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5/305)

#25

이건 기도문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웠다. 고작 이런 걸로 되는 걸까? 의심의 눈초리로 물그릇을 흘겨보았다. 그때 아스레인의 손짓을 따라 허공에 떠오른 털 뭉치 주변을 물이 동그랗게 둘러쌌다. 그 후 여러 물줄기가 신경 세포처럼 털끝에 연결되더니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

완성된 것은 네 발을 가진 기이한 마물이었다. 곰처럼 둥글고 큰 몸집을 자랑하면서, 가늘고 긴 꼬리는 바닥에 질질 끌렸다. 당장 마물 도감을 꺼내어 검색하고 싶었던 찰나 아스레인이 말했다.

“2급 위험 마물 ‘사이누르’다.”

“사이누르요?”

“임신 기간이 매우 긴 데다가 환경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번식을 포기하기에 상당히 희귀한 마물이네. 보통 무리 생활을 하기에 홀로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다만….”

그럼 내가 마주친 마물- 새끼 사이누르는 특별한 연유로 무리를 잃은 걸지도 모른다. 기사단은 숲에서 마물을 찾을 수 없다고 했으나, 마물 사냥의 가능성도 지울 수 없다. 불안하게 입술을 뜯는 사이 아스레인은 허공에서 물로 만들어진 마물을 지워 버리곤 손을 털었다.

“상태가 진정되면 바로 숲으로 향하지.”

“전 지금도 멀쩡합니다.”

“자네 마력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 그럼 내일 출발하죠!”

손이 다쳐 억울한 것도, 망할 놈에 대한 분노도 전부 사라졌다. 머릿속엔 오로지 그 마물을 다시 만나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열의를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니 아스레인이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환각제에 취한 사냥꾼에 대한 얘기는… 내가 전하도록 하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니 아스레인은 대답 대신 내 이마를 꾸욱 눌러 침대에 눕혔다. 세잔과 진이 나간 후 물그릇을 정리한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래로 내려오게. 여관 주인에게 식사를 준비해 달라 부탁하마.”

“네, 교수님.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자네에게서 잠시라도 시선을 뗄 수가 없어.”

“하하…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렸다. 눈만 살며시 내놓은 내 모습을 본 아스레인은 헛웃음을 흘리곤 걸음을 돌렸다. 왠지 피곤해 보이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꿈에서 본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저… 교수님.”

“할 말이 남았나?”

환각제를 들이마신 순간 그와 겹쳐 보인 기이한 마물. 그리고 꿈에서 마주친 황금빛 마물. 그 둘은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본디 환각은 내 상상에 국한된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드리운 마물은 상당히 선명한 것치고는, 단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것이었다.

단순한 우연일까. 무엇 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교수님도 푹 쉬세요.”

내 무의식에 남은 환상이겠지. 그리 치부했다.

***

이번엔 꿈이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창밖은 벌써 컴컴했다. 얼마나 잔 거지.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새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뚜둑, 뚜둑. 기름칠을 덜한 경첩처럼 괴상한 소리가 뼈마디마다 울렸다. 이게 스물 중반의 몸에서 나는 소리가 맞나. 난데없이 씁쓸해졌다.

잠에서 깨면 아래로 내려오라는 아스레인의 조언을 따라 비척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붉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내벽과 어설픈 솜씨로 조각한 문패가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난간을 붙잡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조금씩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한 잔 더!”

여관으로 쓰는 2층과 달리 1층은 술집으로 쓰는 모양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꼭 대학 근처 주점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좁은 책상에 놓인 촛불에 의지해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무리 사이로 지나가며 마땅한 자리를 찾았다. 그때 구석진 곳에 앉아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는 남성을 발견했다.

“세잔 경…!”

“아, 깨어나셨군요.”

“계속 여기 계셨어요?”

“교수님께선 진과 함께 볼일이 있어서 제가 대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정신없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세잔은 꼭 오랫동안 외출했다가 돌아온 주인을 마주친 강아지처럼 완연한 화색을 띠었다. 그는 곧바로 내가 먹을 만한 요리를 주문하곤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드르륵. 오래된 카펫 위로 의자를 끌어와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저 혼자 내려와서 먹어도 되는데.”

“아닙니다. 그보다 몸은 어떠십니까? 태오 님, …아니. 형.”

우와악. 평생 심심치 않게 들어온 호칭인데, 왜 세잔이 부를 때만 어깨가 흠칫거릴 만큼 어색한지 모르겠다. 물론 ‘단둘이 있을 때만’ 호형호제하기로 약속한 건 내쪽이다만. 심지어 나를 흘끔 쳐다보는 남색 눈동자가 어째 반응해 주길 기다리는 눈치다.

그래. 세잔아. 형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기다린 거야? 장하기도 하지. 아이구, 우리 세잔이 다 컸네. …라고 할 순 없잖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꼬리만 씰룩거리니 투박한 손길이 다가왔다. 세잔은 테이블 위에 올린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끌곤, 자는 사이 풀린 붕대를 꼼꼼하게 당겨 마무리해 주었다.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에 비해 한없이 섬세한 손길이었다.

“역시 이 붕대는 세잔 경… 아니. 세잔의 실력이었군요?”

짧은 호칭을 떼었다. 겨우 그것뿐인데, 기운 없이 흔들리던 촛불 끝에 고정된 시선이 번뜩 내게로 향했다. 줄곧 생기 없이 차가운 남색 눈동자 안으로 일렁이는 불꽃이 비쳤다.

“예, 맞습니다.”

“어디서 배운 거예요?”

“어릴 적에 종종 숲을 뛰어다니다가 다쳤는데, 아버지께 혼날까 봐 혼자 치료했었습니다.”

“와, 되게 활발한 성격이었나 봐요?”

세잔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세잔은 거짓말을 정말 못하네요.”

호탕하게 웃는 사이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버섯 수프가 나왔다. 제아무리 양손잡이라지만, 밥 먹을 때 자주 쓰는 오른손이 다쳐 곤란했다. 느릿느릿하게 수프를 먹으니 덩달아 식사하던 세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치유 마법을 써 드리고 싶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붕대를 감아 드리는 것뿐입니다.”

“에이, 충분한 걸요. 금방 나을 거예요.”

별거 아니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다. 성둥성둥 잘린 양송이버섯을 먹으며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을 한껏 즐기다가, 불현듯 떠오른 호기심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마법으로 치유도 가능한 건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치유 마법을 능히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오…. 마법학 교수님이라면 가능할까요?”

“예.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책 한 권 분량에 달하는 기도문을 전부 읊어도 마력이 모자라서 불가능합니다.”

“그럼 저도 마찬가지겠네요….”

암울한 마력량을 탓하며 숟가락으로 애꿎은 그릇 바닥을 툭툭 쳤다. 그렇다면 아스레인이라면 어떨까. 그는 단 한 마디로 마물 ‘사이누르’의 형체를 만들어 냈다. 그라면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체를 테이블에 바짝 가까이 대고 기대감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럼 아스레인 교수님은 가능할까요?”

“장담할 수는 없으나 제가 보기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실은 저도 교수님께서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말요? 그럼 세잔이 보기에 어땠어요?”

“애초에 교수님이시라면 마력량이 기준을 넘으리라곤 예상했습니다만. 설마 그 정도이실 줄은….”

세잔은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마법에 문외한인 나도 감탄이 나올 정도인데, 마법학 전공자인 그가 보기엔 더더욱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천재적인 마법 실력을 인정하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라왔다.

“왜 마물학 교수가 되셨을까요? 교수님의 선조께서도 대마법사셨잖아요? 그럼 당연히 마법학부에서 떼로 몰려왔을 텐데.”

“아, 그에 대해서는….”

“따로 이유가 있나요?”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그분께 안겔루스 마물학부의 교수 자릴 추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아스레인의 선조가 마법으로 노한 마물을 진정시켜 에브게니아 1세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 덕분에 백작에 준하는 작위를 얻었고, 대대로 학자의 피가 이어졌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의 아스레인이 황실로부터 교수 자리를 추천받았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이다.

“황실이라면, 역시 황제 폐하겠죠?”

“어떤 의미로는 맞고, 또 어떤 의미로는 틀립니다.”

“예? 그게 무슨….”

인상을 살짝 찌푸리니 세잔은 설명하길 망설였다. 심각한 사항임을 알고 있기에 주먹을 입에 대고 함구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굳게 닫힌 입이 천천히 열렸다.

“폐하께서는 근래 편찮으셔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지 꽤 되었답니다.”

“저, 정말요?”

“저도 아버지께 전해 들은 얘깁니다.”

세잔의 말을 들으니 불현듯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부분이 떠올랐다. 카르사 제국은 곧 불길한 신탁을 받게 된다. 그때 신전으로 들어간 자는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였다.

소설을 읽을 때 의문스럽게 넘겼던 부분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세잔의 말대로 황제가 병들었다면, 조만간 이 거대한 카르사 제국은 황태자의 손에 넘어간다.

“아마 교수님이 안겔루스 대학에 들어온 건 황태자 전하의 추천에 의해서일 겁니다.”

“…황태자 전하요?”

“교수님께서는 특히 황태자 전하와 긴밀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스레인이 차기 황제와 연이 깊다는 건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백작의 앞에서 아스레인은 ‘연구가 끝나면 폐하를 직접 알현하겠다’고 말했었다. 과연 그가 말한 폐하는 몸이 불편한 황제를 말한 것일까. 아니면, 곧 황제가 될 이를 빗댄 것일까.

복잡한 머릿속처럼 으그러진 수프 안을 숟가락으로 휘젓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혹시 교수님에 대해 아시는 거 더 있나요? 제가 보좌하면서 유용할까 싶어서요.”

“안타깝게도 종종 현지 연구에만 동행했기에 아스레인 교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으음, 그래요?”

“애초에 ‘아스레인’ 가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가 별로 없을 겁니다. 저택은 섬에 있고, 공식 석상에는 가주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지금의 가주께서 ‘교수’ 자리에 앉은 덕분에 자주 뵐 수 있는 것이죠.”

“그건 확실히 그렇죠.”

350년 전, 선조인 아스레인이 시오 왕조를 무너뜨리려 에브게니아 공작을 도왔을 때마저 그 누구도 출신을 알지 못했다. 권력자인 에브게니아 공작이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말하니 다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심지어 지금의 아스레인조차 자신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말을 아끼니 알 방법은 0에 가까웠다. 깊이 공감하니 세잔은 잠시 턱을 어루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든 비밀을 황실만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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