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33/305)

#33

서점으로 향하는 내내 조용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 숨 막히는 침묵을 견뎌 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아스레인이 든 짐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신기한 약초가 있으면 물어보려고 했건만, 이상하게 전부 익숙한 약초뿐이었다.

“이걸 사러 오신 거예요?”

“그래.”

“이 약초들 전부 안겔루스 대학 약초밭에 있지 않아요…?”

“자네 말대로네.”

알면서도 번거롭게 시장 나들이를 왔다고?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억지로 시간을 내어 준 것이 의문이었다. 잔머리를 굴리다가 저 앞에 보이는 책 모양 간판을 가리키며 웃었다.

“아~ 역시 교수님도 서점에 가고 싶으셨던 거죠!”

지레짐작하며 웃었지만, 아스레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도리어 물었다.

“굳이 이유를 들어야겠나.”

“예? 으음. 그건 아니지만요….”

말하기 곤란한 이유라면 억지로 듣지 않아도 됐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그가 말했다.

“최근 썩 좋지 못한 일도 있었고.”

“네, 네.”

“무엇보다 자네 기분이 안 좋아 보였거든.”

“…네?”

내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왔다고? 나 때문에? 기분 전환 시켜 주려고? 오직 그 이유 하나로? …물론 오랜만에 일 아닌 외출을 해서 좋긴 하다만, 처음부터 아스레인이 그걸 노렸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선 채로 굳어 버렸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춘 아스레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쪽이네.”

믿기 어려운 말을 던져 놓고 홀로 평온하니 왠지 억울했다. 먼저 서점으로 들어가는 그를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대도시라 그런지, 아멜리 백작령에서 자주 오가던 서점과는 책장 개수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들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양한 카테고리의 서적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동화만 모여 있는 책장에 멈춰 섰다. 가장 잘 보이는 가운데에 아스레인에게 선물했던 책이 꽂혀 있었다. 냉큼 꺼내어 표지가 그에게 잘 보이도록 책을 돌려 들었다.

“아, 이 책 읽으셨어요?”

“선물을 받은 그날 읽었네.”

진짜 읽으셨구나. 심각하게 동화를 정독하는 아스레인의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이 터졌다. 그러곤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서 동화책을 한 장씩 넘겨 보았다.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엔 옆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아스레인인 줄도 모르고 마냥 책만 골랐다. 게다가 어떤 책을 선물할 거라고 말하니 그가 뭐라고 했더라. …아! ‘그자는 이미 그걸 갖고 있는 걸로 아는데.’라고 애써 돌려 말했지.

다시 떠올려 봐도 어설프게 나를 배려해 준 아스레인이나 당사자 앞에서 선물을 고른 나나 전부 우습기만 하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옆에 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제가 교수님을 못 알아봐서 솔직히 속으로 웃으셨죠.”

“음?”

아스레인은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몸을 숙였다. 쪼그려 앉은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으니 평소보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땐 로브 속에 이런 얼굴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멜리 백작가에서 대면했을 때 넋을 놓고 말았었다.

지금까지 변함없는 생각이다만, 아스레인은 소설 속 표현대로 하늘과 비슷하다. 이미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몇 번을 올려 봐도 똑같은데, 질리지 않고 계속 보게 되는 하늘 같은 사람.

“저 그때 실은… 선물까지 골라 주셨는데 제대로 인사를 못 해서 못내 아쉬웠거든요. 그래서 다음에도 마주친다면 꼭 인사를 하려고 했어요. 물론 바로 다음 날 만나 뵙게 되어 당황했지만요….”

뺨을 긁적이며 뒤늦은 고백을 하니 그가 눈썹 끝을 내리며 말했다.

“진심으로 속이려는 건 아니었다만, 미안하게 됐군.”

“예? 아뇨. 사과받으려는 게 아니에요. 당황했지만, 무척 기뻤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기뻤다고?”

“네! 당연하죠. 심지어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물론 아스레인은 구한 게 아니라 단지 연구생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내겐 구원과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에도 감사했어요.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누르를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묵묵하게 곁을 지켜 준 그에게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일전에도 은혜를 반드시 갚는다고 호언장담했었는데, 갚기는 무슨. 신세 진 것을 부채로 환산하자면 이미 파산 신청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민망한 기색을 숨기려 마른세수를 하다가 불현듯 여관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저절로 귓가에 열이 올라 고개를 숙이며 쭈뼛거렸다.

“그리고… 볼썽사납게 운 건 말이죠? 정말 울려던 게 아니고요. 제가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원래….”

구구절절 변명을 이으니 아스레인이 작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괜찮네.”

“…예?”

“눈물이 흐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오히려 그걸 책잡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니겠나.”

부정할 여지 없이 옳은 말이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또다시 위로를 들어 버렸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무뚝뚝하게 다정한 말을 하는 것이 습관인 모양이다. 게다가 그걸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동화책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가 처음으로 기댈 곳이 생겨서 마음이 놓였나 봐요.”

“기댈 곳?”

아.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당사자가 들으면 꽤 부담스러울 말을 다짜고짜 내뱉고 말았다. 다급히 눈치를 살피며 급속도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찌 바꿀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퍽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에게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음? 그게 당신인데요. 뒷말을 삼키며 아스레인을 흘겨보았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본인임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평소처럼 비웃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얼핏 부러움이 서렸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생각해 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그조차도 어딘가에 기댈 수 있는 곳이 응당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왕이라도 자신만의 대나무 숲을 가지기 마련인데, 과연 그가 기댈 곳은 어디일까. 난데없이 울어 버리는 못난 제자를 위로해 주면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아스레인이 누군가에게 기대긴 할까. 문득 의문이 생겨 동화책을 덮으며 가지런한 옆모습을 똑바로 응시했다.

“교수님은요?”

갑작스런 질문에 청초한 금안이 나를 향했다. 학교 밖에서 직위를 떠난 지금이라면…. 아니, 지금밖에 하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기댈 곳이 있으세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그러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스레인은 나를 바라본 채로 굳었다. 서서히 커지는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누가 봐도 당혹스러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여유로운 가면 뒤에서 처음으로 진짜 아스레인을 마주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평소대로 돌아간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말했다.

“왜. 없다면 자네가 해 주려고 그러나.”

“아니, 저는 장난이 아니에요!”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으면 했으나 아스레인은 내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지.”

끝내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

항상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연구실이 웬일로 시끌벅적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연구실 주변을 돌아다녔고, 옆 연구실에선 약초를 한가득 담은 박스를 옮기기 바빴다. 순간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반갑게도 작은 박스를 들고 아치를 지나 이쪽으로 다가오는 진과 눈이 마주쳤다.

“진! 이게 다 뭐예요?”

“아~ 태오는 모르겠군요. 곧 연회가 열려서 그래요.”

“연회요?”

안겔루스 대학도 축제 같은 것을 여나. 지금껏 겪었던 축제라고는…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술과 음식을 팔며 인맥을 자랑하는 총체적 난국인지라 걱정부터 들었다. 살짝 구겨진 얼굴을 본 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이 연회지, 우리를 위한 연회는 아니에요.”

“어… 그럼 뭐예요?”

“마물을 위한 연회 ‘아드 쿠네’예요. 아드는 고대어로 돌아가다를 뜻하고, 쿠네는 숲 이름이죠.”

진의 설명을 조합하여 ‘아드 쿠네’를 해석하면 ‘쿠네 숲으로 돌아가다’는 의미였다. 마물을 위한 연회라니!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자 진이 선뜻 설명해 주었다.

“보호받는 마물이 더 이상 사람의 손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호전되면, 선황께서 마물을 위해 친히 내어 주신 쿠네 숲으로 돌아가게 돼요. 완전한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직전 야생의 감을 되찾는 과정이죠.”

“아, 그럼 쿠네 숲에서 충분히 생활한 후에 본디 살던 곳으로 가는 거군요.”

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을 무사히 쿠네 숲으로 옮기고, 그들이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연회를 열어요. 이번에도 우리 안겔루스 대학으로 협력을 요하는 서신이 왔어요.”

“마물을 쿠네 숲으로 이송하는 걸 돕는 건가요?”

“네. 열댓 정도 된다던데요? 저는 진정제 효과를 내는 약초를 준비해서 옮기는 길이었어요. 아마 지난번보다 수가 늘어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한가 봐요.”

연회는 둘째치고, 마물을 이송하는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아스레인이라면 가겠지. 마물과 관련된 일에 그가 빠질 리가 없으니 어떻게든 데려가 달라고 사정해야겠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눈에 불을 켜니 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물학과 원생들은 아드 쿠네에서 그렇게 논문 주제를 찾더라고요.”

“논문이요?”

“졸업할 때 논문 써야 하잖아요. 몰랐어요?”

여기도 똑같구나. 일단 논문은 둘째치고 연회에 참가해야 한다. 진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연구실 앞에 섰다. 평소엔 세 번 노크하던 문을 급한 마음에 한 번만 두드리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교수님!”

당차게 부르며 등장하니 서류를 읽던 아스레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기운이 좋구나.”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차분한 그를 보니 왠지 미안해져서 문을 천천히 닫았다. 사뿐히 책상 앞으로 걸어가 그에게 슬쩍 연회에 대한 떡밥을 던졌다.

“밖이 상당히 소란스럽더라고요.”

“아아, 연회 때문이겠지.”

“역시 교수님도 연회에 가시는 건가요?”

“그래. 곧 출발할 거였네.”

뭐야. 혼자서요? 저를 빼놓고요? 서운한 마음에 저절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러자 서류를 넘기던 그가 눈만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곤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자네도 가는 것이니 그리 섭섭한 표정 하지 말게.”

“저, 정말요? 자격이 될까요?”

두 손을 꼭 모으며 물으니 아스레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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