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21/305)

#21

바야흐로 그날이 찾아왔다. 현지 관찰!

안겔루스 대학에 들어온 후, 야생에서 마물을 만날 수 있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비록 아멜리 백작에게 방해를 받았지만 아스레인의 도움으로 무탈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설렘과 긴장을 품에 안고 커다란 가방 안을 다시금 확인했다. 갈아입을 옷, 상비약으로 쓸 약초, 메모지와 잉크를 넣어 둔 펜. 이 정도면 됐다. 연구 기간 내내 숲 근처 마을 여관에서 지낸다고 하니 나머지는 그곳에서 충당하면 된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어깨에 짐 가방을 들쳐 메고 서둘러 연구실로 향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줄 알았건만, 부지런한 그들은 이미 연구실 앞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후였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활기찬 아침에 걸맞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무거운 짐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니 세잔과 진이 자못 놀란 기색을 보였다. 연구실 문단속을 하던 아스레인이 한 박자 늦게 내 짐을 확인하곤 말했다.

“한 일주일 떠나는 사람 같구나.”

“하핫,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동감하네. 나도 자네가 무슨 일에 휘말릴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니 준비하는 게 좋겠어.”

…걱정이겠지? 왠지 특별 감시가 필요한 학생으로 낙인찍힌 것 같다. 묘한 기분을 끌어안고 샛길을 따라 학교 정문으로 나가니 말 두 필과 큰 마차 한 대가 보였다. 그게 아멜리 백작령으로 가기 위한 교통수단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마차를 보니 처음 안겔루스 대학에 온 기억이 스멀스멀 깨어나 설렘이 한순간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사색이 되어 마차를 가리키자 아스레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좋겠나.”

“말이랑 마차 중에서요?”

“그래.”

승마는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그럼 자동적으로 마차를 타야 하는 건가? 낙마와 멀미 중 어떤 것이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을까. 심각한 고민을 하는 사이 곁에 다가온 세잔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말이라면 저와 함께 타도 괜찮습니다.”

“예? 어후, 아니에요. 죄송해서 어떻게 그래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짧은 거리도 아닌 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꿎은 말의 목을 바짝 끌어안은 채 꼴사납게 엎드려 있는 것보다는, 마차 안에서 하얗게 질리는 편이 백배 낫다.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세잔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능숙하게 말에 올라타는 진과 세잔을 보며 내심 부러움을 삼켰다. 그래도 마차를 한 번 타 봤으니까 조금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적응이 뛰어난 내게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마차가 멈추자마자 도망치듯 뛰어내렸다.

“우웁…!”

“태오 님! 괜찮아요?”

“…괘, 괜찮….”

전혀 괜찮지 않다. 초반엔 나름 여행 가는 것처럼 즐거웠는데, 자갈이 많은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언덕 중턱에서 ‘힘들면 마차를 멈춰 주겠다’는 아스레인의 배려를 거절한 죗값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나무에 기대어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하려 바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상비약이 아닌, 잠 오는 약초를 챙길 걸 그랬다.

“그러니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교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진 정말 괜찮았거든요….”

“왜 고집을 부리는지 도통 모르겠어.”

머리 위로 깊은 한숨이 끊이지 않고 내려앉았다. 걱정이 가득한 진은 천천히 등을 토닥여 주었고, 세잔은 시원한 물이 담긴 나무통을 건넸다. 나무 그늘 아래서 물을 마시니 메슥거리는 속이 한결 진정되었다. 벌써 반쪽이 된 뺨을 어루만지며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힘없이 손을 휘적거렸다.

“하아….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아진 거 같아요.”

“그럼 태오는 잠시 여기서 쉬어요. 짐은 제가 내릴게요.”

“아니, 제가 가도 되는….”

“저희에게 맡기시죠. 그러다 첫날부터 몸져눕습니다.”

진의 단호한 태도와 세잔의 무서운 예언이 날카롭게 꽂혔다. 심지어 아스레인은 내 변명을 듣지도 않고 마차로 걸어간 후였다. 내가 할 일이라곤 건강한 컨디션을 되찾는 것뿐이었다. 결국 얌전히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망할. 현지 연구에 나와서 최소한 민폐는 끼치지 않으려 했는데… 참으로 멋진 시작이다. 아스레인을 불편한 것 하나 없이 제대로 보필하여 유능함을 어필하려고 했던 계획이 벌써 무산되었다.

아멜리 백작이 호위 기사를 보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나를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기사단장이 멀미로 몸져누운 꼴을 보았더라면 하늘이 떠나가라 비웃었을 것이다.

속이 아직 멀쩡해지진 않았지만, 마냥 앉아 있는 것이 미안해서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대신해서 짐을 정리해 준 그들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두툼한 가방을 챙겼다. 막 출발할 준비를 마치자 아스레인이 나무 그늘 아래 서서 말했다.

“지금부터 들어갈 비브린트 숲에서 마물의 흔적은 발견되었으나, 약초꾼들이 지나가다가 본 것이 전부이네. 그들은 ‘흙 위에 남은 발자국 크기가 제각각이며 두꺼운 나무껍질이 움푹 파여 있다’고 묘사했지. 따라서 마물은 하나가 아니라 무리일 가능성이 크고, 꽤 높은 위험군에 속할 걸세.”

발자국 크기가 다양한 것도 모자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마물이라. 만약 어미와 새끼들로 이루어진 무리라면,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섣불리 신경을 거슬렸다가는 저항해 볼 새도 없이 등을 꿰뚫릴 것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새로운 마물을 만날 거란 설렘이 뒤섞여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게다가 비브린트 숲은 항상 안개가 짙어 길을 잃기가 쉽지. 모쪼록 단독 행동은 삼가게나.”

엄숙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품 안에서 네 개의 병을 꺼내었다. 회색빛 액체가 담긴 병은 한 손에 들어오는 안약통처럼 아담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병을 나눠 준 그는 엄지와 검지로 병을 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약물을 항상 지니고 다녀라.”

“이게 뭐죠?”

“일시적으로 환각을 보게 하는 약이네. 우리의 목적은 마물을 관찰하는 것이지, 그들을 해치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조심한다 해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지.”

인간은 쉬이 구별할 수 없는 마물의 영역에 발을 들이거나, 의도치 않게 거슬리는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아스레인의 설명에 깊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물약 입구를 단단히 막은 마개를 건드리며 말했다.

“만약 마물이 공격할 낌새를 보이면 이 약물을 쓰도록 해라. 단, 반드시 숨을 참고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해. 함께 환각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빠르게 공기 중에 흩어져 환각을 일으키는 물약이라…. 최후의 최후에 맞닥뜨렸을 때 써야 하기에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부디 사흘간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 물약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안개로 뒤덮인 숲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조용히 다가온 아스레인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태오.”

“예.”

“이제부터 자네가 할 일을 알고 있겠지.”

“마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아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어느 순간이 와도 손을 멈추지 말게.”

“…어느 순간…이라도?”

“설령 눈앞에서 동료가 다쳐도, 자네의 의무는 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것임을 명심하게나.”

괜스레 나쁜 예감이 드는 경고였다. 설령 눈앞에서 동료가 다치더라도, 손에 쥔 펜과 메모지를 놓아서는 안 된다. 애초에 <저주란 축복>의 주인공 아이리스처럼 마물과 대화할 수도 없는 내가 위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밖에 없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세잔이 동행한 거겠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진은 비브린트 숲에 있는 약초를 연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만, 어디까지나 협력임을 잊지 마라.”

“당연합니다. 교수님. 약초에 눈이 멀어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스레인이 세잔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펜과 메모지를 찾았다. 열심히 가방 안을 뒤적거리던 그때 등 뒤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응?”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름 모를 나무만 듬성듬성 놓였다. 혹시 몰라 몸을 숨기기에 충분한 바위까지 걸어가 확인했다. 하지만 바위 뒤에 흔적도 없었을뿐더러 벌써부터 숲을 휘감은 안개가 시야를 방해했다. 펜을 들고 나무와 바위 주변을 기웃거리자 어느새 진이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감각이 예민해진 걸지도 모른다. 가볍게 웃어넘기며 펜과 메모지를 한 손에 들고 가방을 챙겼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이끄는 답사 조는 천천히 비브린트 숲으로 입성했다.

발길이 끊긴 숲은 자연이 뿌리내린 모습 그대로를 지켰다. 이끼는 바닥에서부터 껍질을 타고 올라가 커다란 나무를 좀먹었고, 날벌레는 떼를 지어 햇빛을 향해 날아다녔다.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당장 무언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왔다. 마치 물먹은 솜처럼 점점 몸이 무거워졌다.

“발밑을 조심하게.”

울퉁불퉁한 돌부리마저 이끼가 뻗은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혹여 미끄러질까 봐 발에 힘을 주고 걸으니 마물의 흔적을 구경할 틈이 없었고, 또 주위를 둘러보자니 금방 발을 헛디뎌 넘어질 것 같았다.

결국 몇 걸음 옮길 때마다 주변 환경을 꼼꼼히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산행이 익숙한 남들보다 조금씩 뒤처지던 찰나, 앞서 걸어가며 길을 만들어 주던 세잔의 발치에서 무언가 발견했다.

“잠깐만요. 세잔 경.”

“예?”

“거기….”

급히 세잔을 불러 세우며 발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가장 먼저 몸을 낮춘 것은 아스레인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재빨리 장갑을 벗어 고아한 손가락으로 나뭇잎을 치웠다.

그 아래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발자국이었다. 간밤에 비가 내려 축축해진 흙바닥에 갓 찍힌 자국은 두툼한 표피 주름이 드러날 정도로 선명했다.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국을 손바닥 크기와 비교해 보았다.

“별로 크지 않네요…?”

“성체는 아닌 것 같군. 게다가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야.”

“…운만 좋으면, 더 시간 끌 것도 없이 오늘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그래. 괜히 자극했다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 큰 소리를 내지 말도록 하게.”

“예. 교수님.”

이럴 때 카메라가 없는 것이 아쉽다. 최대한 발자국 크기를 사실과 비슷하게 기록하기 위해 메모지 위로 그림을 그렸다. 모양만 보면 호랑이와 비슷한데, 크기를 따지면 오소리나 수달 같았다. 또한 땅이 그리 깊게 파이지 않은 걸 봐선 무게도 가벼울 것이다. 발자국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을 간단히 메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저도 들었어요.”

수풀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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