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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305)

#22

나와 진은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넓적한 잎 사이로 노란 열매가 한가득 매달린 어린나무가 유독 눈에 띄었다. 방금 전까지 뭔가가 저 자리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으나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우리가 찾는 마물이 아닐 수도 있기에 섣불리 따라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매무새를 정리하는 아스레인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야생동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추적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뒤돌아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양쪽으로 나눠서 조사를 진행하는 게 좋겠네. 내가 진과 함께 갈 테니, 자네는 세잔 경과 동행하게.”

“예. 알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입구에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명은 두 갈래 길로 나누어졌다. 아스레인과 진이 소리가 난 샛길로 빠졌고, 나와 세잔은 원래 가려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저쪽에서 마물의 흔적을 발견한다면야 아스레인이 거뜬히 알아보겠지만, 이쪽은 마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 걱정이 앞섰다. 믿음직스러운 교수님께서 안 계실 때 부족한 점은 내가 채워야 한다.

“사소한 거라도 보이면 말씀해 주세요. 세잔 경.”

“네.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부탁은 했지만 사실상 나부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숲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안개는 끝을 모르고 짙어졌다. 방금 전만 해도 언덕배기까지 전부 보였는데 점점 시야가 좁아져 커다란 나무마저 흐려졌다. 자연스레 내딛는 걸음이 조심스러워졌고 속도도 거북이 기어가듯 느려졌다.

하지만 세잔은 달랐다. 마치 안개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산길을 헤쳐 나갔다. 두세 걸음 뒤에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솔직하게 부러움을 내뱉었다.

“안개가 짙고 산길은 험한데, 세잔 경은 되게 빨리 걸으시네요.”

“…! 죄송합니다. 앞서 걸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경 덕분에 안 넘어지고 있어요. 그저 척척 걷는 게 부러워서 한 말이에요.”

아. 오해가 풀린 그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산행을 한 덕분입니다.”

“저도 자주 돌아다닐 걸 그랬어요.”

맨날 앉아서 책만 읽지 말고 운동 좀 할걸. 아니, 애초에 책 속으로 들어올 때 튼튼한 장군감에 빙의되면 덧나나.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에게 빙의되면서 빈약한 몸뚱이도 함께 들고 와 버렸다. 억울한 한숨을 내쉬며 벌써 뻐근해진 종아리를 주무르려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성체가 아닌 마물이 흔적을 남긴다면, 필시 허리춤 아래 낮은 곳에 몰려 있을 것이다. 다리를 두드리다가 말고 깨달음을 얻어 바위를 짚은 채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서 있을 땐 안개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땅이 비교적 말끔히 트였다. 갑자기 나뭇잎 더미를 뒤적거리니 세잔도 함께 몸을 낮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둘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분명 사람의 발길이 오래도록 끊긴 곳일 터인데, 나뭇가지가 인위적으로 짓눌린 흔적이 있다.

“태오. 이건….”

“발자국이네요.”

누군가 밟고 지나간 것이 틀림없다. 나뭇가지가 뒤틀린 방향으로 고개를 드니 부자연스러운 모양으로 갈라진 덤불이 보였다. 살아 있는 동물이 지나간 길목이다. 게다가 그 길 위에 새싹 하나 움트지 않았으니 비교적 최근까지 오갔을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자주 다니나요?”

“아뇨. 정보를 준 약초꾼들도 그리 자주 다니진 않는다더군요.”

“잘하면… 둥지로 향하는 길을 찾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그 끝에 마물의 서식지가 존재한다면. …최악의 경우 우두머리와 마주친다면,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놓는 행위가 된다. 차마 홀로 무모한 시도를 할 수 없어 길목 입구까지만 다가갔다. 우거진 덤불 사이로 검지 한 마디만 한 털 뭉치가 보였다. 뿌리가 뻣뻣한 것이 흡사 곰의 털 같았다.

곧바로 털을 채취해 주머니에 넣고 기록을 남겼다. 사람의 힘으로도 쉽게 벌어지지 않는 덤불을 헤쳐 나갔으나 몸집은 작다. 약초꾼들의 증언과 달리 성체의 자취는 하나 없고 비교적 작은 흔적만 이어지니 더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설마 무리에서 새끼 홀로 떨어져 나간 것인가. 만약 어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체라면,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도록 구조가 시급하다.

“세잔, 아무래도 교수님을…. 세잔?”

아스레인을 부르러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세잔의 상태가 이상했다. 움직이는 물체에 신경을 모두 빼앗긴 고양이처럼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고요한 남색 눈동자가 먹잇감을 찾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숨 쉬는 것마저 방해가 될까 봐 얌전히 기다리다가 그가 눈을 깜빡인 후에야 어깨를 두드렸다.

“세잔?”

“아, 예.”

“왜 그래요?”

“…저기서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움직임이라면, 설마… 마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잔의 눈길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여긴 순간, 깊은 골목을 덮은 덤불이 흔들렸다. 우리의 주변을 배회하던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들키자마자 덤불에서 튀어나가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멀어졌다.

안개 낀 숲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세잔과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난 덤불로 다가갔다.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 나뭇잎을 헤집자 고요한 숲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드러났다. 파리지옥처럼 입을 벌리고 먹잇감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날카로운 쇳덩이.

“덫입니다.”

“…말도 안 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무성한 풀로 가려진 흙바닥에 덫이라니. 누가 봐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가. 일단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빵 한 덩이만 한 돌을 주워 덫 위에 떨어뜨렸다. 곧바로 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우악스러운 턱이 닫혔다.

딱딱한 돌마저 흠집이 날 정도였으니, 살아 있는 마물이라면 제아무리 가죽이 두꺼울지라도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흉흉한 덫의 이빨을 보니 불현듯 아스레인이 온실로 가면서 내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마물 사냥과 매매는 금지되었고, 카르사 제국과 속국에 서식하는 모든 마물은 황실의 보호하에 들어갔네. 하지만 ‘진정한’ 마물의 가치를 알게 된 자들이 아직도 암암리에 마물 사냥을 거행하지.’

우리에게 들키자마자 도망친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의 주변에서 나온 설치형 덫. 안 좋은 예감이 안개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몰라 덫이 깔린 근처 바닥을 꼼꼼히 살피는 세잔에게 단호한 투로 말했다.

“세잔. 저 사람을 따라가 줄 수 있어요?”

“…예? 그럼 당신은 어떡합니까.”

“전 괜찮아요. 이 자리에 가만히 있을게요.”

사람 냄새가 가득하고 덫까지 놓인 곳이니 감이 좋은 마물은 한동안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탓에 이번 답사에서 마물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으니 참사만큼은 막아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함께 뒤를 쫓고 싶지만, 산행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안개까지 껴서 짐만 될 것이다. 이윽고 세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쥐여 주었다.

“혹시 모르는 상황엔 지체 없이 쓰셔야 합니다. 단, 상대가 검을 들고 있다면….”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세잔은 경고를 남기고 금세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아서 그런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비롭던 숲은 한층 으슥한 분위기를 풍겼다. 덫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단검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이따금씩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날 때면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신경이 날카로워진 와중에도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분명 덫은 이곳에만 설치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밀렵꾼이 설치한 덫에 누군가 걸리기라도 한다면…. 저절로 그려지는 끔찍한 상상을 멈추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긴장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떨리는 숨을 내쉬자 또다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공기의 흐름을 따라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가 귓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어… 하….”

유독 낮은 목소리다. 세잔이나 아스레인일 수도 있으나 방향이 전혀 달랐다. 무의식중에 일어나려다가 마음을 다잡으려 단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안 된다. 똑같은 말을 몇 번씩 되새기며 충동을 다스렸다. 조금씩 잦아드는 심장 박동과 함께 말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던 그 순간이었다.

끼에엑-! 비명에 가까운 마물의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때부터 무슨 생각으로 달리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뭇가지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거나 돌부리에 걸려 발이 삐어도 오직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갈 뿐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탕! 금속이 둔탁한 것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 근처에서 난 소리다. 턱까지 올라온 호흡을 억지로 누르려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후 나무 뒤에 바짝 숨어서 조용히 너머의 상황을 확인했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검을 든 실루엣이 우거진 수풀을 경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불길한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칼끝이 향하는 곳에 무언가 숨은 모양이다. 다행히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조금 더 목을 빼니 철갑옷으로 무장한 남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하필이면 얼굴이 자욱한 안개로 가려져 정체를 특정 지을 수도 없었다. 최소한 인상착의라도 보기 위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그래. 모습을 드러내야지!”

날카로운 발톱이 바위를 갉아 내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귓바퀴를 스쳤다. 착각이라 생각했으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바스락. 툭… 투둑. 엷은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공기가 어깨를 무겁게 눌러 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야생동물이 아니다. 새빨간 눈을 가진 검은 토끼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위압감과 상당히 유사했다.

마물이다. 무언가에 가려져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마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놈은 호기롭게 웃으며 날카로운 검을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마물을 위협했다. 칼날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거대한 마물이었다면 일말의 두려움이라도 내비쳤을 텐데, 생각보다 작은 모양이다. 어쩌면 예상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새끼일지도 모른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으나 애매하게 바위에 가려져 생김새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 너라도 잡으면 날 인정해 주시겠지….”

걸걸한 웃음소리는 서서히 광기로 물들었다. ‘인정받는다’라. 단독 행동이 아니라 상부가 존재하는 조직으로 움직이는 걸까. 조금 더 정보를 얻고 싶었으나, 지금이라도 놈을 말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손에 든 단검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잔이 떠나기 전 신신당부했다. 검을 든 상대라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그의 말대로 비실거리는 내가 검을 든 장정을 제압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훨씬 위험하지만, 보다 확실하다.

“…후우.”

조용히 숨을 내쉬며 단검 대신 주머니에 넣어 둔 약병을 꺼냈다. 아스레인이 준 약물이 손바닥 안에서 찰랑거렸다. 이 회색빛 액체를 공기 중에 풀면 환각이 보인댔다. 비록 마물을 제압하는 용도로 받은 것이지만-

“하압-!”

약을 마물한테만 쓰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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