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35/305)

#35

나뭇잎이라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칠 것 같았다. 소름 끼치는 경고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겨우 목만 끄덕였다. 다행히 나뭇잎은 히페리온의 가지 끝에 매달려 평범한 잎사귀로 돌아갔다.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칼 잡는 것이 익숙지 않아 몇 번 베일 뻔했지만, 서서히 요령이 생겨 히페리온이 다치지 않게 넝쿨을 없앨 수 있었다.

반나절이 흘렀을까. 슬슬 히페리온이 밑동을 드러냈다. 그새 마디가 부르트고 손끝이 까슬까슬했지만, 이보다 보람찰 수 없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한번 높이를 가늠해 보고자 포대로 저렴한 완충 장치를 만들어 두고 사다리로 올라갔다.

두꺼운 나뭇가지에 올라가 앉으니 무섭기보다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리 너머로 천천히 떨어지는 해와 저녁노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원예용 칼을 들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나뭇잎이 소란스럽게 흔들렸다. 또 뭐가 문제인 걸까.

[어이.]

“으응?”

[누군가 오고 있어.] [무서워.] [위험한 존재.] [또 다른 침입자다.]

“무슨 침입자를 말하는 거야? 여긴 플로라의 온실이라고. 침입자 같은 건….”

없을 텐데. 의아하게 갸웃거렸지만, 형태를 드러낸 나뭇잎 나비들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쫓아내자!] [우리론 안 될 거야.] [그럼 어르신이라면?] [지금은 못 깨어나시잖아.]

“아니, 얘들아.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럼 이 인간이라도 보내자.] [그래. 네가 가 봐.] [어르신을 지켜 줘.]

“어? 나? 내가?”

나뭇잎 나비들이 재촉하듯 내 팔과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등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가지 위에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문이 보일 것 같은데. 한 번 더 엉덩이를 움직인 순간, 나뭇잎 나비가 퉁! 하고 밀치는 힘에 그만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우왓…!”

위험한 순간에 다다르면 모든 것이 천천히 보인다는 속설이 사실이었나. 잡을 것 하나 없는 나무에서 떨어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기왕 떨어질 거면 포대 위로…! 간절히 바라는 사이 멀리서 재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포대 더미 위라고 믿기지 않는 안정감. 설마 하고 눈을 슬그머니 뜨자 가지런한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이젠 나를 뛰게 하는구나.”

“…교수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아스레인이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당장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데, 순간 뇌가 정지해서 혀까지 굳어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 그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은가.”

“그래서 포대도 깔아 놓고 올라갔어요. 그렇게 높지도 않았고…, 심지어 잔디밭도 푹신….”

하아. 거센 한숨 소리가 말을 끊었다. 구둣발로 포대를 툭 밀어낸 아스레인이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고작 이런 걸로 괜찮으리라 생각한 건가?”

“어,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엉덩방아를 찧었어도 괜찮을 높이였다. 물론… 멍이나 근육통은 면치 못하겠지만. 그저 떨어지는 나를 보고 입구에서부터 단숨에 달려온 그가 신기할 뿐이었다. ‘굳이 안을 거까진 아니었는데….’라고 말할 수 없으니 조용히 눈치만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아스레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보다 왜 갑자기 떨어진 거지?”

“아, 그들이 알려 줬거든요.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그들?”

“네.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나뭇잎이 자꾸 말을 걸어요.”

짧은 사이 나뭇잎 나비들은 기둥 뒤로 숨어 버렸다. 아스레인의 등장으로 많이 놀란 모양이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가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히페리온의 씨앗이군.”

“히페리온에게 자식이 있어요?”

“단순히 히페리온 근처를 떠도는 사념체를 일컫네.”

아스레인은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우며 설명했다.

히페리온이 마물인지 몰랐던 인간들은 성스러운 거목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간절한 염원이 쌓이고 쌓여 히페리온의 나뭇잎에 깃들면, 마침내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오직 히페리온을 위해 움직이는 사념체들.

“그것이 ‘히페리온의 씨앗’이다.”

설명이 끝나자 어느새 내 어깨에 앉은 나뭇잎 나비가 말했다.

[그것도 몰랐어?] [멍청이.]

멍청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전염되듯 나를 놀렸다. 아니라고 말하기도 지쳐 허탈하게 웃으니 아스레인이 대신 그들을 진정시켰다.

“…시끄럽군.”

그는 손에 든 나뭇잎을 놓아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화를 산 나뭇잎 나비들이 일제히 내 등 뒤로 날아와 숨었다. 그러곤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다시금 재잘거렸다.

[역시 무서워.] [하지만 이젠 괜찮아.] [왜?]

[그 높이에서 떨어져도 인간은 안 다쳤을 거야.] [맞아.] [이 아이를 구하려고 단숨에 뛰어왔어.]

[바보.] [멍청이.]

부디 그의 귀에 안 들리길 바랐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아스레인이 히페리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자코 지켜보다가 뒤늦게 말려야 한단 사실이 떠올랐다.

“어어…! 만지면 안 돼요!”

마력이 충분한 손길이 닿자마자 필리스 줄기 끝에서 작은 나뭇잎이 튀어나왔다. 넝쿨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직전, 얼른 소매를 붙잡아 손을 떨어트렸다. 하마터면 내내 고생해서 일궈 낸 결과가 말짱 도루묵 될 뻔했다. 익숙하게 허리에 찬 원예용 칼을 꺼내 들곤 줄기를 잘라 내며 그를 탓했다.

“아잇, 교수님. 안 그래도 마력 많은 분이 이러시면 어떡해요.”

“히페리온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네. 마력 운용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충분히 도울 수 있으니까.”

“직접 닿아야만 알 수 있는 건가요?”

“평소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필리스가 장막처럼 가로막고 있어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군.”

잘려 나간 넝쿨을 정리하는 사이, 아스레인은 빈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방대한 마력이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은 노련한 그에게도 처음인 것 같았다. 원예용 칼을 안전하게 포대 위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중간 다리가 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요.”

“중간 다리?”

“제겐 마력이 얼마 없잖아요. 교수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제가 거름망처럼 한 번 걸러 내는 거죠.”

마력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허황된 이론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나무 기둥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까칠까칠한 감촉 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평범한 인간이 그러하듯 히페리온을 살아 있는 마물이라고 인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이라면 다른 걸 느끼시겠지.

아쉬운 대로 손을 거두려는 그때, 차가운 감촉이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니 내 손을 가뿐히 잡은 커다란 손이 보였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뺨을 간지럽혔다. 잘못 움직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뻣뻣하게 앞을 보았다.

“…저…기…?”

“잠시 이대로 있어 주게.”

잠깐. 너무 가까운데…. 숨결이 귓가를 스쳐 목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목덜미가 민감하단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진중하게 히페리온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신경을 분산시키려 안달이 났다. 왜 하필이면 오늘은 장갑을 안 끼셨나요. 그나마 손과 손 사이에 천이라도 있었더라면 비교적 덜 신경 쓰였을 텐데.

갈 곳을 잃은 동공이 그의 손을 제외한 모든 곳을 훑고 다니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손을 움직여 보겠나.”

“어디로요…?”

“이쪽.”

이쪽이라고 하면 어딘 줄 알고 움직여요. 안 그래도 지금 전두엽까지 전부 들고 일어난 탓에 뇌는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눈치껏 오른쪽으로 움직이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아닌가 보다. 손을 우뚝 멈추고 이번엔 반대로 나무껍질을 쓸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실례하지.”

여기서 더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숨을 흡, 하고 참으니 그가 예고 없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깍지를 낀 채 마음대로 손을 움직이는 그를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꺼풀은 파리하게 떨려 왔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깊은 독에 빠져 절망적이었다. 차라리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드디어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 됐다.”

“그, 그, 그, …렇군요.”

“왜 그러나. 안색이 별로군.”

진심으로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가요? 하고 싶은 말이 한 트럭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지만 겨우 억눌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짧게 대답하며 한쪽 입꼬리를 어색하게 씰룩거렸다. 그러자 머리 위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내가 손을 잡은 게 그리 싫더냐.”

“…예?!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거 말고….”

“그럼 다행이군.”

엷은 미소를 머금은 아스레인은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의도치 않은 행동인 것 같았으나, 그게 내 마지막 벽을 무너뜨렸다.

히페리온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온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무 기둥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저만치 도망갔던 히페리온의 씨앗들이 기다렸다는 듯 날아와 내 주변을 감쌌다. 허공에서 춤을 추던 씨앗들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와하하!] [얼굴 빨개졌다.] [네 뺨에만 봄이 찾아왔어.]

“…조용히 해. 이제 일할 거니까 방해하지 마.”

[얼굴 좀 봐.] [부끄러워하네.]

까르륵. 간질거리는 웃음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씨앗들을 파리 쫓듯 보내 버리곤 다시금 필리스를 없애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말고 다시 내려오니 씨앗들이 냉큼 날아와 물었다.

[벌써 쉬는 거야?]

“집중이 안 돼서.”

[왜?] [어째서?]

그러게. 이유를 인정하기 싫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가 생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대로 손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고작 남자끼리 손을 잡은 거잖아. 심지어 일을 위해서였는데, 어째서 ‘닿았다’는 사실에 사춘기 청소년처럼 집착하고 있느냔 말이다.

“…하아.”

물론 벽을 쌓던 아스레인과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그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렇다. 아스레인은 아무런 의도 없이 한 행동을 나 혼자 신경 쓰고 있다.

[아~ 나 알겠다.] [뭔데, 뭔데?]

손에 접착제라도 붙은 양 끈질기게 얼굴을 가리니 씨앗들끼리 모여 소곤소곤 떠들기 시작했다. 짧은 토론 끝에 날개 끝이 노랗게 물든 씨앗이 씩씩하게 외쳤다.

[그분 때문이지!]

“아니야.”

정곡이 찔린 나머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부정하자 씨앗이 날개로 눈가를 간지럽혔다.

[하하! 그분이 좋아?] [전해 줄까?]

“뭐? 아니? 미쳤어?”

[그럼 싫어?]

“그건… 또 아닌데….”

우환을 짊어진 사람처럼 다시금 마른세수를 하니 씨앗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대체 뭔데?]

[인간은 복잡해.] [복잡해~]

나도 단순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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