈뜨자마자 왔는데 지각이라니. 막 억울해지던 차에 아스레인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해가 떴다. 그를 탓하지 마.”
[하지만 버릇없잖아요.] [맞아.] [여기 어르신이 둘이나 계신데 자기가 제일 늦게 오고.]
“혼자 이 많은 것을 잘라 냈으니 피곤했겠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내가 말할 땐 듣지도 않던 씨앗들은 아스레인의 몇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일단락되나 싶었건만, 아스레인이 등을 돌리자마자 단풍 진 씨앗이 조용히 다가와 날개로 내 이마를 살짝 때렸다.
입 모양으로 ‘뭐야?’라고 물었으나 유치한 씨앗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척 날아가 버렸다. 속수무책으로 당해 어이없던 와중에 아스레인이 히페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자네가 도와준 덕분에 할 수 있게 됐어.”
“네? 뭐를요?”
이마를 어루만지며 곁으로 다가가니 그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양동이를 향했다. 손잡이 없는 나무 양동이엔 살짝 건드려도 넘칠 만큼 맑은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히페리온에게 물이라도 주려는 건가 싶었지만, 아스레인은 한층 더 대단한 계획을 세웠다.
“마법.”
짤막한 대답을 내뱉은 아스레인은 양동이를 향해 손을 뻗어 검지만 살짝 들어 올렸다. 우아한 손짓을 따라 일렁거리던 수면에서 단숨에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우왁!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마법에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천장에 닿을 기세로 뻗어 올라간 물기둥은 이윽고 다섯 개의 물줄기로 나뉘어져 히페리온을 휘감았다. 투명한 장막으로 감싸진 나무는 마치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감탄할 새도 없이 또 다른 마법이 이어졌다.
“족쇄를 풀어 주어라.”
이번에도 말도 안 될 만큼 짧은 기도문으로 충분했다. 그의 명령대로 물의 장막에서 수백 개의 손이 뻗어 나와 필리스 줄기를 덥석 붙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니 일일이 칼로 잘라야 했던 필리스가 두둑, 하고 쉽게 뜯겨 나갔다. 일정한 길이로 잘린 필리스는 물줄기를 따라 자루 안에 소복이 쌓였다. 그 후 할 일을 끝낸 물은 공중으로 뻗어 나가 마른하늘에 가랑비를 내렸다.
“와…!”
눈 깜짝할 사이에 히페리온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마치 답답한 초록색 옷을 벗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피는 것 같았다.
가벼운 손짓으로 족히 한나절이 걸릴 일을 끝내다니… 역시 마법은 대단하다. 아니, 그가 대단하다고 하는 쪽이 맞겠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아스레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히페리온이 깨어나는 건가요?”
“글쎄. 그건 장담 못 하겠군. 필리스에게 흡수당한 마력이 꽤 되니, 다시 비축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네. 하지만 수많은 씨앗을 부리는 히페리온이니 적어도 쿠네 숲으로 옮긴 후에는 깨어나겠지.”
“하아, 정말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무껍질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일 해가 뜨면 히페리온을 옮기기 위해 정신없어질 테니 오늘이라도 푹 쉬어 두게나.”
“네! 교수님.”
당장 깨어나진 못하더라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숲으로 돌아간 히페리온은 더욱 아름다운 잎을 피워 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허락한다면, 다시금 쉴 곳 없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햇빛을 피해 갈 수 있는 그늘을 내어 주겠지.
그 언젠가. 히페리온의 곁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느낄 날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가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씨앗들이 잎사귀를 펄럭이며 내게 내려왔다. 잘난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째 쭈뼛거리는 것 같다. 그때 오른쪽 날개만 노랗게 물든 씨앗 하나가 다가와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아무튼 네 덕이니까.] [어르신을 도와줘서 고마워.]
“아냐. 잘돼서 다행이다.”
[너무 헤벌쭉 웃지 마.] [바보 같아.]
“으응…. 알았어.”
처음 만나자마자 나를 내쫓으려고 했던 씨앗과도 이젠 많이 친해진 것 같다. 문득 힘들어하는 내게 말을 걸어 준 누르가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졌다. 눈길이 가면 관심이 생기고, 손길이 닿으면 쉽게 정이 드는데… 어째서 정을 떼는 건 이토록 힘들까. 어깨와 손에 달라붙은 나뭇잎 나비들을 보며 짧은 사이 깊게 스며든 정을 느꼈다.
까슬까슬한 나뭇잎 표면을 어루만지는데,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태오.”
“네?”
“손.”
짤막한 단어에 별생각 없이 그에게 손을 건넸다. 일할 때는 몰랐건만, 지금 보니 손가락 마디마다 자잘하게 베인 상처가 빨갛게 올라왔다. 꼼꼼히 상처를 살피던 아스레인은 혀를 찼다.
“쯧, 이럴 줄 알았네.”
“하하… 오늘 안에 거의 끝내려고 서두르다가 그랬나 봐요.”
“손이 성한 날이 없구나.”
“어차피 나을 텐데요. 뭘.”
괜찮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건만, 오히려 그의 미간만 구겨졌다.
“죄송합니다.”
버릇처럼 사과하자 이번엔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아스레인은 긴 소매 안에서 자그마한 통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쓰디쓴 냄새를 풍기는 고체 연고를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상처마다 섬세하게 발라 주었다. 물론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
“자넨 적당히 할 줄을 몰라.”
“그치만… 히페리온과 씨앗들이 숲으로 돌아가기만을 줄곧 기다렸을 걸 생각하니 마냥 손을 놓을 수 없었어요.”
“그럼 도와줄 사람을 구해 달라 말해도 되잖나.”
“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고집인가?”
“아니요. 교수님도 똑같이 생각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를 믿고 보호소에 같이 머물러 주신 것… 아니었나요?”
내가 다짜고짜 일에 뛰어들어도 그는 불가능하다 불러 세우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믿음에 보답하고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쉬지 않고 일했다. 누군가 억지로 몰아세웠던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했으나 예상과 달리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한 적막이 흐르기도 잠시. 가지런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래서 널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예?”
손을 치료하다 말고 웬 폭탄이 떨어졌다. 뭐…나를 좋아해요? 누가요. …설마 당신이요?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크게 동요하는 나와 달리 치료에 집중한 아스레인은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히페리온의 씨앗 말일세.”
“…아.”
“단지 이번뿐만이 아니야. 단델도, 사이누르도. 대개의 마물들이 네게 공명하고 있다.”
그 뒤로도 아스레인의 설명은 이어졌다. 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내가 기어이 미쳤나 보다. 대체 무슨 착각을 한 걸까. 그리고 왜… 실망한 걸까. 내 인생에 줄곧 이상한 놈들만 만나다가, 드디어 멀쩡한 귀인을 만나서 그런가. 그래. 너무 감동한 나머지 분에 겨워 뇌 내 혼선이 생긴 거다.
불현듯 히페리온의 씨앗이 장난스럽게 건넨 말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분이 좋아? 전해 줄까?’
아니야. 절대 아니다. 내가 어떻게 감히.
“대강 치료는 끝났네. 당분간 상처는… 태오.”
하루 이틀 피곤한 나머지 흠모하는 마음을 헷갈린 거다. 가끔 존경이 과하면, 그 대상을 늘 눈으로 좇고 따라가고 싶어지게 되니까.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보이고 싶고, 언제까지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고. 그러니 이건 존경이다.
나 참… 감정을 헷갈리다니 너무 멍청했다. 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져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오!”
“예?”
“괜찮나? 열이 오른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전에 부드러운 손등이 뺨에 닿았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눈빛과 마주쳤다. 제자를 이만큼이나 생각해 주는 스승이 어디 있겠어. 살짝 찌푸린 미간을 발견하곤 두 손을 내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존경이라면 괜찮겠지.
“괜찮아요.”
존경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