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3/305)

#03

틀림없다. 교수님이 내게 읽으라고 지시한 판타지 소설 <저주란 축복>속으로 들어왔다.

소설의 주인공 아이리스는 태어날 때부터 마물과 대화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 능력을 저주라 여겼다. 그래서 아이리스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마물과 사람들을 만나며 정체성을 찾는다. 부러운 능력에 흥미로운 성장물이지만, 문제는 내용이 아니었다.

으레 소설에 빙의되는 주인공들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멋지게 해결해 나간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불가능했다. 하필이면 절정 부분이 막 시작되는 시점까지밖에 못 읽었다. 뻔히 마지막 권까지 나온 소설에 빙의하고도 영웅이 되지 못하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아쉬운 대로 머릿속에서 타임라인을 만들었다. 아이리스의 모험, 그가 만난 조력자들, 배후가 두려운 악역. 여러 가지 사건이 희미하게 떠올라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읽어 생생하게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에브게니아 7세 말. 카르사 제국 신전에 신이 강림했음을 뜻하는 파란색 불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신탁을 전해들은 황제가 급히 신관들로 하여금 신탁을 함구토록 명했다. 이를 이상하게 느낀 아이리스가 고생 끝에 일부를 얻어냈다. 

'하늘과 대지를 지탱하던 다섯 개의 별이 저문다. 이윽고 덮어둔 화가 폭발하여 온 세상이 황금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아이리스는 이 의미심장한 신탁을 멸망의 징조라 여겨 망조를 막고자 여행길에 오른다. 정확히 그 대목까지 읽었다.

비록 신탁의 전문도 모르는 채 소설 속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만약 내가 들어온 시점이 신탁이 내려오기 전이라면 멸망을 막기까지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흘 만에 현실을 깨달았다.

“별실 커튼을 빨아야 하니까 전부 빼 줘.”

“네, 알겠습니다.”

“백작님께서 이 촛대랑 저 화병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셨으니까 꼭 바꾸고.”

“넵!”

하루하루 넓은 저택을 쓸고 닦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빴다. 제국의 멸망이네, 신탁이네 할 것 없이 벌어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멸망을 막아? 어떻게? 결정적으로 나는 주인공 아이리스가 아니다. 멸망을 막는 건 세계 어딘가에 있을 주인공의 역할이다. 백작에게 죽을 뻔했던 하인 나부랭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넌 어째 예전보다 일을 잘하는 것 같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몬테나 산에 다녀온 후부터 확실히 변했어. 역시 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 바뀌나?”

“하하, 하….”

고작 차를 쏟았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후, 같이 일하는 하인들은 나를 가족처럼 반겨 주었다. 감동적인 순간에도 우스운 점은 10년을 함께한 이들 중 내 이름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작가가 ‘나’라는 엑스트라에게 이름조차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게 내 위치였다.

심지어 외형 설정마저 사치였다.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 결 나쁜 검은색 머리, 창백한 피부- 하나도 빠짐없이 내 모습을 유지한 채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 가명을 쓰고 싶지 않던 차에 얼굴까지 똑같으니 차라리 잘됐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이름 ‘유태오’에서 성을 떼고 ‘태오’라 불러 달라고 말했다.

“티오. 선물로 들어온 촛대는 닦아서 초상화 근처에 내려놓으렴.”

“네! 맡겨 주세요.”

물론 지금껏 ‘태오’라고 제대로 불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무렴 좋다. 이젠 이 반복되는 일상에마저 정이 들어 버릴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에 적응하는 동안 기대했던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물을 먹이가 없어 민가를 습격하는 멧돼지쯤으로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마물은커녕 동물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다. 판타지? 개나 주라지. 그새 지독한 신분제가 몸에 배어 백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처신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 벌써 한 달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일과가 이어졌다. 쓸고, 닦고, 먹고, 치우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다행히 지루해서 죽으란 법은 없었다. 일에 익숙해지면서 괜찮은 취미를 찾았다. 종이 냄새에 둘러싸일 수 있는 서재 청소였다. 정확히는 청소하는 척 마물과 관련된 책을 읽는 거였지만.

“전 서재에 다녀오겠습니다~”

모두가 제각기 역할을 위해 흩어진 틈에 들뜬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먼저 두꺼운 벨벳 커튼을 끈으로 묶어 구석으로 밀어 두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곤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사다리를 끌고 다니며 어제 읽다 만 책들을 꺼냈다. 마물과 관련된 서적을 품에 한가득 끌어안고 구석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열 권에 달하는 책의 표지를 펼치자 복사한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폐하의 명을 받아, 디아벨 아스레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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