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23/305)

#23

지금이다! 놈이 검을 휘두르려 팔을 높이 올린 때를 노렸다. 빈틈을 보인 옆구리를 향해 붉은 천을 본 황소처럼 튀어나가 어깨로 사정없이 들이박았다. 퍽. 무게를 실어 냅다 꽂으니 커다란 몸집이 순간 중신을 잃고 휘청거렸다. 곧바로 셔츠 소매로 코와 입을 막은 채 그의 면전에 회백색 액체를 들이부었다.

“……!!”

얼굴을 흥건하게 적신 액체는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상기된 체온 때문인가. 그의 피부에 달라붙은 액체는 금세 기화되어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여름에만 맡을 수 있는 꿉꿉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숨을 멈추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흘린 병을 주우며 걸음을 돌리려는 그때, 놈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저… 저게 뭐야….”

의기양양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파들파들 떠는 겁쟁이만 남았다. 두 눈동자에는 순수한 두려움만이 서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이 퍽 섬뜩했다.

덩달아 겁을 먹고 머뭇거리자 몸을 휙 돌린 그가 내 어깨를 세게 밀쳤다. 넘어지지 않으려 비틀거리다 발목을 접질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으윽….”

“너, 너, 너는… 웬 놈이냐!”

젠장. 하필이면 바닥을 짚은 곳에 날카로운 돌부리가 있어 여린 손바닥이 깊게 찢겼다. 팔꿈치까지 저릿한 고통에 손을 움찔거리자 자그마한 개울 위로 진득한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비명에 마물이 놀랄까 소리를 애써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놈은 소중하게 여기는 검을 챙기는 것도 잊은 채 뒷걸음질 쳤다. 경계하던 태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그… 당신께서 어떻게….”

환각제에 취한 그가 나를 다른 사람과 헷갈렸다. 아직 젊어 보이는 남자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허공에 대고 연신 잘못을 빌었다.

“전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아닙니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머리를 흔들며 부정하다가 급기야 과호흡 증상까지 보였다. 꺼억, 꺼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밧줄이라도 매인 듯 목을 손톱으로 긁는 모습이 섬찟했다. 이내 땀과 함께 흐르는 눈물로 엉망이 된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흉측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찢어졌다.

“난 죽어선 안 돼. 아직 …는 완성되지 않았어!!”

“…그게 무슨….”

“그러니 네가 희생한다고 생각해.”

두려움이 광기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히힉! 이상한 웃음을 흘린 놈은 침까지 질질 흘리며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마물과 대적하지 않고 도망치게 한다는 계획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내가 부상을 입는다는 건 예상치 못했다. 이미 마물은 피 냄새를 맡았을 터. 지혈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몸을 숨겨 봤자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아직 마물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해 상상이 빚어 낸 두려움은 끝을 모르고 커져 갔다.

발끝부터 서서히 물들어 가는 불안감에 숨을 짧게 들이쉬자마자- 후회가 막심했다.

“…망할….”

환각제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지 않은가. 놈이 넘어뜨린 충격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코와 입을 가려야 한단 사실을 잊어버렸다. 설상가상 안개는 점점 짙어져 도망칠 길목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급히 숨을 참았지만, 이미 한참 늦은 대처였다.

쿵. 쿵. 이건 발소리인가. 아니면, 환각이 만들어 낸 소리인가.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보니 바위만 한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삼킬 수 있는 지척까지 다가왔다. 환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시각을 지배당해 이성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고개를 들어 마물의 본 모습을 확인했다.

흉악하게 튀어 올라온 송곳니, 온몸을 단단하게 감싼 근육, 산맥을 형상화하듯 불쑥 올라온 등뼈. 온갖 흉포한 특징을 합쳐 놓은 괴상한 마물이 뜨거운 입김을 내뱉었다. 그 존재감이 이마에 닿을 때 초점 없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 …과 교감을 …확, 인… 넘버…새… 마물….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시스템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울렸다. 본체의 정신이 혼미하니 시스템마저 고장나 버린 게 분명하다. 알 수 없는 소리로 앓는 사이, 멧돼지를 닮은 마물은 곧 뛰어들 것처럼 발을 굴렀다.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마치 남은 수명을 알리는 시계 같았다.

도망쳐야 한다. 저 마물의 본체가 무엇이든 내 심신이 더는 못 버틸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니 경계심이 극에 달한 마물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퇴로만 확보하고 곧바로 뛸 생각이었다. 그러나 등을 보일 틈도 없었다.

“으악!!”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급소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당장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가렸다. 팔 하나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단 절망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아무리 최악의 경우를 따져도, 팔은 물론이고 몸 어느 곳에서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질끈 감은 눈꺼풀이 사시나무처럼 애처롭게 떨렸다. 벌써 천국에 당도한 것인가? 의아함을 느끼며 팔을 내리곤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어?”

그 짧은 사이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안개로 뒤덮인 숲은 밤이 찾아온 것처럼 서서히 어두워졌고, 그 어둠을 뿜어내는 중심엔 검은 털을 가진 늑대가 고고하게 서 있었다. 늑대는 나를 보호하듯 마물과 사이를 갈라놓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거무죽죽한 연기를 뿜어내는 털 사이로 새빨간 눈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너는….”

그림자로 들어온 손님, 아그누스였다. 토끼의 모습으로 만난 마물은 어느새 늑대까지 몸집을 키워 늠름하게 제집을 지켰다. 털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나를 보호하듯 주변을 감쌌다. 갑자기 아그누스가 그림자 밖으로 현신하여 피로감이 몰아쳤지만, 그 덕분에 나를 위협하던 마물은 몸을 바짝 숙인 채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틈을 노린 아그누스는 나를 등에 태우고 단번에 안개 속으로 도약했다. 떨어지지 않으려 한쪽 팔로 목을 끌어안자 그는 장애물을 피해 숲길을 빠르게 헤쳐 나갔다. 아그누스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는 동안,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무엇보다 남자의 인상착의를 떠올려야 한다. 갑옷으로 무장한 훤칠한 남자. 가문이나 조직을 상징하는 문양은 없었으나, ‘그분’을 두려워하며 무언가를 완성하고자 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와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던 무렵, 아그누스가 두툼한 나무 밑동 위에서 멈춰 섰다.

“…왜 그래?”

대뜸 물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아그누스의 목덜미를 한 팔로 감싸고 힘겹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질척한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착각이 들 만큼 몸이 무거웠다. 비틀거리며 바위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아그누스는 허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불쑥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잠깐만…!”

그림자에 대고 외쳤지만 아그누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를 오지에 떨어트려 놓은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아그누스가 사라지니 공중에 흩어진 마력이 조금이나마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바위를 붙잡고 일어나니 저 멀리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네. 세잔 경.”

“…아닙니다. 그보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홀린 듯 걸어가니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교수님…!”

“…태오?”

아그누스가 또 다시 아스레인에게로 나를 이끈 것이다. 이번만큼은 최적의 선택이다. 언덕 위에 아스레인과 진은 물론이고, 헤어져서 행방을 알 수 없던 세잔까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드는데 손바닥에 맺힌 핏방울이 손목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셋은 한달음에 다가왔다. 비록 당혹스러운 표정이지만 익숙한 얼굴을 보니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하하… 그게….”

“헉, 태오. 손에서 피가…!!”

“아, 그것도 말이죠….”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놈이 난데없이 깊은 상처를 들고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멋쩍은 웃음을 흘리던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세잔이 재빨리 팔을 붙잡아 준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으나 여전히 시야는 흐렸다. 아직 약효가 떨어지지 않은 건가. 다급하게 눈가를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괜찮으십니까?”

당혹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세잔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 칭하기 어려웠다. 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휘저은 반죽처럼 형태 없이 돌아다녔다. 심지어 그 옆에 진은 눈코입이 하나씩 지워져 갔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믿지 못할 광경을 회피하느라 시선이 갈 곳을 잃어 방황했다.

“이게 무슨…, 누구….”

“태오. 날 봐라.”

혼란스러운 와중에 차분한 목소리가 이목을 끌어 떨리는 숨을 멈추고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사뿐히 닿았다. 고요한 호박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대로 진정되어 가나 싶었건만-

“환각제를 썼나?”

“…….”

서서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마주하곤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금색 홍채가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가 흰자를 전부 삼켰고, 백옥 같은 뺨에 햇볕을 머금은 모래사장처럼 빛나는 비늘이 돋아났다. 단순히 이목구비가 무너진 그들과 차원이 다른 환각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는 과정을 목격했으니 멀쩡한 정신 따위 남아날 리 없었다.

“태오.”

나직하게 이름을 부른 아스레인이 한 손으로 내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쿵! 등으로 딱딱한 나무가 맞닿는 충격에 몸이 덜컥 흔들렸다. 그가 내 상태를 파악하는 사이, 조금씩 산소가 부족해져 그의 손안에서 겨우 허락된 숨을 헐떡였다. 유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안개와 함께 피어오르는 피 냄새였다.

“하나만 묻지.”

그가 인간의 말을 했다. 인간이 아닌데도.

허리선까지 유려하게 떨어진 머리카락은 서서히 뿔로 변했으며, 동그란 동공은 베일 듯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완벽한 마물의 모습이었다. 금안이 뿜어내는 마력에 홀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아스레인은 한 뼘 남짓까지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그 후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게 뭐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을 망설이다가 띄엄띄엄 단어를 뱉었다.

“…금색 비늘… 그리고….”

“…….”

“사람을 홀리는…, 마물의 눈.”

일순 차분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해선 안 될 말을 입에 담은 것인가.

“약에 제대로 취했군.”

곧바로 평정을 되찾은 아스레인은 나를 바닥에 누이고 다급히 진을 불렀다.

“진, 당장 약초를 가져와라.”

“네!!”

그들이 나를 위해 약초를 찾는 동안, 귓가에선 어렴풋이 기계 소음이 울렸다.

- 새로운 마물이 발, 견… 새로운… 새로운… 새… 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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