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존경하는 교수님. 막 대학원에 입학했던 시절 조교를 지원한 것은 분명 저입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지원 분야를 잘못 봤던 걸까요? 어째선지 제가 맡은 직책은 조교가 아니라 하인 같습니다. 대체 생물에 관한 연구는 어디로 가고, 책상에 영문 모를 판타지 소설 4권이 놓여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 족같은 교수님께서 늦둥이 아드님과 친해지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소설을 읽겠다는 의도는 물론 훌륭합니다. 그런데 아드님도 알고 계신가요? 스릴 넘치는 모험을 대신 읽고 요약한 사람은, 교수님이 아니라 노예를 자처한 저라는 사실을요.
“하아….”
교수님의 지시로 뜬금없이 판타지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5시간째. 무작정 책을 덮고 진심이 가득 담긴 메일을 쓰다가 전부 지워 버렸다. 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이 쌓여 있는데, 정작 메일엔 아무것도 쓰지 못해 하얗게 비어 있는 것이 모순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단지 진득하게 연구가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왔을 뿐이다. 학계에서 저명한 교수라 하여 수차례 컨택 끝에 랩실로 들어왔다. 학문에 열정이 가득한 교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학생,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다양한 지식을 흡수하며 성장하는 나 자신.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이상적인 삼각형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오늘로 지독한 생활을 한 지 1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났다. 한창 졸업 논문으로 정신 없어야 할 지금도 여전히 교수의 뒷바라지를 하는 중이다.
교수님께선 모쪼록 사건을 알기 쉽게 시간순대로 정리하고 등장인물의 특징까지 자세히 묘사하라 지시했다. 판타지 소설이니 전문 용어 가득한 원서보다 읽기는 쉬웠지만, 무수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문장을 끊임없이 보자니 글자 멀미가 생길 지경이었다.
바쁜 상황에서 그나마 이 소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2급 위험 마물… ‘오파러스’라고 부르는구나. 몸집은 가로수만 하고, 부리 끝이 안으로 말려 딱딱한 가죽을 뚫기 좋은 구조라…. 눈동자가 보석 오팔을 닮아 이름이 오파러스가 됐고…. 시력이 나쁜 만큼 청력이 발달했다…. 음. 좋아.”
판타지 배경답게 소설에는 현실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동물이 한가득 등장했다. 생김새는 잉어를 닮았지만 막상 입을 벌리면 네 갈래로 나뉜 혀와 수천 개가 넘는 이빨을 가진 생물이라거나,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한 가죽으로 몸을 둘러싸 날 수 없는 새라거나.
소설 속 사람들은 이 신비한 생물을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동물이라 하여 ‘마물(魔物)’이라 일컬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물은 하나같이 주인공의 성장을 부각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됐다. 거대하거나 위험한 능력을 가진 마물일수록 위험 등급은 높게 책정되었고, 그를 해치우는 주인공은 한층 영웅적 면모를 드러냈다. 하지만 생물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는 마물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매력 요소로 느껴졌다.
마물이라니. 사람을 홀리는 동물이라니! 입에서 불을 내뿜는 환상종을 발견한다면,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정작 정리해야 할 등장인물과 사건은 뒤로하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마물을 일목요연하게 메모했다. 완성하고 보니 이건 뭐… 거의 ‘마물 도감’ 수준이다.
“아오, 큰일 났네.”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건 절대 마물 도감이 아닐 텐데. 사춘기 아드님이 나처럼 환상종에 관심 있지 않은 이상 어색한 부자 사이는 한층 멀어질 것이다.
결이 나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얼음이 녹아 연해질 대로 연해진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커피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구수한 맛이 입 안에 가득해졌다.
두 시간 전에 홀랑 연구실을 떠난 교수님은 지금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발 뻗고 자겠지. 누구는 참 좋은 스승을 둔 덕분에 이틀 동안 집에 못 들어갔는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책의 펼쳐진 부분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좋은 사람 아래서 연구하고 싶다.”
딱 한 번만이라도 지독하게 연구해 보고 싶다. 열정과 지식을 고루 겸비한 연구원과 함께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싶다. 연구와 하등 관련 없는 심부름을 하며 커피와 식사 대용 젤리를 먹다가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인생 말고. 오지에 떨어져 그 누구도 관찰한 적 없는 생물을 마주하고 희열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삶을 맛보고 싶다.
그래. 이 소설에서처럼. 하필이면 조연 중에 교수란 직업을 가진 인물이 나오더라. 어릴 적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교수에게 막연한 존경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름도 정확히 기억한다.
왕립 안겔루스 대학의 마물학부 교수이자 내로라하는 천재- 디아벨 아스레인. 그는 5대째 이어지는 고귀한 학자의 피를 물려받아 총명한 두뇌를 자랑했다. 읽는 내내 모든 언행이 지도 교수와 비교되어 씁쓸한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저런 사람 아래서 마물을 연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부 부질없는 상상이지.”
으으. 시끄럽게 삐걱거리는 의자에 기대어 두 팔을 크게 뻗었다. 뻐근한 어깨와 팔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우악스럽게 들렸다. 이대로 연구실에서 한숨 잘까 싶은 순간, 책상 위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상체를 바짝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 유 군. 시킨 일은 순조롭게 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제 마지막 권만 정리하면 됩니다.”
- 그래.
무슨 용건인가 했더니. 역시 노예가 일을 잘하고 있나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쓸데없이 중후한 척하는 목소리를 더는 그만 듣고 싶은데, 교수는 할 말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 자네도 내 덕분에 간만에 문학적 소양을 쌓은 거 아니겠나.
“하하… 예. 감사합니다.”
문학적 소양은 개뿔이. 일주일간 과제가 없거나 졸업 논문을 멋지게 통과한 것도 아니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원서가 책상 구석에 한가득 쌓여 있고, 1차 컨펌을 받지 못한 논문 초고는 폴더에 고이 모셔 놓았다. 전혀 즐기지 못할 상황에 과제 같은 소설을 던져 놓고 ‘내 덕분’이라 운운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조용히 이를 갈며 애써 웃음으로 넘어가려는데 교수는 또 눈치 없이 폭탄을 던졌다.
- 이번 일을 잘 마쳐 줬으니 나도 할 일을 해야지.
“예?”
- 전에 내게 논문 초고를 들고 왔었지?
교수가 웬일로 논문 얘기를 먼저 꺼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예!” 하고 대답하니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 아까 김 교수랑 식사하고 잠깐 카페에 왔는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말일세. 항상 가는 그 카페로 논문 초고를 들고 오면 봐주겠네.
“지금 당장이요?”
- 왜. 안 되나?
“아, 아뇨. 바로 출력해서 가겠습니다.”
- 그럼 수고하게.
뚝. 할 말만 하고 끊는 버릇은 그 나이가 되도록 못 고치셨나 보다. 논문을 봐주는 게 당신의 일이면서 마치 바쁘지만 선심 써서 시간을 내어 준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 자식 같은 논문을 부디 꼼꼼히 봐 달라며 머리를 조아려야지.
곰팡이가 필 뻔했던 논문을 출력해서 클리어 파일에 깔끔하게 끼워 넣었다.
“열심히 썼으니까 괜찮을 거야.”
기쁜 마음으로 논문을 품고 연구실을 나섰다. 드디어 논문 초고를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정문 앞에 다다르니 길 건너 교수의 단골 카페가 보였다. 2층 창가에 같은 대학 출신인 김 교수와 앉아 있는 지도 교수를 단번에 찾았다.
그새 마음이 바뀌진 않았겠지.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신호등 색이 바뀌길 기다리다가 초록색 불빛이 보이자마자 발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어?”
끼이익-!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소음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정신을 잃기 직전 눈에 담은 것은 도로를 나뒹구는 생수통과 꽃잎처럼 허공에 흩날리는 내 논문이었다.
***
아득한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니 소리부터 들렸다. 그래도 멀쩡하게 대화가 들리는 걸 보니 아직 요단강은 안 건넜나 보다. 논문 초고는 검사 맡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데도 뻐근한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 작게 신음을 내었다.
“어이!!”
누군가 머리카락을 난폭하게 잡아 올렸다. 억지로 고개를 든 상태로도 눈을 뜨기 어려웠다.
“…교수님?”
설마 사고가 난 사람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건 아니겠지.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데 쌀쌀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게다가 산속에서나 날 법한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머물렀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여 으스스한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무슨….”
분명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울창한 나무는 단 한 번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고, 처음 보는 들꽃은 어떻게든 나뭇잎 새로 스며드는 햇빛을 받으려 줄기를 배배 꼬았다. 저 멀리에 폭포가 있는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으며,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가 이따금씩 곁들여졌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머리는 상황을 파악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은 목소리가 귓구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마지막 기회이니 똑똑히 보는 것이 좋을 거다!”
“예?”
머리카락을 쥔 손이 억지로 목을 옆으로 돌렸다.
“모르는 척 하지 마라! 네놈이 말하지 않았느냐. 저 마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돌아보기 전, 두꺼운 나무 기둥 사이로 묘한 실루엣이 스쳤다. 퉁. 퉁. 멀리서도 땅에 진동이 느껴질 만큼 거대한 생명체가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 들판에 몸을 드러낸 그것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위로 쳐들었다. 생에 처음 보는 생물이었으나 나는 그것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나무 한 그루만 한 크기에 고기를 뜯기 좋게 끝으로 말린 부리. 온몸을 덮은 윤기 흐르는 깃털과 기둥 하나쯤은 거뜬히 잘라 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 햇빛을 받아 오만 가지 색으로 빛나는 보석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저 동물은… 아니, 저 마물은.
“…오파러스….”
소설 속에 등장한 2급 위험 마물, ‘오파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