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왠지 입에 착 붙는다 했다. 소설을 보고 마물에 대해 열심히 정리한 내용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황당함으로 물들어 이상하게 비틀린 입꼬리가 엇박으로 씰룩거렸다.
- 마물 도감은 지금처럼 책으로 실재화할 수 있으나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태오 님만 마물 도감을 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거참 편리하네.”
그래.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볍게 밀쳐 두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려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데, 고작 머릿속에 마물 도감 시스템을 자처하는 인공 지능 하나 키우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마법도 못 쓰는 내가 전공인 마물이라도 종류별로 알아 두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생명줄이 될지도 모를 도감을 들여다보다가 ‘관계 평가’란 카테고리를 발견했다.
“이 관계 평가…는 대체 뭐야?”
- 관계 평가는 마물과 태오 님 사이의 친밀도를 나타냅니다. 총 4단계로 나뉘며, 지속적인 교감을 통해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를 발전해? 내가? 마물이랑?”
예상 밖의 기능을 듣곤 한 박자 늦게 헛웃음이 터졌다. 물론 마물이란 존재가 궁금하고 관찰하고자 하는 의욕은 왕성하다. 하지만 이게 무슨 연애 시뮬레이션인가? 대체 무슨 방법으로 말도 안 통하는 마물과 관계를 발전시키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디 한 번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 관계 평가 기능은 오직 마물과 아이 콘택트를 통해서만 활성화됩니다. 따라서 태오 님께서 홀로 마물을 인지하는 경우, 또는 마물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때는 기능이 해금되지 않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단델 말고 관계 평가가 해금된 마물이 있어?”
- 현재로는 없습니다.
친절한 시스템의 설명을 곱씹은 덕분에 깨달았다. 온실에서 마주친 단델은 ‘관계 평가: 경계’라 쓰여 있지만, 몬테나 산에서 본 오파러스는 관계 평가가 ‘비활성화’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오파러스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무서울 정도로 오래도록 눈을 감지 않은 검은 토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도감이 반응하지 않은 것일까. 아직 익숙지 않은 마물 도감에 대해 고민하다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내가 마물이랑 관계가 진척되면 뭐가 좋은데?”
- 마물과 관계가 발전될 때마다 단계적으로 숨겨진 기능이 해금됩니다.
“숨겨진 기능?”
기능 한 번 참 많다. 그래 봤자 뭐 얼마나 쓸 만할까. 일단 들어 보자 싶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이리스처럼 마물이랑 대화라도 시켜 주면 또 몰라.”
- 의사소통은 3번째 ‘친밀’ 단계에 해금됩니다.
“…뭐?”
진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거야? 아니, 그보다 의사소통이 마지막 기능이 아니야?! 동물이든 마물이든 교감에서 최상위 단계는 의사소통이라 굳게 믿었다. 반려동물이 사랑하는 보호자라면 비록 다른 언어를 쓸지라도 이해하는 것처럼. 그런데 시스템은 교감의 끝이 감히 의사소통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마지막 단계가 되면 어떻게 되는데.”
독촉하듯 물었으나 정작 시스템은 대답이 없었다. 만약 시스템이 실제로 눈앞에 서 있었다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먹음직스러운 육포를 두고 기다려 명령을 받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 만약 마물이 당신을 ‘수호’한다면….
“응!”
- 해당 마물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응??”
순간 귀를 의심했다.
“소…환을 할 수 있다고?”
- 예.
참으로 간결하고 정확한 대답이었다. 아스레인은 내게 마력이 부족해 마법을 쓸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하지만 마법보다 더욱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꿈에 그리는 마물과 대화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소환할 수 있단다.
‘마물 연애 시뮬레이션’이라 비웃던 것이 무색하게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마물과의 관계를 4단계까지 발전하는 것이 어려우면 어떠랴. 일단 가능성이 존재한단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못하고 책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시스템에게 물었다.
“소환하는 방법은 뭐야?”
- 마물의 이름을 부르며 자연물을 바치면 됩니다.
“…자연물?”
시스템은 뒤이어 소환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시공간을 넘어 마물을 소환하기 위해선 일정한 생명력이 필요하다. 갓 피어난 꽃, 햇빛을 머금은 나뭇잎, 흙을 뚫고 나온 풀. 뭐든 자연에서 발생하여 생명을 가진 물체면 가능하다.
그 자연물을 대가로 바치면 나를 ‘수호’하는 마물을 소환할 수 있다.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꽃이라도 그 생명이 다하기 전이라면 제물로써 가치는 충분하단다. 창밖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꽃 하나에 마물 하나인 거야?”
- 그건 마물이 가진 힘에 따라 다릅니다.
“뭐? 그럼 강한 마물을 잘못 소환했다가는….”
- 일대가 날아갈 수도 있겠군요.
엄청난 소릴 덤덤하게 하니 별것 아닌 일처럼 들렸다. 하지만 어쩌다 1급 위험 마물이라도 소환하는 날에는 주변에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남게 될 것이다. 조금 전까지 신이 났던 것이 무색하게 금방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직 수호 단계까지 올라간 마물이 없는데도 걱정이 앞서 심각해진 내게 시스템은 말했다.
- 만약 자연물을 바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태오 님의 마력을 제물로 바치면 됩니다.
결국 마력이었다. 처음부터 마력이 넘쳐흐르면 좋았을 텐데. 허공에 손을 휘저어 책을 없애곤 침대에 털썩 누워 버렸다. 역시 커다란 능력에는 그만큼 위험한 대가가 따른다. 하지만 소환을 제외하더라도 마물 도감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 험난한 세상에 내 몸 하나 지킬 보험은 들어 두면 좋지.
“일단… 비밀로 해 두는 게 좋겠어.”
애초에 아무도 믿을 것 같지 않은 능력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
갑작스런 마물 도감의 등장으로 놀라긴 했다만, 일찍 잠든 덕분에 한결 나은 안색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여유가 있지만 일찍 연구실로 향했다. 새벽이슬이 채 사라지지 않은 이른 시간, 안겔루스 대학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당연히 아스레인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연구실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아침이…. 어? 안 오셨네.”
너무 이른 아침이라 역시 아스레인은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 안겔루스 대학 지도가 놓여 있었다. 어제 진이 퇴근하기 전에 책상에 두고 간 모양이다. 지도가 날아가지 않게 책으로 고정해 놓고 연구실 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 안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허공에 중얼거렸다.
“시스템?”
- 예. 여기 있습니다.
하하, 이거지. 이거.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하니 저절로 너털웃음이 나왔다. 기분 좋은 상태로 연구실을 한 바퀴 빙 돌아보다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책을 발견했다. 완벽주의자인 아스레인이 웬일로 퇴근 전에 책상 정리를 잊은 모양이다.
“내가 해 드리지, 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시키지 않은 청소를 시작했다. 펼쳐 놓은 책은 혹시 모르니 그대로 두고, 흐트러진 서류와 책만 일렬로 쌓아 두었다. 약간의 손길만으로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어 흐뭇해졌다. 연구실 생활이 몇 년 차인데 정리에 도가 튼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얇은 책 여러 권을 겹쳐서 책상에 툭툭 내리치는데, 갑자기 책 사이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황급히 바닥을 내려다보니 새빨간 백합 모양의 실링 왁스가 찍힌 흰 편지 봉투가 눈에 띄었다. 아직 이 세계의 가문 역사 같은 건 모르지만, 저 문양은 몇 번씩 봐서 지극히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멜리 백작가에서 쓰는 인장이잖아….”
그날부로 백작과 편지라도 주고받는 걸까? 에이, 설마. 겸상하기도 싫어하는 아스레인이 백작에게 친히 편지를 쓰진 않을 것이다. 그럼 대체 뭐지. 그러고 보니 어제 온실에 갈 때도 아스레인은 편지를 챙겼다. …진짜 아멜리 백작이랑 편지를…? 왜?
아니, 일단 편지부터 주워야겠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끌어안고 다시금 책상 아래를 내려 보았다. 그런데 잠깐 한눈판 사이 편지가 없어졌다. 소리 소문 없이 깔끔하게 증발해 버렸다.
“뭐야. 어디 갔어!”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찾아보았지만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실링 왁스가 뜯어지지 않은 걸 보면, 수신인인 아스레인도 내용을 확인하기 전인 것 같았다. 중요한 편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에 책상 아래 말고도 책장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하지만 편지는커녕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망했다.”
제출 직전 실수로 과제를 삭제했을 때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패닉에 빠졌다. 연구실 한가운데 서서 멍하니 눈만 굴릴 뿐이었다.
그 순간 책장과 벽 사이에서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동시에 으스스한 감각이 살갗 위로 닿아 순식간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용감하게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었으나, 쥐콩만 한 심장은 존재감을 자랑하듯 쿵쿵 뛰어 댔다. 결국 슬그머니 좁은 틈을 향해 눈동자만 돌려 보았다.
그리고 연구실 안에 있어선 안 될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에….”
뒤뜰에서 본 검은색 토끼다. 그가 그림자 안에 숨어 있었다. 산수유 열매처럼 새빨간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형형히 빛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든 말든, 토끼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예고 없이 마주하니 한층 확실해졌다. 검은 토끼는 마물이다. 게다가 외형만으로는 위험도가 가늠되지 않아서 더욱 위험한 마물.
“시, 시, 시, 시스템.”
- 네. 태오 님.
“혹시 내가 지금 바라보는 마물에 대해 알 수 있을까…?”
- 마물이 인지되지 않아 도감에서 검색할 수 없습니다.
한 톨의 희망만 가지고 더듬거리며 물었으나 차분한 시스템은 단호히 부정했다. 어제도 시스템은 마물이 마력으로 인해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때는 인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몇 분 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음에도 마물 도감이 반응하지 않는 걸 봐선, 토끼의 모습은 단순 껍데기일 것이다.
“그림자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 ‘그림자’ 검색 결과, 관련 마물 52건입니다.
“너무 많잖아….”
지금 당장 살펴보기엔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러다 아스레인이 연구실에 도착하면 더 낭패다.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동상처럼 가만히 있는 토끼에게 말을 걸었다.
“나한테 본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니?”
“…….”
“으응. 없겠지.”
“그럼 혹시 바닥에서 쪽지는 봤어?”
“…….”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귀라도 한 번 쫑긋거려 주면 고마울 텐데. 그림자 안이 제집인 것처럼 망부석이 된 토끼는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