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세론의 음흉한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동현이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기는 했다.
모든 업무를 세론에게 맡긴 동현은 따분하게 천룡문에 있었다. 그때 영민이 다가와 보고했다.
“문주님, 입구에 화랑 가문의 가주와 원로분들이 와있습니다.”
“왜 왔다고 하더냐?”
“그거야 비급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영민은 당연한 일을 왜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동안 동현은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동현을 설득하기 위해 아주 집요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이는 비급을 모두 해석한 호국 가문 사람들이 지금 고급 무예를 익히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주의 비기를 모두 동현에게 보여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비급을 해석한 호국 가문이 그 덕분에 지금은 가문의 모든 이가 새로운 무예를 익히며 무공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는 소식은 다른 가문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다른 가문에서도 비급을 해석해 달라고 천룡문에 줄기차게 연락을 하고 있었지만 동현이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아직도 해석하지 못한 채 발만 구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화랑 가문이 가장 먼저 천룡문을 찾은 것이다.
동현은 화랑 가문의 인물들을 만나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동현을 보고 있던 영민이 한마디 했다.
“문주님, 저들도 한국의 무인이니 어지간하면 소원을 들어 주시지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산 사람의 소원을 못 들어줍니까.”
“너 저들에게 얻어먹은 거라도 있냐?”
동현의 말에 영민은 기겁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제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저들에게 받아먹겠습니까. 저는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다만 저렇게 사정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불쌍해 보여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영민은 동현과 함께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이었다. 가족들도 아주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현은 자신의 수하와 그 가족들은 확실하게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동현의 지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르고 있었다.
“아니면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냐? 그리고 불쌍은 개뿔, 전에 저들이 와서 한 짓을 생각하면 절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천룡문이 처음 개파할 때 다른 가문의 무인들을 초대했는데 이들이 와서 한 일이 동현의 기분을 무척 상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영민도 그 당시에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었으니 지금 동현이 하는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문주님, 그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영민이 계속 부탁을 하자 동현도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지 눈빛이 부드럽게 변해갔다.
수하들을 거칠게 대하기는 하지만 항상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그였기에 그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언제라도 바로 수정을 해주었었다.
“음, 마지막 기회라고 했으니 일단 들어오라고 해라.”
“예.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문주님.”
동현의 허락에 놀란 영민은 빠르게 대답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언제 마음에 변할지를 모르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영민 덕분에 천룡문의 문주와 대면하게 된 화랑 가문의 사람들이 영민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천룡문의 수련장을 통해 안채로 갔기 때문에 수련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수호대들을 볼 수 있었다.
수호대는 1기생이 2기생과 3기생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2기생은 그래도 약으로 인해 상당한 내공을 갖고 있었지만 3기생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체력 향상을 중심으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교관은 수호대의 대원입니까?”
“예, 수호대 1기생이지요.”
“그렇군요. 언뜻 보기에도 실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화랑 가문의 가주와 원로들은 천룡문의 대표적인 무인들인 수호대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에 많이 놀란 모습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수호대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니,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기 2기생이라고 하는 수호대원들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영민이 천룡문의 장로임을 알고 있는 가주는 천룡문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은연중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영민은 그런 가주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 그대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영민이 그러는 데에는 바로 천룡문이 이만큼 강하니 앞으로 까불지 마라는 뜻이 숨어있었다.
“예, 2기생들이 아직은 1기생보다는 약하지만 저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조만간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민의 대답에 화랑 가문의 가주는 속으로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2기생 수호대원들은 대부분 20대 초반 정도였는데 그런 자들이 자신의 가문 일류 무인과 비슷한 경지를 가지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아이들도 아직은 내기가 느껴지지 않지만 저렇게 체계적인 수련을 하면 조만간 내기를 느끼는 아이들도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는 천룡문이 미래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가문도 어린 아이들을 수련시키고는 있지만 저렇게 단체로 합숙을 하며 실시하지는 않았다.
수련생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는 화랑 가문 사람들의 모습에 영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동현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영민이 바로 보고를 했다.
“문주님, 화랑 가문에서 오신 손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안으로 뫼셔라.”
동현의 허락에 영민은 바로 손님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나이가 한참 어려 보이자 원로들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손님들이 들어오자 동현이 천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천룡문의 문주직을 맡고 있는 김동현이라고 합니다.”
화랑 가문의 가주는 이미 동현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동현의 인사에 정중하게 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랑 가문의 가주인 최기원이라고 합니다. 문주님의 명성은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가주가 인사를 하자 쭈뼛거리고 있던 원로들이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화랑 가문의 원로인 이기창이라고 하오.”
“화랑 가문의 원로인 김세진이라고 하오.”
두 명의 원로는 동현에게 완전한 존대가 아닌 반존대를 했다. 다른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사실 상대를 무시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바로 나이 때문이었다.
동현은 그런 두 사람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두 명의 원로도 그런 동현의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보았다.
“화랑 가문에서는 저희 천룡문에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동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직설적인 물음에 두 원로는 내심 당황했지만 그동안 살아온 연륜이 있어 이내 침착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대답을 했다.
“천룡문이 호국 가문에 비급을 해석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오게 된 것이오.”
“제가 호국 가문에 비급을 해석해 준 것이 화랑 가문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를 찾으신 겁니까?”
동현은 정중하게 말을 하면서도 상대의 심기를 자극하는 말을 골라서 하고 있었다.
원로들은 자신들이 비록 부탁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지만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다가 동현이 삐딱하게 나오자 더 기분이 상해버렸다.
“천룡문은 다른 가문과는 상종을 하지 않을 생각이오?”
“제가 왜 다른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까?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동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원로의 말에 대답했다.
원로는 동현이 이렇게 나오는 것이 바로 자신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가주, 그만 돌아갑시다. 나도 이런 문파와는 상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가주는 원로들이 스스로 잘못을 하고도 되레 뻣뻣하게 굴자 화가 났다.
“원로님들, 우리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저희는 가문의 중요한 일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대한 일을 원로님들의 자존심 때문에 망치게 된다면 옳은 것입니까?”
가주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자제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원로들은 가주의 말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주는 말을 삼가시오. 아무리 가문의 일이 중하다고 하지만 원로원의 무시를 당하면서까지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소.”
화랑 가문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동현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구를 무시했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동현이었다.
화랑 가문의 가주도 원로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 못 했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문밖까지 따라왔다 대기실로 가려던 화랑 가문의 장로들은 안에서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자 발걸음을 멈추고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도 지금 원로들이 이상하게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싫다고 하는 동현을 설득해 억지로 만나게 한 영민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무인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추진한 만남이 이제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현은 화랑 가문 원로들을 보며 정말 웃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동현은 화가 났지만 그래도 가주는 정상적인 인간 같아서 최대한 자제하며 말을 했다.
“저희 천룡문에 오신 것은 감사하지만, 그만 가주셨으면 합니다.”
동현이 대놓고 가라고 하자 원로들은 얼굴색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가주는 그런 동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원로들이 있으니 말을 할 수 없는지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가라는 동현의 말에 화가 난 원로들은 바로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천룡문은 이렇게 예의가 없는 건가?”
한 원로는 아예 동현에게 반말을 했다.
동현은 상대의 태도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도 예의를 지키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다. 동현이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가 우리 천룡문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는가?”
동현이 반말을 하자 원로들은 더 화가 났다.
“아무리 한 문파의 문주라 해도 나이를 생각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는가?”
“그러면 그대들은 한 문파의 문주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동현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원로들은 할 말이 없었다. 상대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에 대한 얘기고 그들은 이런 대접을 받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허허허, 내가 살아오면서 이런 대우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을 당하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네. 천룡문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이렇게 나오는지 직접 확인을 해 보아야겠다.”
원로가 동현에게 자신이 직접 손을 보겠다는 뜻을 비쳤다. 물론 그건 동현도 바라는 바였다.
“호오, 화랑 가문의 원로는 자신의 실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이네. 나가서 직접 보고 싶다는데 확인을 해 주어야겠지.”
동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용기가 있으면 따라오라는 행동이었다.
화랑 가문의 가주는 그런 동현을 보고 더 이상 천룡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곳에 도움을 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가주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원로 두 명이 동현을 따라 나갔다. 이들은 남들이 하는 말은 믿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만 믿었기 때문에 소문에 겁을 내지 않았다.
동현이 문을 열고 나오자 영민은 그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동현은 뒤끝이 장난 아니기 때문에 만약 영민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그는 이들이 가고 나서 거의 죽도록 두들겨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민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동현의 얼굴이 나쁜 건 아니라 내심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절대 안심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건드리지마를 연재하는 것 같네요.
예전에 연재를 하였던 것들에는 오타가 장난 아니게 많은 것을 보고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전에는 도대체 왜 오타가 저리 많았는지 ㅠㅠ오늘부터는 최대한 오타가 없도록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은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건드리지마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부터는 성실 연재로 완결까지 가겠습니다.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