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세상에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취향을 깊이 고려해 준 선물이라면 더더욱 거절하지 못하겠지. 아스레인이라면 책 선물을 기쁘게 받아 주리라 확신했다.
심부름을 빌미 삼아 저택에서 벗어나 언덕을 내려가니 한 달간 지냈다고 정든 마을이 보였다. 거친 흙바닥 위를 달리는 마차 소리,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고소한 수프 냄새, 시장을 장식한 색색의 꽃까지.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나는 길목을 지나 작은 서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종이 냄새가 한가득 풍겼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어, 왔구먼.”
“오늘 들어온 책 어디 있어요?”
“저어기 안쪽에 정리해 뒀다.”
“감사합니다!”
혹여 허름한 옷자락이 높게 쌓인 책에 닿을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구석에 있는 책장에 도착하니 저번엔 없던 책들이 몇몇 보였다.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즐겁게 구경하던 중 높은 책장에서 익숙한 제목을 발견했다.
“어…!”
<마물은 어째서 핍박받는가.> 무려 소설에서 ‘아스레인이 아직 구하지 못한 책’으로 언급됐었다. 꽤 오래된 책이라 갖고 있는 사람도 몇 없다고 읽었는데, 운 좋게 중고 서점에서 발견했다.
다른 누군가가 가로채기 전에 반드시 내가 사야만 한다. 잰걸음으로 발판을 가지고 와서 책장 근처에 고정해 놓고 올라갔다. 신이 나서 책장에 손을 뻗는 순간, 옆에서 예상치 못한 손길이 불쑥 나타나 책을 가로챘다.
마디가 툭 튀어나온 것 없이 고운 손이다…. 가 아니라, 그건 내가 사려던 책인데! 서둘러 발판에서 내려와 손의 주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높은 책장까지 쉽게 손이 닿을 장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긴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뒤집어쓴 탓에 인상착의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작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혹시 그 책… 사실 거예요?”
“그건 왜 묻나.”
바닥에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묘한 위압감을 흘렸다. 지고 싶지 않아 가슴을 곧게 폈지만 정수리는 어깨에 닿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멋쩍게 목 언저리를 어루만지며 그를 흘겨보았다.
“제가 사려고 했거든요.”
“단순 흥미인가?”
“아뇨. 선물하려고요.”
“내용이 꽤 어려울 텐데.”
물론 내겐 심화 과정이 아직 어려울진 몰라도 선물을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분이다. 어떤 책인들 어려울 리가 없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마치 내 지식을 자랑하듯 어깨를 펴고 말했다.
“괜찮아요. 그분은 마물학 전문가시거든요.”
“전문가…?”
“네. 혹시 디아벨 아스레인 교수님이라고 아세요?”
탁. 장정은 대답 대신 무거운 책을 한 손으로 거뜬히 덮었다. 기분 탓일까. ‘아스레인’이란 이름을 들은 후부터 주변을 감싼 공기가 한층 싸늘해졌다.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니 그는 제자리에 서서 내게 책을 내밀었다. 그 외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체격 차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위험한 사람이라 단정 지은 것 같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책을 받아 들자 그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이 책을 선물한다고?”
“네.”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에 유려한 발음까지 갖춰져 마치 나를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왜요?”
그러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자는 그걸 이미 갖고 있는 걸로 아는데.”
“엥, 정말요?!”
이럴 수가. 아스레인이 이미 이 책을 구했단 말인가. 소설과 사뭇 다른 내용을 접하곤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무용지물이 된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레인에게 이 책이 있는 건 그렇다 쳐도…. 이 사람은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책을 제자리에 꽂으려다가 말고 키가 두 뼘이나 큰 남자에게 훌쩍 다가가 물었다.
“잠깐. 그보다 어떻게 아세요?”
“음?”
“아스레인 교수님과 아는 사이신가요?”
“…뭐…. 아는 사이이긴 하다만.”
말투나 행색을 보곤 여느 귀족인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아스레인과 아는 사이일 줄은! 본능적으로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 다른 대학의 교수인가. 아니면, 설마…. 에이. 아니다. 그처럼 저명한 교수가 한적한 동네 낡은 서점에 올 리가 없잖아. 여러 가능성을 재다 말고 우선 급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와아, 그럼 그분이 뭘 좋아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걸 왜 알아야 하나.”
“실은 내일 아멜리 백작님의 저택으로 교수님께서 오시거든요. 제가 그간 존경하던 분이라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고 싶은데, 그냥은 안 될 것 같고…. 책 선물이라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숨기는 것 없이 사실대로 말하니 가시처럼 날카로웠던 공기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후드로 가려져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행동 하나하나까지 평가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좋은 인상을 남기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멜리 백작의 하인인가?”
“네에. 아무튼 그래서 말이죠~ 기왕이면 그분한테 없는 책을 선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글쎄….”
잠시 고민하던 그는 책을 골라 주려는지 선뜻 책장으로 몸을 돌렸다. 아스레인의 지인이 골라 주었으니 책 선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겠다. 그리 확신한 지 약 5분이 흘렀다. 어느새 그는 서점 안에 있는 책장을 전부 돌아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기대와 달리 그는 여전히 빈손이었다. 수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역시 교수님이라면 여기 있는 책 정도는 전부 갖고 계시겠죠.”
수중에 풀리지 않은 책까지 소장하고 계신 분을 얕봐도 너무 얕봤다. 고작 중고 서점에서 아스레인을 위한 선물을 산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시도였다. 실패했다는 좌절감이 밀려와 어깨가 저절로 축 처졌다. 생각이 짧았다고 연신 중얼거리자 그는 갑자기 뒤쪽에 있던 책장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아, 이건 없는 것 같군.”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서 가져온 책은 다름 아닌 ‘1부터 시작하는 마물’이란 제목을 가진 동화였다.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종이에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힌 것이 인상적이었다. 두 손으로 책을 받아 들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확실히 이 책이라면… 없을 것 같긴 하네요.”
“음.”
장난치는 줄 알았건만, 그는 퍽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 책이야?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전공 내용을 소재로 한 동화를 선물해 줘도 되는 거야? 이건 수학과 교수에게 덧셈 뺄셈 문제집을 선물하는 거나 다름없다. 딱 잘라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책과 그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며 물었다.
“감히 제가 무시한다고 오해를 사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참으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마치 본인이 선물받은 것처럼 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선물했다가 오히려 욕먹으면 그쪽이 책임지는 거예요.’ 하고 각서라도 받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기세에 눌려 싫다는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책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 그럼 이 책으로 할게요.”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슬쩍 표지를 넘겨 보았다. ‘마물이란 무엇일까요?’란 챕터 제목이 보여 순식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래도 아기자기한 삽화를 보니 왠지 동심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특이한 선물로 괜찮을 것 같다. 애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데, 대뜸 그가 물었다.
“마물을 연구하고 있나?”
“연구란 단어는 과분하죠. 단지 책을 읽으며 독학하고 있어요.”
“책이라면?”
“아멜리 백작님 서재엔 아스레인 교수님께서 쓰신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거든요. 주제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아세요? 언제는 서재를 청소하다 말고 책 읽느라 해가 저무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게다가….”
홀로 주절주절 떠들다가 문득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과하게 흘리는 것 같아 황급히 마무리했다.
“음, 아무튼 대단하신 분이에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화책을 가지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주먹만 한 주머니에서 코 묻은 생활비를 쪼개어 계산하는 사이, 그가 내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책을 주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으음, 만약 선물을 받아 주신다면….”
물론 선물을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만약 뭔가를 여쭐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당연히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계산을 마친 동화책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설레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저 같은 사람도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처음으로 원하는 바를 속 시원하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조금은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연습까지 했으니 실수 없이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발견했다.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책을 값싼 누런 종이에 싸서 옆구리에 끼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런, 백작님께서 찾으실 테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곧바로 걸음을 돌려 서점 밖으로 나왔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를 뒤로하며 재빨리 아멜리 저택으로 향했다.
혹여 백작과 그 내외에게 들킬까 봐 종이로 초라하게 포장한 책을 이불 아래에 숨겨 두었다. 무사히 볼일을 마치고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우니 뒤늦게 잊은 것이 떠올랐다.
“아…!”
마음이 급한 탓에 직접 선물을 골라 준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했다. 후회가 막심해 머리카락이 갈라져 드러난 이마를 가볍게 쳤다. 혹 다음에 만나면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름이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산처럼 쌓인 빨랫감을 보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나와 같이 패닉에 빠진 하인에게 전해 들으니 백작이 저택 안에 있는 모든 커튼을 세탁하라고 명령했단다. 손님에게 때가 묻은 커튼을 보여 줄 수 없다나 뭐라나.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제멋대로 설치니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무 대야에 커튼을 넣고 세탁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서점에서 만난 남자에 대한 기억이 함께 씻겼다. 그리고 고된 노동 끝에 다음 날이 찾아왔다.
“중요한 손님이 오시니 다들 언행을 조심하거라!”
바로 오늘- 아스레인 교수가 저택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