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27/305)

#27

헛된 바람이 만들어 낸 착각인 줄 알았으나, 꿈이 아니라는 걸 알리듯 재차 꿈틀거렸다. 무거운 흙을 뚫고 빠져나오려는 새순의 몸부림이었다. 설마…. 의식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무례함을 알고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으니 멈출 수 없었다.

펜과 종이를 가방에 던져 놓고 촘촘히 둘러싼 넝쿨 틈으로 손을 넣었다. 어렵게 털로 뒤덮인 꼬리를 들어 올리니 손가락 끝에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자네 지금 뭐 하는….”

“이 안에 있어요.”

“뭐?”

“새끼 사이누르가 아직 살아 있다구요!”

다급한 외침을 들은 그는 당장 마법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왔다. 상체를 숙이자 꼬리 아래로 몸을 숨긴 새끼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곧바로 세잔이 대신 사체를 들어 올려 준 덕분에 무사히 아이를 꺼낼 수 있었다.

“몸을 숨긴다는 곳이 겨우… 사체가 가득한 둥지였군.”

몸집이 채 두 손을 넘지 못하는 아이는 제대로 먹지 못해 가죽 아래로 뼈가 드러났다. 이 앙상한 사이누르를 환각제에 속아 나를 해칠 마물로 오인했었다니. 순간 숨이 턱 막혀 손에 담긴 애처로운 생명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뒤늦게 내 상태를 알아챈 아스레인은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며 단호히 말했다.

“의식을 마치고 따라갈 테니, 사이누르를 데리고 먼저 여관으로 내려가 있어라.”

“예…!”

“진과 세잔 경은 태오와 동행하게.”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정신을 차리곤 걸음을 돌렸다. 마물임에도 불구하고 인형처럼 가벼운 몸은 뜀박질을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혹여 추울까 봐 거의 가죽만 남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험한 숲길을 뛰어 내려왔다.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

***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여관에 차마 마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어 진의 가방에 그를 숨겼다. 그 후 왕래가 잦은 복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내 방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딱딱한 책상 위에 이불을 말아서 깔아 놓고 비쩍 마른 몸을 눕혔다. 이미 생기를 잃은 그에게서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오래도록 굶었을 사이누르를 위해 식당에서 싱싱한 열매와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 혹여 먹을까 싶어 열매를 입에 갖다 대었으나 사이누르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물을 손가락에 묻혀 입 안으로 흘려 보았지만, 그마저도 전부 토해 냈다. 단순한 먹을 것만으로는 안 된다. 어쩌면 약초가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곧장 세잔에게 그의 상태를 봐 달라고 부탁한 후에 진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여관 주인에게 겨우 사정하여 부엌을 빌리고 요리 도구로 약초를 달였다. 진의 지시대로 상처를 소독하는 풀잎을 빻고, 기력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는 약초를 따뜻한 물에 달였다. 그 후 여러 약을 담은 그릇과 병을 들고 위로 올라갔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싶었다. 세잔이 사이누르의 몸에 난 상처를 돌보는 동안, 그의 입 안에 억지로 약물을 흘려 넣었다. 몇 번 뱉어 내던 그가 조금씩 희석된 약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코가 냄새를 맡고자 킁킁거리는 미약한 움직임마저 소중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오! 사이누르가….”

잠시 약초를 빻으려 한눈을 판 사이, 갑자기 사이누르의 상태가 악화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곤히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불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잔기침까지 뱉어 내어 가녀린 몸이 크게 들썩였다.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나쁜 예감이 서서히 온몸을 지배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을… 치유 마법을….”

서서히 차가워지는 사이누르에게 손을 얹고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살릴 수만 있다면 내 희박한 마력이라도 전부 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기본도 모르는 내가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서 있는 세잔의 팔을 붙잡고 애절하게 빌었다.

“세잔. 마법이라면 될 거예요. 내게 기도문을 알려 줘요. 네?”

하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도문을 안다고 한들 고위급인 치유 마법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세잔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기적을 바라는 내게 현실은 가혹했다. 두 손 놓고 멍청하게 죽음을 예감한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상태는 어떻지?”

그토록 기다리던 아스레인이 도착했다. 유일하게 차분한 목소리가 지독한 늪에서 나를 건져 올렸다. 더듬거리며 사이누르의 상태를 보고하고, 처방한 약초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아아. 그때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빠르게 치료하는 그를 보좌하며 혹여 사이누르의 상태가 악화되진 않을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꼬박 한나절이 지났다. 어느새 창밖으로 저녁 어스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사이누르는 발 빠른 대처를 통해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를 깨끗한 이불 위에 눕힌 아스레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들었네. 이제 충분히 쉬면 괜찮아질 테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잔뜩 배어난 이마를 감싸 쥐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세잔과 진, 그리고 아스레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바닥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감쌌다.

“진은 부엌을 빌려준 여관 주인에게 충분히 사례하고, 세잔 경은 비브린트 숲 일대를 조사한 기사단에게 다시 한 번 증언을 듣게.”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온몸에 긴장이 풀리니 모든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쳤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있으니 아스레인은 어질러진 약초 병을 정리하며 말했다.

“대처를 잘해 준 덕분에 손쓸 곳이 거의 없었네.”

“어떻게….”

“음?”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은 그가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직도 마물 사냥이 남아 있죠?”

“앞으로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될 걸세.”

“…백작께 알리실 건가요?”

“물론 백작령에서 일어난 일이니, 먼저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지.”

고개를 천천히 들어 곤히 잠든 사이누르를 바라보았다. 처음 저 아이를 마주쳤을 때, 난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가득 찼었다. 내가 만들어 낸 환각에 휩싸여 날카로운 송곳니로 살을 꿰뚫을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그때 저 아이는 어땠을까. 사람에게 무리를 전부 잃고도, 혹여 사람에게 먹을 것을 동냥할 수 있을지도 몰라 둥지 밖으로 나온 거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도와 달라 외치려 사람 앞에 나타난 건 아닐까.

온갖 부정적인 추측이 몰아쳐 그릇된 결론을 내렸다.

“…제 탓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가지런한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걸 알면서도 죄책감을 지우지 못했다.

“제가 그때… 환각에 시달리지만 않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이 아이를 구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건 자네 탓이 아니잖나. 엄밀히 말하면 죽을 뻔했던 사이누르를 자네가 구한 걸세.”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교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계속 토하고,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또….”

“진정하게.”

생명의 불씨가 꺼졌다가 켜지길 반복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작은 외부 자극조차 거센 가시처럼 살갗을 찔렀다. 결국 쌓아 둔 감정의 둑이 무너졌다.

“전 왜 이렇게 무능할까요.”

쓸모없는 놈. 백작과 지도 교수는 항상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들이 옳았다. 아스레인처럼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세잔처럼 출중한 검술로 누군가를 지킬 수도 없고, 진처럼 약초에 대해 빠삭한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다. 사이누르를 살리고 싶다는 의욕. 우습게도 그것뿐이었다.

새빨개진 눈가에 볼품없는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울어 버리면 내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는 것만 같았다. 주먹을 세게 쥐니 손바닥 안에서 뜨거워졌다. 상처가 터진 것이겠지. 그럼에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태연하게 감정을 조절하려 노력했다. 이윽고 내 앞에 긴 그림자가 졌다.

“태오.”

차분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놀라기도 잠시, 핏줄이 잔뜩 올라온 주먹 위로 차가운 손이 겹쳐졌다. 움찔거리며 손에 힘을 풀자 그는 피가 배어나 더러워진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그 후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지혈하며 나직이 말했다.

“고맙네.”

“…….”

“무모하긴 했지만, 자네가 용감하게 몸을 던졌기에 저 아이는 목숨을 건졌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겨우 쥐고 있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무리를 인간에게 빼앗긴 아이가 또다시 인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공포와 동시에,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전부 자네 덕분이야.”

미처 닦지 못해 흙먼지로 더러워진 손 위에 물방울이 툭, 투둑 떨어졌다. 한번 시작된 울음을 도통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찢어진 상처를 소독하는 내내 꼭 서러운 아이처럼 볼품없이 울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얹지 않았다. 그만 울라며 말리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붕대를 감아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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