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8/305)

#28

뺨 위로 차가운 것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슬며시 눈을 뜨니 어둑한 방 안에 홀로 일렁이는 촛불이 보였다. 어린 마물이 간밤에 상태가 악화되진 않을까 걱정하다가 어렴풋이 잠에 든 모양이다.

으음. 선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쉬워 얇은 이불 위에 얼굴을 비비며 잠투정을 부렸다. 손에 꽉 쥔 이불을 놓지 않은 채 몸을 살짝 비트는데, 머리 위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내려앉았다.

“일어났나?”

뭐, …뭐지? 또 환청인가? 이불 위에 얼굴을 틀어박은 채로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차라리 귀신이라면 좋겠다. 쪽잠 자고 일어났는데, 바로 옆에서 아스레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모르는 척 잠들까 싶었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궁금증을 끊어 내질 못했다. 결국 이불 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그는 방금까지 촛불에 의지해 독서를 즐기고 있었는지, 천천히 책을 덮었다. 새하얀 셔츠 위로 유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산들바람을 따라 나풀거렸다.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등줄기는 오한으로 뒤덮였다.

“교, 교, 교… 교수님.”

“그래.”

“제가 아직 잠에서 덜 깬… 거겠죠?”

“현실이니 꿈으로 치부하고 도망칠 생각 하지 말게.”

“…네.”

아스레인이 대체 왜 침대에 앉아 있느냔 말이다. 그것도 내가 자고 있는데…! 열심히 돌아가던 회로에 케이블이 전부 끊어져 사고가 정지했다. 흘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 여기 계셨어요…?”

“그래.”

“왜, 왜요? 방에서 쉬시면 훨씬 편하셨을 텐데~”

속내를 포장하려 말끝을 길게 늘이자 그가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가 놔주질 않았으니까.”

“아?”

피곤을 머금은 눈동자가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어느 순간부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내가 잠결에 애착 인형처럼 놓지 않은 건 이불이 아니었다. 무려 그의 셔츠였다. 셔츠! 뜨거운 불을 만진 사람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당장 옷자락을 놓았다. 그 후 상체를 벌떡 일으키곤 얌전히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가 미쳤나 봐요.”

“뭐…. 괜찮네.”

“제가 안 괜찮아요. 아니, 잠결에… 제가… 왜… 왜 그랬을까요…?”

이어지는 설명은 더욱 가관이었다. 상태를 확인하려 방에 들른 아스레인은 내가 잠들어 있어서 조용히 사이누르만 보고 나가려고 하셨다. 그런데 인기척을 느끼고 깬 내가 비몽사몽 중에 그의 옷자락을 쥐고 다시 잠들었다. 아무리 빼내려고 해도 계속 칭얼거려서 그냥 깰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셨단다.

일단 잠에서 깬 기억이 없다. 더군다나 그에게 칭얼거린 기억은 아예 없다.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쥐곤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무슨 애도 아니고… 그죠…?”

“나한테 하는 말인가?”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허, 누가 들으면 자네 얘기가 아닌 줄 알겠네.”

내 얘기가 아니었으면 하니까요…. 식은땀이 묻어난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단단한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만든 구멍으로 당장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고맙게도 그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아, 자네가 쉬는 사이에 백작에게 전서를 보냈네.”

“직접 만나러 가실 건가요?”

“그래. 글로는 무슨 거짓말인들 못 할까.”

애초에 백작이 신실한 태도를 보이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자칫 잘못 행동했다가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죄보다 무거운 중책을 당할 처지라면, 알고 있는 사실조차 섣불리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 저는 사이누르를 데리고 학교로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아이가 깨어날 때까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새끼 사이누르와 얽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사이누르를 바라보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내일 해가 뜨거든 세잔 경과 함께 돌아가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제가 사이누르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많이 안정을 되찾은 상태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그의 한마디에 온몸을 긴장시킨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사이누르가 아플 때나 내 마음이 무너질 때 몸소 느낀 점이 있다. 기댈 사람이 있다는 것은, 또 그 사람에게 믿음을 산다는 건… 상당히 기쁜 일이라고.

“저 마물을 돌보아 무사히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자네의 첫 과제일세.”

“네. 교수님…! 제게 맡겨 주세요.”

평온히 오르락내리락하는 마물의 작은 몸집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를 이번만큼은 반드시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결의에 찬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매가 일순 부드러워졌다.

“아침이 멀었으니 충분히 쉬도록 해.”

아스레인은 읽던 책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까지 배웅하려 따라 일어나려는데, 그가 난데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 보았다. 집요한 시선이 얼굴을 세세하게 뜯어보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막 자고 일어난 꼴이 너무 추레했나. 문득 처음 연구실 앞에서 초라한 옷차림으로 잔소리 들은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혼날지 지레 겁먹고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데, 이어진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쯧.”

망설임 없이 다가온 그의 손이 불그스름한 눈가에 닿았다. 차가운 손끝에 놀라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피하진 못했다. 얌전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부드러운 손길이 뺨 전체를 감싸 쥐고 눈 아래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은 허공을 순회했고, 놀란 심정을 표현하듯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눈가에 맺힌 열기를 충분히 식혀 주곤 손을 거두었다.

“걱정 시키지 마라.”

그 후 짧은 한마디만 남기고 유유히 방을 떠났다. 쿵. 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완전히 멈춘 머릿속에선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 재생되었다. 이윽고 집 나갔던 현실감이 불쑥 찾아와 힘 풀린 다리로 겨우 침대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손가락으로 식었던 눈가의 열기가 목까지 전염되어 순식간에 잘 익은 사과가 되어 버렸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차라리 왜 울었냐고 창피를 주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 탓도 하지 않는 걸까. 어찌 그리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왜….

“미치겠네….”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인가.

***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지 오늘로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중대한 사안을 맡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설마 딱딱한 여관방 침대에서 발 뻗고 편히 잔 것이 마지막 휴식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흘 동안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번갈아 일어났다.

먼저 나쁜 뉴스는 홀로 아멜리 백작가로 향한 아스레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직접 출타한 아스레인이 정황을 설명하자 백작은 짐짓 당황하면서도 ‘마물 사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일관했다. 그 후 뻔히 목격자가 넷이나 있는데도 증거를 내놓으라고 버텼다.

문제는 그럴싸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쓰러진 사이 밀렵꾼들이 철수하는 바람에 비브린트 숲에 놓인 덫은 전부 사라졌고, 무더기로 쌓인 사체마저 장례를 치러 주었으니- 새끼 사이누르가 유일한 증거였다. 하지만 백작은 단지 어린 마물을 굶주림에서 구조한 거 아니냐며 시치미를 뗐다.

결국 아멜리 백작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못하고 ‘앞으로 예의주시하겠다’란 대답만 받아 냈다. 백작이 과연 그 사안에 얼마나 매달려 줄지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좋은 뉴스가 있어 다행이다.

“이리 와. 밥 먹자~”

드디어 새끼 사이누르가 깨어났다. 대학에 도착한 후에도 내리 자더니 갑자기 새벽에 깨어나 울어 젖혔다. 목이 마르다는 걸 알고서 맨발로 기숙사를 뛰쳐나가 물을 뜨러 갔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사이누르의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먹고 자는 것은 전부 내 관할이 되었다.

이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유리 온실 한구석에 사이누르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상태를 확인하러 들를 때마다 나무 밑동에서 늘어지게 자다가 살짝 부은 얼굴로 맞이하는 모습이 그리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나름 ‘누르’라는 애칭까지 정해 주었건만, 안타깝게도 교감은 그게 끝이었다.

“누르. 나랑 안 놀 거야?”

공과 사가 뚜렷한 누르는 오로지 식사할 때만 내게 다가온다. 신선한 열매를 먹을 땐 내가 가까이 있든, 옆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손등으로 슬그머니 등 부분을 만져도 움찔거릴 뿐 물진 않았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풀숲 안에 틀어박혔다. 사람에게 무리를 잃었으니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오픈 북.”

- 오랜만입니다. 태오 님.

“응. 시스템. 사이누르 정보가 나온 페이지를 보여 줘.”

사이누르와의 관계 평가는 처음부터 경계보다 한 단계 높은 ‘흥미’였다. 이 단계에서 단델은 내게 노란 꽃가루로 치장하고 재롱도 부려 주었는데, 누르는 아니었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도 관계 평가가 흥미라니… 퍽 모순적인 일이었다.

“사이누르와의 관계 평가 말야. 오류 난 거 아니지?”

- 현재 NO. 12 ‘사이누르’와의 관계는 흥미 단계입니다.

관찰하기 앞서 누르와 친해지는 게 급선무다. 누르에게 아침 인사를 마치고 연구실로 출근하면서 도감 내용을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관계 평가가 ‘흥미’인 덕분에 누르의 특징이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누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데히드를 좋아한다…?”

그게 뭔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물건이다. 연구실에 별일이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데히드’에 대해 알아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도감을 허공에서 치워 버리곤 연구실 문 앞에 섰다. 안에 아스레인이 있는 걸 알기에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활짝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평소처럼 씩씩하게 인사했건만, 연구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아스레인의 앞에는 지금쯤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할 세잔이 서 있었다. 나를 돌아보는 그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입가에 맺힌 미소를 재빨리 지우고 문을 등으로 닫았다.

“무슨 일이에요?”

세잔은 굳게 다문 입술 새로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그날부로 비브린트 숲 근처에 심복을 보냈었습니다.”

“심복이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피아트 가문엔 잠복해서 정보를 캐내는데 유능한 사용인이 몇 있습니다. 그간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습니다만, 바로 어제… 새로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새로운 소식이라면, 드디어 범인에 대한 증거를 찾은 걸까? 기대와 달리 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공기에 서린 날카로운 불안감이 일순 온몸을 지배했다. 그리고 언제나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비브린트 숲에서 시체가 한 구 나왔답니다.”

“…네?”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자 세잔은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피했다.

“자세한 건 직접 가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의 말에 당장 연구실을 떠나 비브린트 숲 인근으로 향했다. 잊지 않고 멀미약을 챙겨 먹은 후 달리는 마차 안에서 긴장감을 지우지 못했다. 시체라니. 수많은 생명이 묻힌 비브린트 숲에서 또 누가 숨을 빼앗겼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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