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급한 나머지 너무 많은 설명을 생략해 버렸다.
“…예?”
“아니, 죽진 않는데…. 너무 써서 죽을지도 몰라요.”
몇 번씩 강조하니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청년은 사라세니아를 한 번, 그리고 나를 한 번 흘겨보았다. 차가운 남색 눈동자 속에서 불신이 한가득 느껴졌다. 그래. 나 같아도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멀쩡한 약초 먹으면 죽는다고 말하면 오해부터 할 것이다. 하지만 지옥임을 알고 맛보는 것과 모르는 채 용광로로 뛰어드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사라세니아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그럼 제 말을 듣는 쪽이 신상에 이로울 거예요.”
퍽 불량배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진지한 태도 덕분일까. 청년은 사라세니아를 슬그머니 내리며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 이걸 먹어야 합니다.”
“그럼… 제가 약으로 제조해 드릴게요.”
“약초학과이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교수님께서 만드는 걸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어요.”
사라세니아를 생으로 먹느니 정량으로 계량해서 약물을 만들어 주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손에 들린 사라세니아를 뺏어서 말없이 온실로 향했다. 혼자 만들어서 갖다주려고 했는데, 어느새 그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젠 기숙사만큼 익숙해진 온실로 들어가 예전에 아스레인과 함께 갔던 조제실 문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문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선 그를 두고 제조대 앞으로 총총 걸어갔다. 두충나무 껍질을 달여서 만든 약물에 말린 아티초크와 사라세니아 꽃가루를 넣으면 된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사라세니아를 날것 그대로 먹는 것이 제일 좋다지만… 그건 청년에게 할 짓이 못 된다. 대신 꽃가루가 아닌 꽃잎을 직접 빻아 넣어 효과를 높이기로 했다.
그날을 떠올리며 서랍에서 약초를 꺼내어 순서대로 척척 만들어 나갔다. 게다가 쓴맛을 중화하려 약물에 아카시아 꿀을 넣고 라벤더 향기를 가뒀다. 처음 시도해 보는 레시피지만, 세 가지를 함께 복용해도 된다는 사실을 책으로 확인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약물을 달이는 동안 할 일이 없어 먼저 침묵을 깼다.
“학생이세요?”
“예. 마법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와!! 마법이요?!”
마법학 전공이란 소리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았다. 문에 기대어 있던 그가 흠칫 놀라 팔짱을 풀었다. 지옥으로 가는 걸 말리느라 급급해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었는데, 정면에서 보니 제법 훈훈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짧아서 그런가. 유독 표정 변화가 쉽게 드러났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니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마력이 부족하여 마법을 잘하진 못합니다.”
“아~ 그래서 사라세니아를 먹으려고 하신 거구나.”
깊이 공감하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는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 자체가 마법학계의 수치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 아니, 저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럼….”
“실은 저도 마법을 쓰고 싶었는데, 마력이 너무 희박해서 교수님께 한 소리 들었거든요.”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너무도 신랄한 조롱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하듯 흘렸다.
“마법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런 희박한 마력으로 뭘 하겠냐고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을 직접 들은 사람은 나인데, 어째 그가 나보다 몇 배는 상처 입은 것 같다. 급격히 침울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려 곧바로 유리잔에 달인 약물을 따랐다.
“자자, 마셔 봐요.”
이상한 냄새가 맴돌던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맛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일단 라벤더 향기와 달콤한 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물론 색깔은 한층 더 이상해졌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유리잔을 건네며 그가 마시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걸쭉한 액체를 입에 대자마자 참지 못하고 평을 물었다.
“어때요? 마실 만해요?”
“조금 쓰지만… 괜찮습니다. 뭘 넣으신 겁니까?”
“기본 제조 방법에 아카시아 꿀이랑 라벤더를 조금 넣었어요.”
“솜씨가 좋으시군요.”
칭찬을 들으니 한껏 기분이 좋아져 냉큼 레시피를 써서 그에게 건넸다. 별것 아닌 메모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중요한 서신을 받은 장군처럼 비장하게 챙겼다. 그러곤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 보답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기계처럼 딱딱한 그에게 일부러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럼 보여 주세요.”
“뭘 말입니까?”
“당연히 마법이죠. 아, 물론 여기서 해도 될 만한 걸로요.”
“마법…을….”
처음으로 마법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뮤지컬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선점한 관객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두 눈을 빛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메모지를 뜯어 깃펜으로 무언가를 써내려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손바닥만 한 종이 위로 복잡한 글자가 가득 찼다. 그게 마법을 위한 절차라는 걸 알아챈 찰나, 유리잔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우오아….”
마술처럼 트릭도 없이 잔을 띄우다니. 이거야말로 과학에 대한 진정한 배신 아닌가. 바보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유리잔을 사방에서 둘러보았다. 연신 감탄만 흘리니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어쩐지 어설픈 모습이 반가워서 거리낌 없이 글자가 가득한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걸로 마법을 쓰는 건가요?”
“예. 이런 식으로 기도문을 종이에 적거나 직접 입으로 외우면 됩니다. 마력이 부족한 저는 모든 것을 암기해야 하지만, 마력이 풍족하다면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짧은 명령이면 충분합니다.”
“우와, 되게 복잡하네요.”
그럼 나는 테이블만 한 종이에 기도문을 빼곡히 써야 컵을 겨우 띄울 수 있는 거 아닌가 몰라. 마음껏 상상을 펼치는 사이, 그가 갑자기 종이를 구기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억지로 마법을 쓰려는 대가니까요.”
한껏 어두워진 낯을 보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비꼬려는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 단순한 감탄사였건만 오해를 사 버렸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 자격지심이 꽤 심한 것 같다. 특히 마법에 관한 거라면 더욱 자존감이 바닥을 보였다. 분명 그의 집안이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 왠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안쓰러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고 진솔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죠.”
“예?”
“전 한 번도 컵을 공중에 띄우겠단 생각은 못 해 봤거든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그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마력이 희박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바로 포기해 버렸거든요.”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니까. 어떻게든 가능성을 높여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발상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그쪽은 달라요. 불리한 걸 알고도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
“덕분에 저는 귀한 걸 봤어요. 억지로 마법을 쓰려는 대가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껏 빚어 온 노력의 결실을요.”
힘줄이 돋은 손에서 구겨진 종이를 부드럽게 빼 책상 위에 반듯하게 펴 놓았다. 막힘없이 써내려 간 기도문은 다시 봐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나도 예전 지도 교수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책 한 권을 통으로 외워 간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수고했단 말 한마디는 듣지 못했다.
“더러는 쓸데없는 고생이라고 하겠죠. 하지만 신경 쓰지 마요.”
그래서 더욱 섬세하게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깎아내리는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틋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과거를 회상하다가 당시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을 읊조렸다.
“당신은 충분히 노력했어요. 그 자체로 박수받아 마땅해요.”
나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방 안에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그를 등진 채 책상을 짚고 있어 안색을 살피기 어려웠다. 너무 오지랖을 떨었나. 구김이 남은 종이를 말없이 어루만지다가 슬그머니 몸을 돌리곤 고개를 숙였다.
“부담스러웠으면 미안해요. 실은 마법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라 엄청 신기했거든요.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제 어떻게 분위기를 되살리면 좋으려나. 차라리 내가 먼저 온실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찰나, 잔떨림을 머금은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껏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과 마주쳤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저 남색 눈동자가 깊은 심해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한 바다에 드디어 작은 물결이 일었다.
“그런데 그리 말씀해 주시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무뚝뚝한 입매가 부드럽게 휘더니 두 뺨이 보기 좋게 상기되었다. 한결 자연스러워진 표정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괜한 오지랖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 아닙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서 조금 당황했을 뿐입니다.”
황급히 수습하는 모습이 어째 우직한 겉모습과 달리 어설프다. 괜히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어져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제조대에 기대어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편하게 얘기해요.”
“어떤 식으로 말하길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친한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대해 버렸다. 입술을 꾹 깨물며 뒤늦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허물없는 내 태도를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은 없었다. …아,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뭐 어째. 더 고민할 것 없이 솔직하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몇 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