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7장. 미션 발동 (59/62)

제57장. 미션 발동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왜 내가 지금 저들을 쫓고 있는지, 왜 내가 아직도 이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있는지.

“뭐 해!”

선배라는 사람이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뛰쳐나갔다. 전투 중에 한눈이나 파는 정신없는 놈이 돼버릴 수는 없다. 무능력자보단 배신자의 멍에를 짊어지는 게 차라리 나았다.

* * *

해남파가 쫓고 있는 이들은 문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토낀 태극문 일당이었다. 처음엔 언제 또 조연이 튀어나올까 두려워 조심스레 그 뒤를 따르기만 했지만, 며칠 동안의 정탐 결과 ‘괴물’은 저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게 밝혀졌다. 그때부터 꽁초와 질풍조의 악에 받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그 대상이 조연이어서 그런 꼴을 당한 것이지, 질풍조는 절대 약한 조직이 아니었다. 소봉과 적초, 담운이 그 힘에 반해 남기를 원할 정도로 충분히 강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질풍조를 보기 전에 조연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조연이 해남파를 쑥대밭으로 만들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괴로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런 가정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제 와서 머리 숙이고 소요파에게 다가가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판단 빠른 적초도, 잠깐 꽁초의 농간에 놀아난 담운도 그런 비겁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들 어린 세 청년은 그렇게 수렁 같은 상황으로 점점 끌려가게 된 것이다.

소봉은 앞서 나간 질풍조를 따라 바삐 발을 놀렸다.

“3조! 너무 갔다! 돌아와!”

“야, 이 새끼야! 똑바로 못해!”

해남파 질풍조장 응풍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싸움이 소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했다. 저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삼면이 꽉 막힌 곳이었고, 그런 까닭에 이쪽의 수적 우위가 별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전장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먹자 겸 구경꾼인 일반 유저들이 더 많았다. 겉으로 보기엔 호시탐탐 누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들의 칼이 언제 해남파에게 향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죽엇!”

“너나 뒈져라!”

챙! 파캉!

욕설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전선은 답보 상태였고, 누구 하나 죽어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태극문 일행의 뒤에선 주술과 부적술을 배운 이들이 온갖 버프 기술을 걸어주고 있어서 더욱 벽을 깨기가 힘들었고, 이쪽은 위험하다 싶으면 즉시 전장을 이탈하곤 했다.

콰쾅!

“와아!”

이것은 또 무엇인가? 눈앞에서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구쳤다.

“벽력왕이다!”

“폭마!”

일반 유저들에겐 벽력왕, 그리고 구대문파에겐 폭마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유저였다. 레벨도, 무공도, 랭킹도 보잘것없는 이였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일인 전승 문파 벽력문의 당대 문주였다. 거기에 모든 대문파로부터 척살령이 내려진 위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저 태극문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퇴! 후퇴! 물러서!”

다행히 엄청난 효과에 비해 폭탄의 위력은 크지 않아서 즉사한 질풍조는 없었다. 하지만 체력이 반 이상 날아가 버렸고, 다시 한 번 폭탄이 날아온다면 뒷일은 장담할 수 없었다.

응풍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질풍조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뿔싸! 질서 정연히 물러선다 해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상황인데, 일반 유저들의 혼란이 그들의 발을 지체시켰다.

그리고 그때, 재차 폭탄이 날아들었다.

콰쾅!

목불인견이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들, 폭탄 파편에 팔다리가 잘린 시체들이 순식간에 전장을 어지럽혔다.

“야, 이 개새끼들아! 비키라고!”

벽력왕이 의도한 게 이것이라면 제대로 들어맞았다.

다급해진 질풍조의 응어리진 분노가 분출됐다. 그들이 일반 유저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질풍조의 손을 떠난 도검이 눈앞에서 허둥대는 일반 유저들을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으악!”

“이, 이 새끼들이 사람 잡는다!”

비명을 외치는 자들은 하수였다. 칼이 닿기도 전에 겁에 질린 먹자들이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그런 먹자들을 좋게 생각하는 일반 유저들은 없지만, 이 혼란통 속에선 먹자와 유저가 구별이나 가겠는가?

당연히 일반 유저들도 질풍조의 인정 없는 손속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기 시작했다. 한 발짝 물러서 관망하던 실력 있는 일반 유저들이 칼을 뽑아든 것이다.

처음엔 한둘이었지만, 이내 전선 전체로 번져 갔다. 그리고 삽시간에 질풍조를 위시한 해남파 광해단 전부가 일반 유저들에게 포위당해버렸다.

“이 미친놈들아! 칼질 그만 하고 물러서라고!”

그나마 이성을 잃지 않은 간부급 유저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뒤로 빠지라고 외쳤지만, 이젠 퇴로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날아오는 폭탄.

폭탄은 해남 문도들만 모여 있는 밀집 지역에 제대로 떨어졌다.

콰앙!

이번엔 소봉도 피할 수 없었다. 너무 앞서 간 탓이었다. 소봉의 체력이 급전직하했다.

소봉은 아껴 둔 환혼신단을 하나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번에야 용케 버틴다고 해도 다시 폭탄 세례가 오면 그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기랄. 여기까지 와서…….’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

소봉은 죽음을 직시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난 세월, 단련된 감각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꺼림칙한 마음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그도 유저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남의 생명 소중한 것도 좋지만, 일단 자신의 목숨부터 보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투는 치열했다. 아니, 전투라고 할 순 없었다. 완전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이었다.

사망 페널티가 약한 먹자들이 몸을 던져 해남의 검을 막았고, 그 사이로 낭인 유저들의 도검이 비집고 들어왔다. 공세적이던 질풍조는 어느 순간 둥글게 진을 짜 수비 대형이 되어갔고, 원진(圓陣)은 그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시체가 즐비하게 널리고, 또 그만큼의 아이템이 바닥에 떨어졌다가 누군가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모두들 한 손으론 칼질을 하고, 한 손으론 아이템을 줍느라 여념이 없었다.

채채챙-

“으악!”

“죽엇!”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면서 내지르는 단말마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한숨 돌리려고 하면 어느새 등 떠밀린 유저들이 미어져 들어와 좀 전까지 살아 있던 자들을 대신했다.

다행히 난전이 된 탓인지 벽력왕의 폭탄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지난다면 해남파 선봉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비켜랏! 물러서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

“안 비켜? 이 개새끼들!”

다행히 그 순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해남의 본진이 선봉의 위기를 보고 달려 나왔다.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일반 유저들은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아직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일은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먼저 해남파 본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뒤를 이어 하북팽가와 제갈세가, 남궁세가 등등의 대문파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대문파와 연합 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 문파들까지 가세하자 어느새 수만이나 되는 인간들로 전장은 가득 메워져 버렸다.

일순간 세력이 커졌지만, 해남파는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이번만 해도 다른 연합 세력의 말을 듣지 않고 태극문 뒤를 쫓다 호되게 당한 터라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남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한 번씩은 소요파 재건군에게 피해를 입어 분노를 표출할 법도 했지만, 오늘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천 무림 연합과 개방과 소림을 위시한 하남 무림 연합도 지척까지 왔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문파들은 대문파 연합에서 별로 발언권이 센 편이 아닌지라, 무조건 대기하라는 지령을 어길 수가 없었다.

“옵니다!”

저 멀리서 주위를 살펴보던 한 무인이 소리를 크게 지르며 연합 간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어딘가?”

“사천 연합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몇만이나 되는 인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천 연합은 저 멀리서 행진을 멈췄고, 그보다 많은 수의 일반 유저들이 그들을 빙 둘러쌌다. 그들을 달고 온 백호단 무리들도 마찬가지로 진군을 멈추었다.

“또 옵니다!”

어떻게 용케 시간들을 잘 맞추었다.

이번에 등장한 이들은 독각룡의 청룡단 뒤를 쫓던 하남 무림 연합이었다. 그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멀찍이 떨어져 진영을 이루었다.

세 개의 거대 집단이 도착했지만, 아직 전부가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집단은 당금 강호 최강의 집단인 사황성이었다.

시뻘건 아이디 일색의 마인들이 몰려오자 일반 유저들이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다. 정파인들에게야 그들은 껄끄러운 상대였지만, 마인들에겐 맛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악명을 높일 수가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단단히 교육을 받았는지 사황성 무사들이 유저들을 학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이 맞았나 보다. 사황성과 함께 온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구대문파에서 축출당한 공동파였다. 비록 함께한 수가 채 오십도 안 되는 소규모 유저 집단이었지만, 마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모습은 정파라는 이름을 무색케 했다. 같은 대문파 연합 소속의 무사들마저 그들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어쨌건 이런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전투가 아니라 재앙에 가까울 것이다.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도 못하고 머릿수에 압사당할 게 뻔했다.

어느 쪽도 먼저 움직이지 못했다. 지루한 소강상태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만 잡아먹고 있는 사이, 대문파 연합 수뇌들이 하나 둘 연락을 받고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즈음엔 저 멀리서 출발한 장백파도 도착했기에 더 이상 가세할 문파도 없었다.

회의를 소집한 이는 당금 강호 최고의 권력자인 흑룡 담경이었다. 하지만 회의를 주재하는 이는 공동파 장문인 직에 오른 주호라는 인물이었다. 흑룡은 문파 수뇌들이 착석하자마자 대뜸 주호에게 전권을 맡기고 상석에서 내려와 버렸다.

주호와 몇 번 면식이 있던 이들도 있었고, 혹은 이번이 처음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그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흑룡은 일을 허투루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 그가 전권을 맡긴 주호라는 사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닐 것이다.

주호가 좌중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을 꺼냈다.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신 걸로 생각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연합 세력이 모인 이곳은 육반산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육반산에서 1리쯤 떨어진 곳이고, 저쪽 바로 눈앞에 보이는 구릉을 넘으면 육반산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소로가 보일 것입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주호가 설명한 곳을 바라보았다.

“조연이 미리 공언한 대로 우리가 쫓아온 소요파 잔당들은 이곳에서 결집했습니다. 미리 약속된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육반산으로 사료됩니다. 조연이 올린 글에 의하면, 모종의 미션을 발동시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소요파뿐만 아니라 우리 대문파 연합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강대한 미션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미션은 마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그건 그때가 되어야 확실해질 것입니다만, 저 역시 마교가 확실하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다들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주호의 말은 다들 모르고 있던 사항을 짚어주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 육반산 안에는 일종의 미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미로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소요파가 직접 안내할 것이니 그저 따라가기만 하시면 될 겁니다. 하여간 미로의 끝에 이르면 왕릉이 하나 나올 것입니다. 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에 의하면, 그 무덤의 주인은 바로 칭기즈칸입니다.”

칭기즈칸이 주는 의미는 컸다. 거기에 무덤이란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황제의 무덤이니 온갖 기진이보가 가득할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위험할 것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주호는 잠시 기다려 주었다.

“왕릉 안에 마교 거주지로 이어지는 암로(暗路)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연계 퀘스트 형식으로 마교가 출현할지는 지금으로선 확답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대략 그런 형식으로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걸 알아두셔야겠습니다. 퀘스트 형식이니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으셔야 합니다. 덧붙여, 지금 당장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연합 세력만 보더라도 얼추 십여만에 이릅니다. 일반 유저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나겠죠. 절대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왕릉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본진은 이곳에 남고, 안으로 들어가 미션을 진행할 사람들을 따로 추려 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정도나 말입니까?”

하북팽가의 천하도가 물었다.

“으음, 각 파의 척살단 정도의 수준이라면 괜찮습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각 파의 수뇌들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새로이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직을 정비하는 사이, 소요파도 서로 전서구를 교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그들 사이엔 구대문파의 진영이 가로막고 있어서 의견을 교환할 방도란 그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 조연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목적지인 육반산까지 진입을 시도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더구나 지금 그들은 각개격파될 소지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불안감에 싸여 조연을 기다리고 있는데, 구대문파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얼핏 보기에도 다른 문도들보다 강해 보이는 고수들이 따로 차출되어 새로운 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총지휘자인 독각룡은 그것이 공격의 전조라고 판단했다. 그 움직임이란 흑룡의 지시대로 따로 고수들만 추려 모으는 작업이었지만, 독각룡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 열세에 선제공격까지 당한다면 조연이 오기도 전에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버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당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중앙에 있는 독각룡의 진영을 향해 백호단과 태극문 진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된 상태로 살얼음판을 걷듯이 움직였지만, 싱겁게도 그들은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포위망 한쪽을 터주기까지 했다. 구대문파 입장에서 그들은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였고, 목적지까지 안내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방관 속에 그들은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소요파가 해산된 이후 장장 반년 만의 재회였다. 그사이에 떠난 사람도 있지만, 새롭게 추가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전력은 그 이전보다 월등히 높아져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폭마라고 합니다.”

“엽사입니다.”

“육손이라고 합니다.”

그들 외에도 양양의 선견지명이나 파도와 일협, 그리고 사풍 일행까지, 제법 강호에 이름깨나 날렸던 낭인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이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얼굴을 확인했다. 어쩌면 지금 소요파의 진정한 힘은 문도들의 실력보다 이런 인맥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때, 독각룡이 갑자기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부터 최종 목적지까지 이동하겠습니다. 후위는 백호단이 맡겠습니다!”

청룡단이 전위에 서고 다시 진군이 시작됐다. 이백의 고수들이 전진을 시작하자 대기하고 있던 대문파 연합의 고수들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 수효는 자그마치 2천. 소요파가 세를 불렸다지만 수적 차이는 여전했다.

육반산 청낭채를 향해 뻗친 관도가 8부 능선 즈음에서 갈라졌다. 거기서부터가 미로의 시작이었다.

거듭 오른쪽으로만 뻗친 갈림길을 택해 이동했다. 그렇게 여남은 번을 반복하자 그들 앞에 ‘원 태조릉’이라고 적혀 있는 비석과 함께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반산에서 사냥을 해봤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이곳에 들렀을 테지만, 다른 이들에겐 생소한 곳이었다. 그리고 무덤의 이름은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늦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바로 조연이었다. 언제 온 것인지 조연이 무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있지 않았다. 네 명의 생소한 인물들이 조연의 뒤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족들이나 입을 법한 금포를 걸친 사내가 한 명, 검은 관을 쓴 강퍅해 보이는 환관,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젊은 수사(修士), 마지막 네 번째 인물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누가 봐도 저들이 평범한 유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연이 미리 말을 꺼내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운영자들입니다. 이번 일이 워낙에 큰일이라서 참관을 요청하기에 제가 받아들였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하긴, 수십만이 참여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운영자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조연의 그 말을 인정이라도 하듯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군웅들은 조연의 말을 믿었다.

“각룡이 형, 진입 조건은 맞춰놨겠죠?”

“물론이지.”

태조릉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진법 중급 이상을 수련한 자들만이 입구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 그 이하라면 시작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조연은 군웅들의 소집을 요청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독각룡에게 미리 말해두었고, 독각룡은 진법 비급을 대량으로 구입해 군웅들에게 배우게 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뒤따라오는 저 대문파 연합에선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끝나면 회포를 풀기로 하고,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뒤에서 대인원이 노려보고 있는데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조연은 바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광과 도림, 폭마 님, 그리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가 영 껄끄러웠다. 지금이야 무덤덤해졌지만, 그땐 얼마나 증오하던 이름인가.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껄끄러운 이름이 조연의 입 안을 맴돌다 밖으로 나왔다.

“엽사 님, 이상 다섯 분들은 후위를 책임져 주셔야겠습니다. 일단 모든 인원의 이동이 끝나면 암도(暗道)를 철저히 틀어막아야 합니다. 방법은 다섯 분이 알아서 하시고, 주의해야 할 건 네 개의 봉인이 완전히 풀린 순간 시간을 놓치지 않고 저희가 있는 곳으로 신속히 이동하셔야 합니다. 약간이라도 지체하면 다섯 분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위험 부담이 큰 역할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고수들로만 최상의 조합을 만든 것이다.

다른 때라면 당연히 이광이 투덜거릴 말이었지만, 다른 이들의 눈이 원체 많아서인지 별말이 없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조연이 앞장섰다. 조연 뒤로 운영자 넷이 따랐고, 그 뒤는 청룡단, 백호단 순이었다.

암도(暗道)는 여전히 살벌했다.

쉭!

“조심!”

픽! 티딩! 팅!

횃불은 한계가 있었다. 강전(强箭)과 비침(飛針) 따위가 횃불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때면 군웅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라리 몇 명만이 진입을 시도했다면 괜찮았겠지만,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진입했기에 재빠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연이 앞장서서 암기들을 일차로 걸러준 덕택에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모든 암기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동작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무덤 속 기관 장치는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강력해졌다. 위력도 세졌고, 공격 횟수도 늘었다.

결국 회피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주술계 유저 몇몇이 암기에 당해버렸다. 체력이 적은 그들에게 암기는 치명적이었다.

“술사들 보호하세요! 천잠보의 착용자들은 회피하지 마시고 몸으로 버티세요!”

암기를 피하면서 명품 갑옷을 착용한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쓰러진 사람들도 회복할 수 있었다. 주위 동료들이 급할 때 쓰려고 아껴 둔 명약과 해독제 따위를 아낌없이 풀어준 덕택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강호에서 명약 아이템은 무척 비쌌고 쉽게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특히 절정급 이상의 해독약은 더욱 그러했다. 비싼 약은 심하면 천만 냥을 넘기도 했으니, 현재 이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하다는 걸 충분히 짐작케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지!”

앞서 가던 조연이 수신호를 올리자 군웅들의 발길이 멈춰 섰다.

흉흉했던 암도는 끝이 났고, 앞엔 너른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넓은지 이백에 달하는 군웅이 전부 들어섰는데도 채 1할도 채우지 못했다.

“다 온 건가요?”

“네, 다 왔습니다.”

광장 벽면엔 유등(油燈)이 밝혀져 있어서 살펴보는 데 무리는 없었다.

“윽, 이거 왕릉이 맞아요?”

“그러게요. 무슨 왕릉이 이래요? 에휴.”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한숨 섞인 불만이 나올 만도 했다. 보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배경이라도 멋들어지게 만들어두는 게 예의가 아닌가 말이다.

왕릉은 조연이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상태 그대로가 완성된 모습이었던 것이다. 광장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여러분의 목숨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살아남고 싶으신 분은 제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소요파가 무사히 암도를 통과해 광장에 도착했을 무렵, 그때서야 대문파 연합의 진입이 시도되었다.

왕릉이 진법 중급 수련자에 한해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탓에, 이들은 시작부터 헤매야 했다. 어떤 이는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인원이 들어가지 못했다. 원인을 분석하는 시간이 얼마간 있었고, 이유를 알았을 때엔 출입 가능 인원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줄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진법 수련자들로만 다시 인원을 구성해야 했다. 인원을 맞추기 위해서 본진에서 다시 유저들을 차출해야 했고, 그렇게 2천 명가량의 원래 인원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나마 공동 장문인 주호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겨우 삼십여 분 정도만 지체되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간이 없다! 바로 들어가!”

선봉은 해남파였다. 낯선 환경에 적이 먼저 들어갔으니 당연히 매복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해남 장문인 꽁초는 주호의 명을 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군들 뒤에서 흑룡이 노려보고 있는데 감히 못하겠다는 소릴 할 수 있을까?

‘훗, 망할 놈들 같으니! 이럴 때만 해남을 찾는 것이냐?’

꽁초가 열이 받는 이유는 주호가 아니라 다른 놈들 때문이었다. 평소엔 신생 문파 취급을 하면서 큰일엔 껴 주지도 않던 놈들이 이럴 때만 해남파의 역량을 추켜세우면서 앞장세웠다.

위험한 일이라 발뺌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왜 이럴 때 해남을 치켜세우느냔 말이다.

‘내가 그런 소리 듣고 기분 좋아할 바보 같아 보이냐, 이 망할 놈들아!’

어쩐지 얕잡아 보인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채채챙-

따당! 칙-

“암기다! 당한 사람을 뒤로 돌리고 계속 전진한다! 멈추지 마!”

역시 암기가 있는 듯했다. 응풍의 고함 소리가 암도를 타고 울렸다.

하지만 말처럼 부상자를 뒤로 돌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통로는 인간들로 빽빽해서 되돌아갈 틈이란 없었다. 다들 알고 있음에도 그저 묵묵히 전진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럴 줄 알고 쾌검을 익힌 사람들을 앞세운 덕분에 피해를 감소시킬 수는 있었다. 해남의 쾌검은 암기를 막는 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전력 손실은 피할 수 없었다. 해남 문도의 삼분지 일이 암도에서 아웃당했다.

“제기랄… 제기랄! 이래서야 무조건 손해잖은가.”

사망도 사망 나름이었다. 이렇게 떼로 몰살을 당하면 문주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은 분명했다. 겨우 터를 닦아놓은 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꽁초는 고민이란 것도 여유가 있을 때나 부리는 사치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쾅!

“크하하하! 계속 와라! 그래그래, 옳지! 잘한다!”

쾅!

쉬이익-

푹! 푹!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폭음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씨발! 폭마다!”

앞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공간에 폭탄.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저 앞이 어떤 꼴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궁왕이다! 물러서!”

폭마는 이미 밖에서 한 번 봤기에 예상이 가능했지만, 궁왕은 달랐다.

궁왕(弓王) 엽사.

비록 잠시였지만, 강호 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던 자였다. 그리고 이렇게 피할 곳 없는 암도에서의 그는 폭마보다도 훨씬 두려운 존재였다.

“물러서라고! 전멸하고 싶어? 빨리 나가, 이 자식들아!”

연사력이 떨어지는 폭탄보다 한 번에 여러 대의 살을 날릴 수 있는 엽사의 노(弩)가 훨씬 무서웠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는 정말로 전멸할 수도 있었다.

“후퇴는 없다! 앞으로 돌격해! 물러설 공간도 없어!”

꽁초가 외쳤다.

그것은 제법 적절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다른 때라면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대열의 최전선에 서서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이광과 그 뒤를 받치는 신도림의 현란한 주술을 보았다면 그런 명령을 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보지 못한 대열 중간 즈음에 서 있던 해남 문도들이 문주의 명을 따라 전진하려 애썼다. 그러나 직접 적들과 대면한 이들은 명령을 무시했다. 어떻게 저들을 뚫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죽어서 뚫릴 길이라면 명을 따르겠지만, 이건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앞에선 뒤로 가려 하고, 뒤에선 앞으로 가려고 했다. 이 새끼, 저 새끼 욕설이 난무하고, 때론 열 받은 이들이 동료에게 무기를 휘두르기까지 했다. 이런 개판이 또 어딨을까?

슬슬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뒤쪽의 문도들도 감을 잡기 시작했다. 저렇게 악착같이 뒤로 물러서려고 한다면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조연이가 있는 게 아냐?”

“으으…….”

그들의 착각은 그들의 목숨을 조금이나마 건져 주었다. 꽁초도 조연이 출구를 틀어막고 있다고 여겼기에 더 이상 전진을 독려할 수 없었다.

없는 공간을 억지로 만들어서 뒤쪽으로 조금씩 물러섰다. 그러자 살아남은 앞쪽의 문도들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이십여 보가량을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자 드러난 참상.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끄응.”

조연은 없었다. 달랑 다섯뿐이었다. 저들 다섯이 그 짧은 시간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참상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무조건 대기!”

꽁초가 드디어 정상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돌진할 미친놈은 없었다.

비록 해남파는 이렇게 망가졌지만, 그들 뒤엔 아직도 놈들을 잡아 죽일 고수가 수두룩했다.

이광 일행이 해남파의 전진을 막고 있는 사이, 조연은 홀로 광장에 뚫린 네 개의 동굴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 네 개의 동굴에 조연이 고생 고생해가면서 모은 퀘스트 봉인 아이템을 한 개씩 설치해야 했다. 아이템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미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백택이한테 자세히 물어볼걸.”

봉인 해제 아이템은 소모품이라 한 번 사용하면 사라졌다. 그런데 어디에도 이 아이템을 이 동굴에 사용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았다. 순서를 잘못해서 넣으면 여태 고생한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뭔가 힌트가 있을 텐데 말이야.”

있다면 진즉에 발견했을 것이다.

“좀 알려 주면 안 됩니까?”

조연이 뒤돌아보며 능청맞게 물었다. 그가 운영자라고 말했던 이들이 조연의 등 뒤에서 그가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었다.

“알아서 하십쇼. 뭐 실패해도 다시 모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수사 복장의 젊은 사내가 비꼬며 말했다. 검은 환관은 처음 볼 때부터 계속 찝찝한 표정이었고, 황족은 무표정 일색이었다.

“진 소저! 진 소저도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어라? 저 진씨 운영자는 가르쳐 줄려나? 다른 운영자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미모의 아가씨 운영자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펴 입술에 댔다. 세로로.

조용히 하란 뜻이었다.

그녀의 주의 덕분에 조연은 육손에게 이들의 정체를 계속 감출 수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너무 시간을 끈 탓일까? 광장 가운데서 대기하란 말을 했는데도 육손은 조연을 살피러왔다.

“조금.”

조연은 육손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비록 육손이 제갈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버금갈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확실하진 않지만 들어보시겠어요?”

역시!

“4라는 숫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이럴 때에 쓴다면 1이나 3을 쓰겠죠. 사상(四象)의 원리를 적용했다고 하기엔 그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일렬로 나란한 사상이란 없죠.”

“짧게!”

“네, 짧게. 굳이 4라는 숫자를 사용했다면 그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칭기즈칸과 관련된 개인적인 숫자라는 거지요. 제가 알기론 칭기즈칸과 관련한 4라는 숫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칭기즈칸 최고의 장수들인 수부타이, 제베, 젤메, 쿠빌라이, 이들 사선봉(四先鋒)이거나, 아니면 그의 네 아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그리고 툴루이.”

그것 참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 둘 중에 어느 쪽이야?”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봉인 해제에 필요한 네 가지 아이템에 대해 알고 싶네요. 그걸 알아야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연은 여태 그 부분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비밀로 감추고 있었다. 오직 그만 알고 있으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하나는 벽옥으로 만들어진 푸른 늑대의 조각상. 영하성에서 낭왕이라는 레이드 몹을 잡아서 먹은 거지. 또 하나는 기린의 뿔. 동물원 기린이 아니라 신수(神獸) 기린이야. 그리고 용혈(龍血)이라고 황제 자신의 피도 있고. 마지막은 신전(神箭)이라고 북막에서 입수한 검은 화살. 이렇게 네 개야.”

마지막 아이템을 말하는 순간, 조연은 이 동굴들이 사선봉과 관련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세 장수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베라는 장수는 그도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활의 명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육손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조연도 뻔히 알아차린 걸 그는 고심했다.

한참을 고민한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화살이 뜻하는 건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그것도 모를 수 있을까?

“제베가 아냐?”

조연이 너무도 의아해 물었다.

“제베요? 신궁 제베를 말하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여긴 칭기즈칸의 네 아들과 관련된 게 맞습니다. 기린과 용혈을 봐서 분명하지요. 두 가지 물건은 황제를 가리키는 물건이지, 용맹한 장수들하고 연관된 물건 같지는 않거든요. 덕이 높은 성인을 상징하는 기린은 분명 삼남 오고타이를 뜻하는 물건일 겁니다. 오고타이는 덕이 높아서 형제들이 모두 그에게 대칸의 자리를 양보했거든요. 용혈이라면 역시 칭기즈칸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막내 툴루이와 관련된 물건일 거구요. 그리고 푸른 늑대상이라면 몽고 민족의 전설과 기상을 이야기하니 역시 장남 주치에게 어울릴 물건이겠고……. 문젠, 검은 화살의 정체네요. 그게 둘째 차가타이하고 연관이 있어야 할 텐데, 별로 그와 관련해서는 아는 바가 없거든요.”

“차가타이라면 차가타이한국을 세운 사람 아냐?”

“아, 네, 맞지요. 호라즘 제국이 망하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웠죠.”

역시 그랬던가?

육손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이미 답이 나왔는데 말이다.

찌푸려졌던 조연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럼 그 화살이 둘째 것이 맞네. 북막에서 그 화살을 입수할 때 상자에 담겨 있었거든. 상자엔 차가타이한국에서 북막주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지. 선조가 쓰던 물건이라고 말이야.”

어쩐지 너무도 간단했다. 만약 육손이 직접 퀘스트 아이템을 구했다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다 된 건가요?”

자신이 큰 도움이 됐다는 걸 육손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래. 그럼 왼쪽부터 차례대로인가?”

“그렇죠. 왼쪽이 서열이 높으니까요.”

“좋아, 그럼 가장 우측의 동굴로 사람들을 모아줘. 이광에게도 말해두고. 내가 네 번째 동굴로 들어가는 순간, 바로 거기로 후퇴하라고 말이야. 천리종무영을 쓸 테니 한눈팔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둬야 해.”

육손이 명령을 이행하러 돌아가자 조연은 첫 번째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주치의 상징물인 ‘푸른 늑대 조각상’을 들고 천천히 동굴의 막다른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석상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연은 그곳에 들고 있던 조각상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백택에게 들어 대충 알고 있었다. 이곳은 이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조연도 승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우웅-

동굴 전체가 통곡이라도 하듯이 울어댔다. 조연이 더 이상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천리종무영을 시전해 재빨리 바로 옆 동굴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두 번째 동굴에서 검은 화살을, 세 번째 동굴에선 기린의 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동굴.

조연이 동굴 안에 들어갔을 때엔 이미 말을 전해들은 군웅들이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조연이 뒤를 돌아보자 헐레벌떡 이광과 엽사 일행이 따라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행히 이탈자는 없었다. 제법 시간을 지체했는데도 그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던 것이다.

조연이 이광을 향해 또다시 명을 내렸다.

“이광! 아까처럼 입구를 틀어막아! 이번엔 정말로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조연의 이번 외침은 기백이 달랐다. 이광은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다섯 명이 다시 동굴 입구를 틀어막는 것을 본 조연은 군웅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세 마리 레이드 몹이 소환됐습니다. 그리고 이 동굴 안에서 또 한 마리의 레이드 몹이 튀어나올 겁니다. 소환되자마자 화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긴장하세요! 이놈들은 여러분이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놈들입니다!”

이미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다. 다시 한 번 조연이 기합을 불어넣자 모두의 눈이 더욱 예리해졌다.

조연은 마지막 봉인 해제 아이템인 용혈을 가지고 석판으로 다가갔다. 그가 용혈을 툴루이의 석판 위에 놓자 동굴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떨기 시작했다.

“준비하세요! 여유 따윈 남길 생각 마세요!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몰살입니다!”

다시 경고하는 조연이었다.

‘그놈들? 글쎄? 인간들 수준으로 감당이나 할 수 있으려나? 아마 네놈 같은 녀석 백이 달려들어도 간당간당할걸?’

백택에게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실력이 낮았지만, 여기 있는 군웅들의 평균 수준보다는 높았다. 백택의 위협 덕분에 이렇게 구대문파의 몰살 계획을 짜긴 했지만, 그것도 곧 나올 녀석을 쓰러뜨려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동굴은 마치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광풍이 몰아치고 모래가 날렸다. 실눈을 떠야 간신히 눈앞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조연의 신안을 통해 희뿌연 형체가 잡히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준비하세요! 소환되는 중입니다!”

검은 오러의 거대한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예전 하남의 파신묘에서 봤던 그 건달바왕만큼이나 컸다. 그리고 창날처럼 놈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오러는 감히 건달바왕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놈이라는 걸 의미했다.

<크아아앙! 이놈들! 누가 감히……!>

“공격!”

몹 따위가 외치는 말을 들어줄 이유란 없었다. 조연은 공격 개시를 외침과 동시에 바로 무진을 발동했다. 아무리 본신 실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가진 최강의 무공은 무진이었다.

게다가 무진만이 발출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잔뜩 기를 끌어올리고 있던 군웅들이 각자 지닌 최고의 필살기를 뿜어냈다. 폭마는 오뢰신탄(五雷神彈)을, 엽사는 아수라전(阿修羅箭)을. 이광도 강기 발출을 시전했고, 신도림과 고현 같은 주술사들은 업화를 시전했다.

오색 빛살이 흑영(黑影)을 뒤덮었다. 이런 식이라면 놈은 나오자마자 명부로 강제 소환당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연은 안심하지 않았다. 무진을 시전하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림대환단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절정에 다다른 구양신공이 엄청난 속도로 조연의 단전을 채워나갔지만, 조연은 그 짧은 시간도 아까워 속이 탔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발출한 무공에서 발산된 빛무리 때문에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안을 지닌 조연은 이 망할 괴물이 쓰러지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의 오러는 오히려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정말로 백택의 말이 맞았다.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가소로운 것들!>

우르르릉- 콰르르릉!

굉음과 함께 눈앞에 벼락 세례가 떨어졌다.

푸른 뇌전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주위의 땅을 꺼멓게 태웠다. 그 땅을 밟고 서 있는 유저들도 그 무지막지한 벼락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체력이 약한 유저들은 그 공격 한 번에 쓰러지고 말았다.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지만, 숯처럼 타버린 시체는 여태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 더 오싹했다.

뇌전이 사라지고 나서야 군웅들은 괴물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흑마(黑馬)를 탄 장수였다. 장수의 손에 들린 장도(長刀)에선 파직파직 소리와 함께 뇌전이 일렁이고 있었다.

“쉬지 말고 공격해요!”

밖엔 이런 놈들이 세 마리나 있다고 했다. 물러서봤자 그곳이 더 지옥 같을 것이다. 그나마 살아날 방도라면 눈앞의 놈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군웅들은 더욱 악착같이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쾅! 콰쾅!

취익-

그러나 이 괴물은 그 정도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흑마가 투레질을 하더니 군웅들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탁. 타다닥-

그리곤 딱 장도를 휘두르기 적당한 거리가 되자, 거대한 칼이 군웅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츄아악-

캉! 카앙!

대열 앞에 선 유저들은 그 거대한 칼이 내리쳐질 때 죽음을 예상했다. 피할 공간도 없었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두 절세고수들이 그들의 목숨을 연장시켜 준 것이다.

대열 뒤쪽에서 엽사가 장도의 기세를 죽이는 강기전을 쏘자 운기를 마친 조연이 금강저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역시 괴물은 괴물이어서 조연은 장도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동굴 한쪽 벽으로 튕겨져 버렸다.

“공격 잠시만 멈추세요!”

조연은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놈의 체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차라리 광장으로 끌고 가서 처리하는 게 나을 뻔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광장으로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조연이 급히 몸을 꺾어 검은 장수의 뒤로 넘어갔다. 마침 조연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독각룡과 간부급 고수들이 군웅들의 공격을 제지시키면서 방어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놈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려야 했다.

조연은 그가 지닌 모든 무공을 한꺼번에 불러일으켰다. 철포삼, 사상검진, 일성소, 구양신공의 염기, 권강, 심결육합권의 충자 결, 거기에 고현이 전투 시작 전에 붙여 준 갖가지 부적들. 무진을 제외한다면 강호 최강의 공격력일 것이다.

쾅! 쾅! 콰쾅!

조연의 보리금강저가 검은 장수의 뒤를 굉음을 내면서 부딪쳐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때쯤 이미 장수는 앞쪽 대열을 한바탕 쓸어버린 상태였다. 몇 번의 뇌전이 작렬했고, 몇 명의 유저들이 시커멓게 타죽었다.

‘날 좀 바라봐! 제발!’

그러나 장수는 제법 자존심이 셌다. 조연의 애간장 녹는 마음을 모르는 척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군웅들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벌써 스물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조연이 있는 곳, 장수의 뒤편으로 꺾어 들어왔다. 예사로운 신법이 아니었다.

“준비하세요.”

낯익은 목소리, 육손이었다.

[격체진력(隔體眞力)을 받았습니다. 공격력이 향상됩니다. 내공이 늘어났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제대로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육손의 말대로였다.

그가 내 등에 내력을 주입하자마자 장수가 단번에 몸을 뒤집어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쏟아지는 벼락!

스슷스슷- 스스슥-

나도 내가 인간인지 궁금하다. 세상엔 벼락 피하는 놈도 있었다. 바로 나.

이제 됐다. 넌 죽었다.

“공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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