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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장. 용도 폐기 (60/62)

제58장. 용도 폐기

조연 일행이 공략한 몹은 칭기즈칸 사선봉 중에서 쿠빌라이였다. 이놈이 전투력 자체로는 가장 강력했다. 다만, 공격 방식은 가장 평범한 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베는 일거에 강기 화살 백여 대를 쏠 수 있는 괴물이었고, 젤메는 거대한 철제 전차를 몰고 광장을 시체 산으로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쿠빌라이는 마치 하늘을 날 듯 말을 타고 다니며 거대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어느 놈 하나 만만한 놈이 없었다.

“끝이군요.”

이 대리가 정 사장을 보며 말했다.

애당초 이 레이드 몹들은 최절정급 고수라 할지라도 단 일인의 공격력으론 어그로를 먹지 못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네 마리 중의 한 마리만을 잡았을 뿐인 조연 일행은 벌써 공략법을 알아냈다. 반면, 광장에 난입한 대문파 연합은 완전히 헤매고 있었다. 아니, 헤매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준비한 자와 말려든 자들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 대리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 사장은 이제 검은 옷을 걸친 환관, 조 과장을 보고 말했다.

“과장님, 지금부터는 녹화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겠죠?”

역시 정 사장은 철저했다. 나중에 조 과장이 발뺌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조 과장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미 사업이 틀어졌다는 것은 그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실패작을 확인한다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 과장이 대답했다.

녹화는 밖의 직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 * *

“휴우, 어떻게 잡긴 잡았네요?”

육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격체진력을 시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날 목표로 내공을 불어넣는다는 건 눈이 빠지도록 피곤한 일이니.

나도 등짝이 땀으로 흥건했다. 중간 중간 어그로를 놓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무지막지한 속도의 공격을 완벽하게 회피한다는 건 보통의 집중력으론 불가능했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지금도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장장 오 분 동안 공격을 퍼붓기만 했다. 그러고서야 겨우 한 놈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저것들 보니깐 힘이 나네요.”

역시 급이 달랐다. 놈은 쓰러지면서 무려 이십여 가지나 되는 아이템을 떨어뜨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못해도 최절정이고, 거의가 초절정비급일 것이다. 아이템도 그 정도 수준일 것이고.

어쨌든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 짓을 세 번이나 더 치러야 했다.

“빨리 정비들 하시기 바랍니다. 술사님들은 빠른 재버프 부탁드립니다.”

나도 지쳤지만 저들도 지쳤다. 하지만 쉬는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사람들이 재정비를 하는 사이 이광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간간이 화살을 날려 도움을 주던 엽사가 날 바라봤다.

뭐라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길 원하는 건가?

“역시 천하제일고수라는 소릴 들으실 만합니다.”

선제공격은 엽사가 먼저 날렸다. 맞고만 있을 순 없다. 나도 반격을 해야 했다.

“엽사 님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솔직히 소요파와 함께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자 엽사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조연 님 근처에 있다 보면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진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렇게 말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그동안 뭐 하나 했더니 이런 고수들 섭외하러 다녔던 것인가?

‘놀고먹지만은 않아서 다행이군.’

광장은 완전 전쟁터 분위기였다.

“역시 안에서 잡는 게 나았군.”

놈들을 풀어주면 어떤 꼴이 되는지 바로 눈앞에 그려져 있었다. 광장은 장판파였고, 저놈들은 조자룡이었다. 놈들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붙잡을 수 있는 유저가 없었다.

“역시, 아직 마교가 등장할 시기는 아닌가 봅니다.”

“저놈들 잡으면 마교가 출현하는 건가요?”

혼잣말에 엽사가 반응을 보였다.

“봉인 퀘스트라는 것이죠. 이 미션은 일종의 기폭 장치라고나 할까요? 유저들이 이놈들을 잡을 수준이 된다면 마교를 등장시켜도 된다, 뭐 이런 식이죠.”

“으음, 그럼… 클리어하면 안 되는 미션이었군요.”

당연한 소리. 나 같은 초절정급 고수가 천 명쯤 됐을 때나 공개되어야 정상이었다.

“할 생각입니다.”

엽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아마 또라이로 보일 것이다. 옆에서 훔쳐 듣고 있던 신도림이나 이광도 그런 눈초리였다.

“그럼 또 시작해볼까요? 더 지체했다간 우리가 곤란해질 것 같네요. 엽사 님?”

“네?”

“저기 저놈으로 합시다. 비겁하게 탱크 타고 다니는 놈으로요. 땡겨 오세요.”

“끙.”

엽사는 신음 소리를 내긴 했지만, 내 말을 따라주었다. 자신의 독문 병기 연환노에 강전을 재었다.

“자, 다시 갑니다! 이번엔 밖에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니까, 반대 방향으로 잡게 되는 겁니다! 준비들 하세요!”

한편, 조연이 성공적으로 미션을 공략 중일 때, 주호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물론 일개 프로그램 따위인 그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는 없지만, 그냥 그런 상태일 거라고 생각하자.

주호(강호)의 최종 목표는 조연과의 미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메인 서버라는 사실을 감추고, 강호의 환경을 언제라도 제어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사실, 지금의 이 미션은 그가 조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분명 개발팀에서 계획했고, 언제라도 간단한 명령어 몇 개만으로 발동할 수 있게 해둔 상태였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봉인. 절대 노력이나 운으로 발동되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마교 출세 미션의 발동은 강호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곤륜산 백택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문젠 어째서 인원도 훨씬 더 많고, 저쪽보다 고수도 훨씬 많은 대문파 연합이 이렇게 왕창 박살이 나는가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왜 이쪽은 이런 거지?”

그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자잘한 실수가 겹쳐 총체적으로 난국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걸 의도한 것은 조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주호, 물러나도록 하자!”

사황성의 흑룡 담경이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흑룡밖에 없었다. 당장의 전력으로 쓰기에 공동파는 너무도 수준 미달이어서 사황성과 손을 잡은 것이다.

바로 그의 요청으로 사황성은 강호 제패의 꿈을 접었다. 대신 흑룡은 사황성에 완벽한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사황성주가 폐관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강호가 약속해준 것이다.

흑룡의 말은 옳았다. 흑룡 입장에서는 후퇴해야 옳았다. 하지만 주호 입장에선 아니었다. 지금 주호는 너무 많은 걸 투입한 상태였고, 이 자리에서 물러선다면 암중의 조절자라는 역할을 다신 맡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꿈꾸었던 자리를 아마 조연이 담당할 것이다.

“돌아가서 사람들을 더 불러 모읍시다. 저들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내력이 전부 소진됩니다. 그렇게 설정되어 있으니까요. 계속 인원을 들이붓다 보면 결국 잡을 수 있습니다.”

흑룡의 아미가 잔뜩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만이든 십만이든 무조건 투입하라는 소리야?”

“그렇게 해야죠. 그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럼 처음의 구천구백은 뻔히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다는 소린가? 구천구백이 없다면 일만 번째 도전자도 없어!”

흑룡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주호의 정체를 알기에 설명조로 이야기하는 흑룡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요. 소문을 내면 됩니다. 저놈들 잡으면 초절정비급이 우르르 쏟아진다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러니깐 먹힐 겁니다. 자그마치 초절정비급이란 말입니다.”

흑룡은 주호가 무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왕왕 인간들의 탐욕이란 그런 바보 같은 일을 가능케도 하니깐 말이다.

솔직히 한 번 죽는 것보단 초절정비급을 얻을 기회를 가지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

흑룡은 아직 그나마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이미 최절정급 극상의 경지에 오른 그들 십이전사는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 그리고 흑룡의 명을 받고 발 빠른 가물치가 급히 암도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조만간 새로운 인간들이 미어져 들어올 것이다.

“됐어. 된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확신이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승리를 믿고 싶은 주호였다.

하지만 조연이 전차를 탄 젤메를 쓰러뜨리고, 쿠빌라이를 제압할 때까지 암도를 통해 들어오는 유저들은 없었다.

그렇게 조연이 저 괴물 같은 놈들을 한 마리씩 공략할 때마다 광장의 대문파 문도들의 사망은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제베마저 조연에게 공략당할 즈음엔 더 이상 찬 땅바닥에 엎어지는 유저는 한 명도 없었다.

살아남은 대문파 연합의 유저는 모두 합쳐 삼백도 채 되지 않았다. 최절정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전멸당했고, 최절정이 됐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심지어 와룡 제갈량이나 종남의 삼절검 같은 한 문파의 수장들마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주호는 노심초사 유저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유저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주호는 급히 흑룡에게 달려가 지금이라도 조연의 뒤통수를 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오히려 차디찬 냉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흑룡마저 강호 인생을 접어야 할 분위기였다. 광장의 살아남은 유저들이 조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러했다.

‘완전히 조연 세상이 되었군.’

흑룡 또한 천하제일인을 꿈꾸었다. 그래서 강호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계속 무리수를 두면서 앞으로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연을 따라잡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마지막 남은 제베마저 조연 일당의 손에 공략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수십 개나 되는 최고의 비급, 아이템들이 조연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승복한 구대문파 문도들은 감히 먹자 짓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 개의 비급이 현금으로 수백만 원, 수천만 원을 호가할 것이지만, 그런 탐욕마저도 광장의 분위기를 이겨 낼 순 없었다.

압도적이었다.

* * *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그들은 주호가 하는 양을 모두 보고 있었다. 조 과장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그래도 아직 저놈은 사태 파악을 못하는 것 같은데요?”

이초원이 말했다.

확실히 그래 보였다. 주호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뭔가 꼼수를 부리려는 표정이었다.

“어라?”

그런데 갑자기 주호가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주호는 일반 유저가 다루는 캐릭터와 똑같았다. 다른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배워야만 펼칠 수 있고, 유저가 할 수 없는 짓을 할 순 없었다. 진진의 화신인 현운자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 로그아웃을 했다?

그건 유저의 몸으론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이 지켜보는 사이, 주호는 다시 등장했다. 그가 잠시 강호세계를 벗어난 시간은 겨우 2초 남짓.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조 과장이 물었다. 그에 질문을 받은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마교주 현신!”

* * *

마교는 육반산에 살지 않았다. 원래 십만대산에 살았다. 때문에 마교주 역시 십만대산에 살아야 했다. 원 태조릉의 네 명의 신장을 제거하면 마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십만대산에서 말이다.

그게 게임상의 설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 육반산의 원 태조릉에 마교주가 나왔다. 교주 친위대 300인과 함께 말이다.

“참 나,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조연의 입에선 비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혔다. 저놈들, 마교 놈들이 왜 여기에 나와야 하는가? 조연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충분히 짐작했다.

시뻘건 마기가 광장 전체를 도배했다. 살아남은 유저들이 간신히 휴식을 취하다가 화들짝 놀라 조연 옆으로 이동했다. 원래 조연을 따라 같이 온 유저들뿐만이 아니었다. 구대문파의 문도들도 마찬가지로 조연 곁으로 황급히 옮겨 갔다. 심지어 사황성 흑룡까지 말이다.

마교주의 수준은 초절정도 넘어서 거의 운영자급이었다. 조연의 능력으론 교주 친위대원 한 명을 감당키도 어려울 정도로 녀석들은 압도적이었다.

애당초 마교 출세라는 에피소드는 강호 에피소드 막장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그놈들의 말도 안 되는 수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른 유저들은 다시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지만, 조연은 느긋하기만 했다.

조연이 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는 절세가인을 보고 외쳤다.

“진 소저, 이제 됐잖아요! 청소는 그쪽에서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구축 가능한 선험적 인식 알고리즘’에 기반한 귀납적 패턴 인식 인공지능, 코드 네임 ‘강호’는 영구적으로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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