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6/305)

#06

퍽 이상한 일이었다. 아멜리 백작은 고작 하인 하나를 산에 묻기 위해 기사단장을 쓸 만큼 못되어 먹은 놈이었다. 그런 백작이 나한테 기회를 줘?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다. 한 달간 지켜본 백작은 결코 아랫사람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속이 시커먼 놈에게 만만찮은 꿍꿍이가 있단 뜻이다.

어떤 폭탄을 터트릴지 몰라 고슴도치 가시 세우듯 경계하며 백작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후 아스레인에게 차를 내어 주는데, 갑자기 백작이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교수께 허튼짓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예?”

생뚱맞은 소릴 하기에 놀란 눈으로 아멜리 백작을 쳐다보았다. 뻔히 시선을 느낀 백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스레인이 먼저 아멜리 백작에게 물었다.

“허튼짓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하하, 그게 말입니다…. 예전에 이 멍청한 놈이 제가 가장 아끼는 구두에 일부러 차를 쏟았지 뭡니까.”

“…일부러요?”

역시. 왠지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싶었다. 아스레인이 내게 관심을 보였다는 말은 전부 구실일 뿐이다.

“예. 그래서 아스레인 교수께 똑같은 무례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한 말입니다.” 

아멜리 백작. 아니, 이 망할 자식은 내게 망신을 주기 위해서 기어이 접견실로 부른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백작에게 차를 쏟은 것이 고의가 아니라고 증명해 봤자 소용없다. 비쩍 마른 고기까지 뜯어먹길 좋아하는 하이에나의 덫에 보란 듯이 걸려 버렸으니 목숨이라도 구걸하는 수밖에.

초조하게 아스레인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는 입에 풀이라도 붙인 듯 조용했다. 그사이 백작은 지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의 벌을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말고. 이상한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당연히 잊을 리가 없다.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니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무슨 벌을 내리셨습니까?”

“벌이라고 해도 큰 건 아니었습니다. 그야 선대께서도 워낙 종에게 친절하셨기에 평소 저도 그 면모를 닮으려고 노력하니까요. 하하.”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헛소리를 듣곤 나도 모르게 마른기침을 뱉었다. 뭐? 종에게 친절해?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해라. 심심하면 아직 성인도 아닌 하인에게 겁을 주질 않나, 음식 투정을 하질 않나, 뻔히 내가 듣는 걸 알고도 몬테나 숲에서의 일을 들먹이질 않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껏 목격한 악행을 동네방네 불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후환이 두려워 손을 꽉 쥐며 참는 것이 전부였다. 맞잡은 손이 떨리는 걸 흘겨본 백작의 입꼬리가 탐욕스럽게 올라갔다.

“홧김에 산짐승의 먹이로 던지려다가, 마음씨 좋은 제가 기회를 줬습니다. 살아 있을 가치를 증명하면 한 번 더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말이죠.”

뻔뻔함이 극을 달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지금 아니면 아스레인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기에 될 수 있는 한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달그락. 찻잔을 우아하게 차 받침에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아스레인이 물었다.

“어찌 가치를 증명했답니까.”

“하하, 놀라지 마십시오. 이놈이 갑자기 마물에 대해 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였다. 얼굴 위로 또 다른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분명 아스레인의 것이다.

“호오, 마물에 대해서요?”

“예, 예. 쥐새끼 같은 자식이 언제 서재를 청소하다가 책을 훔쳐봤나 봅니다. 슈펜 기사단장 말로는 꽤 심도 깊은 지식을 토해 냈다더군요. 그래서 약속은 약속이니 살려 뒀습니다.”

“그것참 흥미롭군요.”

목숨이 안줏거리가 된 와중에도 아스레인에게서 ‘흥미롭다’는 말을 들어 기쁘다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거겠지. 속에 쌓인 한탄이 금방이라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은 나설 차례가 아님을 알기에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멜리 백작의 퉁퉁한 손이 나를 향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때 기사단장 앞에서 했던 말을 아스레인 교수께도 한 번 읊어 보거라.”

“…예?”

“드디어 네가 틀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재롱이라도 떨라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백작의 뒤틀린 심보를 고려하면 내게 창피를 주기 위해서 벌인 일이 분명하다. 게다가 지식을 털어놓을 상대는 검술밖에 모르는 기사단장이 아니라, 이 분야의 전문가다. 조금만 헛소리를 했다간 바로 망신을 당할 것이다.

“왜. 막상 그때처럼 거짓을 고하려니 겁이라도 나는 게냐?”

하지만 여기서 지레 겁먹고 물러설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을 폄하하기 바쁜 아멜리 백작은 이것만큼은 평생 모를 것이다. 지금 당장 아스레인의 눈에만 들 수 있다면, 기꺼이 물구나무라도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잘난 입을 어디 한번 놀려 봐라.”

실수하지 않으려 조용히 기억을 더듬는 내가 겁먹어 말 못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아멜리 백작은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자신의 멍청함을 모르는 오만한 자에게 비웃음 사는 일만큼 자존심 상하는 경우는 없다. 바짝 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차분히 운을 띄웠다.

“몬테나 산 중턱에서 2급 위험 마물 ‘오파러스’를 보았습니다. 체구는 성인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보아 최소 3년은 넘게 산 성체였으며, 깃털이 햇빛을 받아 오묘하게 금색을 띠었으니 발정이 오지 않은 수컷으로 사료됩니다.”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수놓인 화려한 카펫을 멍하니 바라보며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날을 회상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져 정신이 없었지만, 그때 처음 마주한 마물에 대한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사실 보고는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고 사적인 감상은 최소화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또한 부리 끝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소… 아니, 책에서 오파러스는 나무 기둥에 부리를 비벼 끝을 더욱 날카롭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누군가 사육하고 있는 마물이 아니라 몬테나 산에 뿌리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하마터면 소설에서 봤다는 얘길 꺼낼 뻔했다. 어색하게 말을 바꿨으나 아무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계속 말해 보게.”

아스레인이 말했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연못으로 떨어져 수면 위에 이는 파동처럼 잔잔한 목소리였다. 그 덕에 온몸을 지배한 긴장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만 근처에서 꽤 큰 소리를 냈는데도 오파러스는 저희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필시 인기척을 알아채고 경계하리라 생각했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와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아스레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후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심심한 사과의 말을 얹었다.

“혹여 제 행동이 무례했다면 부디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식은땀이 가득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온 감각이 날카로워져 미약한 숨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였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아스레인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지는 결코 죄가 아니다. 하나 무지를 알고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나태함은 죄가 되겠지.”

마치 봄을 알리는 햇살이 얼어붙은 대지를 쓰다듬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오파러스는 마물 중에서도 상당히 지능이 높은 축에 속하지. 굶주렸거나 보호할 대상이 근처에 있지 않은 이상,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도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아.”

“…아….”

“햇볕 아래서 깃을 고르고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있는 건 그만큼 안정된 상태임을 뜻하네. 주변에서 소리가 나더라도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먼저 공격하지 않아. 유한 성격인 만큼 사람에게 쉽게 사육되고, 그만큼 자주 사냥당하지.”

아스레인은 내가 간과한 사실을 친절하게 짚어 주었다. 그것도 소설에 나온 내용보다 훨씬 자세한 정보였다. 자기 자랑만 쓸데없이 늘어놓는 강의가 아닌, 유익한 내용을 가르침 받은 것이 얼마 만이던가.

“이제 알겠나.”

“예, 교수님.”

이곳이 강의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배울 점 많은 선생과 그를 따르는 학생. 줄곧 이상이었던 것이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 순수한 기쁨이 퍼졌다. 그때 노래하듯 유려한 목소리가 반쯤 새어 나간 정신을 붙잡았다.

“신기하구나. 비단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가진 지식을 활용하여 제대로 관찰하다니.”

“…하하….”

“대체 어디서 배웠지?”

소설에서 본 내용이라고…는 죽어도 말 못 한다. 불안하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못마땅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만 입을 다물고 대화에서 빠지라는 눈치였다. 크흠! 아멜리 백작은 대놓고 헛기침을 뱉으며 코앞에서 날아다니는 파리 쫓듯 손짓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대로 입을 꾹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하라고 시켜서 했을 뿐인데, 백작은 잔뜩 심통이 났다. 이후 얼마나 커다란 불똥이 내게 튈지 가늠하기도 싫었다.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초조하게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연 건 백작이 아닌 아스레인이었다.

“이 저택 안에 꽤 커다란 서재가 있는 줄 압니다.”

“아, 도서관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책이 있지요. 그중엔 교수가 쓴 책도 몇 권 있습니다.”

“그것참 영광이군요.”

부드럽게 화제를 돌리는 아스레인 덕에 분위기가 다시 평화로워졌다. 평소 커다란 서재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는 백작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며 호탕하게 웃었다. 무슨 속내인지 모를 아스레인은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런데 그 책을 전부 읽고도 이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시는 겁니까.”

제 자랑만 줄줄 늘어놓던 곱창 같은 입술이 우뚝 멈췄다. 이번에도 날카로운 기세가 정곡을 찔렀다. 일순 할 말을 잃은 백작은 혹여 얕은 밑천이 드러날까 봐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흠, 흠. 집무가 워낙 바빠 서재에 자주 들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백작의 서재는 말 그대로 보기 좋게 가꿔진 정원 같습니다.”

“아, 알아봐 주는 겁니까? 아름답게 설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차마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 멍청이는 아스레인이 진심으로 서재 인테리어를 칭찬하는 줄로 착각한 모양이다.

신이 난 백작은 누구도 궁금하지 않은 서재에 대한 정보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젠 우습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어쩌다 맥락 하나 못 읽는 놈이 제국 한편에 영토를 쥐게 된 걸까.

잠자코 백작의 헛소리를 들어 주던 아스레인이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에 반해 이자는 그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법을 아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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