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드리지마-178화 (177/222)

178화

가주는 동현이 기분 나쁘지 않게 말을 돌려했다. 가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모여있는 모든 이들은 사실 동현이 비급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동현은 눈앞에 있는 비급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비급을 본 동현은 저들이 아직까지 해석을 못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비급이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 비급을 보던 동현이 드디어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을 내려놓은 동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가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동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숨소리도 죽인 채 그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동현은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비급이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문주님.”

“이 비급의 내용은 무공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거의 도가의 사상에 대한 것들이라 드리는 말씀입니다.”

가주와 다른 이들은 동현의 대답에 한동안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세기 원로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동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문주, 그럼 그 책에는 무공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이야기요?”

“무공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공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성취하게 만드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군요. 즉, 이 비급은 다른 비급을 보조하는 비급이라는 말입니다.”

“아, 그러면 지금 보았던 비급은 다른 비급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아마도 다른 분들이 비급을 해석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 나와있는 내용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닌가요?”

“맞소, 그 내용이 하도 뜬구름을 잡는 것들이라 아직까지 해석을 못 하고 있는 것이오.”

“여기에 나와있는 내용은 도가의 사상을 토대로 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아마도 『도덕경』을 배우신 분이 계시다면 이 책의 내용을 보다 빨리 해석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덕경』이라는 말에 가주와 무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들이 해석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공부를 하려고 한 이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인들을 보자 동현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무공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 있으니 해석을 못 하는 거지. 에잉!’

호국 가문의 사정을 본 동현은 아마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주, 그러면 그 책을 모두 해석하실 수 있는 거요?”

“해석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비급을 보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우선은 여기 있는 세 권의 비급을 먼저 해석하도록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동현이 해석을 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해 달라는 뜻으로 말했다. 이세기 원로가 그런 동현의 뜻을 바로 파악하고는 가주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문주께서 장소를 구해달라고 하시는데, 가주의 의견은 어떻소?”

가주는 동현이 혼자서 해석을 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색이 조금 변했다.

“원로님, 문주님이 해석을 하시는 것은 좋지만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동현은 가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가주님, 제 말은 혼자 있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조용한 장소를 주셨으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으니 말입니다.”

동현의 대답에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해석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런 곳에서 해석을 하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동현의 뜻을 파악한 가주가 바로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가문에서는 이미 문주님이 해석하실 장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다만 문주님이 비급을 해석하실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먼저 보여드린 것입니다. 이제 비급을 해석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다른 분들도 오해하지 않게 되었으니 바로 장소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가주의 말대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동현이 비급을 해석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남아있던 것이었다. 이제 동현이 확실히 비급을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바로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호대 분들에게는 저희가 따로 방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답한 동현이 밖에 있는 수호대를 향해 말했다.

“수호대는 들어라. 여기 호국 가문의 일 때문에 오늘은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 실수하지 않도록 처신을 하거라.”

“예, 문주님.”

수호대에게 명령한 동현은 바로 가주를 따라 이동을 했다.

호국 가문에서 마련한 장소는 아늑한 느낌을 주는 별관이었는데 문을 열면 바로 작은 연못이 보이는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동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있는 천룡문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군요.”

“허허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문주님.”

가주와 동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원로들과 장로 둘이 따랐다. 장로 둘은 지금까지 비급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동현이 해석하는 것을 보기 위해 따라오는 것이었다.

비급을 타인에게 해석해 달라고 부탁할 순 없는 일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 해석이 정확한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방으로 들어간 동현은 바로 나머지 비급을 보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동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두 권의 비급을 본 동현은 책 속에 담긴 무공이 일반적인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이 아니라 병사들이 익히는 무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비급은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이기는 하지만 일반 제자들에게 가르칠 만한 무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조금은 실망하고 말았다.

동현은 비급에 있는 내용과 호국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호국 가문은 무인들이 만든 가문이 아니라 군에 있던 사람이 만든 가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내려놓은 동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바로 이세기 원로에게 물었다.

“원로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동현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하겠다고 하자 이세기 원로가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엇이 궁금한 것이오?”

“호국 가문은 무인들이 만든 가문이 아니라 군에 있던 분이 만든 가문입니까?”

동현의 질문에 이세기 원로는 적이 놀란 모습이었다. 사실 호국 가문은 군에 있던 장군이 만든 가문이 맞기 때문이었다.

“아니, 문주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요?”

“여기 비급에 나와있는 내용이 바로 병사들이 익히는 무공이기 때문입니다.”

“병사들이 익히는 무공이라고요?”

동현의 말에 놀란 가주가 되물었다.

“예, 여기 있는 비급엔 병사들이 익히는 무공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고 여기에 나와있는 것은 그냥 일반 제자들이 익히는 무공이었습니다. 물론 현대의 무공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그리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어 보여서 말입니다.”

동현의 말에 원로들과 장로들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비급을 해석하기 위해 평생 고생을 하며 노력했는데 동현이 잠시 보고는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문주님, 그러면 비급의 내용은 모두 해석이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해석은 끝났으니 바로 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동현의 대답에 장로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 좋은 무공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니 자신들이 좋지도 않은 무공 비급을 가지고 그 고생을 했나 싶어 화가 나기도 했다.

병사들이 익히는 비급을 가지고 평생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가문에 치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김동현 문주, 비급에 나와있는 내용들이 정말 병사들과 일반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이란 말이오?”

이세기 원로가 아닌 다른 원로 중에 한 명이 물었다. 계속되는 확인에 동현은 이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들어있는 무공은 지금 호국 가문에서 익히고 있는 무공보다도 좋지 않은 것들입니다.”

호국 가문의 무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에 대해서는 동현도 어느 정도 알기에 하는 이야기였다. 수호대와 대련할 때 이들이 익히는 무공도 제법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았던 것이다.

“음, 정말 난감하군.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며 비급을 해석하려 했다는 말인가?”

원로의 탄식에 장로들도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세기 원로가 그런 장내의 분위기를 느끼고 동현을 바라보았다.

“문주, 미안하지만 지금 해석한 비급의 해석본을 부탁해도 되겠소?”

“예, 해석본을 쓸 필기구만 주시면 바로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가주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품에서 비급을 하나 꺼내놓았다.

“문주님, 여기 이 비급의 내용을 먼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주가 품에서 비급을 꺼내자 원로들과 장로들도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주의 행동을 막지는 않는 것을 보며 동현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동현은 말없이 가주가 꺼낸 비급을 들어 안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번 것은 확실히 고대의 무공 비급이 맞았다.

책자의 첫 장에 적힌 신공의 이름을 본 동현은 조심스럽게 비급을 넘기기 시작했다. 안의 내용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기록한 것으로 보였는데 한국에 아직까지 이런 무예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동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비급을 확인하고 있던 동현이 세론을 불렀다.

―세론, 여기 보고 있는 비급의 내용을 모두 카피해서 보관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동현은 비급의 내용이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좋은 무공이기 때문에 보관을 하기로 했다. 자신도 새로운 무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급을 보는 동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세기 원로는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보았다.

‘응? 눈빛이 변했군. 그 이유가 혹시 무언가 다른 중요한 것이 있어서인가?’

이세기 원로는 동현의 눈빛이 갑자기 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동현은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탁자에 그대로 놓았다.

“가주님이 주신 비급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 기록하신 비급이군요. 해석본을 쓰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좋은 무공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문주님, 비급을 확실하게 해석하실 수 있는 겁니까?”

“예, 이번 비급도 조금 색다르게 적어놓기는 했지만 충분히 해석이 가능합니다. 바로 해석을 해드리고 싶은데, 필기구는 없습니까?”

동현의 대답에 가주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여준 건 가문의 최고 무공이 나와있는 비급이었는데 아직까지 누구도 해석을 하지 못해 보관만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동현은 비급을 보고는 바로 해석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기 원로는 단번에 해석을 했다는 것보다도 동현이 마지막에 눈빛이 변한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문주가 해석을 한다고 했으니 우리 가문의 숙원이 풀리게 되어 기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문주가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눈빛이 변한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기 바라오.”

이세기 원로는 동현에게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세기 원로가 자신의 변화를 날카롭게 지적해 주자 동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하하하, 원로님은 역시 날카롭게 보고 계셨군요. 제가 마지막에 눈빛이 변한 이유는 바로 비급의 마지막에 진법을 설치하는 내용이 나와 있어서입니다.”

“진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기 비급에 적혀있는 것인데, 일종의 군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적과 전투를 할 때 진을 사용해 적을 전멸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직도 진법이 남아있다는 것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런 것입니다. 이제 해명이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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