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오늘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 아침부터 사라세니아를 먹은 덕분에 상태도 좋고, 우리의 연구를 방해하던 날씨마저 상쾌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숲에 도착하니 아스레인이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부디 시야에서 사라지지 말게.”
“물론입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만큼 세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연구 진척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비브린트 숲에 서식하는 자는 2급 위험 마물 ‘사이누르’로 판명되었다. 비록 이 일대를 둘러본 기사단이 마물은 물론이고, 밀렵꾼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고 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네. 큰 소리를 내지 말고 모든 행동을 조심하도록 해라.”
“예. 교수님.”
“그래서 태오, 자네가 마지막으로 마물을 마주친 곳이 어디지?”
“기억나는 데까지 앞장서겠습니다.”
물론 숲에서 나온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똑똑히 기억한다. 다행히 안개가 흐려져서 둥지로 향하는 길목까지 수월하게 숲을 헤쳐 나갔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슬슬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마물을 마주친 곳으로 가기 전, 세잔이 인기척을 느꼈던 덤불에 멈춰 섰다. 혹시 몰라 어제처럼 나뭇가지로 나뭇잎이 쌓인 곳을 뒤적거렸다.
“세잔 경. 이쯤에서 덫을 봤었죠?”
“예. 제 기억에도 여깁니다. 하지만….”
무거운 물체에 짓눌렸던 흔적은 남아 있었으나 역시 덫은 수거된 후였다. 어쩜 증거가 이리도 없을까. 마물이 자주 다니는 곳에 덫을 놓고, 들키는 즉시 철수하는 것까지 보니 전문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틀림없다.
아쉬운 대로 걸음을 옮겨 목적지에 다다랐다.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바위와 이끼가 가득한 개울. 내가 놈에게 환각제를 부은 그곳이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걸 재차 확인하고 부자연스럽게 갈라진 덤불을 가리켰다.
“저쪽 이상하게 갈라진 덤불 보이시죠? 사이누르의 털을 발견한 곳도, 그로 예상되는 마물과 마주친 것도 저 부근이었어요.”
“둥지로 향하는 길목일지도 모르겠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스레인은 말없이 덤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부탁대로 시야 안에서 다른 부근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하지만 내가 앉은 곳에선 마물의 흔적은커녕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깨끗하게 치워 놓은 것 같았다. 미묘한 괴리감을 느끼던 그때, 아스레인이 다급하게 수풀을 헤쳤다.
“…이건….”
“왜 그러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스레인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핏자국이 남은 나뭇잎이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묻는지 알기에 다급히 두 손을 저었다. 저쪽으로 발도 들인 적이 없으니 저건 내 피가 아니다. …그렇다면….
같은 불안이 엄습한 아스레인이 침착하게 나뭇가지로 더미를 헤쳤다. 그러자 나뭇잎으로 가려져 있던 흔적이 속속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흩뿌려진 상당한 양의 핏자국, 인위적으로 뜯긴 털. …예감이 영 좋지 못하다. 아스레인은 뻣뻣한 털을 들어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대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이누르의 털일세.”
“…설마….”
“하지만 최근에 생긴 것은 아니야. 추적이 불가능하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동시에 깊게 들어선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털과 피는 어제 마주친 어린 마물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새끼 사이누르가 혼자 숲을 떠돌아다니던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냉정하게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서둘러 가 보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비좁은 덤불 안으로 들어갔다. 세잔이 검으로 억센 풀을 잘라 주었으나 겨우 허리를 펼 수 있을 만큼 좁았다. 하지만 불평할 새가 없었다. 길목을 걷는 내내 바닥에 일정하게 떨어진 핏자국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둥지로 예상되는 저편과 가까워질수록 불쾌한 냄새가 강해졌다.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는 불행히도 처음 맡는 것이 아니었다.
“…….”
단체로 폐사한 동물을 보았을 때, 나는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쿵. 쿵. 불안감으로 쥐어 짜인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 옷가지와 뺨에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스치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 후 겨우 덤불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진. 맑은 물을 꺼내라.”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아늑한 둥지 안에는 죽은 마물의 사체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누가 평화에 불을 질렀는가.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려는 듯 몸을 맞댄 채로 생을 마감했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가죽에 들러붙은 피딱지, 차갑게 굳어 버린 몸을 기어 다니는 벌레. 그것들만 없었더라면 마치 평온한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어떤 말도 쉽게 내뱉을 수 없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스레인은 웅크린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한 사이누르를 묵묵히 살펴보았다. 사냥꾼들이라면 마물을 포획하기 전에 우리에게 들켜 급히 철수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이미 피를 본 후였다니…. 정황상 답은 나와 있었으나,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어렵게 운을 뗐다.
“포식자의 소행일까요?”
“그리 믿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아닐세.”
아스레인은 진이 가져온 맑은 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씻어 내렸다. 뻣뻣한 털을 치워 가며 꼼꼼히 살펴보던 그가 사뭇 진지하게 설명했다.
“다른 마물의 소행이었다면, 발톱으로 인해 살이 뜯겨 나갔거나 지저분한 상처가 남았을 것이네. 하지만 이 흔적을 보게나.”
털에 엉겨 붙은 핏자국이 사라지니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결코 다른 마물의 짓이라 할 수 없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종족은 단 하나뿐이야.”
“…사람이군요.”
“게다가 꽤 마물에 대해 잘 아는 솜씨군. 기사들이 이곳을 찾지 못한 이유도 알겠어.”
사이누르는 환경 변화에 상당히 예민하다. 따라서 우거진 숲속에서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둥지로 택한다. 밀렵꾼들은 그 특징을 역으로 이용하여 사냥한 사이누르의 사체를 옮기기 전 둥지에 숨겨 놓았다. 그 때문에 순찰을 도는 기사에게도, 사체를 먹는 마물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이다. 욕지거리가 나오는 추악한 방법이었으나, 단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사체는 온전하잖아요. 이럴 거면 대체… 무엇을 위해 죽인 건가요….”
“자네의 말대로 대부분 밀렵된 마물은 가죽과 고기까지 남김없이 팔리지. 몸체가 큰 마물의 경우, 남들의 눈을 피해 옮기기 힘드니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물건만 취하곤 하네.”
조심스럽게 사이누르의 머리로 손을 뻗은 그는 곧 긴 손가락으로 푹 꺼진 눈꺼풀 위를 쓰다듬었다.
“사이누르에겐… ‘마안’이라 불리는 눈이 있지.”
생리적으로 튀어나온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사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거짓말같이 모든 개체에 눈이 없었다. 저절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았으나 손가락 새로 빠져나간 감정은 주워 담지 못했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엉겨 붙은 몸이, 빼앗기지 않으려 바닥 깊게 박힌 발톱이, 작은 몸집을 가진 개체를 위해 감싼 꼬리가 괴로운 형상을 만들어 냈다.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거칠게 가방을 열어 종이를 꺼내었다.
이미 명을 다한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각각의 특징과 몸에 난 상처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상처 입은 오른손으로 종이를 받쳐 펜촉이 붕대 위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 탓에 상처가 벌어지는 것 같았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점점 비뚤어지는 글씨만이 복잡한 감정을 대변해 주었다.
참상을 문자로 옮겨 적는데, 사체를 살펴보던 아스레인이 넌지시 물었다.
“태오. 자네가 마주친 게 새끼라고 했나?”
“예.”
“…하지만 보이지 않는군.”
그의 말대로였다. 둥지 주변을 돌아다녔으나 어린 사이누르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아이마저 죽은 걸까. 아니면, 우리의 기척을 알아채고 다른 곳으로 숨은 걸까. 부디 어딘가에 살아 있기를 바랐다. 펜을 세게 쥐며 쓰라린 불안을 힘겹게 삼켰다.
그새 관찰을 끝낸 아스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칙상 마물의 사체를 발견하면 관할처에 알리고 마땅히 연구용으로 써야 한다. 하지만 이는 자연의 부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니, 그들의 마지막 바람대로 이곳에 머물게 하지.”
허공에 맺힌 금색 눈동자는 퍽 차분했다.
“이견 있나?”
그가 물었다. 미리 약속한 듯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동의였다. 그는 새하얀 장갑을 재킷에 넣어 두고 맨손으로 사이누르의 미간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감히 추측하려 들지 못했다.
묵념을 마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곤 입을 열었다.
“세잔 경. 도와주겠나.”
“뭐든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들의 모습을 숨기는 동안, 곁에서 기도를 읊어 주게.”
“…알겠습니다.”
세잔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후, 아스레인이 했던 것처럼 사이누르의 몸에 손을 올리며 조심스레 기도를 읊었다.
차가운 길 위에 놓인 그들을 받아 주소서. 자비로운 손길로 까맣게 타 버린 영혼을 달래 주소서. 보잘것없는 씨앗에서 태어나 주어진 명을 다하였으니, 다시 당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소서. 신시아 잎처럼 너른 손으로 감싸 주시고,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칸투 꽃으로 안내하시어 가련한 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