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2/305)

#02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저것이 정말 마물일까. 멸종 위기종을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종. 아니, 소설 속에서 오직 글자로만 표현된 생물이 눈앞에 나타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설렘에 휩싸였다.

날렵한 부리로 윤기 흐르는 깃털을 섬세히 고르는 모습은 가히 아름다웠다. 한동안 넋을 놓고 오파러스를 관찰하다가 뒤늦게 정신 줄을 붙잡았다. 아무리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면 안 되는 ‘마물’ 아니던가.

“대체 여긴….”

“뭐라고?”

여긴 어디냐고 물으려던 차였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장정들의 눈빛이 워낙 흉흉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머리카락을 억지로 쥔 남자는 웬 중세에 나올 법한 철갑옷으로 중무장을 하였고, 그 주변에 있는 이들 또한 허리춤에 각각 검을 차고 있었다. 꼭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할 기사들의 차림새와 닮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기사 하나가 허리춤에서 조용히 검을 뽑아 내 가녀린 목을 겨누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베일 것 같아 온몸에 털이 비죽 섰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몇 년간 노예 생활을 했는데 눈치 없단 소릴 들으면 섭섭하다. 애초에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꿈이라면 퍽 생생한 것이고, 현실이라면… 현실이면 절대 안 되지.

마음 같아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뺨을 세게 내리치고 싶지만, 꿈이라 확신하기엔 목에서 느껴지는 칼날의 예리함이 너무도 생생했다.

“선생님. 일단 이 검을 치우고 차분하게 얘기하심이 어떨까요?”

“묻는 것에만 대답해라!”

“넵.”

누군가 이 품위 있는 기사에게서 여유를 훔쳐 간 것이 분명하다. 대답에 토를 달 때마다 수명이 1년씩 줄어드는 것 같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리 중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내 옆에 섰다. 검을 든 기사가 “단장님.” 하고 살짝 자리를 피하는 걸 봐선 계급이 높은 모양이다. 투구에 꽂힌 꿩의 꽁지깃처럼 꼿꼿하게 턱을 치켜세운 단장은 눈짓으로 들판을 가리켰다.

“저 마물에 대해 알고 있느냐.”

나무 사이로 훤히 보이는 들판에는 여전히 오파러스가 깃을 고르고 있었다. 이따금씩 몸을 부르르 떨 때 바닥에 죽은 깃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아, 근처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깃털을 한 개라도 주머니에 넣었을 텐데. 콩고물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받아먹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2급 위험 마물 오파러스입니다. …제가 알기론.”

“오파러스…?”

“예. 뭐….”

소설을 쓴 작가가 그리 지었으니 맞는 거 아닐까요. 기세등등하게 답을 말하긴 했으나 확신이 없어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단장은 어물쩍 넘기는 말투가 상당히 불손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두꺼운 눈썹이 10시 10분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처럼 휙 올라갔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난처한 질문에 위압적인 태도가 곁들어져 더욱 당황스러웠다. 지렁이가 왜 지렁이냐는 물음은 만 6세 때 졸업하는 수준 아닌가. 기사의 우두머리인 그가 단순히 내 반응을 떠보려고 던진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말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어색한 입꼬리만 씰룩거리며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마물의 이름이 오파러스인데, 왜 오파러스냐고 물으시면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진심을 가득 담아 대답했으나 철갑옷처럼 두꺼운 벽을 친 단장에겐 닿지 못했다. 단장은 미동도 없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댄 기사에게 가볍게 눈짓을 했다. 그 작은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곧 알 수 있었다.

“죽여라.”

“아, 잠시만요!”

거참.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데, 아무래도 이 기사단의 모토는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한다’인 모양이다. 비굴하게 두 손을 들어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으자 단장이 한 손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경동맥을 가를 것 같던 검이 살짝 멀어졌다.

“기, 기사님도 참~ 이제 막 말하려던 차였는데요. 하하….”

“그래. 이제야 설명한 마음이 생긴 게냐.”

“눈동자가 보석인 오팔을 닮아 학명으로 그리 지었답니다.”

오파러스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물 도감을 정리하며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가차 없는 단장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꿈인지 현실인지 가르기 전에 일단 살고 봐야 하기에 아는 것을 전부 읊었다.

“오파러스는 사과나무 묘목 정도 되는 크기의 알에서 태어나 생후 1년이 되면 어미로부터 독립합니다. 이후 성체가 되면 저기 보이시는 것처럼 커져 발톱으로 나무 기둥을 자르는 것쯤은 거뜬합니다. 주로 산짐승을 잡아먹어 두꺼운 가죽을 뚫기 좋게 부리 끝이 휘었고, 입맛이 까다로워 고기가 조금만 상해도 입에 대지 않습니다.”

괜히 설명을 아껴 봤자 칼날은 가까워진다. 혹여 예리한 검이 다시 살갗에 닿을까 봐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래서 오파러스를 돌볼 때는 각별히 주의를….”

“그만.”

아직 두 줄이나 남았는데 단장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불쾌한 쇳내가 맴돌았지만 혹여 심기를 거스를까 봐 미간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장정들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그중 칼을 들고 있던 기사는 바보같이 입술을 툭, 하고 벌렸다.

“단장님.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군.”

술렁거리는 기사들 사이에서 나를 향한 의심이 한결 수그러든 듯했다. 이내 단장이 짧게 혀를 차며 입을 틀어막은 손을 치우자 위협적인 검도 함께 거두어졌다.

두꺼운 밧줄로 목을 졸렸던 것도 아닌데, 막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놀란 가슴을 토닥이니 쿵, 쿵 묵직하게 뛰는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왠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느낌이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흙먼지가 뒤덮인 발끝에서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상한 처지를 알 리 없는 단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날벌레처럼 이리저리 피해 목숨을 겨우 부지하는구나. 백작님께서 너그러운 분인 걸 감사히 여겨라.”

백작님? 갑자기 뭔 백작. 내가 목숨을 맡겨 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교수님밖에 없는데,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뻣뻣한 목을 억지로 돌려 단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업신여기듯 내려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넌 원래 처형당할 운명이었으니.”

“…제가요?”

“하, 설마 잊었다고는 못하겠지? 네가 백작님께서 가장 아끼는 구두에 차를 쏟지 않았느냐.”

“…어….”

“너무 충격을 받아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군.”

그의 말대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리포트 초고를 잘못 저장했거나, 연구 보조에서 시약 배합을 실수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밀려왔다.

나를 처형하라고 시킨 백작, 철로 중무장한 기사들, 처음 보는 들꽃으로 가득한 숲속, 그리고 버젓이 깃털을 관리하는 오파러스까지. 모든 요소가 현실과 부합하지 않았다.

“백작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몬테나 산을 넘을 때까지 살려 둘 가치를 증명하면 숨을 붙여 두고, 그렇지 않으면 마물에게 먹이로 던져 주라고. 서재에서 감히 백작님의 책을 훔쳐본 건 괘씸하지만… 운은 좋구나. 그분의 명을 따라 너를 다시 아멜리 백작가로 데려가겠다.”

휘몰아치는 상황을 따라가기 어려워 정신을 놓고 있던 중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아멜리 백작가. 미묘하게 입에 잘 달라붙는 것이 초면은 아니다. 불안하게 손톱 끝을 뜯다가 순식간에 한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혹시 그 백작이라는 분이… 카노 레스 아멜리?”

“어디 감히 백작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낙마해서 팔이 부러진 딸과 유흥에 빠져 집에 안 들어오는 아들 있는 분… 맞아요?”

“이 자식이 단단히 미쳤구나!!”

이럴 수가. 부디 어디선가 마주친 적 있는 유학생 이름이길 바랐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도 주변엔 아멜리라 불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익숙한 이름의 주인은 단 한 명. 방금 전만 해도 열심히 읽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백작 ‘카노 레스 아멜리’다.

1권에 단역으로 등장한 아멜리 백작은 악독하게 하인을 괴롭혀서 읽는 내내 울화가 치밀었다. 남들에겐 친절해 보이지만 막상 약자에겐 힘을 과시하는 모습이 꼭 지도 교수와 닮아 똑똑히 기억한다.

“한 번 더 아멜리 백작님께 불경한 언행을 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잠깐. 진짜야? 정말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거야? 아니죠, 교수님? 이거 다 거짓말이죠. 꿈이죠. 눈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면 애증이 가득 묻어난 연구실에서 눈을 뜨겠죠? 왜 이런 데서 자고 있냐고 은근히 창피를 주겠죠. 차라리 전부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다고 말해요. 엄청난 리액션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도 참을 테니까 일단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진짜… 진짠가요?”

“아무리 부정해도 넌 아멜리 백작님의 하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정리하고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이마를 때렸다. 짜악! 미처 힘 조절을 못 해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갔다. 미세 먼지 한 톨 없이 맑은 하늘이 나뭇잎 사이를 가득 채웠다.

최근 먼지 때문에 파란색 대신 누렇게 뜬 하늘만 봤었는데, 뭉게구름이 작약처럼 풍성하게 피어오른 풍경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억울하게 맞은 이마가 끊임없이 화끈거린 덕분에 이 상황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제대로 미쳤군. 어서 양손을 묶어!”

“네. 단장님.”

과학을 공부하는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 학계를 놀라게 할 연구 결과보다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문장이다. 아니, 기사의 말대로 내가 정말 미친 걸지도 모른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 일순 눈물이 찔끔 맺혔다. 가차 없이 두꺼운 밧줄로 손목을 묶던 기사는 내가 아파서 우는 줄 알고 단단하게 당긴 밧줄을 슬그머니 풀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렸다. 이리저리 얽힌 복잡한 감정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애증이었다.

“내 논문은… 내가 정리한 파일…은…?”

내가 일궈 놓은 연구. 1년 하고도 5개월 동안 교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은? 뭘 위해서 자존심 전부 내려놓고 손발을 부싯돌처럼 비벼 아부를 떨었나. 물론 그만두고 싶은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막상 전부 잃어버린다니 공허함이 먼저 찾아왔다.

소중한 외장 하드에 정리한 자료들은 다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설마 내가 사라진 틈을 타서 교수님이 홀라당 다른 프로젝트에 써먹는 건 아니겠지. 안 되는데.

“교수 개자식… 초고라도 읽어 주지….”

“이놈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분명 사고 전까지만 해도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마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다고 징징거리긴 했다. 하지만 내 기도 효력이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다. 어째서 그동안 ‘교수님이 조금만 친절해졌으면 좋겠다’라고 기도를 할 땐 듣지 않으시고, 말도 안 되는 공상을 부탁하니 들어주시는 겁니까.

“백작님께서 주신 기회이니 다신 실수하지 말거라.”

두 손이 밧줄로 묶여 끌려가는 내내 머릿속은 남겨 두고 온 연구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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