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31/305)

#31

시장에 나간 김에 누르가 좋아할 만한 과실을 사서 온실로 향했다. 그 후 샛길을 걷는 내내 진에게서 들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데히드 꽃, 포효하는 수사자. 설마 소설에서 카르사 제국이 멸망한다는 신탁과 관련이 있나. 사건이 점점 커져 가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두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온실에 들어오니 곤히 잠들어 있는 누르가 보였다. 예전엔 작은 소리만 나도 화들짝 놀라 깼는데, 이젠 세상모르고 편하게 잔다. 억지로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누르를 바라보았다.

벌써 누르를 구해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잠든 누르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해. 누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진가 봐.”

이름을 알아들은 걸까. 곤히 잠들어 있던 누르가 슬며시 눈을 떴다. 깊은 눈동자가 왠지 나를 책망하고 있는 것 같아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름대로 해 보려고 했는데…, 내 위치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억울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나는 그저 누군가 사건을 해결해 주길 기다리며 눈앞에 놓인 일을 마무리하면 된다. 그리 단념하니 책임감으로 무거웠던 어깨가 우습게도 홀가분해진 한편,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커다란 포도알 같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체념한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네 가족을 …그렇게 만든 범인을 꼭 잡는다고 했는데.”

미안해. 뒷말을 중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널 구한 사람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누르를 구한 순간부터 항상 사라지지 않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인정하기 싫어 한구석에 미뤄 뒀지만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나 시장가서 사 온 열매가 담긴 주머니를 꺼내었다.

누르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지금 우울할 틈이 어디 있나. 가지각색을 가진 열매를 한 움큼 꺼내어 적당한 곳에 놓아주려 허리를 굽힌 순간이었다.

[나를….]

막 사춘기가 지난 것 같은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구한 걸 후회해?]

환청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온실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의아함을 느끼는데 다시 발목 근처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시선을 툭 떨구니 돌 위에 누워 있는 줄 알았던 누르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떨리는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누, 누르니?”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후회해?]

빛이 깃들지 않은 검은 눈동자는 마치 깊은 구덩이처럼 보였다. 그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낮췄다. 무릎을 꿇고 앉자 누르는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 위로 올라와 나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눈동자에 얼이 빠진 얼굴이 비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후회 안 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그럼 됐어.]

가볍게 말을 끊은 누르는 내 손에 담긴 열매를 야금야금 집어 먹었다. 호흡을 따라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꿈이 아님을 알렸다. 처음으로 그가 먼저 다가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잠시, 나직한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어온 햇볕처럼 따스하게 온실을 채웠다.

[나도 널 만난 걸 후회하지 않으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 그간의 고생이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누르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자 경쾌한 알림음이 연속해서 울렸다.

- NO. 12 ‘사이누르’가 당신을 친밀하게 느낍니다.

- 사이누르와의 관계 평가가 진전되었습니다. ‘공통 언어’가 해금됩니다.

드디어 마물 도감에 새로운 기능이 열렸다. 어떤 난관을 극복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누르이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금세 열매를 먹어 치워 빈손이 되었는데도 누르는 평소처럼 등을 돌리지 않았다. 까슬까슬한 혀로 손바닥을 핥아 주기에 괜스레 울컥해졌다. 그것도 잠시, 누르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열매 더 줘.]

“어? 으응. 잠깐만.”

서둘러 주머니를 열어 남은 간식을 전부 손바닥에 털어놓았다. 그러자 사이누르는 입 주변을 분홍색 혀로 핥곤 강낭콩만 한 열매를 단번에 삼켰다. 식사를 마친 후 무릎에서 내려가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는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궁금한 거 있으면 지금 물어봐. 열매를 사 온 게 기특하니 아는 대로 말해 줄게.]

기특…이라니. 청소년쯤 되는 어린 목소리로 나를 칭찬하니 여러모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질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짧은 주둥이로 그루밍하는 누르 앞에 편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물었다.

“혹시 그날 기억나는 거 있어? 그 인간의 외형이라던가.”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려 힘들진 않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누르는 평온했다.

[내가 말해 봤자 너는 이해 못 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눈은 불필요한 껍데기가 아닌 본질을 꿰뚫어. 그러니 네가 원하는 ‘외형’은 나도 모르지.]

동그란 동공이 순식간에 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뒤늦게 아스레인이 설명한 ‘마안’에 대해 떠올랐다. 사이누르만이 갖고 있기에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물건. 둥지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사이누르 무리에게 없던 ‘단 한 가지’를 떠올리곤 무안해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럼 외형이 아닌 달리 기억나는 건 없어? 소리라든가, 냄새라든가.”

[있어.]

“정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누르는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어머니께선 그 냄새가 나는 곳엔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멍청한 놈이 덫에 걸려들었지.]

“그 냄새?”

[그때 네가 가져온 망측한 보라색 꽃 말이야. 피 냄새가 나는 인간들에게선 전부 그 꽃향기가 섞여 있었어.]

“데히드 꽃…이구나.”

[너희가 어찌 부르는지는 몰라.]

이로써 비브린트 숲에 있던 밀렵꾼들이 전부 데히드 꽃 향낭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환각제에 취해 나를 누군가와 헷갈려 두려워하던 그는 분명 ‘완성되지 않았다.’고 외쳤다. 그리고 여관 주인의 말에 따르면, 수상쩍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아직 풀리지 않은 단서들이 가득해 서서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식당하기 직전, 머리카락이 흩뜨려질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많은 도움이 되었어.”

누르는 말없이 그루밍에 집중했다. 두꺼운 발바닥을 작은 입으로 앙앙 물어 가며 핥는데, 벌써부터 얼마나 커질지 가늠이 안 된다. 몸집이 커다란 동물은 어렸을 때부터 태가 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누르는 뼈대부터 달랐다.

도감에 따르면, 다 자란 사이누르는 두 발로 섰을 때 거의 2m에 달한다. 그것뿐이랴. 무게는 300kg가 거뜬히 넘어간다니 포식자인 불곰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거기다 ‘마안’까지 갖고 있으니 폐쇄적인 무리 생활을 즐기지만 않았더라면 1등급 위험 마물이 되었을 것이다.

속으로 감탄을 삼키며 직업병처럼 누르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반달 모양 귀와 동그란 얼굴은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었다. 복슬복슬한 회색 털이 다리만큼 긴 꼬리까지 덮고 있어 여름 나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부담스러운 시선을 알아챈 누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광활한 우주를 담고 있는 눈동자에 홀려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정말 신비로운 눈이구나.”

[왜 갑자기 칭찬이야. 네 본질이 궁금해졌어?]

“그러려고 칭찬한 건 아니지만…, 뭔가 보이는 거야?”

[넌 공들여서 볼 필요도 없어.]

약간 자존심 상하네. 울적하게 입술을 비죽거리자 누르는 네 발로 똑바로 서서 말했다.

[힘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

[텅 비어서 볼 수 있는 게 없어.]

잠깐만. 차라리 힘의 문제인 쪽이 낫잖아. 마력도 비고, 본질도 비었다니. 대체 뭘 담기 위한 몸뚱어리란 말인가. 그나마 머리라도 지식으로 꾸역꾸역 채워서 다행이다.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소리니까.]

그 후 누르는 흙바닥을 가로지른 내 그림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지금도 무언가를 들였잖아.’라고. 넋 놓고 공허한 눈동자를 바라보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면 이런 기분일까. 말도 안 했는데 그림자에 사는 아그누스의 존재를 알아챘다. 정말로 그에게 겉모습이란 불필요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대단한 능력을 몸소 체험하자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혹시 교수님은?”

환각제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어렴풋이 아스레인에게서 이상한 마물을 겹쳐 보았다. 정신을 잃고 난 후, 꿈에서도 황홀한 금빛을 품은 마물을 봤다. 비록 한쪽 뿔이 반 잘려 있었으나 안타깝기는커녕 당장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단순한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몰라 생각할 시도를 못 했을 뿐. 눈을 반짝이며 물으니 누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교수? 그게 누구야.]

“그, 있잖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 되게 잘생긴…. 아, 외형은 못 본댔지.”

설명을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인상착의가 누르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낮은 목소리에 고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 봤자 모를 테고. 애꿎은 입술을 뜯으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뭔가가 떠오른 누르가 물었다.

[설마 네가 쩔쩔매는 대상을 말하는 거야?]

“어! 맞아. 그래서 교수님의 본질도 봤어?”

트라우마가 되었을 기억을 물어봐도 거침없이 대답하던 누르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당한 태도는 어디로 사라지고, 누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흙바닥을 탕탕 두드리는 꼬리가 어쩐지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사뭇 긴장감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엥. 진짜?”

마안을 가진 누르도 볼 수 없는 본질이라니. 내가 마물의 눈을 봐야 도감에 등록되듯 본질을 보기 위한 조건이 따로 있나? 아니면, 혹시 나한테 말해 주기 싫은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재차 물었다.

“왜 안 봤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니 동그란 눈매가 의심을 품고 가늘어졌다.

[안 본 게 아니라 못 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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