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처음 숲속에 떨어졌을 때 험한 산길을 나 홀로 걸어 내려오게 한 기사들을 욕했었다. 왜 자기들만 말 타고 나는 낡은 신발로 돌부리를 밟게 하느냐고. 하지만 마차로 약 1시간을 달려온 지금- 속으로 그들의 인성에 대해 재평가를 내렸다.
“우욱….”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심지어 배를 타도 멀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교통수단 멀미는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단어인 줄 알았다.
그래. 마차를 타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차 바퀴는 고무 타이어가 아니었기에 충격을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딱딱한 바퀴로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달려도 힘겨운데, 돌과 모래로 가득한 흙길을 달리니 계속 몸이 덜그럭거렸다.
격한 흔들림 속에서도 눈을 감은 아스레인은 선잠에 든 것처럼 평온했다. 그 탓에 잠시 멈춰 달라고 깨울 수가 없어서 속으로 주기율표를 외우며 어서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죄송합니다. 교수… 우읍….”
마차가 멈추고 아스레인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눈앞이 온통 새파랬다. 그가 갓 짜낸 우유만큼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은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중간에 멈춰 달라 말하지 않았나.”
“…우윽, 아니…. 그건… 우웨엑.”
“미련한 것.”
안겔루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기둥을 붙잡고 거나하게 헛구역질하는 학생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혼미한 와중에 아스레인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곤 다급히 손을 휘적거렸다. 안 그래도 귀한 옷에 차를 흘렸는데 토사물까지 묻히면 더는 뵐 면목이 없다. 다행히 먹은 것이 없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 웁…!”
“말할 건지, 토할 건지 하나만 하게.”
쿵쿵거리는 가슴을 천천히 문지르며 기둥에서 손을 떼니 그 아래 새겨진 글귀가 보였다.
‘바라는 자는 구할 것이고,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학구열이 묻어나는 슬로건을 보면서 토를 했으니, 이제 아스레인이 나를 어떤 놈으로 볼지 상상도 안 된다.
“사람이라도 부를까.”
“아뇨. 괜찮습니다. 추한 꼴을 보였네요. 하하… 하….”
“음, 나름 진귀한 광경이었어. 수업 중이라 나 혼자 보길 다행이네.”
위로인 건지 놀리는 건지 헷갈려 곰곰이 생각하다가 후자로 결론을 내렸다. 곱씹을수록 민망해져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를 애써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흙먼지가 묻은 짐 가방을 들고 똑바로 서니 아스레인이 말했다.
“아무튼 안겔루스 대학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제야 커다란 대학 건물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직사각형 구조로 이루어진 학교는 가운데 널찍한 마당을 두고 각 꼭짓점에 첨탑 형식 건물이 들어섰다. 본관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샛길엔 각종 편의 시설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놓였다. 부유한 재단을 배후에 둔 사립 대학에서나 볼 법한 규모였다. 앞서 걸어가던 아스레인은 간단히 설명을 이었다.
“안겔루스 대학은 선황께서 지은 별장을 개조해 만든 학교다. 네 개의 건물은 마물학부, 약초학부, 마법학부, 무술학부가 나눠서 쓰고 있지. 자네는 앞으로 내 휘하에서 마물학을 공부하게 될 것이네.”
흔히 접할 수 있는 정치학이나 국문학이 아닌 학문에 저절로 흥미가 일었다. 심지어 마법학이라니! 마물학에 과하게 집중한 나머지 마법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세계엔 대부분이 마력을 갖고 있으나, 그 마력을 능히 쓸 수 있는 인재는 극히 적다고 들었다. 하지만 기대를 쉬이 접을 수가 없었다. 왜, 흔히 차원 이동 소설을 보면 하나씩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그렇다 할 능력이 없었으니 마법에 가능성을 걸었다.
“저도 마법학을 배우면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아스레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퍽 상냥하게 말했다.
“자네가 가진 희박한 마력으로 무슨 마법이 일어나겠나.”
“…아.”
“마법도 자존심이 있는데.”
내용은 결코 상냥하지 않았지만. 젠장. 헛된 희망이 아주 깔끔하게 접혔다.
긴 복도를 거닐며 아스레인은 친절히 학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오직 지식만을 추구하는 안겔루스 대학은 무려 평민일지라도 총명한 머리만 갖고 있다면 귀족의 후원을 받아 원하는 만큼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웅장한 벽으로 둘러싸인 황제 직속 도시에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유일무이한 장소다. 학년은 나뉘어 있지 않으나 수업을 듣는 이를 학생이라 부르고, 교수를 도와 연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이를 원생이라 부른다.
“그러니 이곳은 신분이 아닌, 오직 지식만이 권력이다.”
아카데미 형식인지라 호칭이라도 달라질 줄 알았건만, 결국 나는 현대에 있든 소설 속에 있든 ‘대학원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스레인은 직사각형 구조의 본관에서 벗어나 샛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넝쿨로 뒤덮인 아치를 지나자 언덕을 깎아 만든 공터가 펼쳐졌다. 비교적 아담한 독채가 나란히 놓인 모습은 흡사 바다 근처에 삼삼오오 모인 펜션 같았다.
“여기부터가 연구실이다. 원생은 대부분 이곳에서 생활하니 길을 기억해 두도록 해.”
음. 낭만적인 펜션이 아니라 음기 가득한 감옥이었구나. 잠시나마 감성에 젖었던 것이 무색해졌다. 어쩐지 학교를 벗어나서 아치를 넘자마자 생기가 희미해지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다.
아스레인은 일렬로 놓인 독채 중 가장 구석에 놓인 건물로 걸어갔다. 다른 건물과 눈대중으로 비교해도 훨씬 큰 연구실은 상당히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얼마나 많은 대학원생의 원한이 쌓여 있기에 신기 없는 내가 봐도 불안한 걸까. 어두운 연구실을 마치 심령 체험하는 폐가처럼 바라보며 꺼림칙한 반응을 보였다.
“이 연구실은 유독 어둡네요. 대체 어떤 교수님이 쓰시는….”
“내 연구실이네.”
“하, 하하. 너무 밝으면 눈 건강에 해롭죠. 역시 현명하십니다.”
문 옆에 붙은 명패엔 ‘디아벨 아스레인 교수’라 똑똑히 적혀 있었다. 하마터면 본인 앞에서 연구실에 대해 안 좋은 평가부터 남길 뻔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아스레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가늘게 뜬 금안이 마치 ‘애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암울한 연구실로 향한 아스레인은 문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매일 아침 시계탑에서 종이 세 번 울리면 수업이 시작되네. 자네는 따로 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지만, 시간에 맞춰 연구실로 오도록 하게나.”
“그럼 종이 치기 전에 연구실로 오면 될까요?”
“음. 그대로 오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아스레인이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옷을 전부 껴입었는데도 집요한 시선 탓에 한 꺼풀씩 벗겨지는 기분이다. 하아. 밑도 끝도 없이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이 마지못해 말했다.
“사람을 시켜서 입고 다닐 옷을 기숙사로 보내 주마.”
“교수님께서 보기에 제 꼴이 좀… 그런가요?”
“그건 자네가 직접 거울을 보면 알 걸세.”
“넵.”
나름대로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깔끔한 것을 입은 건데 그가 보기엔 한없이 초라한 모양이다. 이젠 아멜리 백작의 하인이 아닌, 아스레인 휘하의 원생으로 머물게 되었으니 그만한 차림새를 갖춰야 했다.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스레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진과 함께 대학 부지를 돌아다니며 길을 익히게.”
“진…이 누구죠?”
“옆 연구실에 속한 약초학 원생이지. 내 연구실에서 마지막 원생이 나간 후로 이쪽 일까지 도맡고 있었으니 달리 궁금한 것은 전부 진에게 물어보게나.”
같은 처지인 사람을 만날 수 있단 기쁨도 잠시, 그가 두 연구실을 관리하고 있었단 말에 소름이 끼쳤다. 몸은 하나인데 모셔야 하는 교수님이 두 분이라니. 아무리 노동에 익숙한 나조차도 저절로 고개를 젓게 되는 상황이었다. 일단 마주치면 당장 위로부터 건네야겠다.
“지금 옆 연구실로 가면 되나요?”
“아직. 그리 어려운 일을 부탁하진 않았으니 곧 돌아올 걸세.”
“아,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네요. 그 후엔 뭘 하면 되나요?”
“진과 길을 익히고 나면, 오늘은 이만 됐으니 기숙사로 들어가서 쉬어도 좋네.”
“…예?”
기숙사에서 쉬어도 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돌아가도 되는 건가.
문득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옆 랩실 동기들과 카페에 갔을 때, 분명 지도 교수가 자기 커피는 필요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 커피만 들고 랩실로 돌아가니 ‘진짜로 안 사 온 거냐’며 눈치 없단 욕을 먹었다. 그 후로 꼬이고 꼬인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골머리를 썩었던가.
만약 아스레인이 연구실에 한번 들르라는 걸 에둘러 말한 거라면, 이대로 돌아간 후에 불어닥칠 폭풍이 두렵다. 벌써부터 감이 없다고 욕먹고 싶진 않단 말이다. 현관에서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불안하게 맴돌다가 불쑥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무슨 소리지?”
“오늘 제가 할 일은 이게 끝인지….”
“그럼 뭘 더 바라나. 새로 대학원생이 들어왔으니 연회라도 열까.”
“예?!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우물쭈물하다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시험이나 자격 증명이 필요하지 않은가 해서요. 후견인 문제도 있고….”
아무리 이 대학이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지만, 나는 낙하산 그 자체였다. 불안한 나머지 계속 뒷말을 흐리자 아스레인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만 말하라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드니 올곧은 금안과 정확히 마주쳤다.
“누가 쫓아내기라도 할까 두렵나?”
“아, 아뇨.”
“다른 곳은 몰라도 연구실에 관련된 일은 내 권한이지.”
쉽게 초조한 속내를 들켜 버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했으나 결코 오만하지 않았고, 흔들림 없이 차분하지만 동시에 마냥 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내 결정에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가지런한 눈썹 한쪽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누구라도 아스레인이 원하면 안겔루스 대학 연구실에 앉힐 수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그가 학교로부터 신뢰받고 있단 얘기겠지.
출신이 불분명한 평민인 나는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못내 찜찜했다. 순식간 얼굴 위에 스친 불안을 읽은 아스레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껏 탐구하고, 생각을 멈추지 말게. 그게 자네가 해야 할 일이네.”
마치 안전장치 없이 허리에 줄 하나만 달랑 묶고 절벽으로 달려간 기분이다. 그리고 그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스레인이다. 절대 그가 먼저 줄을 놓을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 하지만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그의 첫 제자는 아니지만 반드시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