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1/305)

#11

차라리 환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봐도 헛것은 아니었다. 분명 들판에 검은색 토끼가 있었다고 장담해도 진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끝내 내가 피곤하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기숙사로 안내해 주며 푹 쉬라는 인사만 남기고 홀연히 가 버렸다.

진의 말대로 잘못 본 거라면 좋을 텐데…. 정녕 검은색 토끼가 없었다면, 그건 토끼의 모습을 한 마물임이 틀림없다. 곧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이 이런 거였나.

결국 여러 걱정이 겹쳐 밤새 한숨도 못 잤다. 방심하는 순간 그림자 속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으으….”

뜬눈으로 끙끙 앓으며 밤을 새우고 무기력하게 기숙사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했다. 피곤함을 씻어 내기 위해 샤워하고 돌아오니 그새 문앞에 아스레인이 보내 놓은 옷상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딱 맞는 코트와 소매가 넓어 움직이기 편한 고급스러운 셔츠는 척 봐도 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전날 밤의 후유증 때문에 선물을 보고도 전혀 기뻐하지 못했다.

대강 옷가지를 정리해 놓고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연구실에 도착했다.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목부터 가다듬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출근 첫날부터 실수할 수는 없지. 뺨을 툭툭 치며 잠을 내쫓곤 씩씩하게 연구실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금껏 이른 아침에 연구실로 가면 맞이해 주는 건 복사기와 컴퓨터뿐이었다. 그런데 삼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스레인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우왁!”

오늘도 변함없이 고아한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꽥 질렀다. 문 앞에서 딱딱하게 굳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아스레인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왜 그러지?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다만.”

“예? 아니, 아닙니다….”

부지런도 하셔라.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 좋은 풀 냄새가 연구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신선한 공기조차 어색한 기류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앞을 쭈뼛거리며 지나가는 동안에도 금색 눈동자는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창가 쪽 책상에 자리 잡으니 그가 물었다.

“어제 안내는 잘 받았나?”

“아, 넵! 진이 길을 세세하게 알려 준 덕분에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길 잃은 아이를 찾아가는 보모 역할은 안 해도 되겠어.”

진지한 목소리 때문에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모르는 채 대화가 끝났다. 당장 주어진 일이 없어 몰래 아스레인을 훔쳐보았다. 아직도 소설 속 그분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괜스레 책을 뒤적거리며 호시탐탐 말을 걸 기회를 엿보던 그때, 깃펜을 든 아스레인이 서류 위에 빠르게 글씨를 적어 가며 말했다.

“식사는 때가 되면 레스토랑에서 알아서 챙기고, 몸이 안 좋으면 본관으로 가게나. 물론 약초밭에서 약초를 뜯어다가 스스로 약을 제조 및 복용하는 건 상관없다만 위험 부담은 전부 자네의 몫이네. 또한 연구실이 정식으로 문을 닫는 건 4시이지만, 그 전에 시킨 일이 끝나면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도 좋아.”

넋 놓고 듣다가 한 박자 늦게 쪽지에 유의 사항을 받아 적었다. 예전 연구실 생활과 비교하면 퇴근도 빠르고 훨씬 자유롭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자유가 많다는 것은 자칫 시간을 잘못 분배했다간 실수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는 소리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니 아스레인이 나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한테 물어봐도 되네. 그러라고 있는 교수 아닌가.”

그건… 맞는 말이지. 그동안 시답잖은 것으로 교수님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몸에 밴 탓이었다. 전달이 끝난 아스레인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을 들고 일어났다. 외출인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어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당장 급한 일 있나?”

“아, 아뇨. 없습니다.”

“잘됐군. 동행하지.”

어디로 가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책상에 놓인 잉크 펜과 메모지만 챙겨 급하게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아스레인은 인적이 드문 연구실 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비스듬한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니 주변은 점점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와 풀들로 우거졌다.

기분 탓일까. 저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잠시 잊고 있던 ‘뒤뜰의 검은 토끼 괴담’이 다시 떠올라 본능적으로 아스레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걷기 불편할 만도 한데 그는 아랑곳 않고 평소와 같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마물을 왜 연구한다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질문에 으스스한 분위기도 잊고 머리를 굴렸다.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알고 있었으나, 의도는 쉬이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안전하면서 도망칠 구석이 많은 대답을 내뱉었다.

“마물과 공생하기 위해서입니다.”

“재미없는 정답이군.”

터벅터벅. 먼발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걷던 그가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설득하기 위해서다.”

“설득…이요?”

“자네도 알다시피 예전엔 마물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어. 심지어 마물의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막대한 포상금이 내려져서 마물 사냥꾼이 성행했지. 돈을 벌기 위해 마물을 죽이고, 그리하여 터를 잃은 마물은 민가를 습격하고… 괴로운 굴레였네.”

입술 새로 나온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그는 흘러가는 구름처럼 아무 감정을 담지 않은 채 설명을 이었다.

“막상 사냥을 금지하자니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이 반기를 들었네. 모두가 자네처럼 이타적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마물의 보존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연구가 시작됐네. 마침내 에브게니아 1세 때 마물의 사체 일부가 약효를 갖고 있다고 밝혀졌다. 그날부로 마물은 토벌 대상이 아니라 연구 보호 대상으로 바뀌었지.”

문득 소설의 대목이 떠올랐다. 마물을 대하는 태도가 동전 뒤집듯 바뀌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은 꽤나 혼란스러웠다고. 선조를 죽인 마물을 이제 와 보호해야 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는 자들과 처음부터 마물 토벌을 자행한 인간의 실수라는 자들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마물 사냥과 매매는 금지되었고, 카르사 제국과 속국에 서식하는 모든 마물은 황실의 보호하에 들어갔네. 오로지 자연사한 마물의 사체만 약재로 쓸 수 있게 했지.”

그래 봤자 시대는 변했다. 더는 마물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진정한’ 마물의 가치를 알게 된 자들이 아직도 암암리에 마물 사냥을 거행하네. 그런 치들로부터 마물을 보호하는 기관 중 하나가 바로 여기, 안겔루스 대학이다.”

때마침 고개를 드니 돔 형식의 천장을 가진 유리 온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족히 집을 두어 채 합쳐 놓은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관리가 우수하여 유리 표면에는 물 자국 하나 없었고, 푸름을 잔뜩 머금은 나부대대한 잎사귀가 온실을 한가득 채웠다.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온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마물이 있는 건가요?”

“그래. 치료와 병행한 연구가 끝나면 다시 서식지로 돌려보내고 있네.”

현대의 야생 동물 보호소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되려나. 간단한 설명을 마친 아스레인은 앞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곧 마물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철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아스레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보인 것은 세계를 감싼 위그드라실처럼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들판을 뒤덮은 붉은 꽃,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간 넝쿨, 싸라기눈처럼 작은 열매. 나뭇가지를 따라 뻗어 나간 생태계는 자연을 한 움큼 퍼서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연신 탄성을 내뱉으니 이를 바보같이 여긴 아스레인이 경고하듯 말했다.

“마력의 보호를 받는 곳이니 안에 있는 것이 아무리 탐나도 함부로 온실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말게.”

“온실 밖으로 나가면 무슨 일이 생기나요?”

“글쎄.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직접 해 보게나. 굳이 말리진 않겠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묘하게 싸늘해서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아스레인은 좁은 미로 같은 길을 망설임 없이 헤쳐 나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뒤를 따라가니, 마치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멈춘 것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앞에 도착했다. 유심히 살펴보니 잎 사이로 밤톨 같은 것이 둥실 떠올랐다.

설마…! 감격에 젖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미세한 생명을 가리켰다.

“혹시… 마물인가요?”

“그래. 최근 탐사를 갔다가 진의 몸에 달라붙어 들어온 ‘단델’이라고 하네.”

“몸에 달라붙어 들어왔다고요?!”

“단델은 덩치가 커다란 생물에게 붙어서 천적으로부터 몸을 숨기지. 근처에 키코로 떼가 있긴 했다만… 흠. 설마 진에게 붙을 줄은 몰랐네.”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아스레인이 입을 열자마자 밤송이가 통! 하고 튀어 올랐다. 그가 허공에 손짓하자 신기하게도 잎사귀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단델이 천천히 다가왔다. 온몸을 감싼 복슬복슬한 털 덕분에 아스레인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단델은 마치 바람에 흩날린 민들레 갓털 같았다.

“경계심이 심하진 않나 봐요. 제가 만져도 괜찮을까요?”

“5급 위험 마물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럼….”

“다만 겁이 많으니 손을 높이 들지 말고 손바닥을 보인 상태로 다가오기를 기다리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괜찮아. 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

이럴 때 주인공 아이리스처럼 마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한참 동안 간만 보던 단델이 결심을 내린 모양이다. 숨까지 죽이고 기다리니 이윽고 솜털 같은 몸체가 살포시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처음으로 마물을 만졌다고 내심 기뻐하기도 잠시-

- NO. 62 ‘단델’과 교감을 확인했습니다.

난데없이 이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으악!”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봐도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덩달아 놀란 단델은 이미 털을 바짝 세우며 도망간 지 오래였다. 대체 뭐였을까.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옆에 있는 아스레인에게 의심을 돌렸다.

“교수님.”

“뭐지?”

“방금 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차분하게 단델을 진정시키던 아스레인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뒤뜰에서 환각을 본 것도 모자라, 이젠 환청까지 듣는 걸까. 잠을 못 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아스레인에게 의심을 사서 멋쩍은 미소만 흘리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 마물 도감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뭐?”

“말까지 편하게 하고 벌써 적응했나 보군. 나도 그냥 이름으로 부르지 그러나?”

“아니, 교수님. 그게 아니라요….”

대체 뭐야. 뭔데 이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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