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32/305)

#32

새로운 아침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누군가 내 뺨을 꾹꾹 눌렀다. 슬쩍 한쪽 눈을 뜨니 회색 솜방망이가 얼굴 위를 휘젓고 다녔다.

[야, 야. 일어나.]

“으응….”

[이미 해가 떴다고.]

“알았다니까….”

온실 안이 지루하다는 누르의 원성에 못 이겨 기숙사에 데려왔다. 산책 삼아 잠깐만. 아주 잠깐만! 외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복슬복슬한 털이 부드러워 보여 끌어안고 침대에 누운 것이 실수였다. 따스한 온기와 두말하면 입 아픈 촉감에 못 이겨 아예 잠들어 버렸다. 뒤늦게 눈을 뜨니 불빛 없는 새벽이었다. 이미 큰일 났는데 어쩌겠어. 더 자야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결정으로 인해 누르가 기숙사에서 내 잠을 깨우는 괴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거 불편하지 않았어?”

[물어 버리고 싶었어.]

“…미안해. 곧 맛있는 열매를 준비할게.”

누르가 내게 경계를 푼 건 기쁜 일이다만,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 설마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다. 후다닥 씻고 와서는 아스레인이 선물해 준 옷상자를 열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보리색 튜닉과 깔끔한 갈색 바지를 챙겨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가슴을 여미는 끈을 당겨 묶는 사이, 하품을 한 누르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이제 그분을 뵈러 가는 건가?]

“응. 그런데 사실… 그날 이후로 교수님을 어떻게 봬야 할지 모르겠어.”

[왜?]

누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일단 아스레인 앞에서 엉엉 운 것도 나름대로 민망하지만, 여관방에서 밀렵꾼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을 발견한 후로 별다른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레인은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걱정될 정도로 바빴다. 이따금씩 비상하는 독수리 문장이 찍힌 편지가 도착할 때면, 아스레인은 꼬박 하루 동안 볼 수 없었다.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 데면데면해졌다고 설명하니 누르는 기지개를 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분은 딱히 별생각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또 맞는 말이야.”

매무새를 정갈하게 정리한 후 허름한 천 가방을 펼쳐 바닥에 두었다. 어제 한 번 들어간 덕분에 누르는 익숙하게 펄쩍 뛰어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혹여 누가 보지 않도록 포대기에 싼 아이를 안듯 가방을 품고서 기숙사를 나왔다. 품 안에서 꾸물거리는 누르를 천천히 토닥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나저나 나는 왜 ‘야’고, 교수님은 ‘그분’이야?”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할 말이 없네.”

족족 맞는 말만 하니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아침 일찍부터 온실로 향했다. 무사히 누르를 온실에 마련된 보금자리에 돌려놓고 연구실로 걸음을 돌렸다. 어제와 다름없이 굳게 닫힌 연구실 문을 보니 한숨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아…. 뭐라고 하지?”

아스레인이 오면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까. 문을 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예기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뭐가.”

“…엥?”

오래도록 비어 있던 책상에 아스레인이 앉아 있었다. 문지방에 서서 멍하니 눈만 끔뻑이다가 한 박자 늦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교수님! 왜 여기 계세요?”

“여긴 내 연구실이다만.”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바쁜 일은 끝나신 건가요?”

“일은 끝나진 않았지만, 내 역할은 끝났네.”

그 말은 결국 아직 범인의 끄나풀을 못 잡았다는 거겠지. 아쉬운 마음에 제자리로 돌아가 빈 책상을 툭툭 털어 냈다.

그러고 보니 아스레인의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던 것 같은데…. 연구실 안에 있는 존재 자체가 신기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상을 되찾았다. 별생각이 없을 것 같다는 누르의 말이 역시나 맞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레인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할 일 있나?”

“예? 아뇨. 없습니다.”

“그럼 동행하지.”

짤막한 대화가 끝나자마자 아스레인은 책상에 기대어 세워 둔 지팡이를 가지고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나갔다.

당연히 온실이나 약초밭으로 향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정문을 통해 안겔루스 대학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도 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 조용히 추측만 하다가 발길이 시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말씀하셨으면 제가 다녀왔을 텐데.”

“마을에 있는 약재상에게 주문한 것을 직접 받아야 돼서 말이네.”

아스레인이라면 왠지 고급스러운 약재상에서 황실로부터 인증을 받은 약초만 쓸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의외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낡은 서점이었는데 말이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계절은 어느덧 초겨울로 접어들었지만, 대도시의 낮은 축제라도 열린 듯 북적북적했다. 시장에 발을 들인 아스레인이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리 완벽주의자인 아스레인이라도 평생 일만 할 수는 없지. 십분 공감하며 천막이 줄지어 선 대로를 거닐었다. 수레에 포대를 한가득 싣고 바쁘게 가는 짐꾼부터 앞치마에 신선한 과일을 넣어 이리저리 권하는 상인까지. 재래시장을 연상시키는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기분을 한껏 고양시켰다.

광장에서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한약방에서 날 법한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역시나 광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약재상을 발견했다.

끼익. 녹슨 경첩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니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인사했다.

“아이고, 오셨군요.”

약재상은 양쪽으로 서랍장이 가득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았다. 하필이면 주인장이 통로 한가운데에 서서 아스레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탓에 나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문지방에 어정쩡하게 서서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눈치 보다가 어렵게 말했다.

“교수님, 저는 밖에서 기다려도 될까요?”

“음. 기다릴 필요 없네. 마음껏 돌아다녀도 좋아.”

아스레인은 선뜻 승낙하며 다시 주인장과 대화를 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하려는 심산 같았다. 의아하지만 일단은 상점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 시간에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광장 쪽이 시끌벅적해졌다.

와아- 커다란 함성 사이사이로 박수 소리가 곁들여진 걸 듣자 하니 대단한 구경거리가 생겼나 보다.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골목에서 빠져나가니 광장 한구석에 몰린 인파가 보였다.

“그리하여 유피테르는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유랑극단의 연극이 막 절정을 맞이하려는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중심에 마련된 작은 무대가 보였다.

배우는 총 세 명. 무대에는 살아 있는 황소 한 마리와 족히 3m에 달하는 모형이 있었다. 무언가 날개를 펼친 것 같긴 한데, 뒤는 허술하게 나무판자로 덧대어 마감 처리하는 바람에 어떤 모형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받아라!!”

그때 주인공으로 보이는 배우가 기합과 함께 가검을 휘둘렀다. 쉽게 잘리도록 미리 손을 써 둔 것인지, 모형에서 기다란 무언가가 단숨에 잘려 나갔다. 바닥에 툭, 하고 힘없이 떨어진 그것은-

“와아아아!!!”

마물의 머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길쭉한 역삼각형 머리와 노을 진 하늘 아래 모래사장처럼 빛나는 황금색 비늘.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확실했다. 꿈에서 본 적 있는 바로 그 마물이다. 회오리 모양으로 하늘 높이 솟은 뿔까지 똑같았다.

비록 이음새가 너덜너덜하고 비늘 표현마저 어설펐으나 그가 맞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을 향해 탄성을 내지르는 동안, 충격에 빠진 나는 멍하니 바닥에 너부러진 머리를 보았다.

“하하, 이 대륙은 내가 지켜 냈다.”

의기양양한 대사와 함께 구석에서 모형을 받치고 있던 한 스태프가 달려와 주인공의 어깨에 먼지가 달라붙은 새빨간 망토를 둘러 주었다.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 된 주인공은 다시 한 번 칼을 휘둘러 뿔을 잘라 갔다. 그러곤 멋지게 황소에 올라타 마물에게서 잘라 낸 뿔을 치켜들었다.

“자! 보아라! 이 ‘유피테르 카르사’가 전설의 마물을 물리쳤다!”

주인공은 전리품인 뿔을 자랑하려 하늘 높이 들고 광장을 한 바퀴 순회했다. 와아아아! 군중들은 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제자리로 돌아온 남자는 황소에서 뛰어내려 곡예를 하듯 착지했다. 그 후 뿔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이곳을 기점으로 나라를 세우겠다. 위대한 카르사의 이름을 딴 이 나라는 태평성대가 계속되리라!”

그 대사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는 모두 카르사 제국의 건국 신화를 각색한 연극이었다. 연극이 끝나자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관객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치며 극단을 향해 돈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 홀로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상에 불과한 줄 알았던 마물이 모형으로 나타날 수가 있나. 게다가 아무리 ‘건국 신화’라지만, 마물 토벌이 금지된 이 나라에서 마물의 목이 댕강 날아가는 연극을 해도 되나.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물어뜯는데, 뒤에서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답잖은 연극이군.”

아직 관객과 배우가 떠나지 않은 무대를 향해 대놓고 혹평을 날리는 용기가 대단하다. 얼마나 신수가 훤한지 궁금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내 옆에 선 장정을 보자마자 다른 이유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교, 교수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하하, 유독 광장이 시끄러워서 와 봤는데… 용무는 끝나셨어요?”

“음.”

짤막한 대답이 이어지는 내내 금안은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따라가니 연극이 끝났는데도 아직 치우지 않아 덩그러니 남은 머리가 보였다. 와락 일그러진 미간을 보자마자 탄식을 삼켰다.

나조차도 의아한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물을 사랑하는 아스레인에겐 더욱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연극일 테다. 얼른 모형을 치웠으면 했으나 극단은 돈을 다 받을 때까지 떠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황급히 그의 앞을 막고 서서 몸으로 떨어진 머리를 가렸다.

“혹시 서점에 들러도 될까요?”

아스레인은 대답이 없었다. 안광을 잃은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바닥을 향했다. 게다가 안색마저 점점 창백해지는 것 같다.

“교수님!”

시선을 끌려 손뼉을 친 후에야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황량한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향해 박수를 치는 관객이 늘어날수록 낯빛이 흐려졌다. 걱정이 된 나머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팔을 조심스레 잡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래. 이곳은 그만 떠나지.”

살짝 떨리는 동공이 도망치듯 다른 곳을 향했다. 인파에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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