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7/305)

#07

“예? 그게 무슨….”

벌써 두 번이나 대놓고 조롱당한 백작은 드디어 낌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하찮은 내가 자신보다 똑똑하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호탕한 웃음이 뜨거운 태양 아래 수분처럼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윽고 살이 퉁퉁 부어오른 손이 찻잔을 성의 없게 건드렸다.

“흥. 제아무리 똑똑해도 하인입니다. 하인이 꽃을 가꾸는 법을 알아서 뭐 합니까? 놈에게는 땅도, 씨앗도, 그 꽃을 피워 낼 충분한 영양분도 없습니다.”

그래. 조용히 차나 따라라 이거지. 아직 내 명줄을 잡고 있는 건 저 퉁퉁한 손이었기에 불필요한 언행을 삼갔다. 조용히 찻주전자를 들어 백작의 잔에 차를 따르고 다른 잔을 확인했다. 백작이 재미없는 얘기를 잇는 내내 아스레인도 차를 꽤 많이 마신 모양이다. 마땅히 차를 따라 주려고 걸음을 옮긴 순간, 발등에 무언가 턱 하고 걸렸다.

“우왓…!”

어디 붙잡을 데가 없어 찻주전자를 든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댕그랑. 살짝 금이 간 포트가 바닥을 짚은 손 옆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까칠까칠한 카펫 위로 두 무릎을 내리꽂은 후, 아픔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의아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넘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내 발에 걸리는 멍청한 짓은 안 했고, 밟아서 미끄러질 것도 없고, 딱히 발에 걸릴 장애물도 없다. 카펫뿐인 맨땅에서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옆을 보니 테이블 아래서 얄밉게 까딱거리는 백작의 작은 발이 눈에 띄었다. 저거다. 저 자식이 일부러 발을 걸어 나를 넘어뜨린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전후 사정 고려하지 않고 당장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이런 벌레만도 못한 놈!”

다짜고짜 튀어나온 불호령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 신발에 차를 흘린 것도 모자라서 이젠 귀한 손님의 옷에도 차를 들이붓는구나!”

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아스레인의 깔끔한 남색 코트에 이상한 얼룩이 졌다. 젠장. 넘어지면서 티포트 뚜껑이 열려 안에 있던 레몬차가 왈칵 나온 모양이다. 차를 어느 정도 식혀 온 덕분에 화상은 입지 않았겠지만, 하필이면 진저와 설탕을 섞은 레몬차여서 상당히 끈적끈적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입술만 뻐끔거렸다. 아스레인은 별말 없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묵묵히 얼룩을 닦았다. 유치한 술수에 넘어간 나는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일련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코앞에 삿대질을 했다.

“네가 또 그럴 줄 알았지. 어서 교수께 사과하지 않고 뭣 하나.”

“죄송….”

“뚫린 입으로만 말하는데 그게 진심인 줄 누가 알겠느냐?!”

그 순간 맹렬한 손이 머리를 가차 없이 후려쳤다. 퍽! 우악스러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바닥을 짚었다. 대체 얼마나 세게 때린 건지, 뒤통수를 맞은 순간 눈앞이 핑 돌더니 잠시 동안 암전이 찾아왔다.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을 땐 마치 아스레인에게 절을 올리듯 머리를 숙인 채였다.

“기어코 네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죄송….”

“은혜도 모르고 멍청하게 기어오르는 네 녀석은 필요 없다!”

이건 명백한 화풀이다. 특별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아스레인에게 화를 낼 수 없으니, 만만한 내게 감정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것이다. 끊임없이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한편으로 억울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아스레인을 붙잡고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라 애원해도 과연 그가 믿어 줄까. 아무리 그가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을지언정, 협력 관계를 맺은 백작이 아니라 처음 보는 하인의 편을 들어 줄 리 만무하다.

“아스레인 교수. 다친 곳은 없습니까? 이놈이 감히 결례를….”

“그가 차를 적당히 식혀 온 덕에 괜찮습니다.”

정작 장본인은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백작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신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 내게 화를 쏟아부었다. 짧은 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아스레인이 백작가를 떠나는 순간, 나는 한 달 전 그날로 돌아가게 된다. 이번엔 완전히 백작의 눈 밖에 났으니 아무리 빌고 또 빌어도 다시 돌아올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넘어가 주니 주인을 얕본 게지. 당장 산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마.”

아, 눈 딱 감고 도망칠까. 죽을 각오로 대문으로 달려가면 뚱뚱한 백작이 나를 잡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대신 슈펜 기사단장이 허리춤에 찬 날카로운 칼로 허름한 옷가지와 창백한 살가죽을 꿰뚫겠지. 어떻게 해도 결과는 똑같다. 터무니없는 계략으로 죽을 상황에 놓였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무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허무하게 모든 것을 포기한 그 순간이었다.

“아멜리 백작.”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날카로운 분위기를 갈랐다. 아스레인의 태도는 변함없이 여유로웠으나 처음과 달리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어째 백작이 불같이 화를 낼 때보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리 귀찮은 일을 자처하십니까.”

“뭐… 뭐요?”

“굳이 산까지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불손한 하인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죠.”

설상가상으로 아스레인은 내 편을 들어줄 일말의 여지도 없어 보였다.

“허허, 역시 말이 잘 통합니다. 그 방법이란 게 대체 뭡니까?”

무릎 앞에 놓인 가지런한 구둣발이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멈췄다. 두근, 두근. 긴장감에 전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쉼 없이 뛰었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비록 특별할 것 없는 한 달이었으나 잠시나마 마물을 만났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내가 동경하던 학자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다.

“백작의 그 소중해 마지않는 구두에 차나 쏟고,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이 저 아이를-”

궁상맞은 회상이 끝날 즈음 아스레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거두겠습니다.”

“하하, 똑똑한 선택… 예?”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황당한 선택이었다. 나도, 백작도 말문이 막혀 입술을 움찔거리는 게 전부였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이곳에 오로지 그만이 깊은 바다처럼 고요했다. 이윽고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조용히 다가온 그림자는 곧 시야 안에서 새하얀 손이 되었다. 어렴풋이 잉크 내음을 풍기는 두 손가락이 내 턱 끝을 붙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때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이자를 제게 버리시지요.”

올곧은 신념으로 굳게 다져진 금색 눈동자였다.

“…….”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이젠 환청까지 듣는 걸까. 꿈이라면 부디 깨지 않길 바랐다. 아니, 꿈이 아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매가 방금 나를 거두겠다고 선언했다. 턱 끝에 맺힌 타인의 온기가 현실이란 걸 알려 주듯 선명히 느껴졌다. 지금 당장 감사하다며 짐을 챙기지도 못할망정 의구심이 먼저 일었다. 정말… 진심일까? 귀를 의심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스레인 교수. 지금 농담하자는 거요…?”

“제가 그리 농담을 잘하는 인물로 보였다면 유감입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호박을 박아 넣은 것같이 황홀한 금안이 빛났다. 마치 인어에게 홀린 선원처럼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장갑을 낀 손이 내게서 떨어진 것도 그쯤이었다. 아멜리 백작은 이 상황이 전부 믿기지 않는다며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놈은 내 휘하에 있습니다.”

“백작께서 방금 필요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대단한 백작께서 단 두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콧대가 천장을 찌르는 그는 쓸모없는 자존심 때문에 결정을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 그러니 불과 몇 분 전에 ‘배은망덕한 놈은 필요 없다’고 길길이 날뛴 백작이 재활용품 쓸어 담듯 나를 다시 주워 오진 못할 것이다. 백작의 자존심과 고작 하인의 경중을 따지자면, 물론 자존심이 더욱 소중할 테니까.

아아, 그 재수 없는 자존심이 이런 방식으로 나를 도울 줄은 몰랐다. 아스레인이 품은 저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깊은 혜안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친히 돼지우리에서 빼 준다는데 얌전히 목줄을 넘겨 주는 수밖에.

“쓸모없는 놈을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마침 대학에서 연구를 도울 만한 이를 구하던 중이었습니다.”

“허, 이놈이 연구를요?”

대학에서 연구를 돕는다. …결국 2년 전 그날처럼 대학원생으로 스카우트된 거였다. 멀리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스레인은, 내가 지금껏 만난 허영뿐인 속물 교수들과 전혀 다르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귀하게 내린 선택을 혹여 바꾸지 않도록 최대한 숨을 죽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말을 고르던 아스레인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자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게으른 자는 며칠을 못 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연구실을 관둔 이가 이제 열 손가락을 넘어갑니다.”

“그럼 이 멍청한 놈은 당연히 교수의 도움이 못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아스레인은 얄궂게 올라간 입꼬리를 어루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이자가 보기보다 총명하여 살려 두기로 한 건, 백작께서 내린 결정 아니었습니까.”

“…그건….”

“게다가 제 앞에서 마물에 대한 지식을 증명하도록 명령하기에 제게 총명한 하인을 자랑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

“마침 더는 필요 없다고 하시니, 전 백작의 안목을 믿고 이 아이를 고른 겁니다.”

순수하게 상황만 놓고 보자. 백작의 심기를 건드린 내가 극적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지식’ 덕분이다. 즉, 백작은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인이며,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은 내가 명석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백작이 모든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 자신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게다가 고작 시험하는 용도로 아스레인을 이용했으니 무례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놓은 덫에 제 발이 붙잡힌 백작은 불안정하게 떨리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멈추지 않았다.

“선대의 면모를 따라 하인을 아끼는 백작께서 설마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그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은….”

“그건 큰 오해요!”

“그럼 다행입니다. 백작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그런 얕은수를 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싸늘해진 접견실 안을 가벼운 웃음소리가 채웠다. 아스레인은 오로지 백작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만 가지고 올가미를 만들었다. 금안을 가진 매는 상공을 맴돌다가 빈틈을 보인 먹잇감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톱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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