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공간에서 눈을 떴다. 나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늑대였다. 칠흑 같은 연기 사이로 새빨간 눈을 빛내는 늑대는 내 그림자에 사는 마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짓했지만, 검은 늑대는 다가오지 않고 제 자리에 앉아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니 싱크 홀처럼 깊게 파인 구덩이가 보였다. 설마…. 불안한 마음에 늑대를 바라보니 기다렸다는 듯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으음. 따라가야겠지. 어쩔 수 없이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구덩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거센 바람이 귓등을 스치고 지나가 일순 귀가 먹먹해졌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굴 안으로 흘려보낸 정신을 붙잡으니 저 멀리 풀밭이 보였다. 바닥에 그대로 들이박을 거란 예상과 달리 푸른 잔디는 트램펄린처럼 출렁거렸다.
얼떨결에 안정적으로 착지하고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내가 들어온 입구는 무성한 나무들로 가려졌고, 검은 늑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모래 언덕이 떡하니 보였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구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닿기도 전에 언덕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모래 언덕이 아니라… 몸을 둥그렇게 만 마물의 등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마물은 역삼각형 모양의 길쭉한 머리를 드러내며 서서히 잠에서 깼다. 전설에서만 접했던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게다가 위로 솟은 뿔은 마치 일국의 왕이 쓴 화려한 왕관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쪽 뿔이 반절 잘린 상태였다. 어쩐지 고통스러워 보여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니 길게 찢어진 눈이 번쩍 뜨였다. 황홀하게 빛나는 금안과 마주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니 결이 살아 있는 나무 천장이 보였다. 기숙사가 이렇게 생겼었나.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돌리자 도미노처럼 세 사람이 주르륵 이쪽을 바라보았다.
“태오!!”
“드디어 깨어났군.”
며칠 동안 랩실을 무단결근한 후에 갑자기 나타나도 이런 환대는 못 받겠다. 아스레인과 진, 그리고 세잔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어렵게 운을 뗐다.
“여긴… 어디예요?”
“자네가 숲에서 쓰러져서 근처 여관으로 급히 내려왔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이마 위에 고이 놓인 물수건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아, 내가 쓰러졌었구나. 어쩐지. 숲에서 제 발로 내려온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침대 위에 누워 있나 싶었다.
게다가 돌부리에 찢긴 손도 깔끔하게 소독되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의미 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풀길 반복하며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머리를 굴렸다. 고맙게도 아스레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태는 어떻지?”
“조금 몽롱한 거만 빼면 괜찮아요.”
“해독제의 영향이네.”
“…해독이요?”
“내가 준 환각제는 마물에게 쓸 용도로 제조되었기에 사람에게는 맹독에 가까워. 특히나 자네같이 허약한 자에게는 더욱이.”
허약한 자. 음절 하나하나가 가시가 되어 가슴에 나란히 박혔다. 그 허약한 놈이 무턱대고 일을 저질렀으니 혼나는 건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고동색 나무 스툴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꼰 그가 끈질기게 노려보았다.
“대체 약을 어떻게 썼기에 마물이 아니라 자네가 취한 건가?”
“…그게… 말이죠….”
“마력은 왜 또 바닥이 난 거고.”
마물을 해치려는 놈을 제압하기 위해 환각제를 쓰다가 도리어 내가 취했고,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아그누스가 튀어나와 마력이 바닥났다. 한 줄로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기엔 믿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력이 바닥난 이유는 일단 뒤로 미뤄 두고, 마물 소리를 듣고 뛰어가서 무장한 사내를 마주친 후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 후 다짜고짜 세잔을 향해 물었다.
“잡았어요?”
기대를 안고 물었건만 세잔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태오의 말을 듣고 곧장 그를 쫓아갔으나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점점 자욱해져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는 길을 잘못 들어 교수님과 진을 마주친 겁니다.”
“…그때 제가 나타난 거군요.”
“예. 당신을 여관으로 옮긴 후, 교수님께서 연락을 취해 기사들이 비브린트 숲을 조사했습니다. 그사이 저 또한 마을을 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증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낌새를 느낀 그들도 전부 철수한 것인지, 수상한 무리는 없었습니다.”
서서히 여관 방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아스레인이 연락해 안겔루스 기사단이 비브린트 숲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밀렵꾼의 흔적은 물론이고 마물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재빨리 철수하면서 덫까지 한꺼번에 치워 버렸으니 철두철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포기하긴 이르다. 분위기를 환기하려 최대한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제가 봤어요! 그 남자는 갈색 짧은 머리카락에 검정 눈을 가졌어요. 철갑옷엔 특정 문장도 없는 데다가 지극히 평범한 외모였지만…. 환각제에 취한 남자를 찾는 건 쉬울 거예요.”
끄나풀을 잡는다면 언젠가 일을 지시한 수뇌부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산행에 익숙한 세잔조차 방황한 길을 그는 자유롭게 달렸다고 했다. 안개로 가려져도 상관없을 만큼 비브린트 숲을 자주 오고 갔을 것이다. 덫을 설치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설픈 추론이라도 함께 나누려 입을 열었으나 곧 우아한 손길이 말문을 막았다.
“그만.”
“…예?”
“자네는 방금 깨어났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인가. 그 기세를 보니 휴식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군.”
정곡이 찔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쯤 한창 흔적을 찾고 있어야 할 그들이 나를 간호하느라 여관방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했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가 애써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요. 험한 산길에서 절 옮기느라 힘드셨을 텐데 죄송해요. 하하….”
“지금 웃음이 나오나?”
“…아니요….”
“제때 손을 썼으니 망정이지. …자네, 진심으로 위험했네. 이건 농담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설마 사람에게 쓸 것이라곤 생각도… 하아.”
아스레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걱정했을 그들에게 미안해서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때 줄곧 죽을상을 하고 있던 세잔이 불쑥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가늠도 되지 않아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예?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제 할 일 하나 제대로 못하고 심각한 누를 끼쳤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세잔을 탓할 생각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거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죄책감으로 물든 그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 보였다. 열심히 낑낑거리다가 도통 마음대로 되지 않아 울상을 지으며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그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그만 일어나게. 괜찮다고 하잖나.”
“맞아요. 이건 세잔 경의 잘못이 아니에요.”
망할 그들의 잘못이지. 열심히 토로했지만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상체만 살짝 숙여 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세잔 경. 안 일어나시면 저도 여기서 무릎 꿇어요?”
“아니, 그건….”
“진심이에요.”
눈치를 살피던 그가 내 단호한 태도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진이 친절하게 가져다준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세잔은 꼭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처럼 각 잡고 앉아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가만히 두면 구석에 홀로 남아 음습한 기운을 내뿜을 게 확실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에요.”
죄책감을 덜어 주려 생글생글 웃으니 세잔의 눈썹 끝이 살짝 아래로 쳐졌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입술을 움찔거리는 그를 가만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꿔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 맞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주머니에 고이 넣어 두었던 털 뭉치를 꺼내었다.
“이건 새로 발견한 흔적이에요. 따로 넣어 두려고 했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주머니에 넣어 왔어요.”
마물의 털로 예상되는 것을 꺼내니 아스레인과 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스레인은 곧바로 손수건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그의 손수건 위로 조심스럽게 털을 올려놓으며 발바닥을 그린 메모지도 뒤이어 꺼내었다.
“제가 나뭇잎 아래서 찾은 발자국은 꽤 작았어요. 그리고… 물론 실제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마물과 대치한 남자는 전혀 겁먹지 않았어요. 성체라면 조금이나마 주춤할 텐데 말이죠. 만약 무리에서 이탈한 새끼라면 관찰 후에 보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꼬깃꼬깃한 메모지를 보여 주니 아스레인은 털과 발바닥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도움이 될까요?”
고심한 논문 주제를 검사받듯 슬쩍 눈치를 살폈다. 줄곧 무뚝뚝했던 그의 입꼬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훌륭하군.”
“정말요?”
“그래. 자네 덕분에 마물을 특정 지을 수 있겠어.”
드디어 아스레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덩달아 딸려온 반가운 소식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털만으로 알아보시는 건가요?”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 흔적은 마법을 통해 추적할 수 있네. 비록 시간이 오래 지나면 흐릿해지지만.”
마법에 ‘마’ 자도 모르는 나로선 무슨 말인지 확실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대충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지. 아스레인은 마법을 쓰려는 건지 털을 올려놓은 손수건과 물그릇을 나란히 두었다. 마법을 쓰는 순간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일전 세잔의 설명에 의하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기도문을 입으로 외우거나 쓰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마력이 충분하다면 번거롭게 기도문을 읊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과연 아스레인은 어떨까.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자 아스레인은 물그릇 위로 손을 뻗은 채 중얼거렸다.
“네 원형을 보여라.”
…뭐야. 그게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