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0/305)

#10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침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스레인의 눈길이 닿은 곳으로 몸을 돌리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 양손에 바구니와 종이 뭉치를 든 채 다가왔다.

“교수님. 벌써 다녀오신 거예요?”

벽돌색 머리카락은 굽이치는 파도처럼 곱슬곱슬했고 코와 뺨에 주근깨가 도드라졌다. 끽해야 막 이십 대가 된 것 같은 앳된 얼굴이었다.

어려 보이지만, 이 세상 모든 피곤을 짊어진 인상을 보자마자 그가 아스레인이 언급한 대학원생 ‘진’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하니 청년은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이분은….”

“오늘부터 이자가 내 연구를 도울 걸세.”

“저, 정말요?”

반쯤 죽어 있던 얼굴에 느닷없이 생기가 돌았다.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떨지 잘 안다. 손님이 몰려 바쁜 시간대에 같이 일할 알바생이 생겼을 때 몰아치는 안도감이다.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진은 급기야 감동받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끈끈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짐 가방을 내려놓고 싹싹한 투로 자기소개를 했다.

“태오라고 합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아, 이름은 진이에요.”

줄곧 먹구름이 낀 것처럼 탁하던 하늘색 눈동자가 갑자기 청량한 가을 하늘이 되었다. 진은 금방이라도 지붕 위로 올라가 ‘자유다!’를 외칠 것만 같았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아스레인이 진에게 말했다.

“안겔루스 대학에 온 건 처음이니 네게 기숙사까지 안내를 부탁하마.”

“예. 교수님. 저한테 맡겨 주세요!”

퍽 씩씩한 대답이었다. 그 후 아스레인은 진이 가져온 서류만 챙겨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공터에 초면인 남자와 단둘이 남았으나 어색함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연구실 문이 닫히자마자 서로 눈을 맞추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함께 연구실 부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갔다. 교수님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어떤 세계이든 대학원생이 가진 본능이었다.

벤치에 앉아 짐을 내려놓으니 진이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과는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

“어어…. 딱히 아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애초에 그런 황송한 사이일 수가 없었죠.”

“왜요?”

“줄곧 아멜리 백작님 아래서 일했거든요.”

피곤으로 물든 눈이 번쩍 뜨였다.

“아멜리 백작님 아래서 일을 하셨다구요?!”

“하하, 네. 말 그대로 하인이었어요.”

“그럼 백작님을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하신 건가요?”

백작을 위해서라니. 어찌 그런 무서운 말을.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뇨. 서재를 청소하는 척하면서 종종 책을 읽었거든요. 그러다 교수님께서 쓰신 마물에 대한 서적을 접했죠. 여러 사정으로 교수님 앞에서 그 지식을 선보일 기회를 얻었고, …감사하게도 높이 사 주신 것 같아요.”

“어쩜….”

공정하지 못한 채용으로 진에게 미움을 사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흘끔 눈치를 살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진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 화를 삭이고 있다고 확신한 순간, 그가 입에서 손을 살짝 떼며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진의 눈에선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동지를 대하는 전우애가 느껴졌다. 그에 대해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아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이야말로 그동안 두 연구실 일을 혼자 맡느라 피곤하셨죠.”

“하아, 말도 마세요. 그래도 다른 분이 아니라 아스레인 교수님이니까 괜찮았어요. 그분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안 부르시거든요. 그나저나 태오…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저야말로 성도 없는 평민인데, 막 이름을 불러도 괜찮나요?”

혹시 실례를 범하고 있는 걸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저도 몰락 귀족이라 그냥 진이거든요.”

하하. 이어진 웃음소리가 하도 쾌활해서 순간 귀를 의심했다. 누가 자신의 가문이 망했다는 심각한 얘기를 역 앞에 슈퍼 사라졌다는 수준으로 가볍게 말할까. 따라서 웃지도, 그렇다고 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해 눈을 굴렸다. 진은 이도 저도 못하는 반응이 익숙한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튼 새로 오셔서 너무 기뻐요. 정말로요.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진은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먼저 레스토랑 가는 길부터 알려 드릴게요.”

비슷한 처지라는 이유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진은 테마파크 직원처럼 세세하게 길 안내를 해 주었다. 약 3m 간격으로 널찍하게 테이블이 놓인 레스토랑, 별장에 작게 마련한 서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도서관. 그 외에도 여러 시설이 있었지만, 부지가 워낙 넓어 하루 만에 둘러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무거운 짐을 잊을 만큼 흥미롭게 교내 산책을 하고 진과 함께 정원으로 돌아왔다.

“자주 가실 곳 위주로 알려 드렸으니 당장은 괜찮을 거예요. 다른 곳은 아마 교수님과 함께 가게 되실 거니 걱정 마세요. 제가 내일 지도도 드릴게요.”

“고마워요. 진. 덕분에 길 잃을 일은 없겠어요.”

“이런 것쯤은 일도 아니죠.”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진에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뭐 하러 가세요?”

“아, 오랜만에 시간이 비어서 잠깐 뒤뜰에 가려고요.”

“뒤뜰이요?”

“실은 취미로 토끼를 키우고 있거든요.”

진은 소중히 품에 안고 있던 바구니를 냉큼 보여 주었다. 초록색 천을 걷어 내니 바구니 안에 신선한 풀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자주 봤던 엉겅퀴와 민들레부터 이름 모를 줄기 식물이 보였다.

“와, 먹이 주러 가는 거예요?”

“네. 오전에 가려고 했는데 일이 밀려서요.”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괜찮으시면 손을 빌려 드릴게요.”

“당연히 괜찮죠!”

바구니 천을 덮은 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 뒤뜰로 가며 문득 랩실에서 다육이를 키웠던 지인이 떠올랐다. 맨날 삭막한 연구실에 갇혀 있으니 건강한 취미를 가져 보겠다고 다육이를 사들였다. 물론 며칠 못 가서 연구실의 음기를 전부 빨아먹고 말라비틀어졌지만. 우울한 생각은 그만두고 진에게 물었다.

“허락만 받으면 동물을 키워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마물도 있는데, 동물은 당연히 괜찮죠.”

“마, 마물을 교내에서요?”

“네. 하지만 마물을 마주칠 일은 잘 없어요.”

잠깐. 잘 없다는 말은… 곧 아예 없진 않다는 거잖아. 교내에서 마물을 볼 수 있다는 건가? 시골길을 돌아다니는 고라니처럼 이곳엔 마물이 돌아다니는 건가?!

혹여 위험한 마물을 마주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위험해도 일단은 보고 싶다는 기대가 뒤섞였다. 마물에 대한 상상으로 인해 상기된 표정을 본 진이 의아하게 물었다.

“혹시 마물을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예전에 딱 한 번이요.”

“아~ 그럼 잘됐네요. 곧 만나게 되실 거예요.”

음? 그게 무슨 의미지. 실은 키우는 토끼가 마물인 거 아니야? 의도를 물어볼 새도 없이 진은 뒤뜰에 도착하자마자 울타리를 넘었다. 푹신한 잔디가 깔린 들판에는 걱정과 달리 멀쩡한(?) 토끼 열댓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다. 살짝 튀어나온 주둥이로 제 몸만 한 풀을 먹는 새하얀 솜뭉치를 보니 안심되었다. 진은 바구니에서 풀을 한 움큼 쥐어 내게 건네주었다.

“구석에 있는 아이들까지 먹을 수 있도록 이곳저곳에 두시면 돼요.”

“네. 저는 저쪽에 다녀올게요.”

짐을 울타리 주변에 내려놓고 진에게 부탁받은 대로 구석구석 간식을 내려놓았다. 계속 잔디만 먹어 식상했는지, 여러 토끼가 냉큼 풀을 향해 달려갔다. 이런 귀여운 생물들 사이에 혹여 마물이 숨어 있을까 봐 불안해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유독 구석에 있는 새까만 토끼가 눈에 띄었다.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토끼는 먹이를 보고도 제자리를 지켰다. 나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면, 몸집이 큰 사람에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고…. 흰색과 점박이 사이에서 온통 새까만 털 때문에 혹여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가장 먹음직스러운 민들레 풀을 들고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 이리 와서 먹어. 다른 애들 먹는 거 보이지? 이상한 거 아냐.”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풀을 흔들었지만 토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새까만 토끼는 흰색 개체에서나 보일 법한 빨간 눈을 갖고 있었다. 몇 시간을 갈고 닦은 홍옥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에서 기묘한 마력을 느꼈다. 해질녘 노을을 등진 토끼는 그림자 속에서 두 눈동자만 흉흉하게 빛내고 있었다.

“…어…?”

그제야 눈치챘다. 저 토끼… 아니, 토끼를 닮은 무언가는 나와 마주친 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들판에 있는 다른 토끼들은 간식을 먹으면서도 수십 번씩 코를 벌름거렸다. 그에 비해 이 토끼는 냄새를 맡기는커녕 숨도 쉬지 않았다. 그럼 저것은 대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함을 느끼자마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내 손만 한 생물이 내뿜는 오라에 겁을 먹어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새빨간 눈동자는 변함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멀리서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잊고 있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며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빈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달려오는 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민들레 풀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 아뇨. 얘가 먹이를 못 먹는 것 같아서 따로 챙겨 주고 있었어요.”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키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진이 한 걸음 옆으로 가서 내 뒤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시선이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꼭 빈 들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꾸만 떠오르는 안 좋은 예감을 지우려는데, 진이 쐐기를 박았다.

“누굴 말하는 거예요?”

“네? 여기 털이 새까만 토끼….”

황급히 뒤를 돌아 손가락으로 토끼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 들판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던져 놓은 민들레 풀도 함께 사라졌다.

“전 검은 토끼는 안 키우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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