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5/305)

#05

에브게니아 공작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시오 가문이 오래도록 카르사 제국을 통치했다. 시오 황제는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는 한편 안팎으로 적에게 둘러싸였다.

밖에서는 국경이 맞닿은 타국과의 전쟁. 그리고 안에서는 마물과의 대립이 이어졌다. 정복을 빌미로 시오 황제는 마물을 무자비하게 토벌했고, 서식지를 잃은 마물은 급기야 민가까지 내려오기 시작했다. 칼에 피를 묻힌 죄를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게 된 것이다.

그때 평화와 공존을 외치며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 에브게니아 공작이었다. 결국 에브게니아는 황실에 반기를 들었고, 카르사 제국에서 시오 황족의 혈통은 끊기게 된다.

당시 에브게니아 가문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 바로 ‘아스레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출중한 마법이 노한 마물을 진정시키는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인재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공작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고만 했을 뿐.

하지만 출신이 뭐 그리 중요한가.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던 마물의 문제를 아스레인은 손쉽게 해결했다. 크게 기뻐한 에브게니아 1세는 ‘아스레인’에게 백작에 준하는 작위를 하사했다. 그로부터 5대째 가문을 이어받은 백작이 내가 존경하는 디아벨 아스레인 교수다.

“성심성의껏 모셔야 한다.”

“예!”

평소엔 부드러운 시종장도 오늘만큼은 잔뜩 긴장한 채였다. 부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 아멜리 백작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을 나란히 문 앞에 세웠다. 전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자세로 서 있으니 꽤나 장관이었다. 뒤늦게 나온 백작은 성벽처럼 세운 하인들이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단 위에 섰다.

“흐음, 부족한 것 없이 준비했겠지?”

“물론입니다. 백작님.”

지방에 억눌려 괴상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쯤 고상하게 집무실에 앉아서 돼지같이 미트파이나 처먹고 있어야 할 백작이 웬일로 문까지 납셨다. 역시 아스레인은 다르다는 건가. 백작이 나를 보지 않는 틈을 타 눈으로 온갖 욕을 쏘았다. 그 시선이 따가웠던 탓일까.

“흥, 실수를 하면 바로 몬테나 산에 던져 버릴 것이야. 제 할 일도 못 찾고 쥐새끼처럼 부엌을 오가는 저 천박한 놈이 어떻게 됐는지 봤겠지.”

백작은 보란 듯이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어린 하인들은 두려움이 찬 눈으로 나를 한 번 흘겨보고 다시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몬테나 산에서의 사건 이후로 백작은 심심하면 나를 본보기로 하인들에게 겁주곤 했다. 치졸하기 짝이 없다.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근육이 붙지 않아 비실거리는 몸을 최대한 옷으로 가렸으나 초췌한 안색은 어찌할 바가 없었다. 오늘따라 유독 진한 다크서클을 어루만지던 그때였다.

언덕 너머에서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하인이 발꿈치를 세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언덕을 바라보았다. 곧 늠름한 말의 갈기가 드러났다.

“다들 준비하거라.”

달그락, 달그락. 점점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별장 앞에 고급스러운 마차가 멈췄다. 말끔하게 정장을 갖춘 마부가 나와서 정중히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에서 나올 아스레인과 마주치기 전에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시오. 아스레인 교수.”

아멜리 백작이 어울리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내가 직접 마주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입 안이 말라 나도 모르게 부르튼 입술을 잘근거렸다. 성격을 드러내듯 정갈한 발소리가 정확히 아멜리 백작 앞에서 멈췄다.

“반갑습니다. 아멜리 백작.”

잠깐만. 이 목소리… 왜 익숙하지? 불안한 예상이 목덜미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밴 손을 맞잡으며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오는 길이 꽤 고되었을 텐데, 괜찮았습니까. 하하!”

“예. 문제없습니다.”

다시 들어도 착각이 아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유려한 발음, 끝에서 뚝 떨어지는 어투까지. 난 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지나가다 우연히 흘려들은 것이 아닌, 무려 이 목소리의 주인과 대화를 나눴었다. 머리에 있던 피까지 빠짐없이 내려가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일하는 이들을 밖에 세워 둘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귀중한 손님이시니 마땅히 다들 나와서 인사해야지요.”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선물할 책을 골라 준 사람이… 결국 그 선물을 받을 사람과 동일 인물이었다고?!

“일단 들어가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까요.”

“…그러죠.”

외형을 소설에서 충분히 접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설마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로 동네 서점에서 볼 줄은 몰랐다. 게다가 글로만 묘사된 사람을 목소리로 분간할 수 있을 리 없는데, 그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

“다들 제가 직접 선별한 아이들이니 교수를 극진히 모실 겁니다.”

백작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위풍당당하게 계단을 앞서 갔다. 그의 뒤를 아스레인이 따랐다. 뚜벅. 뚜벅.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빌었건만,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닥을 가로지른 긴 그림자였다. 내 앞에서 멈춘 두 개의 구둣발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넓은 무대 위에서 독백을 맡은 배우가 된 것처럼 내 머리에만 뜨거운 조명이 쏟아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몰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천천히 발끝에서부터 그를 훑어 올라가자 자연스럽게 소설 대목이 떠올랐다.

“간밤은 잘 지냈나.”

옅은 황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릴 때면, 가을을 머금은 갈대밭을 거니는 착각에 휩싸인다. 노을처럼 따스한 색을 가진 황금빛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항상 차가운 감정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고귀한 품격으로 벽을 치니 어차피 먹지도 못할 포도를 탐내는 여우처럼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보게 된다. 그럼 그는 독수리의 발톱 형태로 깎인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무심하게 툭, 내리친다. 그제야 나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

소설 속 표현에 틀린 것이 없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어깨 한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심장이 발끝으로 내려앉았다. 무례한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있으니 그가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쳤다. 그 덕분에 환상에서 깨어난 나는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꽂았다.

“…예….”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흘려 넘겼다. 그 후 아스레인이 백작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도망치듯 지하로 뛰어갔다. 머리를 감싸 쥐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이불 안에 포장된 책 끄트머리가 살짝 드러났다. 주먹을 꽉 쥐고 애꿎은 책을 퍽퍽 내리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못한 건 없겠지. …어차피 그 사람인 줄 몰라서 그랬잖아. 다 이해하실 거야….”

실수보다 민망한 언행들이 떠올라 당장 물그릇에 코 박고 기절하고 싶었다. 놀란 마음을 어렵게 진정시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지금쯤 애피타이저를 준비하고 있어야 할 레트반이 들어왔다.

“티오!”

“무슨 일이에요?”

“나야말로 묻고 싶어.”

불안한 예감이 들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거친 숨을 몰아쉰 레트반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백작님께서 널 부르셨어.”

“…뭐, 뭐라고요?”

“너보고 차를 내오라 명하셨어.”

“제가요? 왜요?”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어.”

나 때문에 레트반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일단 식당으로 따라갔다. 그녀는 직접 내어 가려고 준비해 놓은 찻주전자와 잔이 담긴 트레이를 내게 건네었다. 좁은 입구에서 상큼한 레몬 향기가 새어 올라왔다. 이유도 모르는 채 접견실로 향할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 꼿꼿이 섰다. 잔뜩 긴장한 나를 향해 레트반은 심심한 위로를 던졌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그래야죠.”

“이번엔 차를 쏟지 않도록 꼭 조심하렴.”

“걱정 마세요. 레트반 누님.”

애써 씩씩한 미소를 지으며 식당에서 나와 접견실로 향했다. 대체 왜 나를 부른 것일까? 설마 아스레인으로부터 서점에서 마주친 정황을 전해 들었나. 언행에서 실수한 것은 크게 없다만, 그들끼리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르니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한 채로 접견실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백작의 허락이 떨어지니 문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무거운 문을 열어 주었다. 휘황찬란한 접견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백작이었다. 아스레인은 문을 등진 채 소파에 앉아 있었기에 고아한 뒤통수만 보였다. 뒷모습만 봐도 우아한 품격이 느껴져 섣불리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오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진저 레몬티를 내왔습니다.”

“그래.”

금박으로 장식된 동백꽃 찻잔에 향기로운 레몬티를 내렸다. 쪼르륵.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차를 따르는 동안 접견실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으스대길 좋아하는 아멜리 백작이 누군가와 만나며 저리 행복하게 웃는 건 처음 본다.

대화를 엿듣기 위해 일부러 차를 천천히 따르며 온 신경은 그들에게 기울였다.

“그래서 방금 전에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예. 제가 백작께 거짓이라도 고할 것 같습니까.”

“하하! 설마요. 제 영지에서 마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다행히 아직까진 특이한 점 없는 대화였다. 심지어 아스레인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멜리 백작의 비위를 부드럽게 맞춰 준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연구 협력이라면 당연히 해야죠! 폐하께서 내린 특명 아닙니까.”

“깊은 이해에 감사합니다.”

“뭐, 근처 마을에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주시죠. 허헛, 제 평판이 걸린 일이라.”

“백작의 고귀한 평판에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 괜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고귀한 평판이라. 악행을 일삼는 놈에게 턱없이 과분한 단어였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백작이 호탕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속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하마터면 구겨질 뻔했던 인상을 곧게 펴며 백작 앞에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 공손히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며 멀어지는 그때, 아멜리 백작이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뻐해라. 아스레인 교수께서 미천한 네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내 기꺼이 차를 대접할 기회를 준 것이니.”

대체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간 걸까. 백작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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