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34/305)

#34

아침이 되자마자 마차를 타고 보호소 ‘플로라’로 향했다. 치료가 시급한 마물들이 서식하기에 경비는 한층 삼엄했다. 무거운 철문을 넘어서니 길을 따라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여러 기둥으로 천장을 받친 석조 건물 앞에 내리자 한 남성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오셨군요. 아스레인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단아한 몸가짐이 돋보이는 남성은 나긋나긋한 투로 아스레인을 반겼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넘겨 따스한 빛깔을 담은 하늘색 눈동자가 훤히 드러났다.

“인사해라. 태오. 이쪽은 ‘플로라’의 수석 헤임 베르크 교수다.”

아스레인의 손짓을 따라 베르크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베르크 교수님. 아스레인 교수님 아래서 배우고 있는 태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태오 군. 교수직은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으니 부디 편하게 부르세요.”

“아, 네! 베르크 님.”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베르크는 다시 아스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회 준비는 순조롭습니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대부분이라 함은?”

“…전에 말씀드린 ‘히페리온’을 기억하십니까.”

내내 부드러운 안색을 유지하던 베르크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어루만졌다. 불안한 낌새를 눈치챈 아스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친 곳은 전부 나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심각한가 보군요.”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베르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앞서 걸어갔다.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는 동안 서둘러 마물 도감을 살펴보았다. 시스템이 머릿속에 박혀 있으니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히페리온. 처음 듣는 이름을 되새기니 허공에 떠오른 마물 도감이 빠르게 넘어가다가 중간쯤에 멈췄다.

NO. 57에 기록된 히페리온은 무려 1급 위험 마물이었다. 나무 모양의 마물은 한 그루에서 끊임없이 가지가 뻗어 나가 마치 뿌리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풍족한 땅에 뿌리를 내리면 수십 년간 움직이지 않는 탓에 마물인지 모르는 인간으로부터 신성한 자연물로 여겨졌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거대한 나무. 마치 여러 개의 나무가 합쳐진 것 같은 반얀 나무를 떠올리며 도감을 치웠다. 고개를 드니 마침 걸음을 멈춘 베르크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입니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아파트 6층 높이의 직육면체 온실이 드러났다. 깨끗한 유리 온실 안에는 오로지 거대한 나무 한 그루만 떡하니 놓여 있었다. 히페리온이었다. 도감에서 본대로 여러 개의 나무를 합친 것처럼 기둥이 마구 갈라져 있었고,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천장을 뚫을 기세로 뻗어 올라갔다. 가히 감탄이 나올 만한 광경에 점정을 찍은 것은 나무를 감싼 넝쿨이었다.

“실은… 히페리온을 치료할 때 도움이 되고자 필리스도 함께 키웠습니다.”

“필리스요?”

“아, 태오 군은 모를 수도 있겠군요.”

의아하게 물으니 베르크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필리스는 마력을 흡수하는 넝쿨 식물로, 마물 히페리온과 공생 관계로 유명하다. 거대한 히페리온은 온몸으로 마력을 내뿜어 숲의 동식물에 원치 않은 피해를 끼친다. 그때 넝쿨 필리스가 히페리온을 휘두르고 자라면서 불필요하게 빠져나가는 마력을 붙잡아 준다. 따라서 필리스는 히페리온에게 마력이란 영양분을 얻고, 히페리온은 필리스 덕분에 껍질을 파고드는 해충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문제였다뇨?”

“저 히페리온의 밑동을 보십시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두꺼운 밑동에 부자연스럽게 움푹 파인 흔적이 보였다.

“저 상처로 인해 내뿜는 마력을 조절하지 못했죠. 결국 그 몸을 둘러싼 필리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필요 이상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뒤늦게 비대해진 넝쿨을 제거하려 마법을 쓰자니 홍수 난 집에 물을 붓는 격이고, 억지로 잘라 내려니 사람에게서 흐르는 마력에조차 반응하고 맙니다.”

공생하는 식물이 기생하게 되어 버렸다. 온몸이 필리스로 뒤덮인 히페리온은 곧 양분을 잃고 시들어 버릴 것이다. 베르크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연회까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히페리온은 시기를 맞춰 쿠네 숲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마법으로 잘라 내니 도리어 필리스가 자라나고, 물리적으로 없애려고 시도해도 인간의 마력에 반응한다.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 당장은 필리스를 잘라 내는 방법이 최선인 거죠?”

“결론은 그렇습니다. 마력이 극도로 부족한 사람이 일일이 자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를 주변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플로라 보호소는 대부분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이 구성하고 있고, 협력 관계를 맺은 안겔루스 대학은 말할 것도 없죠.”

마력이 극도로 부족한 인재.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알 것 같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정말 마력이 없거든요.”

“어느 정도인지 측정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크는 서둘러 품에서 외눈 안경을 꺼냈다. 그러곤 내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물을 감정하듯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주먹을 꽉 쥔 채 차렷 자세로 있으니, 곧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아…!”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내린 베르크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희박하다 못해 바닥을 보이는 마력! 어떻게 이런 인재가….”

“하하, …기분이 좋아야 되는 거겠죠?”

“지금 당신이라면 필리스를 조금도 키울 수 없을 겁니다…!!”

물론 도움이 된다니 기쁘다만, 어째 기분이 묘하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베르크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고된 작업이 될 겁니다. 하지만 태오 군….”

“좋아요. 제게 맡겨 주세요.”

“…정말입니까?”

“안 그래도 일을 도와 드리려고 온 거니까요.”

“아아, 신이시여….”

베르크는 이름 모를 신에게 기도를 올리다 말고 부리나케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윽고 한 손에 쉽게 들어오는 원예용 칼을 가져와 내게 칼자루를 넘겨주었다.

그 후 베르크는 더 이상 넝쿨이 자라지 않도록 일정 이상 마력을 가진 자는 온실로 출입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직 나만이 히페리온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나와 달리 걱정으로 가득한 아스레인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 잘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넝쿨이 어느 정도 제거가 되면 출입이 자유로워진다잖아요. 오늘 해가 지기 전에 확인하러 오세요.”

“알겠으니 절대 무리하지 말게.”

“그럼요!”

그들이 온실 앞을 떠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통로를 지나 가림막 대신 놓인 중문을 여니 무거운 공기가 숨통을 턱 막았다. 잔기침을 내뱉으며 바닥에 놓인 사다리와 포대를 낑낑 끌어다가 밑동 근처에 두었다. 가까이 가도 온통 넝쿨로 뒤덮여 껍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며칠은 밤을 새워야겠는걸.”

고된 작업이 이어질 걸 알고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뿌리 부분부터 제거하여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자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살짝 휜 칼끝으로 필리스 줄기를 자르고 단숨에 잡아당겼다. 하지만 넝쿨에 달린 자잘한 잎사귀가 마치 문어 빨판처럼 바짝 달라붙어서 나무껍질이 함께 뜯겨 나갔다.

“…아?”

너덜너덜해진 껍질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뭇잎이 잽싸게 따귀를 스쳤다. 아니, 내리쳤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자 손바닥만 한 나뭇잎이 허공을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뭐, 뭐야?”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나뭇잎이 공중에 떠 있으니 퍽 이상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니 네 장의 잎사귀가 하나로 합쳐져 나비 모양이 되었다. 끝이 살짝 단풍으로 물들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히페리온에게 붙어 있던 수백 개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나를 둘러쌌다. 왠지 나뭇잎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뒤로 물러서니 코앞까지 나뭇잎 나비가 날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너 뭐야?] [어르신께 무슨 짓이야?] [괴롭히고 있어.]

[자비롭게 보내 줄 때 썩 꺼져!] [침입자.] [나가!]

지금… 나뭇잎이 말을 한 건가?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온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보다도 매도당하는 것이 두려워 다급하게 칼을 내려놓고 두 손을 내저었다.

“나는 히페리온을 도우러 온 거야. 진정해!”

[그걸 어떻게 믿어.] [고작 네가?] [거짓말쟁이!]

“진짜야. 한 번만 믿어 줘!”

[우리가 왜?] [이미 쇠약해지신 분이야.] [지켜야 해.] [우리가 지켜 드려야 해.]

한 번 말하면 최소한 세 개의 대답이 돌아오니 정신이 없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마른세수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뭇잎에게 공격당해 온실에서 쫓겨나는 것보다야 허공에 대고 협상을 하는 쪽이 백번 낫다.

“그래.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히페리온은 이 넝쿨에게 마력을 빼앗겨서 쇠약해진 거야.”

[알아.] [우리도 없애 보려고 했어!] [그런데 안 돼.]

“난 할 수 있어. …정 의심되면 옆에서 계속 지켜봐.”

당당히 소리치자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나뭇잎 무리가 우뚝 멈춰서 그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내 자격을 놓고 한바탕 토론이라도 하는 걸까. 긴장한 내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단풍 나비가 다가왔다. 그 후 무수한 나뭇잎 나비가 순식간에 내 주변을 감쌌다.

[단 하루야.] [해가 질 때까지 두고 볼게.]

[그래도 여전히 달라지는 게 없으면,]

나뭇잎 나비 무리가 일제히 말했다.

[넌 여기서 못 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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