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14/305)

#14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창밖으로 밝은 햇빛이 스며 들어와 토끼가 자리 잡은 책장 아래 그림자가 점점 좁아졌다. 경계선에 닿지 않으려는 듯 조금씩 뒤로 물러선 토끼는 포도 젤리 같은 코를 움찔거렸다. 그 후 나를 원망하듯 노려보기에 이유 없이 억울해졌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응?”

쪼그려 앉으니 토끼가 몸을 살짝 틀고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가 향한 방향은 내가 아니라 내 옆으로 진 그림자였다.

설마 내 그림자로 뛰어들려는 건가? 빛에 닿으면 안 되고, 그림자 안에서만 살 수 있는 마물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다.

“이거야? 내가 이러면 돼?”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연신 말을 걸며 낮은 자세로 다가갔다. 어느새 토끼가 둥지를 튼 그림자와 연구실을 가로지른 내 그림자가 맞닿았다. 그러자 토끼는 기다렸다는 듯 몽실몽실한 발을 들어 그림자를 툭 건드렸다. 짙은 눈동자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귀여운 모습이었다. 들어와도 괜찮다며 그림자가 진 바닥을 톡톡 건드리니 토끼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때. 아늑해?”

섣불리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위압감을 뿜던 토끼가 어느새 손을 뻗지 않아도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토끼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이사를 고민하는 세입자가 집 안을 세세히 둘러보는 것처럼 내 그림자 테두리를 따라 한 바퀴 빙 돌았다. 생각은 읽을 수 없지만, 안정적으로 처진 귀를 보니 왠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괜찮으면 잠시 쉬었다 가도 돼.”

이것도 인연이라고, 아직은 조금 무서운 토끼… 마물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자 토끼는 뒤로 접힌 귀를 쫑긋 세우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한 번에 눈높이까지 뛰어오른 도약에 놀라기도 잠시, 이어진 행동에 입이 툭 하고 벌어졌다.

“…어?”

검은 토끼는 깊은 굴 안으로 몸을 숨기듯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니 눈을 의심하기 바빴다. 왠지 영 좋지 못한 것과 엮였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림자 안에서 나오라며 부질없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다급히 두드렸다.

“저기요? 계세요?”

때마침 새까만 무언가가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와 높은 책장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털끝에 아지랑이가 핀 그것은 토끼가 아니라- 웬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석상처럼 굳어 있던 토끼 시절과 달리 붉은 눈동자는 영롱한 빛을 띠었고, 새까만 털에서 윤기가 흘렀다.

“우와….”

…가 아니지! 지금은 모습을 바꾼 마물에게 감탄할 여유가 없다. 당장 편지를 찾아서 다시 아스레인의 책상 위에 올려 놔야 한다. 우아하게 살랑거리는 꼬리가 마치 놀아 달라고 하는 것 같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너랑 놀아 줄 시간이 없어. 편지가 사라졌거든? 그러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그란 주둥이가 무언가 물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건 굴러가는 종잇조각이 아니라, 그토록 찾던 아멜리 백작의 편지였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어?!”

“…….”

“아, 아무튼 그건 장난감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리 줘.”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얄미운 몸놀림으로 손길을 피해 창가로 뛰어갔다. 창문은 성인이 오가기엔 턱없이 작지만 고양이 정도는 능히 다닐 수 있는 크기였다.

그래 봤자 문단속을 잘해서 그가 빠져나갈 틈은….

“잠깐만!! 그건 반칙이잖아!!”

과학적인 가설이 판타지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고양이는 자신이 마물이라는 걸 증명하듯 편하게 유리 창문을 통과했다. 급히 창문을 열고 소리쳤지만 고양이는 유유히 풀숲을 향해 걸어갔다. 씰룩거리는 궁둥이가 마치 잡아 보라고 골리는 것 같았다. 놓치기 전에 곧장 연구실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다른 걸로 놀아 줄 테니까 편지는 제발 돌려줘. 응?”

나무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며 저 멀리 얼핏 보이는 고양이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돌부리 위를 잽싸게 뛰어다니며 제 갈 길을 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조금만 한눈팔면 바로 놓칠 것 같았다. 잰걸음만으로는 부족해 뛰기 시작하니 금방 숨이 차올랐다.

“헉, 허억….”

오랜 시간 의자에만 앉아서 책을 읽은 탓에 살이고 근육이고 전부 빨아 먹힌 대학원생에겐 너무 가혹한 벌이었다. 게다가 저 마물이 그림자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로 묘하게 몸이 무거워진 것 같다. 부디 착각이길 빌었다. 내겐 더 이상 착취당할 무언가가 남아 있지 않단 말이다.

“헉, 그거 사라지면, 흐억, 얄짤없이 잘릴 거라고…!”

애환을 담아 외쳤지만 저만치 뛰어간 마물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때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이름을 부르면 멈추지 않을까. 그림자와 관련된 마물은 많지만,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물은 생각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잠시 나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며 작은 목소리로 시스템을 불렀다.

“시스템!!”

- 예, 저는 여기 있습니다. 태오 님.

“책… 아니, 마물 도감을 보여 줘!”

- 실재화 기능을 바라시면 ‘오픈 북’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대학 시험이 생각나는 그리운 단어다. 그림자 마물에게서 시선을 떼며 짧게 중얼거렸다.

“오픈 북.”

단 세 글자 만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기숙사에서 처음 보았던 진갈색 양장 책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마물 도감은 타인에게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림자와 관련된 마물에 대해서 검색해 줘.”

- 키워드 ‘그림자’ 검색 결과 52건입니다.

“그 안에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길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 건?”

- 관련 키워드 검색 결과 6건입니다.

“좋아!”

6건이면 소거법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다. 허공에 떠오른 마물 도감을 향해 관련 있는 마물만 보여 달라 명령했다. 그러자 촤르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넘어가던 책장이 우뚝 멈췄다. 그림자 마물이 더 멀리 사라지기 전에 얼른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출석부처럼 번호 옆에 쓰인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곁눈질로 반응을 살폈다.

“쉐더! …아니고, 키코로. 아니고… 산! 아니네.”

얼마나 불렀을까. 반이 지나도 그림자 마물이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질 뿐이었다. 설마 내가 미처 읽지 못한 마지막 권에 등장하는 마물인가? 도감에 없는 마물일 수도 있단 생각에 서서히 목소리가 작아지던 때였다.

“…아그누스?”

저 멀리 돌부리를 뛰어넘은 그림자 마물이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심지어 작은 목소리를 귀신같이 듣고 슬쩍 고개를 돌리는 것 아닌가. 새빨간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감으로 느꼈다. 드디어 그림자 마물의 정체를 알았다.

“어? 너야? 아그누스야?!”

쪽지를 입에 물고 바위 위에 앉은 그림자 마물, 아그누스가 대답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곤 바닥에 착 달라붙도록 엎드려서 날카로운 동공을 내게 고정시켰다. 확연한 반응 차이를 느끼곤 서둘러 그 아래 쓰인 문장을 훑었다.

NO. 99 아그누스

-분류: ?급 위험 마물

-최초 발견지: 미발견

-외형: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원형을 본 자가 거의 없다.

-특징: 마력으로 형체를 만들어 내는 마물. 주로 그림자를 활동 근거지로 삼으며, 마력이 부족할 땐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기도 한다. 목마른 나그네처럼 예고 없이 찾아와 은혜를 입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는 비밀로 길을 안내한다.

-관계 평가: 미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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