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들끓는 강호
강호에서의 소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일파만파 구석구석까지 번져 갔다. 강호가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어수선했던 적은 없었다.
시작부터 거창했다. 안휘성의 남궁세가가 첫 제물이 되었다. 남궁세가주 문창검 남궁기를 비롯해 문파에 머무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씨 몰살을 당했다. 그러나 남궁세가가 강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어쩌면 그대로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호북성 제갈세가에서 두 번째 혈사가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드디어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구나 제갈세가엔 과거 강호팔룡의 일인인 와룡 제갈량이 있었다.
세가 식솔을 거느리고 남만 야수맹을 정벌하고 있던 제갈량이 급히 문파로 귀환했다. 그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혈사를 벌인 이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과거 감숙성 난주에 자리 잡았던 소요파의 잔당들이 벌인 짓이라는 게 드러난 것이다.
제갈량은 공언했다. 앞으로 그들은 강호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강호 유저들은 그 말을 믿었다. 소요파가 한창 성세를 구가하던 시절보다 지금의 구대문파는 더욱 거대해졌고, 단단해졌다. 어찌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흔들려야만 했다. 또 다른 소문 하나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구대문파로 승격된 이후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던 신흥 강호 해남파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더구나 그 대단하고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단 일인(一人)에 의해 행해졌다는 이야기는 모든 이를 충격에 빠뜨리고도 남았다.
덧붙여 해남을 점거한 절대고수가 전 소요 문주 조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간 있었던 두 번의 혈사의 의미도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대문파에겐 근심으로, 중소 문파와 일반 유저들에겐 기대와 흥분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혼란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해남파에 하루 더 머물며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든 조연의 수하들이 강남땅을 휩쓸기 시작했고, 또 다른 무리들은 촉도(蜀道)를 지나 사천으로 진입했다.
숨어 있던 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견제를 받고 있던 힘도 기지개를 폈다. 영하성과 산서를 오가며 고된 전투를 거듭하던 독각룡의 청룡단도 진군을 시작한 것이다.
세인들에게 알려지기로 청룡단의 수는 겨우 스물다섯. 하지만 그들이 떨쳐 일어났을 때 그 숫자는 기만술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몰려든 것인지 일백이 넘는 무사들이 청룡단에 합류했다. 개개인이 모두 최절정에 육박한 최고의 고수들 일색이었다.
각 지역에서 이름깨나 날린 낯설지 않은 아이디를 가진 낭인 유저들과 배신했다고 알려진 소요파 문도들이 청룡단에 합류했다. 심지어 그 속엔 과거 조연을 쓰러뜨리고 강호 최고수의 칭호를 받았던 엽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적은 확실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잇속을 챙기던 무리들이 응징의 대상이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이템을 잃고, 레벨이 하락하고, 흉한(兇漢) 상태가 되어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계란으로도 바위를 깰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대문파에 과감히 도전했고, 때론 승리했으며 때론 패배했다.
첫 혈사가 벌어지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들과 싸우지 않은 대문파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싸움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요파 3개 군이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이동을 시작했다. 사천의 무리는 북으로 향했고, 강남의 무리는 북서쪽으로 향했다. 황하 이북의 청룡단은 서쪽으로 진로를 돌렸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감숙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이상행동과 맞물려 한 편의 글이 강호 홈페이지에 실렸다.
<저의 재등장을 반기는 분들도 계실 테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짐작하시다시피 지금 강호에 혼란을 조장하는 이들은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맞습니다.
저를 알고 소요파를 아는 분들이라면 지금 우리의 행위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일이란 걸 아실 겁니다.
협객은 은원을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협객이 아니어서 은혜는 잘 모겠습니다. 하지만 원한은 잊지 않습니다. 구대문파, 오대세가 전부가 무릎을 꿇을 때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이유는 복수 운운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쪽이 싸우는 방식을 보며 전략의 부재를 말하는 분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행보는 어제, 그제 계획된 것이 아닙니다. 훨씬 오래전부터 잡혀 있었고, 현재까지 틀림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단계적인 복수가 아니라 전면전을 택한 이유는, 우리 소요파가 강호 최강임을 공인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동 중인 우리 일행을 잘 따라오십시오. 모종의 장소에 도착하고 나면 축제의 장이 펼쳐질 것입니다. 함정을 우려하여 오지 않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실 겁니다.
그날, 저는 우리 소요파로도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미션을 발동시킬 생각입니다. 그날은 소문만 무성할 뿐 위치도 파악되지 않은 강호 최강의 문파가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미션은 추후에도 발동될 수 있지만, 다시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오직 저만이 발동할 수 있고, 저는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초절정의 경지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제 초대에 응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날 뵙도록 하지요.>
조연이 올린 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올린 글의 마지막 부분, 초절정무공에 대한 짧은 언급은 강호 유저들을 더 이상 방관자로 남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절정에 이른 고수부터 한몫 잡고 신세 펴 보겠다는 삼류 낭인 무사까지, 모든 이들이 인생 역전을 꿈꾸며 조연의 계획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번에야말로 끝장내겠다는 각오로 소요파 뒤를 강호의 대문파 전체가 추격하고 있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그들에게 협력하는 중소 문파들이 합쳐진 그 수는 무려 수만에 달했다.
하지만 그 수만의 대문파들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쫓기게 되었다. 조연의 미끼를 덥석 문 수십만의 일반 유저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그들 주위를 배회하는 저 하이에나 무리들이 언제 혁명군이 되어 그들 등에 칼을 꽂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증폭된 긴장감이 양 진영을 감쌌고, 그런 상태로 추격전이 이루어졌다. 강호는 언제 폭발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곧 터져 버릴 듯이 들끓고 있었다.
* * *
‘역시 황도(皇都)라 이건가?’
북경엔 무기를 패용하고 있는 이들이 없었다. 간혹 철선(鐵扇)이니 철필(鐵筆)이니 하는 기문 병기를 착용한 이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건 유저가 아닌 NPC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간혹 무기를 착용한 이들을 볼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림인이 아닌 관부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그간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보러 주루에 들렀다. 주루 2층엔 큼지막한 탁자들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그중 가운데 탁자에 검은 관포를 뒤집어쓴 사내 셋이 앉아 있었다. 소문만으로 듣던 동창 소속의 유저들이었다.
‘운이 좋은 걸까?’
사내들은 낯선 인물이 들어섰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조용히 눈을 내리깔면서 그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세 유저들은 마침 내가 궁금해하고 있던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지금이야 강호에서 제법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잖아.”
“누가 모르냐? 나도 그러고야 싶지.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하냐? 무단으로 근무지 이탈했다가 평생 쫓기고 싶어? 정 따라가고 싶다면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든가. 하여간에 난 신경 끌란다. 아싸리 이참에 사표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야, 정표 네 말도 일리가 있긴 해. 근데 그거 아냐? 조연이가 한 말을 보자면, 분명 마교가 나올 게 뻔한데 말이야. 그게 겨우 한둘일까? 못해도 몇백, 몇천은 튀어나올 거다. 분명 조연이도 자기네들만으로 감당 못한다고 했으니 그 정도는 될 거야. 그래서 유저들 끌어 모으는 거구. 몇백이라면 모르겠지만, 몇천이라면… 괜찮은 놈으로다가 하나 건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래? 그 확률이란 걸 믿는다면 당장 사표 쓰고 가라. 난 싫으니깐. 난 공무원이 좋다.”
두 사내는 소요파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고, 한 사내는 남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나하곤 별 상관이 없다. 저런 피라미들이 가세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하여간 건실한 직장을 갖춘 이런 사람들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낚일수록 일이 편해질 테니까 말이다.
세 사람은 한참을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렁에 같이 빠지고 싶어 했고, 한 사람은 그 두 사람을 밀어 넣으려고 애썼다.
관부란 무림의 세계와 달랐다. 문파에선 명성을 올리면 상급의 무공을 배울 수 있지만, 동창이나 금의위에선 직급이 올라야 그런 일들이 가능했다. 그런데 상위 직급의 수는 아래 등급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으니, 저들에게 직장 동료란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딜 가도 더러움이 묻지 않은 곳이 없구나.’
반년간 혼자 수련할 땐 사람 내음이 그립더니만, 막상 세상에 나오니 추잡하고 더러운 일들만 겪는 듯했다. 소봉이 놈의 배신도 그렇고, 놈을 이용해먹으려던 꽁초의 허술한 계략도 그랬다. 거기에 이놈들의 작태가 또 한 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 더러운 꼴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부대끼며 살면 결국 보게 될 수밖에 없으니, 보기 싫으면 가면 되는 것이다.
주루를 나왔다. 수하들이 계획대로 잘해주고 있으니, 나도 그들의 기대에 따라주어야 할 것이다.
자금성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북경성 내성(內城)을 통과해 자금성의 남쪽 정문인 오문(午門)에 이르렀다. 기치창검(旗幟槍劍)이 날카롭게 예기를 뿜어내는 가운데 수위 무사들이 입구를 삼엄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유저들로 보이는 사람은 얼씬도 하지 않았고, 걸어서 문을 통과하는 사람도 없었다. 수레나 가마를 탄 고관대작들이 이따금 오고 갈 뿐이었다.
차착- 챙!
그 앞으로 가자마자 무사들이 창검으로 가로막더니 순식간에 날 둘러쌌다.
‘이자들…….’
일개 문지기들이 모두 최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과연 황궁인가 싶었다. 그리곤 위장(衛將)으로 보이는 NPC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신분증!”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비슷한 것은 있지만.
“통과!”
당연히 이렇게 될 줄이야 알고 있었다. 황금배첩의 힘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삼엄한 경비도 작은 배첩 하나에 그 힘을 잃었다.
자금성은 넓고도 넓어서 몇 개의 관문을 통과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홍의각(弘義閣)에 이르러 고위 관리를 볼 수 있었다. 금의위 부영반이라는 관리를 만나고서야 내 황금배첩은 손을 떠났다.
그렇게 황제 알현이 시작되었다.
* * *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이 대리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는 여전히 조연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IGM은 요 며칠 정신없이 바빴다. 그 모든 일은 조연이라는 유저에게서 비롯됐다. 조연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은 한참 후에나 잡혀 있는 마교(魔敎) 출세(出世) 에피소드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홈페이지의 게시판 관리자가 조연의 글을 보고 개발팀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 마교 출세는 봉인되어 있긴 하지만 업데이트가 따로 필요할 정도는 아닌, 이미 완성된 에피소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성된 상태라고 해도 간단히 퀘스트로 발동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기에, 개발팀은 다시 검토를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하루 밤낮을 꼬박 고생한 결과는 그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조연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방법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겨우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라, 혹은 강호의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가 그렇게 퀘스트를 만들어뒀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은 사건을 무마하는 게 중요했다. 강호의 유저 수십만이 이미 조연의 글을 읽고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뭐, 하려고만 한다면야 욕을 먹더라도 퀘스트를 다시 봉인할 수도 있지만, 그 순간 사장 정지훈이 개입해버렸다.
“그대로 두시오.”
단지 그 말뿐이었다.
개발팀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사장의 말이니 어쩌겠는가? 그저 조연의 행로를 유심히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연이 황궁에 도착하자, 정말로 그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봐야겠군.”
조연은 지금 황제와의 알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강호에서도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 그의 말 한마디면 아무리 초절정고수라 할지라도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오늘처럼 유저의 요청이 있을 시엔 운영자가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이 대리는 담당 운영자가 아니었다. 운영자가 직접 관장하는 퀘스트는 옵저버 2팀의 영역이었다. 그쪽 파트도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다른 팀에서도 2팀에 놀러와 있었고, 심지어 사장 정지훈도 와 있었다.
사장 정지훈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초원은 헤드셋을 낀 2팀장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담당 운영자가 따로 있었지만, 사장까지 참석한 마당이라 팀장이 직접 조연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2팀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고 느낀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을까?
“안 됩니다. 불가합니다.”
팀장이 대답하자 조연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나왔다.
「아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영생을 원했고, 난 그것을 주었어. 난 신이 아닐지라도 그대에게 난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신의 대리인이라는 황제가 어떻게 신의 말을 거역할 수가 있는 거야?」
조연은 이미 황제에게 원하는 물건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지금 황제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은 그와는 다른, 살인 페널티에 대한 부분이었다.
“저 사람 너무 막나가는 거 아냐? 아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줄 알 것이지 왜 저렇게 물고 늘어진대?”
“하하, 실장님이 저 사람 잘 모르셔서 그래요. 유명한 사람입니다. 궤변으로요. 뭐 지금 같은 상황에선 딱히 궤변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그나저나 개발팀은 왜 쓸데없이 저따위 아이템이나 만들어서 번거롭게 하는 거래요?”
그 개발팀 직원은 이미 시말서를 쓴 상태였다. 조연의 소지품창과 황금산장에 저장된 아이템은 며칠 전에 철저히 조사를 당했고, 일만이천과(一萬二千果)를 획득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아이템의 개발은 기획팀의 의뢰에 따라 개발팀이 담당했다. 그런데 이 아이템은 그런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지금 옵저버 2팀장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IGM의 개발팀은 간혹 불필요한 아이템을 충동적으로 만들곤 했는데, 일만이천과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원래 사고 친 개발자의 의도는 황금산장주 금적산에게 갖다 주면 상당량의 금액을 보상받고, 무림맹주 조운학에게 가져다주면 초절정 검공 비급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연은 이 복숭아를 황제에게 건넸다. 그리고 말로 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라는 게 때론 상황에 따라 무섭게 변할 수도 있었다.
사장이 뒤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안 2팀장은 가부의 결정을 사장에게 물었고, 사장은 승낙하라고 했다.
일단 받고 나자 조연의 요구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자신이 정식으로 다시 요청할 때까지 강호에서 살인을 저질러도 관부의 병사나 포쾌들이 유저들을 잡으러 다니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황제가 아니라면 누가 해주겠는가?
당연히 일리가 있는 요구였다. 그 때문에 이렇게 2팀장이 쩔쩔매고 있는 것이었다. 뒤에는 사장이 지켜보고 있고.
“안 됩니다.”
2팀장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조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초원은 조연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조연의 수하들 대부분이 카오틱 상태였고, 머잖아 조연도 마찬가지 상황에 처하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들어주세요. 개발팀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고요.”
정 사장의 말이었다. 정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휴.”
사장의 재가가 떨어지자 2팀장이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리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황은 정리됐다. 구경꾼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초원은 황급히 정 사장을 따라갔다.
뒤에 이 대리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 사장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장실 안에까지 들어가고서야 정 사장의 입이 열렸다.
“언제랍니까?”
“오 일 후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날짜가 딱 맞아떨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수고했어요. 일단은 그쪽에다 그렇게 연락해두겠습니다. 이초원 씨도 그에 맞춰서 준비를 취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 *
“크크큭.”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운영자라는 사람이 너무 미숙했다. 저래가지고서야 어디 밥이나 제대로 먹겠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당황을 해도 그렇지, 요구한 대로 그대로 받아주는 경우가 어딨는가? 솔직히 나 혼자만 페널티를 면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보다 나은 조건이라면 감숙성이라는 지역만으로 묶어둘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날짜를 못 박았어야 했다. 그런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페널티 유보를 승낙해버린 것이다.
“뭐… 언젠가 찾아오겠지. 실수했다면서. 크크큭.”
그때가 되면 또 무슨 요구를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자! 그럼 마지막 물건을 회수하러 가보자구!”
목적지는 장백산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조연 님.”
“히야, 전혀 몰라보겠습니다! 정말 사풍 님이 맞아요?”
미리 연락받은 사풍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관도상에 떡하니 아이디를 띄우고 있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사풍은 정말로 오지 탐험가답게 생겼다. 허리춤에 걸린 칼은 정글을 탐험할 때나 사용할 만도(蠻刀)였고, 어깨엔 밧줄과 갈고리를 메고 있었다.
사풍의 친구들인 적월과 일향도 같이 와 있었다. 그들의 행색도 사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즘 바쁘죠? 어서 들어가요. 말씀드린 대로 이미 승낙은 얻어놨습니다.”
사풍의 안내를 받아 장백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획에 사풍을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내가 아니었다. 문파가 해산당하고 이광을 사풍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사풍 일행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난이도의 던전이나 사냥터가 있다면 이광과 함께 정복하라고 말이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서로 나쁠 게 없는 거래였다.
나중에 남만 야수맹을 넘겨주느라 이광을 호출할 때, 그들이 사풍을 끌어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광은 판이 이렇게 커질 거라는 걸 모르는 상태였는데, 어떻게 알고 미리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다행히 사풍과 백두산호랑이는 꽤 친분 관계가 있어서 이번 일에 장백파를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겨우 ‘친분 관계’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금 강호에서 장백파의 위세는 구대문파 못지않았다. 오픈 초기부터 장백파의 인기는 소림, 무당, 화산, 당문 등과 견줄 정도였고, 지금에 와서는 더욱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민족의 성산(聖山)이라는 장백산이 주는 친근감도 있었지만, 개발자들도 그에 부응해 기이한 무공들을 장백산에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환술과 오행공(五行功)이 그것이었다. 소환술은 백록(白鹿)이나 백호(白虎) 같은 영수(靈獸)를 부릴 수 있는 수법이었고, 오행공은 말 그대로 상성을 이용한 주술 공격기였다. 물론 중원 문파와 마찬가지로 각종 직접 타격계 무공도 존재했다.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 장백파에 도착했다. 장백파의 외관은 중원의 여느 문파와 사뭇 달랐다. 기와가 아닌 억새 잎으로 지붕을 친 초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화(桃花)와 매화(梅花)가 만발한 정원엔 까막까치와 흰 사슴이 노닐고, 마당에선 어린 도사들이 영조(靈鳥)와 영수(靈獸)를 소환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젊은 도사들이 어린 도사들의 수련을 돕고 있었고, NPC로 추정되는 노도사들이 선학(仙鶴)을 타고 창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선경(仙境)이 따로 있다면 이곳이 바로 그곳일 것이다.
“저쪽입니다.”
사풍이 가리킨 곳엔 흰 무명옷을 걸친 중년 도사가 싸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이미 사풍에게 연락을 받은 중년 도사, 백두산호랑이가 날 알아보고는 다가와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장백문주 백두산호랑이입니다.”
“조연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주위의 시선이 따가웠다. 문주가 직접 맞이하는 외부 손님이란 어느 문파에서나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문주 집무실인 듯한 조그만 초옥으로 안내했다.
“문파 살림살이가 좀 그렇습니다. 증축을 한다고 했는데도 외관이 좋아지지가 않네요.”
겉보기에도 중원 문파와는 사뭇 달랐다. 유독 장백파만 다른 룰이 적용되는 것 같기도 했다.
“전 오히려 좋은데요. 마음도 훨씬 편하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결정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백두산호랑이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약조를 하긴 했으니 참가는 해야겠지요. 그런데 조연 님은 믿을 만하신 분인가요?”
그걸 어찌 내 입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조연 님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켜보던 사풍이 대신 답했다. 그에 백두산호랑이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약속을 해놓고 곰곰이 따져 봤습니다. 제게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지요. 장백파의 그저 그런 도움이 아닌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시려면 제게 약속 한 가지만 해주세요.”
사실 백두산호랑이가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장백파는 과거의 소요파만큼이나 구대문파의 견제를 받는 처지였다. 내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달려오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말씀해보세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요구라면 의당 그럴 것이다. 절대적으로 장백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한결 쉽게 풀릴 테니 말이다.
“북막에 대한 지배권을 1년간 보장해줄 수 있습니까?”
역시 이권에 대한 요구였다. 그런데 이건 좀 과한 요구가 아닌가? 야수맹이나 북막은 문파 혼자서 집어먹기엔 덩치가 너무 컸다. 거기에 사냥터 독식이란 문제는 나중에 우리 발목을 잡을 소지마저 있었다.
비록 공식적으로 천명하진 않았지만, 일반 유저들이 소요파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지배 구조의 타파가 아니었나? 어쩐지 호랑이를 끌어내려서 늑대를 산중 대왕 자리에 앉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을 않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독식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관리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일반 유저들에겐 아무런 제재도 없을 것이고, 구대문파에게도 무조건적인 통제를 가하진 않겠습니다.”
웃기는 소리였다. 욕심 앞에 질서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백두산호랑이의 마음을 이해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가 겨우 이런 욕심쟁이에 불과했던가? 평소 들었던 것과는 꽤 다르지 않은가.
“뭐, 장백파 실력으로 그렇게 하겠다면야 누가 말릴 수나 있겠습니까? 어떻게 확실하게 통제할 실력은 됩니까? 아, 장백파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워낙에 넓은 사냥터니깐 말이죠.”
“솔직히 장백파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어차피 소요파에서도 차후 북막에서 사냥을 할 거 아닙니까? 설마 훨씬 거리가 먼 야수맹을 염두에 두고 계신 건 아니겠죠?”
보자 보자 하니까… 실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은 많다. 거기다 궂은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뒤에서 빌붙겠다는 것이 아닌가?
“없던 일로 하지요. 괜한 일을 벌이려고 했나 봅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무릉도원 같은 이곳이 한순간에 위악(僞惡)이 가득 찬 세상으로 보였다. 한 사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바뀌어버렸다.
“조연 님!”
사풍이 초막에서 나와 날 불렀다.
“죄송합니다. 고생하신 건 알겠지만, 장백파는 우리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뭐… 없어도 별 무방이었습니다.”
“허, 거참.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갑자기 나가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지 마시고 일단 다시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온 마당이었다. 그런데 다시 기어져 들어가라고?
“으음…….”
난 장사꾼이다. 사풍의 손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초막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백두산호랑이가 다시 인사를 건넸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건 또 뭔가? 사풍이 말을 보탰다.
“조연 님의 진정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타파해야 할 대상과 똑같은 놈들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기 때문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친구는 죄가 없습니다. 제가 워낙에 의심을 하니 사풍 이 친구가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입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제 허물을 탓하세요.”
말을 끝내며 백두산호랑이가 머리를 조아렸다.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난 속이는 걸 좋아하지, 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뭐라 따지며 서로 기분 상할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나답지 않은 일. 지금은 웃어야 할 때였다.
“방금 전에야 그렇게 말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도 같이하시렵니까?”
“코앞의 일도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어떻게 훗날의 일을 장담하겠습니까? 오늘의 저는 오늘의 조연 님을 믿고 가겠습니다.”
훗,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거봐요, 제가 어련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잖습니까. 하하! 그럼 이제 이걸로 끝난 거지요?”
사풍의 웃음소리에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 있던 앙금이 깡그리 사라졌다.
“그럼 한번 본때를 보여 줍시다. 그동안 당한 것의 백배 천배로 돌려줘봅시다!”
순진한 백두산호랑이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날 바로 장백파의 정예들이 산을 내려갔다. 백두산호랑이가 이미 소집령을 발동해둔 상태라 따로 준비할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이미 강호의 제 세력들보다 상당히 늦은 터였다. 그들이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발에 땀이 나도록 달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봉인 해제 퀘스트 아이템을 구하러 북막으로 향했다. 내게도 약속 시간 맞추기란 빠듯한 일이었다.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