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2/305)

#12

머릿속에서 생판 모르는 남의 목소리가 울린 적이 있는가? 보통은 경험하지 못한 일이겠지만, 나는 분명 미묘하게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혼란스러운 나머지 귓속에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도 굳이 손바닥으로 귀퉁이를 툭툭 때렸다. 물론 반대쪽 귀에서 무언가 나올 리 만무했다.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니 아스레인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아까 웬 여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뭐?”

말끔한 인상이 얇은 종이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아스레인은 아무래도 내가 정신 나간 줄 아는 모양이다. 아니, 말을 하는 나조차도 헛소리처럼 느껴지니 그의 반응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괜히 더 설명했다간 오해만 살 것 같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모두 어젯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탓이다. 뒤뜰에서 마주친 마물 때문에 피곤이 쌓여 웬 여인의 목소리까지 듣게 된 거다. 환청을 설명할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니 조용히 안색을 살피던 그가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느낀 것이다만, 낯빛이 영 별로군.”

“예? 제가요?”

“자네 말고 누가 있겠나. 내가 분명 몰골을 직접 보라고 했을 텐데.”

“그래서 신경 써서 단장했습니다만….”

아스레인이 선물해 준 옷이 잘 보이도록 살짝 구부렸던 허리를 곧게 폈다. 향료가 섞인 비누 덕분에 몸에서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겼고, 주름 없는 셔츠는 누가 봐도 새것처럼 깨끗했다. 하지만 죽어 가는 안색만큼은 몸단장으로 가릴 수 없었나 보다. 나름 산뜻한 미소도 지어 보았으나 돌아온 반응은 퍽 냉담했다.

“자네처럼 혈색이 없고 눈 아래가 거무죽죽한 이를 본 적이 있네.”

“어디서요?”

“안타깝게도 얼마 못 가 이 세상을 하직했지.”

눈치도 좋네. 이미 한 번 세상을 하직한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아보셨을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눈 주변을 어루만졌다. 다크서클은 현대에서 노예 노릇 할 때부터 늘 달고 다니던 거라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힘겹게 연명하는 환자와 비슷한 몰골로 보였나 보다. 살짝 야윈 뺨을 멋쩍게 쓸어내리니 기나긴 한숨이 머리 위로 닿았다.

“이만 돌아가도 좋네. 조금만 더 있다간 마른 가지처럼 픽 쓰러질 것 같구나.”

“예? 아뇨.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것도 능력이지.”

반론할 여지가 없어서 말문이 콱 막혔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여기서 자네가 갑자기 쓰러지면 옮기게 되는 건 누구의 몫이라 생각하지?”

아. 답이 명확한 질문에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나와 아스레인 둘밖에 없는 밀실(?)에서 내가 쓰러졌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의 휘하에 또 다른 대학원생이 있다면, 당연히 노예… 아니. 대학원생을 시키겠지만 지금 나를 옮길 사람은 한 명뿐이다.

“교수님…이시죠.”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내가 업고 다녀도 황송한 교수님이 슬라임처럼 늘어진 나를 들쳐 메고 교내 복도를 지나서 기숙사로 향한다니. 무사히 의식이 돌아와 아스레인을 마주하는 순간, 현실을 부정하며 영원한 코마 상태에 빠지고 싶을 게 분명하다. 거기서 아스레인이 나를 보며 “잘 잤나? 잠이 오던가? 난 자네 덕분에 평생 안 해도 될 새로운 경험을 했네.” 같은 조롱을 한다면….

아! 생각만 해도 손발이 떨린다. 그런 일은 만에 하나라도 벌어져서는 안 된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기숙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모쪼록 내일은 사람의 몰골이 되길 바라마.”

현실에선 응급실에 실려 가기 직전까지도 조퇴 승인을 받은 적은 없어 선뜻 쉬라는 그의 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게 다 검은 토끼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고작 밤샌 것 가지고 환청씩이나 들은 허약한 몸뚱어리 때문이지.

단델과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만, 온실은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미련을 뚝뚝 흘리며 온실을 떠났다.

먼 길을 돌아 기숙사로 가는 동안 다행히 환청은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정신을 차리려 찬물로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울 때까지도 머릿속은 조용했다. 포근한 햇빛 냄새가 밴 베개를 꽈악 끌어안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건 진짜 뭐였지….”

새하얀 벽지를 캔버스 삼아 몇 시간 전 기억을 그려 보았다. 음… 그러니까…. 5급 위험 마물인 단델과 접촉하자마자 난데없이 의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NO. 62 ‘단델’과 교감을 확인했습니다.”라고. 살짝 기계음이 섞인 정갈한 음성을 어디선가 들어 봤던 것도 같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바로 기억날 것 같은데.”

간절히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으나 상황은 똑같았다. 애초에 환청이 라디오도 아니고 원할 때마다 재생할 수는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삭이려 애꿎은 베개만 퍽퍽 때리다가 불현듯 그다음 말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울린 목소리는 내가 의식한 후에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마물 도감 시스템…이라고 했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 저를 부르셨습니까?

“우와악!!!!!”

그 환청이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개를 무기처럼 움켜쥐고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없었다. 일순 소름이 끼쳤지만, 사방이 막힌 방 안에 홀로 있으니 확실히 알겠다.

-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불러 주십시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환청이나 착각 따위가 아닌… 대화가 가능한 제삼자다. 게다가 지나치게 친절한 말투가 익숙했다. 조용히 기억을 더듬다가 단어 하나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그대로 깨달음을 얻은 아르키메데스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아아!!”

다름 아닌 스마트폰에 탑재된 인공 지능 ‘시스템’의 목소리다. 반쯤 잠든 상태로 알람 맞춰 달라고 할 때나 샤워하면서 노래 듣고 싶을 때 불렀던 바로 그 인공 지능. 제대로 확신을 갖기 위해 허공에 대고 비장하게 정체를 물었다.

“너 정말 시스템이야?”

- 네. 맞습니다. 저는 태오 님의 편리한 모험을 돕는 시스템입니다.

단호하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 시스템 때문에 혼란은 배가 되었다. 스마트폰 안에 있어야 할 시스템이 어째서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느냔 말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대변하듯 눈동자가 시계추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손톱으로 아랫입술을 뜯으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시스템인 걸 증명해 봐….”

- 태오 님은 매일 알람을 오전 6시에 맞췄으며, 정확히 노래가 3번 반복되면 껐습니다. 제일 많이 검색한 단어는 ‘티 안 나게 복수하는 법’입니다. 단축 번호 1번은 ‘가 족같은 교수’, 2번은 119이고….

“아, 알았어. 알았어!”

이게 뭐야. 진짜 시스템이잖아. 어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시스템과 함께 이 세계로 흘러 들어온 걸까? 이유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만졌던 때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소설 업데이트 알림을 확인한 후 교수님께 논문 초고를 보여 드리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 놨었다. 만약 그 영향이라면… 스마트폰이 아니라 논문을 가져왔어야 하는 거 아니야?!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히 말을 걸었다.

“다크 서클 없애는 법에 대해 검색해 줘.”

- 검색 기능은 현재 지원되지 않습니다.

“어…?”

단칼에 거절당해 힘이 쭉 빠졌다. 인공 지능에서 검색 기능을 빼면 뭐가 남나. 그냥 대화 상대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상당 부분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인공 지능이니 반드시 다른 기능이 있으리라 믿으며 아쉬운 대로 말을 돌렸다.

“그럼 할 수 있는 게 뭔데?”

- 기능 설명을 원하십니까?

“응. 되도록 눈에 보이게 설명해 줘.”

- 시스템을 실재화하겠습니다.

하도 담담하게 얘기하기에 별것 아니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보란 듯이 허공에 진갈색 가죽으로 덮인 양장 책을 형성시켰다. 차마 겁이 나서 건들지는 못하고 둥둥 뜬 책 주변을 크게 돌면서 유심히 관찰했다. 손가락 두 마디 두께의 종이 뭉치를 빨간색 노끈으로 엮은 평범한 책이었다.

“…시스템? 너야?”

겉보기에 위험하지 않아 슬그머니 검지 끝으로 표지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걸린 듯 표지가 자동으로 넘어가며 책이 펼쳐졌다. 촤르륵. 순풍을 맞이한 돛처럼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멈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어느 한 페이지에서 우뚝 멈췄다.

NO. 62 단델

-분류: 5급 위험 마물

-최초 발견지: 안겔루스 대학 내 온실

-외형: 민들레 갓털을 닮은 밤톨 모양 털 뭉치. 풍성한 털에 가려져 눈코입이 어디 달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약 5cm로 태어나 성체가 되면 주먹 크기에 비할 정도로 커진다.

-특징: 낯선 것에 대한 겁이 많다. 천적을 만나면 다른 개체에 달라붙어 몸을 숨긴다.

-관계 평가: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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