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20/305)

#20

그들이 괜한 추측을 하기 전에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어쩔 수 없이 세잔을 데리고 먼 길을 돌아 도서관 뒤쪽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왔다.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세잔은 아직도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나 평민이 감히 귀족을 뒷골목으로 데려가서 뭘 할 수 있겠는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세잔 경.”

“예.”

세잔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조금도 없는데.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짜고짜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세잔은 얼떨결에 함께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왜 이러십니까.”

“일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예?”

“전 세잔 경과 달리 평민입니다. 지금은 아스레인 교수님 덕분에 황송하게도 안겔루스 대학에 들어왔지만, 그전에는 하인이었습니다. 저명한 피아트 후작 가문의 귀한 자제분을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제 부주의 때문에 생긴 불상사입니다.”

하인으로 일할 때 백작의 심기가 불편하면 무엇이 억울하든 일단 자신의 잘못이라 말하며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 덕분에 무릎을 꿇는 것쯤은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마치 미리 사과문을 적어 놓은 것처럼 막힘없이 말하자 세잔은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얌전히 반응을 기다리니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일어나시죠.”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애초에 용서랄 것도 없습니다.”

세잔은 나를 일으켜 세워 주기 위해 친절히 손을 뻗었지만,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며 무릎 꿇은 자세를 고수했다. 그에게 확답을 듣고도 불안한 걸 보니 백작가에서 지낸 한 달이 꽤나 뼈에 사무친 모양이다.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준 그에게 미안하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고 싶었다.

“그럼 염치없지만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그때 약초밭에서부터 온실까지의 일을 없었던 걸로 해 주세요. 세잔 경과 저는 답사에서 처음 만난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제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처음부터 그가 귀족인 걸 알았더라면 호형호제하자는 터무니 없는 제안도 하지 않았겠지. 세잔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이번 일로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거에 비하면 약한 부탁이니 세잔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건 싫습니다.”

“네?”

“혹 신분 때문에 그런 겁니까?”

굳이 고개를 끄덕이지도, 손을 내젓지도 않았다. 이유 있는 침묵은 긍정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던 세잔은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후작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물론 알아요. 하지만 그분의 자제가 세잔 경이시죠.”

“비록 아버지 때문에 대부분 저를 세잔 경이라 부르지만, 가문을 제외하면 결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스레인이 세잔을 ‘경’이라 칭할 때 어렴풋이 대단한 집안임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오로지 실력이 중요한 이 학교에서만큼은 저 또한 가문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이해해요.”

“같은 것을 보고 배우는 학생인데도 신분이 다르단 이유로 멀어진다는 사실이 우습지 않습니까.”

계급 사회에서 보기 힘든 사상이었다. 그 점은 훌륭하다며 마땅히 박수를 받아야겠지만, 입장 차이를 생각해 달란 말이다. 초가집에 사는 평민은 혹여 그들이 산들바람이라 부르는 태풍에 휘말릴까 봐 미리 대피하는 거다.

“그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모두가 세잔 경 같을까요?”

답은 아무도 모른다. 세잔이 여느 귀족과 달리 열린 마음을 갖고 있을지라도, 방금 전 그를 둘러싼 무리 또한 세잔과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어떤 보복이 돌아올 수도, 오히려 세잔이 나 때문에 괜한 소문에 휘말릴 수도 있다.

아멜리 백작만 해도 그랬다. 하인들은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황제의 측근인 아스레인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지 않았나. 난 더 이상 귀족으로 인해 억울하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싶지 않다. 여러모로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세잔 경. 저는….”

“형.”

“우왁.”

“…예?”

“아니, 아니에요.”

예고도 없이 불쑥 형이라 부르니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갔다. 귀가 축 처진 도베르만 같은 표정을 지어도 소용없다. 마물로 인해 고생할지언정, 오직 마물한테만 스트레스 받기로 한정 지었단 말이다. 두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이며 거리를 두었다.

“저를 편하게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간절함을 담아 얘기하니 움찔거리던 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남색 눈동자를 정면에서 마주하니 괜히 죄책감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이제 이 담화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다가오던 그때, 세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담을 드려 죄송합니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혼자 들떠 버렸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체념한 낯빛을 보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게 방금 전까지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나를 반가워하던 사람을 쳐 내는 일이라면 더더욱. 죄책감으로 인해 이쯤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는 그때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안 볼 때는 편히 얘기해도 괜찮습니까?”

“…예?”

“대학 밖이라면 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아니, 세잔 경.”

왜 이러세요. 나한테는 뜯어먹을 마력도, 지식도, 돈도, 가문도, 명예도 없는데 왜 ‘친구 사이’에 집착하느냔 말이다. 적당히 평범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심보인가? 이 학교에 친구가 나밖에 없는 사람처럼 군다. 세잔은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미소를 지었으나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떨렸다. 이대로 집에 돌려보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소리 죽여 울 것만 같았다.

“그것마저 불편하시다면….”

불행하게도 난 이런 사람에게 상당히 약하다.

“아, 알았어요.”

“예?”

“친구 해요. 우리.”

“……! 정말입니까?”

줄곧 기운 없던 얼굴에 순간 생기가 돌았다. 금방이라도 버섯이 자랄 것 같은 음습함은 사라지고, 막 봄을 맞이한 꽃이 하나둘씩 피어오르는 착각이 일었다. 금세 기운을 찾은 그를 향해 급히 조건을 걸었다.

“단, 세잔 경의 말씀대로 부디 둘이 있을 때만 편하게 대해 주세요.”

“예. 좋습니다.”

세잔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자마자 친구를 사귄 아이처럼 기뻐하는데, 내가 무어라 말을 얹을 수 있을까. 피아트 후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내 잘못도 크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 두고 좋은 친구가 생겼음에 기뻐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이번에야말로 세잔이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나려는데, 등 뒤에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순식간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팔짱을 끼고 선 아스레인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나.”

“…교수님!”

“하도 안 오기에 도서관에서 길을 잃었나 싶었는데….”

앞뒤 잴 것 없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로 더러워진 무릎을 툭툭 털었다. 이 옷도 아스레인이 사 주신 옷인데, 너무 막 쓰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치를 살피자 날카로운 눈매가 그새 가늘어졌다.

“이런 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가 대체 뭔가.”

“그게… 그럴 만한 일이….”

약초밭에서 사라세니아를 생으로 먹으려던 청년을 구해다가 약도 지어 주고, 의도치 않게 위로도 해 줬는데… 알고 보니 후작가의 자제였습니다! 라고 어떻게 말하란 말인가. 지금 막 좋게 해결되려던 차에 들켜 입지만 이상해져 버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며 세잔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러자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다가와 나와 세잔 사이로 가볍게 끼어들었다.

“이자가 자넬 불편하게 했나?”

그 후 아스레인은 자연스럽게 나를 세잔에게서 떨어뜨리며 너른 등 뒤로 숨겨 주었다. 일련의 행동이 마치 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릎 꿇고 있는 모습만 보고 단단히 오해를 산 모양이다. 당황한 나와 달리 비교적 차분한 세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뇨. 제 고집이 불러일으킨 일입니다. 형… 아니, 태오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태오?”

언행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가지런한 눈썹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아는 사이였나.”

나긋한 목소리 안에서 묘한 위압감을 느꼈다면, 착각이겠지. 무거운 침묵이 맴도는 골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섣불리 분위기를 환기하려 입을 열었다가는 오히려 역풍만 불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는 사이 아스레인이 먼저 팽팽한 줄을 끊었다.

“뭐…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사정이야 아무렴 좋네.”

정말… 좋은 거죠? 지금 당신의 표정은 뭐 하나 잘못 건드리면 곧바로 터질 폭풍전야이신 걸요.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길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내게 한 번 닿았다가 떨어진 눈길이 곧 세잔의 얼굴에 꽂혔다.

“다만 내 제자를 그리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하네.”

가늘게 뜬 눈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경고를 담았다. 어느 틈에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눈치만 살피다가 이름이 불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태오.”

“예, 예?”

“이제 둘 사이에 있는 일은 정리된 건가?”

“아… 넵! 교수님.”

“그럼 그만 돌아가지.”

그 말을 끝으로 아스레인은 걸음을 돌렸다. 서둘러 그를 따라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니 세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갑작스런 아스레인의 등장에 나 못지않게 당황한 듯 영혼까지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알아서 잘 말하겠다는 의미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세잔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때 앞서 걸어가던 아스레인이 물었다.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 맞나.”

“네. 맞습니다. 세잔 경과는 오해가 있었을 뿐이에요. 오히려 세잔 경이 사과를 해 주셨고요.”

잰걸음으로 그의 옆에 나란히 서니 차분한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자 흙먼지로 더러워진 무릎이 보였다. 손으로 아무리 털어도 자국이 남아 어찌할 줄을 모르니 아스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 데서나 무릎 꿇지 말게.”

“그… 죄송합니다. 교수님.”

학교 안에 눈이 많으니 특별히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명한 세잔이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스레인과 함께 있으니 더더욱 내 처신을 신경써야 했다. 깊이 반성하며 입술을 꾹 다물자 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예? 그럼….”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아스레인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너무 낮추지 말라는 말이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