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장. 전초전
4시간의 의미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그놈들이냐? 그놈들이 그랬냐?”
“…면목 없습니다.”
“허허. 이런, 개자식들!”
아니, 어떻게 소봉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불길처럼 솟았다. 당장이라도 이놈들을 쫓아가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4시간이나 지나버린 상황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분명 놈들이 자의적으로 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해남 장문인의 사주가 분명합니다.”
육손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조립산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소봉이는 그래도 마지못해서 그런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두 놈들은 전혀 달랐지만요.”
조립산의 그 말이 내 화를 돋우었다.
“흥! 마지못해서? 아직도 그놈을 감싸려고 하나? 소봉이 그 자식이 그런 놈들을 끌고 들어온 것만으로도 똑같은 짓을 한 거야! 아직도 그놈이 우리 동생이라도 된다고 착각할 셈이야?”
“…….”
조립산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침착해져야만 했다. 우선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날 노렸다면 모를까, 이제 중소 문파의 문주가 되어 있는 조립산을 노렸다는 건 쉽게 이해 가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태극문을 아니꼽게 여기고 있었다면 문파대전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아니었다. 꽁초와 태극문이 충돌한 적도 없으니 개인적인 원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드러낼 수 없는 협잡이 있다는 소리인데…….
‘흐음… 왠지 소봉이 자식이 꽁초 놈한테 휘둘리고 있는 거 아닌가?’
소봉이가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의 책임이 회피되진 않았다.
생각은 그쯤 하기로 했다. 조심은 해야겠지만, 이 일이 그렇게 머리를 쥐어 싸며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공격을 받았으니 복수를 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우선 문도들에겐 립산이가 사망한 일을 밝히지 말도록 하자. 격한 분노는 복수를 그르칠 수도 있어.”
조립산이 안 보일 때 어렴풋이 이런 일이 아닐까, 불길한 짐작을 했다. 다행히 이번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육손, 그리고 신도림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립산의 사망은 톱니바퀴처럼 짜여 있는 내 계획에 수정을 요구했다.
“해남에 한번 가봐야겠어. 바로 장백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해남 장문인 꽁초를 한번 만나봐야겠지. 두 사람도 문도들 데리고 해남으로 와. 조심들 하면서 말이야.”
“마땅히 그래야겠지만 우리들만으로 되겠습니까? 그리고 너무 일찍부터 접전이 벌어지면 페널티도 부담이 됩니다.”
“돼. 그건 내일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야. 페널티는… 힘들어도 며칠만 참아보도록 해.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그때 가봐야 확답을 줄 수 있을 듯해.”
“알겠습니다. 이미 해산까지 한 마당이니 바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조립산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확실하게 결정한 것인지, 조립산은 말과 동시에 문도들을 챙기러 밖으로 나갔다.
조립산이 그렇게 자리를 비우자 육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 보며 말했다.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놈들이 연이 형님이 여기 있다는 걸 알렸을 테니까요.”
그 말에 난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주면 내가 더 고맙지.”
문파대전이 아닌 상태에서 전투를 해야 했다. 그것도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질러야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문도들의 걱정은 거기에 있었다.
태극문 문도들 몇몇은 그런 사실에 반대해서 떠났지만, 서른 명 가까운 문도들은 흉한(兇漢) 상태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흉한이 되면 상점에서 아이템도 살 수 없고, 애당초 경비병 때문에 도시에 들어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일이 시작되면 언제 보급을 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완벽한 상태를 만드느라 다들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가 있도록 하지. 수고들 하고, 빨리들 와.”
“조심하세요. 우리 몫도 남겨 두시고요.”
선발대는 나 혼자였다. 조립산과 육손 등을 뒤로하고 태극문을 나섰다.
해남도는 천리종무영을 시전해서도 한나절은 달려야 할 거리에 있었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경공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바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소흥을 막 벗어난 남쪽 관도상에서의 일이었다. 한 사내가 관도에 턱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아무리 천리종무영을 시전하면 주위를 제대로 살필 수 없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길을 막는 인간들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길을 막아선 놈은 소봉이와 함께 온 두 놈들 중의 하나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주둥이에서 나온 소리가 우스웠다.
“누굴? 나?”
“예. 지금 오시는 걸 보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계시겠군요.”
훗. 천하의 조연을 앞에 두고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인가? 가소롭기 그지없다.
“계속해봐. 단, 용건만 간단히. 바쁘니깐.”
“어디 좀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겁나시면 그만두셔도 되고요.”
이건 뭐, 양아치들이나 하는 수법하고 다를 바가 없잖은가.
“가도록 하지. 앞장서봐.”
놈이 경공을 일으켜 관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남쪽으로만 달리던 놈이 어느 순간 관도를 이탈해 서쪽으로 내달렸고, 그렇게 또 얼마를 가자 회계산(會稽山)을 앞에 두고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삼면이 나무로 빽빽한 구릉지라 매복을 두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놈이 하자는 대로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겁날 것은 없었다.
“여긴가? 그럼 그만 애들 불러오지?”
녀석이 움찔하더니 소리쳤다.
“나오세요! 조연이 데리고 왔습니다!”
녀석이 외치자 역시나 등 뒤에서 못난 중생들이 분분히 튀어나왔다. 한 삼십 명가량이나 됐다.
“하하! 역시나 걸려들었구나! 조연이 너처럼 잔대가리가 발달한 놈이 이런 간단한 계책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된단 말이야. 으하하!”
녀석은 말 몇 마디로 미끼의 연기력 부족을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댁이 꽁초인가?”
“훗, 귀는 열고 다녔군! 그래, 내가 해남 장문 꽁초다!”
“쉽게 알려 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 이유나 좀 들어볼까?”
“이유? 이유야 많지! 넌 우리 구대문파 모두, 그리고 해남의 적이기 때문이야. 그 이유 말고 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겠어?”
“그래? 별다른 이유가 아니어서 다행이군. 그럼 이제 시작해보지그래.”
지금까지는 각본대로 진행됐지만,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후후, 아직도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놈이군. 그 배짱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길 바라마.”
그렇게 말한 꽁초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외쳤다.
“쳐!”
그리고 공격이 시작되었다.
녀석들의 움직임은 조직적이었고, 지능적이었다. 이런 짓을 얼마나 자주 벌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열(前列)은 협봉검(狹蜂劍)과 곡도(曲刀) 따위를 갖추었고, 그 뒤를 장창(長槍)과 장도(長刀)가 받쳤다.
쐐액!
츠파파팟-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검기들이 사방에서 짓쳐 들어왔다. 하늘도 땅도 완전히 푸른 검기로 가득 차버렸다.
녀석들은 한 명을 상대하는 데도 전심전력을 다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정해진 역할을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군.’
해남 무인들의 오러는 잘 닦여 있었다. 모두 최절정급 고수.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이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압박이었다.
휙- 휙-
스슷! 스스슥!
놈들의 파상 공세가 빈틈 하나 찾을 수 없게 계속되었지만, 뒷걸음치는 일은 없었다. 극성의 능파미보가 실낱같은 틈을 찾아 회피 동작을 취했다.
녀석들의 공격에 격중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세를 바꾸지도 못했다.
능파미보가 아무리 초절정의 보법이라고 하지만 여기에도 허점은 있었다. 완벽한 회피와 완벽한 공격을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압박이 심할수록 회피에만 주력해야 했다.
만약 욕심에 눈이 멀어 공격을 취한다면, 그 순간 리듬은 깨지고 적들의 병장기가 내 몸을 난자할 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바뀔 때까지 그렇게 능파미보의 회피력만 믿고 자리를 유지했다. 능파미보의 위력을 신뢰했기에 흉흉한 분위기에도 마음은 느긋했다.
하지만 해남 문도들은 그렇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더 몰아붙여! 전진(前進)!”
앞 열에서 조장인 듯한 한 녀석이 소리쳤다.
‘기회!’
잘 짜여진 진형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 어찌 됐든 그 사이엔 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앞 열이 일제히 한 발짝 뛰어나왔다. 그 한 발짝만큼 그들은 후열의 엄호를 받지 못했고, 그 전진하는 시점도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못했다.
“핫!”
녀석들이 튀어나오는 순간을 노려 나도 앞으로 뛰어나갔다. 제일 오른쪽 사내를 노리고서.
쉭- 츠츠측- 파팟!
슥- 콰자장- 창!
온갖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흘러 지나갔다. 그리고 놈들의 당황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쪽 구석을 노리고 들어간지라 반대쪽 구석에 위치한 사내의 공격로는 다른 인물들에게 막혀 버렸고, 양쪽이 서로 변화를 꾀한 덕택에 그들은 잠깐 동안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직 내가 노린 최우측의 사내만이 정확히 나를 노릴 수 있었다.
사내의 굳은 입매가 자신감을 보여 주었지만, 자신 때문에 진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걸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구양신공의 염기(炎氣)가 보리금강저를 활활 태웠다. 권강의 푸른빛과 섞여 황홀한 색채를 발하는 그 기운이 심결육합권의 충자 결을 따라 놈의 도강(刀쾝)과 충돌했다.
콰쾅!
충돌음과 함께 화려한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 강렬한 빛은 서로의 눈을 질끈 감기게 만들 정도였다.
‘됐어!’
사내는 단번에 죽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그들에겐 해악이 되었다. 사내의 몸뚱이가 뒤로 튕겨져 버린 것이다.
난 사내의 튕겨 나간 몸을 방패 삼아 앞으로 다시 뛰쳐나갔다. 몇몇 해남 문도들이 경호성을 발하며 날 막아왔지만, 혼란에 빠진 진법에선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캉! 퍼펑! 쾅!
난잡한 놈들의 공격으론 날 감당할 수 없었다. 양 떼 무리에 뛰어든 늑대처럼 보리금강저가 놈들의 목숨을 사정없이 취하기 시작했다.
마치 천둥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내 양손에서 일어난 홍염(紅焰)이 권강으로, 때론 탄강(彈쾝)의 형태로 해남 무인들의 몸뚱이에 작렬했다.
“후퇴! 후퇴다! 물러서!”
뒤에서 제 부하들이 갑자기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보고 꽁초가 다급히 외쳤다.
그 말을 듣고 머리 나쁜 몇몇 놈들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게 해남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내게 가해지는 압력이 줄어들자 능파미보는 더욱 빛을 발했다. 7할의 힘을 방어에 쓰던 것이 3할만 써도 되자 전장은 모두 내 발아래에 뒤덮여 버렸다.
“으아악!”
“이런, 괴물 같은 자식!”
잘 버티는 놈들도 겨우 대여섯 대에 불과했고, 대개는 두세 번의 연격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순식간에 시체가 산을 이뤘다. 놈들이 쌓아온 악명과 함께 악착같이 긁어모은 고급 아이템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훗! 도망은 어디 쉬운 줄 아나?”
뒤쪽에 자리했던 놈들과 꽁초는 벌써 꽁지 빠지게 줄행랑을 놓았다. 내 앞엔 시체들밖에 없었다.
놈들이 떨군 아이템들을 수거하고는 재빨리 뒤를 쫓았다.
녀석들은 얼마 가지도 못한 상태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정신없이 관도를 타고 달리고 있었고, 꽁초가 제일 앞에 있었다.
쾅!
앞만 보고 달리던 해남 문도 하나가 금강저에 격중돼 바닥을 뒹굴었다. 놈이 채 정신을 가누기도 전에 재차 권강이 쏘아졌다. 녀석의 두부에서 쏟아진 피가 흥건하게 바닥을 적셨다.
사냥은 계속되었다. 또 다른 해남 문도가 다음 먹잇감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또 한 명.
단 한 명도 내 살수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꽁초도 마찬가지였다.
“난 말이야.”
퍽!
꽁초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눈이 풀려 있었다. 그래도 봐줄 생각은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했어.”
빠캉-
“왜 이렇게 자꾸 피곤한 일을 만드냔 말이다!”
퍼퍽! 쾅!
“잘, 잘못했습니다…….”
“시끄럽고, 그만 가라.”
잦아드는 꽁초의 푸른 오러가 놈의 생명이 다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거기에 염기 가득한 권강이 꽂혀 들었고, 꽁초와의 대면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망할 자식들. 일을 왜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어? 그냥 길게 목이나 빼고 기다릴 것이지.”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천리종무영이 아무리 천하제일 경공술이라 해도, 해남도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해남 문인들이 죽어나간 자리를 되짚어 아이템을 회수하고는 바로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뇌주반도 담강항에서 배를 타고 해남도에 상륙했다. 다행히 처음 와본 해남도였지만, 해남파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배에서 같이 내린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따라가면 해남파가 보일 것이다.
사람들은 일정한 방향으로만 달렸고, 대충 감이 잡히자 그들을 제치고 튀어나갔다. 그렇게 몇 개의 산봉우리를 건너자 여모령이라는 곳에 도달했고, 해남파로 짐작되는 전각군(殿閣群)을 볼 수 있었다.
“흐음.”
정신없이 달려왔다. 뛴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전투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꽁초에게 용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해남 정문엔 여느 문파들처럼 경계를 서는 무인이 있었다. 좌수검을 비껴 찬 녀석은 질풍처럼 달려온 나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난 그에게 다가갔다.
“무, 무슨 일로……?”
그에게 죄가 있다면 해남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퍼퍽! 쾅!
“컥! 이, 이게… 무슨… 짓…….”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상태로 경계 무사는 강제 로그아웃당했다.
땡땡! 땡! 땡!
문파 입구에서 살인이 벌어지자 해남파 경내에 비상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노닥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잡몹들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안으로 쳐들어갔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하게도 NPC 무사들이었다. 유저들을 많이 받은 관계로 NPC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지만, 대신 모두 절정급 이상의 고급 NPC들 일색이었다.
하지만 이런 놈들과 어울릴 여유는 없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긴가?”
모든 문파에는 사망한 사람들이 부활하는 장소가 존재했다. 작은 곳은 문파 취의청이 그 역할을 맡았고, 중견 문파 이상은 따로 귀생전(歸生殿)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존재했다. 내가 찾는 곳이 바로 해남파의 귀생전이었다.
연무장 좌측에 그 귀생전이 있었다. 해남파에 난입하기 전에 확인한 바로는 앞으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유저들까지 몰려들기 전에 어서 빨리 귀생전으로 들어가야 했다.
NPC들 사이사이로 사태 파악을 못한 유저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내가 뛰어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설마하니 본파에 단독으로 쳐들어올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방관 덕택에 쉬이 귀생전에 난입할 수 있었다.
“후우…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언제 한번 이런 짓을 해보고 싶었다. 소요파가 멸문하기 전에 나 혼자서라도 이런 짓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 화를 참지 못하고 이 짓을 했다가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진 못했을 것이다.
귀생전 입구로 NPC들이 차례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놈들을 곶감 빼먹듯이 때려잡고 있는 사이에 10여 분이 흘러갔다. 그리고 기다리던 손님들을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누, 누구? 엇? 넌!”
빠캉! 파팍!
철푸덕-
상상도 못했으리라. 사망한 지 네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시 한 번 저승 문턱을 넘어야 하다니.
그놈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한 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격을 하는 놈은 단 한 놈도 없었다. 놈들의 죽음은 허무했다. 난 재밌었지만.
그렇게 꽁초를 끝으로 2차 학살이 끝이 났다.
“이제 네 시간 동안 뭘 해야 하나?”
아직도 NPC들은 질서 있게 한 놈씩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론 아마도 해남 유저들이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겠지만, 그들에게 투시력이 있을 리 없었다.
한 10여 분가량을 그렇게 NPC나 때려잡으면서 소일했다.
“다 끝났나 보네?”
마지막 NPC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귀생전 문밖엔 유저들이 이미 무기를 꼬나들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차마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오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나갈게!”
안 들어온다면 나가주면 되는 것이다.
“오, 온다!”
그 수효가 이젠 거의 일백에 달한 무리가 되었지만, 녀석들은 귀생전 안에서 내가 보인 신위에 잔뜩 겁먹은 상태였다. 놈들 손에 잡힌 무기가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궁신탄형보다 더 빠른 수상비의 신법이 전개됐다.
콰앙!
“한 놈 가시고.”
일부러 가장 약한 놈을 골라 일타(一打)를 먹였다. 그렇잖아도 뿌옇게 깔려 있던 공포심이 그 한 방으로 놈들을 집어삼켰다.
“쳐, 쳐!”
한 녀석의 외침에 몇몇 해남 무인들의 무기가 반사적으로 날 향해 내질러졌지만 거기엔 어떤 위협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저 뒤쪽에 있던 녀석들 중 몇은 벌써 도망을 치고 있었다.
다시 학살이 시작되었다.
“괴, 괴물…….”
“도망가!”
손속에 사정을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놈들 중의 한 놈쯤은 착한 녀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제 업보려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내가 당한 손해에 강호의 낭인 유저들이 당한 분노가 덧입혀졌다. 붉게 타오르는 보리금강저가 수년간 쌓인 울분을 맘껏 토해냈다.
녀석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치기 바빴고, 난 그들을 쫓기 바빴다. 전투라는 이름은 가질 수 없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고, 도살이었다. 즐거웠다.
하지만 어지럽고 혼란스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냥감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해남 문도 중 몇몇은 아주 아주 운이 좋게 문파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녀석들을 쫓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역할이 있었다. 소문의 전달자라는 역할이. 솔직히 쫓아가기도 귀찮았다.
해남파 귀생전은 내 안방이 되었다. 가끔 문파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정신 나간 녀석들이 귀생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생명줄을 놓곤 했다.
그렇게 혼자서 해남파를 점거하고 있는 가운데 다시 4시간이 지났다.
다시 몇몇 정신없는 놈들이 접속을 시도했다가 또 한 번의 사망을 기록했다. 하지만 꽁초는 접속하지 않았다. 밖에서 어떻게 연락을 받았던 것일까?
혼자서 대문파를 점거한다는 일은 얼핏 말도 안 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주는 이미 저세상을 떠돌고 있고, 간부급들도 모두 접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문이 돌아봤자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못했고, 대부분은 대륙 본토에 있었다. 놈들이 제대로 대응하려면 아직도 한참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조립산 일행이 도착했다. 모두 서른셋의 대오였다.
그들이 내 자리를 대신했다. 뒷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난 자리를 떠 북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