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29/305)

#29

다신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마을 안으로 마차가 들어섰다. 혹여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봐 세잔과 아스레인뿐만 아니라 나까지 검은색 로브를 챙겨 입었다. 마차에서 내리니 어두운 골목 안에서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가 걸어 나왔다. 수상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으나, 이내 그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전 세잔 도련님을 모시는 비숍이라고 합니다. 좋은 이유로 만나 뵈는 것이 아니라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목까지 내려온 로브로도 훤칠한 체격은 가릴 수 없었다. 세잔이 말한 ‘믿음직한 심복’이라는 표현이 단숨에 이해되었다. 소개가 끝난 비숍은 곧바로 골목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시신은 빈 마구간을 빌려 잠시 안치해 두었습니다. 짐으로 눈을 속여 옮겼으니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신. 짧은 단어를 들으니 다시금 긴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이후 비숍은 마치 마을에 몇 년간 지낸 사람처럼 익숙하게 인적이 드문 길목을 골라 앞장섰다. 조용히 뒤를 따라가던 아스레인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건 누구지?”

“마을에 사는 목수입니다. 비브린트 숲 근처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잠시 목을 축일 겸 호수로 갔다고 합니다. 그때 물속에서 희미한 형체를 봤고… 처음엔 동물 사체인 줄 알았으나, 긴 나무토막으로 돌을 치우자 웬 흰 거품을 문 남자의 시체가 떠올랐답니다.”

흔들리는 수면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이물.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창백한 얼굴. 저절로 당시 상황이 상상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추스르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차분하기만 했다.

“흰 거품이라…. 독살인가?”

“처음엔 저도 독살인 줄 알았습니다만, 시신을 옮기며 보니 목에 깊은 자상이 나 있더군요.”

자상? 만약 숲에서 마주쳤던 남자라면 내가 봤을 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는데. 심지어 머리 아래를 철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어서 쉽게 칼을 들이밀 수도 없었다.

의아함을 품에 안은 채로 사방이 가로막힌 마구간에 도착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이라곤 나무로 된 작은 창문뿐이었다. 자물쇠 대신 문을 막은 얇은 판자를 위로 올리자 끼이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마구간 문이 열렸다. 곧 죽은 자를 직접 봐야 한단 생각에 떨리는 숨을 내뱉으니 아스레인이 다가와 속삭였다.

“굳이 안 봐도 되네.”

“맞습니다. 태오. 묘사를 해 주시면 제가 대신 가서 보겠습니다.”

세잔도 시체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 혼자 편하자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뇨. 제가 볼게요. 그게 가장 정확할 테니까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비숍을 따라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말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마구간에는 지푸라기 더미 위로 새하얀 천만 덩그러니 놓였다. 시체를 발견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기분 나쁜 냄새가 코를 쏘았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 다가가니 비숍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조심스럽게 천을 들췄다.

단숨에 상체까지 천을 내리자 가장 먼저 목을 꿰뚫은 자상이 눈에 띄었다.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백색에 가까웠고,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진 입술에선 어떤 온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비록 눈은 감고 있었으나 내가 마주친 그 남자가 맞다. 메스꺼운 속을 겨우 억누르며 힘겹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자가 맞습니다.”

아무리 의연한 척을 하려고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리자 아스레인이 내 앞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시야를 가로막았다. 이윽고 세잔은 나를 데려다가 마구간 앞에 세우며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자가 입고 있던 옷은 어디 있나. 인근에 흉기는 남아 있던가?”

아스레인이 으레 궁금한 것을 묻자 비숍은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의문스러운 태도에 관심이 쏠릴 즈음 그가 시신을 다시 천으로 덮으며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처음부터 이 상태였습니다.”

“…뭐?”

“목수가 발견했을 때부터 벌거벗은 채였답니다. 그리고 단검은… 이자가 쥐고 있었습니다.”

자결이라는 건가. 뒤이어 비숍은 이자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과 상처의 크기가 정확히 일치했다고 증언했다. 직접 양날 대거를 확인한 아스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구간을 나왔다.

“곧 믿을 만한 의사를 이곳으로 보내겠네. 부검 결과를 지켜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마구간에서 막 나오자마자 저 멀리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동시에 소리가 다가오는 쪽을 경계했다. 황급히 달려온 이는 짧은 튜닉을 입고 허리춤에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에 당황하던 차에 “도련님!” 하고 부르는 호칭에 내심 안심했다. 세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무슨 일이냐 묻자 그가 힘겹게 말했다.

“사, 사건이 일어난 밤에 그자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를 찾았습니다.”

“바로 가지. 앞장서게.”

“예!”

마구간을 비숍에게 맡겨 두고 튜닉을 입은 기사를 쫓아갔다. 마을 중심가에서 제법 멀어지니 굴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여관이 보였다. 겉보기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았으나 영업한단 팻말이 버젓이 붙어 있었다.

허름한 문을 열자 구석구석을 장식한 거미줄이 보였고, 습한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얼마나 오랫동안 발길이 끊겼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턱을 괸 채 졸고 있던 주인장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깨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끔뻑, 끔뻑. 주름진 눈꺼풀을 움직이던 주인장은 로브를 뒤집어쓴 무리를 보고 중얼거렸다.

“…손님이 아니구먼.”

바닥난 의욕과 달리 제법 눈치는 빠른 사람이었다. 문을 꽉 닫으며 마지막으로 들어온 세잔의 기사가 주인장에게 말했다.

“아까 나한테 말했던 거 있잖소. 그걸 이 모험가 나리에게 상세히 설명해 보게.”

갑자기 모험가 나리가 되긴 했다만, 그쪽이 안전했다. 세잔이 품에서 두둑한 돈주머니를 꺼내어 가판대에 올리자 여관 주인이 크게 헛기침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겠소. 다만 이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상태가 이상했지.”

“상태가 이상하다?”

“크흠…! 누가 쫓아온다고 했나. 그래서 나는 몸을 숨겨 달라고 하는 줄 알고 방을 하나 내줬네.”

누가 쫓아온다니…. 환각제에 취한 밀렵꾼은 나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해 두려워했었다. 추격당하고 있었나? 아니면, 단지 헛소리에 불과한가. 조용히 턱을 어루만지다가 여관 주인을 향해 말했다.

“그가 머물렀던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돈주머니를 챙긴 주인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곤 허리춤에 찬 열쇠 꾸러미에서 하나를 척 꺼내어 문을 열어 주었다. 대낮인데도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은 곰팡이 냄새와 함께 음습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러나 주인장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삐걱거리는 문에 기대어 무심하게 말했다.

“여기일세.”

“감사합니다.”

그 후 주인장이 내려가자마자 방을 꼼꼼히 찾아보았다. 먼지를 쓴 서랍장을 옆으로 밀어도 보고, 침대를 살짝 들어 아래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허탕 친 것이 무색하지 않도록 벌레 몇 마리만 기어 다닐 뿐이었다.

세잔과 아스레인이 방 안을 훑어보는 사이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돈주머니에서 은화를 세던 주인장이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괜스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싹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있죠. 사장님. 혹시 그 사람에게 수상한 기색은 없었나요?”

“흐음.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지. 들어와선 목욕물이나 식사도 원치 않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나갔네.”

“그럼 나가면서 특별히 뭔가를 부탁하진 않던가요?”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해 달라거나, 어떤 물건을 맡긴다거나. 방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엄포를 내놓거나. 예시를 들면 들수록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턱에 듬성듬성 난 수염을 어루만지던 주인장은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부탁하긴 했지.”

“뭐를요?”

“베개가 더러우니 세탁해 달라고.”

“그게… 끝이에요?”

“어엉.”

간단하고도 당연한 부탁이었다. 딱히 이상한 점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혹시 몰라 물어보았다.

“그래서 바꿔 주셨어요?”

“으음, 아니. 원래는 뒷문으로 이어진 공터에 빨랫감을 쌓아 두고 나서 날을 잡아 한꺼번에 세탁하네. 그런데 물을 길어 오기 귀찮아져서 그냥 먼지만 털어 다시 뒀네.”

그의 설명대로 카운터 뒤에 사람 한 명이 겨우 오갈 정도로 작은 쪽문이 보였다. 정문이 아니라면, 사람이 오고 갈 만한 곳은 저 뒷문뿐이다. 베개를 세탁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나가서 그대로 시체가 되었다….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죽음이었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주인장이 가판대를 탁!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그날부로 베개가 몇 개 사라졌지.”

…베개가 사라졌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자마자 계단 위로 튀어 올라갔다. 여전히 서랍과 책상 주변을 뒤지고 있는 이들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이불을 걷었다.

“태오. 왜 그러나.”

단순히 착각일지 모르지만, 육감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이불 안에 있는 베개를 뒤집자 어설프게 기워 놓은 자국이 보였다. 이음새를 잡아 벌려 손을 집어넣고 솜을 온통 헤집었다. 그리고 마침내 솜이 아닌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찾았다.”

윤기 흐르는 보라색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는 꽤 값비싼 물건으로 보였다. 알싸한 계피 향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주머니를 열어 침대 위에 들이부었다. 그러자 바짝 말린 보라색 꽃과 함께 수분과 향을 머금은 돌가루가 쏟아졌다. 내용물을 확인한 아스레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데히드 꽃 향낭이군.”

데히드…? 마물 도감에 사이누르가 좋아한다고 언급된 물건이다. 그게 꽃이었다니. 게다가 어째서 다른 것도 아닌 데히드로 향낭을 만들었는지 몰라 생각에 빠졌다.

그때 아스레인은 내용물이 아닌 빈 주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윽고 손을 집어넣어 천을 뒤집은 그는 ‘무언가’를 보곤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주머니엔 갈기가 화려하게 난 수사자의 옆모습이 그려졌다. 눈에 띄게 표정이 굳은 아스레인은 향낭을 품 안에 넣으며 곧장 걸음을 돌렸다.

“교수님! 그건 대체….”

서둘러 그를 붙잡았건만 돌아온 반응은 냉랭했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모두 함구해라. 그리고 더는 캘 생각도 하지 말거라.”

그 말을 끝으로 아스레인은 여관 밖으로 나갔다. 나와 비슷할 거라 생각한 세잔마저 저 문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갑자기 사색이 된 세잔은 기사를 데리고 아스레인을 따라 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나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뒤늦게 방을 정리하고 나가니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장이 벌떡 일어났다.

“거기 젊은이.”

“아, 네네. 말씀하세요.”

“그자가 나갈 때 중얼거리던 말이 이제야 떠올랐어.”

“예?!”

“요새 자주 깜빡깜빡해서 말이네.”

“뭐, 뭐라고 하던가요?”

여관 주인은 세잔에게 받은 은화 한 닢을 들여다보며 시를 낭송하듯 읊조렸다.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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