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305)

#19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단순한 자기소개죠. 참고로 저는 25살이에요.”

“생각보다… 많으시군요.”

25세가 많은 건가? 이쪽에서는 16세에 성인식을 치른다고 했으니 많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동안이라 칭찬 들은 거라 생각하기로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반응을 보니 제가 연상인가 보네요.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요.”

“…형…?”

전생에선 늘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는 호칭을 정리했다.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주인공 아이리스를 ‘형’이라 부르던 이들이 있었나? …없었지. 있어도 혈연 정도는 되어야 형님, 아우하며 거리낌 없이 불렀었다. 뒤늦게 실수했단 사실을 깨닫고 두 손을 세차게 저었다.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 정말 안 그래도 돼요….”

하지만 그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형. 혀-엉. 호칭이 어색한지 그는 몇 번 ‘형’이란 단어를 중얼거렸다. 단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느낌이 묘하게 어색해서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입을 살짝 가리고 가벼운 웃음을 흘리니 그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너무 대놓고 웃었나 보다. 미안한 마음에 작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 이런.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마물학을 공부 중인 태오라고 해요.”

선뜻 악수를 권하자 그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저는 세잔이라고 합니다.”

잠깐. 세잔?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손을 맞잡은 채 연산 컴퓨터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아스레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현지 연구에 참여할 이는 나와 진, 호위를 맡은 세잔 경.’

그래. 세잔 경!

“그러니 태오…. 아니, 형은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게 당신이었어…?

***

대체 왜 그랬을까? 감옥 같은 대학원에서 지내다 보니 사람이 그리워져서 그런가. 우연히 약초밭에서 만난 청년이 답사에 함께할 세잔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몇 번씩 만감이 교차했다.

밤새 이불을 뻥뻥 차다가 퀭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하며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 세상에 세잔이라는 사람이 한 명만은 아닐 것이다. 나만 해도 흔치 않은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교양 수업에서 동명이인을 본 적 있는 걸.

마침 진과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어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물었다.

“있잖아요. 저희 현지 연구에서 호위해 주신다는 분 말이에요.”

“아, 세잔 경이요?”

“네. 혹시 안겔루스 대학에 다니세요?”

제발. 어제 우연히 만난 세잔이 아니길 바랐다. 간절하게 두 손을 꼭 모으고 떠오르는 모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신은 내 편이 아니라는 걸, 한 번 더 확신했다.

“그럼요. 마법학과 학생이신 걸요.”

“…아.”

“마법을 공부 중이시만, 정작 특기는 검술이세요. 검술 실력을 놓고 보면 안겔루스 대학 수석이라던데.”

“…대단한 분이시네요….”

“그렇죠? 사실 세잔 경이 동행하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기사단의 호위 따윈 필요 없었어요.”

진이 세잔에 대해 설명해 준 덕분에 깔끔하게 체념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솔직히 형 동생 하면 좋잖아? 안면 튼 사람끼리 함께 답사에 가서 연구하면 확실히 편하지. 안 그래도 친한 사람이라곤 진밖에 없었는데 잘됐다. 밥을 먹다 말고 가슴께를 다독이니 진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 말 없이 웃어 줄 뿐이었다.

점심 식사 후, 아스레인은 수업을 하러 가면서 내게 책 반납을 부탁했다. 소화도 시킬 겸 책 여섯 권을 품에 안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복잡한 본관으로 통하는 길을 피하겠지만, 여섯 권이나 되는 책이 꽤나 무거워 어쩔 수 없이 지름길을 택했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막 강의가 끝난 학생들이 바쁘게 복도를 돌아다녔다. 안겔루스 대학에 온 후로 항상 연구실과 온실만 오고 간 탓에 무수한 인파 사이를 거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어느 세계나 대학원생보다 대학생들이 활기찬 것은 불변의 법칙이었다.

혹여 책을 들고 가다가 누군가를 치진 않을까 걱정되어 복도 구석에 딱 붙어 걸어갔다. 본관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까진 좋다만, 막상 계단을 내려가자니 발아래가 보이지 않아 위태롭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시야에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왔다. 능숙하게 다섯 권의 책을 가져간 손을 따라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세잔…!”

“뒷모습을 보고 혹시나 했습니다.”

각 잡힌 셔츠에 남색 조끼를 받쳐 입은 세잔은 어제와 달리 곱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덕분에 한결 편하게 책 한 권만 안은 채로 계단을 내려왔다. 다시 책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아, 도서관이요. 교수님께서 책 반납을 부탁하셨거든요.”

세잔은 행선지를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도서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같이 가 주겠다는 건가? 아스레인과 다른 의미로 생각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다. 서둘러 뒤를 쫓아가니 책 표지를 훑어보던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스레인 교수님이군요.”

“어…. 알고 계셨어요?”

“어제 이름을 곱씹다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하하, 저도 같이 답사를 가게 되는 분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어라.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흘러간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민망한 사람은 나뿐인가 보다. 오히려 세잔은 나를 다시 만난 것이 반가운 기색이었다. 옆모습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지만, 머리카락에 덮인 귀 끝이 살짝 붉어 눈치챘다.

“마법뿐만 아니라 검술까지 능하시다고 들었어요.”

“주로 검을 다루긴 합니다.”

“대단해요. 나중에 검술도 보여 줄 수 있어요?”

“…그리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닙니다.”

“에이, 거짓말~ 이미 수석급 실력이라고 들었거든요.”

“…그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돌아보기에 저절로 짓궂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여 주기로 한 거예요. 알았죠? 세잔.”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보여 드리죠.”

지금 당장 보여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비장해진 세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관계에 서툰 새내기를 보는 것 같아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느새 도서관에 도착해 그에게 책을 넘겨받으며 말했다.

“도서관까지 옮겨 줘서 고마워요. 세잔.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도울 수 있어 기뻤습니다.”

아아, 역시 어제 친해지길 잘했다. 걱정이 눈 녹듯 사라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아스레인 이름으로 책을 반납하고도 시간이 남아 느긋하게 신작 코너를 구경했다. 한참 후에 새로운 책 한 권을 빌려 도서관 밖으로 나왔는데, 세잔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자가 아니었다.

“…음?”

세잔과 비슷한 체격을 가진 장정 다섯 명이 그를 빙 둘러쌌다. 세잔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뚝뚝했지만, 눈에 띄게 안색이 좋지 못했다. 혹여 안 좋은 일에 휘말린 건가 싶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워낙 목소리가 큰 덕분에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목소리가 전부 들렸다.

“세잔 님! 이번에 들었습니다. 아버지이신 피아트 후작 각하께서 또 훈장을 받으셨다고요.”

“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명문인 피아트 가문이니 당연하죠!”

“하하. 축하드립니다!”

잔뜩 상기된 표정을 한 장정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훈장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물론 세잔의 아버지가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제가 이번에 파티를 여는데, 세잔 경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똑똑히 들었다. 피아트 후작 각하. 그들은 세잔의 아버지를 후작이라 불렀다. 심지어 세잔의 풀 네임은 ‘피아트 반 세잔’이란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새로운 정보 하나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

귀족이셨구나…. 그것도 심지어 후작의 자제였구나…. 나는 망했구나…. 오등작이 건재한 카르사 제국에서 후작은 공작 바로 아래 작위였다. 내 생애 만난 귀족 중 최고는 백작이었는데, 그보다 높은 후작가 자제에게 ‘형으로 불러라’라는 망언을 해 버렸다. 왜 그가 귀족일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머릿속에 비상 사이렌이 정신없이 울려 툭 벌어진 입 밖으로는 같은 말만 새어 나갔다.

“…도망… 도망가자.”

그 순간이었다. 원치 않는 관심을 받아 퍽 곤란해 보이는 남색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냉랭한 얼굴이 순식간에 꽃밭이 되는 바람에 무리까지 전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일단 시선을 샀으니 웃기는 한다만,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쉴 새 없이 움찔거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으나 세잔은 멈추지 않았다.

“태오.”

심지어 이름을 부르며 무리를 두고 내게 다가왔다. 아, 아직 무슨 변명을 할지 생각 못 했단 말이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으나 발이 계단에 걸려 더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사이 세잔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단숨에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책을 같이 들고 와 놓고 마치 1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하니 어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

“책은 무사히 반납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그럼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라면 지금 같이….”

“예? 아뇨? 먹었어요. 하하, 전 괜찮으니 모쪼록 저분들이랑 하던 얘기 하세요.”

하지만 지금은 뱉어야 한다. 자리 안내를 맡은 종업원처럼 두 손으로 공손히 무리를 가리키며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벽을 세우니 세잔은 이내 이상함을 눈치챘다.

“형?”

“그, 그 호칭은 괜찮아요.”

“저번엔 그리 부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문제가 아니라….”

상체를 살짝 기울이자 저 멀리 이곳을 응시하는 무리가 보였다. 심지어 그들끼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어라 수군거리기 시작해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자꾸만 시선이 신경 쓰여 연신 어깨 너머를 흘겨보니 세잔이 앞길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시야가 갑자기 단단한 가슴팍으로 들어차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세잔은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퍽 애처롭게 말했다.

“제가 뭔가 잘못했다면 말씀해 주세요. 고치겠습니다.”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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