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30/305)

#30

세잔의 활약으로 범인을 알아차리는 데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줄 알았건만,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연구실로 돌아오니 무섭도록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마치 뚝 잘라 낸 필름처럼 그날의 사건만 사라졌다.

아스레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하며 이따금씩 내게 과제를 내주었고, 세잔은 종종 점심을 함께 하자며 연구실을 찾아왔다. 나 혼자 꿈을 꾼 기분이다. 마구간에 안치된 시신도, 자결인지 타살인지 모를 죽음도, 베개 안에서 찾아낸 향낭도… 전부 내게는 뚜렷한 기억이다. 그와 동시에 ‘내게만’ 뚜렷한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짜고짜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물어볼 수 없었다. 의아하게 웃으며 “무슨 소리야.” 하고 시치미를 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해도 내 기억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겉으로는 평소처럼 행동하는 양 굴면서, 아스레인이 바쁜 시간을 노려 홀로 약초밭으로 달려갔다. 다름 아닌 향낭의 재료로 사용된 데히드 꽃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사이누르가 좋아하는 꽃이, 사이누르를 죽이려 한 밀렵꾼이 남긴 물건에서 나온다.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약초밭을 아무리 뒤져도 ‘데히드’란 이름을 가진 식물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약초학과인 진을 찾아가 물으니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있을 리가 없죠.”

“왜요?”

“데히드 꽃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 탓에 카르사 제국에서는 특정 해안 지역에서만 재배되죠.”

진의 말대로 내륙에 위치한 안겔루스 대학 내에서 데히드 꽃이 필 리 없었다. 드넓은 카르사 제국에서도 남부에서만 볼 수 있다니, 어떻게 구하면 좋을지 내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진은 뒤이어 데히드 꽃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데히드 꽃은 진귀한 향료라 귀족들 사이에선 한때 향수로 사랑받았었어요.”

“지금은요?”

“이젠… 찾지 않죠.”

한때 사랑받았던 항료.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것도 모자라 냄새가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 더는 재배하는 곳을 찾기도 힘들다고 했다. 일반적인 약초상이나 향료 가게에도 없을 것이 분명하여 진에게 사정사정했다. 사이누르가 유독 좋아한다고 하니 꽃을 찾으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자 며칠 뒤, 진으로부터 데히드 꽃 세 송이를 받았다.

다섯 갈래로 나뉜 꽃잎이 밖으로 말려 꼭 분수 같았다. 짙은 노란색인 암술과 수술이 보라색 꽃잎과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굳이 꽃을 얼굴 가까이 대지 않아도 극적인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이런 향을 스파이시 계열이라고 부르던가. 생화라 그런지 향낭의 재료로 쓰인 말린 꽃보다 훨씬 향기가 강했다.

“이런 향기를 좋아하는 건가….”

끈으로 묶인 데히드 꽃다발을 들고 서둘러 온실을 향했다. 안 그래도 진한 향수를 대여섯 번 뿌린 사람처럼 가는 길목에 알싸한 계피 향이 남았다. 어서 누르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온실 안으로 들어가 늘 가던 곳으로 향하니 수풀 사이 진회색 털로 감싼 꼬리가 보였다.

“누르야! 나 왔어.”

목소리가 들리니 실컷 잠자던 누르가 귀를 쫑긋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곧 나인 걸 확인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항상 오면 간식 열매부터 챙겨 주니 내 얼굴만 보면 배고파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응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니 평온하던 사이누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라곤 손에 든 꽃밖에 없었다.

“네가 좋아한다고 해서 가져와 봤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데히드 꽃을 살며시 내밀었다. 부디 좋아하길 바랐으나, 사이누르는 시큰한 냄새를 맡자마자 펄쩍 뛰어올랐다. 어느새 동글동글한 얼굴이 사납게 변해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었다. 누가 봐도 싫어하는 기색이 느껴져 황급히 꽃을 등 뒤로 치웠다. 그럼에도 사이누르의 화는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도감이 틀릴 리가 없는데….”

꽃을 저만치 치워 버려 냄새가 희미해졌는데도 구석으로 몸을 숨긴 사이누르는 꼼짝도 안 했다. 등에 바짝 선 털이 어째 불쾌함보다는 두려움을 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예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데히드 꽃을 들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적당한 풀숲에 꽃을 두고 누르가 좋아하는 열매를 구해 다시 돌아갔다. 누르는 그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진정이 되길 바라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열매를 늘어놓곤 중얼거렸다.

“미안해.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어.”

얌전히 기다리니 어느새 수풀 밖으로 나온 누르가 열매를 하나씩 먹어 치웠다. 식탐이 여전한 건 다행이었으나, 평소보다 훨씬 격하게 내 손길을 피했다. 설마 하고 손바닥 냄새를 맡아 보니 희미하게 데히드 꽃향기가 배어 있다.

마물 도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듯 누르는 유별나게 데히드 꽃을 싫어한다.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르가 보인 반응은 불호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건-

“…무서워?”

데히드 향기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만약 마물 사냥에 이 향료가 미끼가 되었다면…? 사이누르의 특징을 알고 그들의 둥지까지 사체 숨기는 장소로 이용한 자들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다.

아니면, 단지 밀렵꾼 무리가 전부 데히드 향낭을 갖고 있었기에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을 추려 내는 증거가 데히드 향낭이 될지도 모른다. 심각한 비약이어도 좋다. 아무 단서가 없는 지금으로선 얕은 추측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

힘겹게 데히드 꽃을 구해 준 진에게 감사 인사를 할 겸 안겔루스 대학 근처 시내로 나왔다. 대학 근처 마을은 아멜리 백작령에 있는 어느 마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황성과 맞닿은 마을이니 당연히 크겠거니, 하고 단순히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큰길을 따라 자루를 인 상인들과 커다란 마차가 끊임없이 지나다녀 내 몸 하나 간수하기 바빴다.

겨우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와 창가 테이블에 진과 마주 앉았다. 그럴듯한 구성으로 짜인 ‘오늘의 메뉴’를 주문하곤 안부를 물었다.

“요즘 지도 교수님은 어때요?”

“하아…. 바인하르 교수님이요? 말도 마요. 어제는 파티를 다녀오셨는지 저한테 자랑하기 바쁘셨다니까요.”

“파티요?”

“네. 가끔씩 예전 제자에게 초대받으시거든요. 그분의 제자 중에 백작가의 자제가 있는지 알 게 뭔지~ 페르난드 남작님이 어떤 공을 세웠는지 전혀 안 궁금하거든요. 또 누구더라…. 아, 사피엔 백작님의 첫째 아드님이라고 했나. 그분은….”

쉴 새 없이 하소연을 하던 진은 새하얀 접시에 장식된 열매를 죽일 듯 포크로 찍었다. 빨간색 과즙이 냅킨 위로 픽, 하고 튀는 모습은 꽤 살벌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가 찬물을 들이켜며 화를 삭이는 사이 화제를 돌렸다.

“진은 여러 가문에 대해 빠삭하신가 봐요.”

“그럼요. 우리 가문도 일단은 귀족이었으니까요.”

“…아.”

몰락 귀족이라고 했었지. 뒤늦게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은근슬쩍 궁금한 것을 던졌다.

“그럼 혹시 상징만으로 가문을 알 수 있나요? 아, 책에서 문장을 봤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서요.”

“유명한 가문이라면 알 것 같은데…. 어떤 문장이었는데요?”

내가 아는 문장은 아멜리 백작이 쓰는 백합밖에 없었다. 향낭 안에 새겨진 그림은 사자. 필시 소설에서 ‘사자’와 관련된 문장에 대해 나왔던 것 같기도 한데, 불행히도 기억이 흐릿했다. 테이블을 검지로 툭툭 치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아스레인의 손안에 있어서 세세하게 보진 못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포효하고 있는 수사자의 옆모습이었어요.”

터진 열매를 포크로 굴리던 진이 손을 우뚝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살짝 좁아진 미간은 불쾌하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의아하게 느끼는 듯 보였다.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왜요?”

이윽고 진은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지금은 쓰지 않는 시오 가문의 문장이에요.”

“시오라면… 이전 왕조요?”

그 후 친절한 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카르사 제국이 막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황소’를, 전 왕조 시오가 ‘사자’를, 현 왕조 에브게니아가 ‘독수리’를 상징으로 썼단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아 탄성을 내뱉자 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여기서 고개를 끄덕였다간 쉬운 역사도 모르는 바보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잠깐 헷갈렸어요.”라고 얼버무렸다. 어설픈 변명이었으나 다행히 진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새빨간 열매를 포크로 찍어 사탕처럼 한입에 넣은 진은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런데 요새 역사에 관심이 생긴 거예요?”

“네? 왜요?”

“전에 찾아 달라고 한 데히드 꽃도 시오 왕가와 관련이 있거든요.”

데히드 꽃과 시오 왕가가 관련이 있다니. 처음 듣는 정보에 수프를 먹던 손이 우뚝 멈췄다.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자 진은 어린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치듯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시오 왕조의 마지막 황제께서 좋아하던 꽃이 데히드예요. 그래서 해안에 있는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은 모두 데히드를 재배하곤 했죠. 연회를 열 때면 데히드 꽃과 향낭을 선물하기도 했고요.”

“…아.”

“태오는 정말 마물 말고는 관심이 없나 봐요.”

“하하…. 그, 그렇죠.”

어색한 웃음으로 사색이 된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향낭 안에 그려진 ‘포효하는 수사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데히드 꽃. 왜 아스레인이 문장을 확인하자마자 여관을 떠났는지, 또 세잔은 사색이 되어 말을 아꼈는지 깨달았다.

에브게니아 공작이 카르사 제국 왕좌에 앉으면서 당연히 시오 가문의 명맥은 끊겼다. 하지만 그 시절을 상징하던 수사자와 데히드 꽃이 무려 마물 밀렵꾼으로부터 나왔다. 심지어 그자는 문장을 숨긴 후 인근에서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태오. 왜 그래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서로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퍼즐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완성되기엔 한없이 부족한 그림이었으나 전체적인 틀만으로 충분했다. 아스레인이 더는 캘 생각도 하지 말라며 경고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혈통이 끊긴 왕조의 재등장.

“…아, 아니에요. 조금 체했나 봐요….”

사이누르 일가족을 몰살한 범인이 전 황실과 관련이 있다면, 내가 개입할 틈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마구간에 안치되어 흰 천으로 가려진 시신은 그 남자가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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