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5/305)

#15

과연 교수님은 어디서부터 보셨을까. 무릎을 꿇었을 때? 흙바닥을 쓰다듬을 때? 아니면, 설마… 그림자를 문처럼 노크하며 두드릴 때? 시작점이 어디든 남이 보기엔 충분히 의심을 살 법한 정신 나간 행동이었다. 곁눈질로 흘겨보았으나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어떠한 생각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일단 민망한 상황을 무마하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뭐가 떨어진 줄 알았는데, 단순히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흙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옷자락을 툭툭 털어 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부디 얕은 변명이 통하길 빌었다. 하지만 가늘게 뜬 금안은 의심을 잔뜩 품은 채로 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올라갔다. 마치 엄격한 공항 검색대를 지나는 것처럼 바짝 긴장하여 부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곧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집요한 시선이 떨어졌다.

“대학 내에 보는 눈이 많으니 조심하게나.”

“넵.”

“…물론 자네가 시선을 즐긴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예?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네.”

별다른 추궁 없이 지나가 다행이지만, 어째 아스레인에게 괴상한 이미지만 잔뜩 심은 것 같다. 그러게 왜 하필…. 아스레인이 있는 쪽으로 나를 이끌지만 않았어도 괜히 의심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기만 홀랑 그림자 속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리니 애먼 나만 이상한 취급받은 거 아닌가. 억울한 마음을 애써 속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 연구실로 가시는 건가요?”

“음, 아니. 잠시 온실에 들러야 하네. 옮길 약초가 있어.”

아스레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왜 이렇게 긴지. 몇 걸음 앞서가는 그를 쫓아가는 것조차 힘겨웠다.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처럼 겨우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그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딱히 무거운 것도 아니다만.”

“그래도 교수님 장갑이 더러워지는 것보단 제 손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벼운 눈짓으로 흘겨본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직후 따라 들어간 온실은 전과 같이 무거운 습기로 가득했다. 기왕 온실에 들른 김에 단델에게 인사라도 건네려고 했는데, 아스레인은 보란 듯이 정반대로 걸어갔다.

그가 향한 온실 구석에는 덩굴로 장식된 자그마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삼면을 가득 채운 수납장은 마치 한약방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참나무와 갓 뜯어낸 풀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저절로 편안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온실 안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마물에게 필요한 약재를 제조하는 곳이지. 사람이 없다면 편히 써도 좋다만….”

“들고 나가지 말라는 말씀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입 아프게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군.”

나직한 웃음을 흘린 아스레인은 조용히 서랍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앞에 붙은 이름을 확인하지도 않고 능숙하게 서랍을 열어 약초를 꺼내었다. 두꺼운 종이 위에 차곡차곡 놓이기 시작한 꽃과 잎사귀들은 벌레 먹은 부분 하나 없이 말끔했다.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종이를 접고 노끈으로 봉하는 그의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 후 아스레인은 증류수로 보이는 맑은 물 두 병과 이름 모를 갈색 가루가 채워진 유리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벌써 용건이 끝난 것 같이 보여 서둘러 거들기 위해 다가갔다. 그런데 물 한 병을 채 옆구리에 끼기도 전, 그가 난데없이 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시선이 퍽 부담스러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유를 물었으나 아스레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는지 다시 서랍장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약초를 척척 꺼내곤 제조대 앞에 서서 무언가 만들기 시작했다. 흡사 플라스크처럼 생긴 병에 노르스름한 액체를 들이붓고, 계량 하나 없이 약초를 넣는 모습은 기계처럼 일정했다. 역시 천재가 하나만 잘하라는 법은 없었다.

멍하니 구경하는 사이 물약 하나가 완성되었다. 코끝을 찌르는 풀 냄새와 함께 걸쭉한 것이 작은 유리병에 담겼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 나쁜 진녹색 액체였다. 위험한 마물을 마비시킬 때 쓰는 극독인가. 저런 향기를 가진 액체라면 효과는 좋겠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니 아스레인이 불쑥 액체를 내밀었다.

“자, 마셔라.”

“…예?”

…농담이겠지? 아무리 내가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어도, 그게 극독약을 줄 만큼 잘못된 짓은 아니잖아.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걸 왜 제게….”

“마력을 채워 주는 약이다.”

“마력이요?”

“안 그래도 희박했던 자네의 마력이 전보다 훨씬 없어졌어. 그새 뭐라도 잘못 건드렸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득 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 마물이 떠올랐다. 설마 한 집에 세입자가 둘이라 그런 건가? 그림자 속에서 기생하는 것도 모자라, 안 그래도 부족한 마력까지 빨아 먹히고 있는 거라면 크나큰 낭패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숨기려 애써 부정했다.

“아, 아무것도요.”

“정말인가?”

“하하, 그럼요. 이 약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냉큼 약물을 받아 들었다. 이걸 마시긴 해야 하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냉담한 아스레인을 한 번, 기묘한 빛을 띤 물약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눈을 딱 감고 액체를 들이켰다. 입 안에 미묘하게 뜨끈한 액체가 들어오자마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웁….”

“음?”

“욱, 맛이 참… 특이하네요…? 하하, 하….”

아, 젠장. 당장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속을 게워 내고 싶을 만큼 끔찍한 맛이다. 술을 무진장 마신 날 위액을 전부 토해 냈을 때와 정확히 똑같다. 온갖 쓴맛을 섞고 그 안에 비릿한 액젓 한 방울을 떨어트린 느낌이다.

“제게 마력이 부족하다고 이런 독… 아니, 약까지 챙겨 주시고 감사합니다.”

맛은 악감정이 섞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건강을 생각해 줬으니 호의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나저나 마력을 채워 주는 약이라니. 설마 이 맛없는 약을 참고 많이 마시면 언젠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아직 반이나 남은 액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냉철한 목소리가 기분 좋은 꿈을 깨 버렸다.

“많이 마신다고 마력이 축적되진 않으니 괜한 기대를 품지 마라. 일시적인 각성제 효과일 뿐이니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럼 맛이 좋아서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거로구나.”

표정에 헛된 망상이 전부 드러났나. 입이 열 개라도 변명거리가 없었다. 괜스레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재료는 어떻게 됩니까?”

“두충나무 껍질을 달여서 만든 약물에 말린 아티초크와 사라세니아 꽃가루를 넣었네. 다른 약재는 몰라도 사라세니아만큼은 평범한 약재상에서는 구하기 힘들지.”

“많이 귀한가요?”

“사라세니아는 비료 대신 마력을 먹고 자라. 그 기이한 특징 때문에 평민 사이에서는 단 한 송이를 사기 위해 한 달 벌이를 전부 바쳐야 하네.”

잠깐. 한 달 벌이? 교수님. 그런 건 먼저 말씀해 주셔야죠. 대충 마시는 척만 하고 버리려는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꽃 한 송이가 곧 한 달 월급이다. 아직 이 세계에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지만 현대로 치면 최저 시급으로 180만 원! 누구는 없어서 못 먹는 약재를 몰래 버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니다. 암, 아니고말고.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신선한 사라세니아를 그대로 뜯어먹는 것이 제일 좋지.”

이어지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병 입구를 그대로 입에 댔다.

“하지만 맛이 워낙 독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엄두도 못 낼….”

입에 쓴 것이 몸에도 좋다고. 180만 원이란 걸 알고 마시니 쓴맛이 약하게 느껴지는 착각이 일었다. 남은 액체를 전부 털어 넣고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신 사람처럼 캬,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그 후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이 낯설어 시선을 돌리니 놀라다 못해 황당함으로 물든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던 아스레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도 참… 자네군.”

***

비싸단 소리에 호쾌히 약물을 마시긴 했다만, 위액이 역류하는 것처럼 목구멍과 식도가 쓰라렸다. 당장 초콜릿을 서너 알 입에 넣은 후 숨을 참고 싶은 심정이었다. 홀로 약물과 사투하며 연구실 문을 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같이 오셨네요?”

무슨 일인지 연구실에 온 진이 반갑게 인사했다.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제자리를 찾아가니 책장에서 기웃거리던 진이 물었다.

“교수님. 혹시 아멜리 백작이 보낸 편지를 가져가셨나요?”

“음?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만.”

“정말요? 어제 바람에 날아갈까 봐 책 사이에 끼워 놨는데 없어져서요. 다시 찾아볼게요.”

진은 사뭇 당황한 얼굴로 책 사이를 열심히 뒤졌다. 그때 나 혼자 양심이 찔려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그 편지, 책이 아니라 내가 품에 소중히 끌어안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진이 억울해질 것 같아 조용히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그러곤 교무실로 끌려가는 학생처럼 비척거리며 아스레인에게 다가갔다.

“이거… 맞죠?”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자 두 쌍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날아와 뺨에 꽂혔다. ‘그게 왜 너한테 있냐’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아스레인의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놓으며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아까 교수님 책상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서둘러 갖다 드린다는 게 그만….”

누가 봐도 거짓에 가까운 변명이었지만, 아스레인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편지를 가져갔다. 책상 구석에 놓인 페이퍼 나이프로 가볍게 인장을 뜯어낸 그는 곧바로 편지를 펼쳐 보았다. 그 후 수 초도 지나지 않아서 날이 잔뜩 선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하. 선전포고가 따로 없군.”

아스레인은 고급스러운 편지를 하찮은 쓰레기 버리듯 책상에 던졌다. 단숨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공기가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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