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태극문에서
“예? 본파에 가시겠다고요?”
“안 돼요, 안 돼! 그냥 가시면 안 돼요!”
신도림뿐만 아니라 육손도 질겁했다.
아마도 사흘간 항주에서 벌인 짓거리를 발설할까 봐 두려운 눈치였다.
하기야 처음 그들이 나눴던 대화를 통해 대충 눈치는 챘다. 이들이 문주에게 뭔가 거짓말을 하고선 놀러 나왔다는 것을 말이다. 듣기론, 지금 조립산은 문도들을 강하게 단련하는 중이라던데… 이런 농땡이를 가만 두고 보진 않을 것이다.
“조용히 있겠습니다. 육손 님 장가갔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을게요. 문파 공금일 은자 천 냥도 제가 채워 넣어드리지요. 신 소저에 대해서도 입 벙끗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우연히 만난 손님을 대접하느라 지체됐다고 말입니다.”
“손님이라고요?”
“손님?”
후후. 뜨악한 표정들이 볼 만하다.
“가면 압니다.”
궁금해 죽겠지? 메롱.
조립산의 태극문이 자리 잡은 소흥은 항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남쪽으로 한 시간가량을 달리자 소흥에 도착했다.
태극문의 외양은 평범했다. 흔하디흔한 지방의 소문파였다. 소요파처럼 너른 대지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고, 건물이라곤 달랑 두 채뿐이었다. 그나마 기와를 얹은 건물도 중앙의 다섯 칸짜리 건물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대단한 일임엔 틀림없었다. 절강성의 땅값과 감숙성 땅값이 같을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립산은 나처럼 돈도 많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마 문파 건설하고 한동안 라면만 끓여 먹지 않았을까 싶다.
“제가 먼저 들어가지요.”
죄지은 게 분명해 보였다. 여태 앞장서 안내하던 두 사람은 막상 문파에 도착하자 태도가 돌변했다. 쭈뼛쭈뼛한 자세로 섣불리 발을 안으로 들이지 못했다.
정문엔 수위 무사도 없었다. 직접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만! 구파발 승! 마포는 아직도 버릇 못 고쳤냐! 방어 시엔 일격기 자제하라고 했잖아! 그럼 10분 쉬고, 다음은 조별 진형 연습이다! 갑조! 을조! 준비해!”
문파 안에선 50명가량의 유저들이 몇몇 조교의 지휘 아래에 대련 연습을 하고 있었고, 연무장 가운데에 오르지 못한 유저들은 주변에서 따로 개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율이 잘 잡혀 있는지, 내가 들어가도 얼굴 하나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간에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열기가 대단해 보였다.
마침 개인 대련 시간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낯선 손님이 들어왔는데도 문도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자리에나 누워 쉬었다. 그 와중에도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문도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육손과 신도림이 들어오고부터였다.
“어라? 왔네? 끌끌끌. 이번엔 쉽게 안 넘어갈 겁니다.”
“그러게. 그나저나 도림이 넌 우승 상금 얼마나 탔냐? 벌써 소문이 자자하던걸? 항주에서 그 돈 다 써버렸다면서?”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 난 문주님 없을 때 몰래 기어들어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크크크.”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훈련이 고돼 잠깐 나온 줄 알았는데, 그것보단 조금 과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아… 에…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조립산… 아니, 조 문주님을 만나 뵈러 온 사람입니다만…….”
“엥? 정말 손님입니까?”
가까이 있던 문도가 조금 놀랐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내가 별말이 없자,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아니, 뭐… 종종 가입하겠다고 찾아오는 찌질한 사람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와도 무시했던 건가?
하기야 항주에 들렀다 온 상태지만 여전히 내 몰골은 썩 좋지 못했다.
“문주님은 저기 저분이세요.”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간부 서너 명을 사이에 두고 담화를 나누고 있는 중년 검객이 보였다.
그도 내가 문파 가입을 요청하러 온 낭인인 줄 알고 있는지 한 번 눈길을 준 이후로는 무시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였지만, 가지가지 상념이 다 떠올랐다. 자건은 분명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본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돈과 노력을 투입해서 이만한 문파를 건설했다. 간혹 낭인 무사들이 가입하러 찾아오기까지 한다니 제법 문파 관리도 잘한 듯 보였다.
하기야 육손이나 신도림만 보더라도 문파 수준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고, 앉아서 쉬고 있는 저 문도들도 녹록치 않아 보였다.
그런 문파의 수장이 된 마당에, 더구나 6개월이나 문파를 유지한 상황에서 다시 내 밑으로 들어오려 할까?
‘만약 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평소 내 성질머리라면, 노잣돈이나 쥐어주며 옛 주군을 쫓아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이해하도록 하자.’
그래도 반대의 결정이 내려지면 기분은 나쁘겠지.
“오랜만입니다, 조 문주.”
여전히 꿍꿍이를 계속하던 조립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가 얼굴을 들어 날 쳐다보았다.
자건만큼이나 많이 변한 얼굴이다. 아니, 자건보다 더 멋있었다. 과거 소요파 문주였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쓸 만한 문파를 운영하면 저렇게 위엄 있는 얼굴이 되는 것일까?
조립산은 인사를 받고도 날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그의 반응이 오죽 이상했으면 옆에 있던 태극문 간부들마저도 자신들의 문주를 갸우뚱하며 쳐다볼 정도였다.
“오랜만이라…….”
드디어 열린 입에선 그 말뿐이었다. 그리고 조립산이 벌떡 일어섰다.
와락-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주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나 같으면 분명히 노잣돈 주고 쫓아 보냈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지는 않나 보다.
“자건이한테서 며칠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문주님을 만났다고요. 연락을 주셨으면 미리 마중 나갔을 텐데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건만, 말 안 듣고 미리 연락을 했나 보다. 평소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려고 고의로 연락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잘 지내신 건가요?”
솔직히 내 행색은 내가 봐도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폐포파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나가던 문파의 주인이었던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을 믿고 잘나가던 사업을 정리할 수 있을까? 조립산의 말엔 딱 그만큼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잘 못 지냈지.”
도발에도 조립산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문주가 되면 얼굴도 두꺼워지는 것일까?
하여간 장난은 그만 해야겠다. 착한 사람을 골려 먹는 일이 재밌긴 하지만 이 정도로 그치자.
“이런 꼴이 될 정도로 고생했고, 그만큼의 성과가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문주님 실력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강호 랭킹 게시판을 종종 보곤 했지요. 넉 달 전부터 문주님이 1위에 랭크되어 있더군요.”
하산하고 내 랭킹이 1위라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그게 넉 달 전부터였다는 것은 지금 조립산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여간 조립산이 그걸 알고 있었다면, 지금 보이는 반응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전보다 더 강력해진 대장이니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일단은 그의 반응을 보러 왔던 것이고, 이렇게 여전히 내 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판단은 훗날 충분한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는 날 선택한 것이 일생 최고의 선택이라는 걸 인정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밖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우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건 일행이 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지금부터 조립산이 해줘야 할 일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일을 맡기려면 태극문의 전력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다.
그런데 태극문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난 꽤나 놀라야만 했다. 태극문은 평범한 중소 문파가 아니었다. 그건 무엇보다 육손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게 컸다.
과거 강호팔룡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있었다. 돈 많기로 유명했던 나, 그리고 사황성의 흑룡, 오픈 초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광풍단의 백무, 유저 최고의 무공을 지녔던 화산의 무룡, 가장 빠른 시기에 대문파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개방의 이룡, 한동안 유일한 무림맹 소속으로 유명했던 단풍, 그리고 최초의 기문진법가 제갈량. 마지막 인물은 끝내 아이디가 알려지지 않았던 육선문(六扇門:관부)의 황룡이었다.
그 황룡이 바로 육손이었다.
육손은 하북성 창주 지방 출신으로, 강호 최초로 관부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그것도 금의위에 말이다. 그로 인해 그는 황룡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육손도 처음엔 다른 팔룡처럼 승승장구했다. 한때 천호(千戶)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반 위사였을 때만 해도 퀘스트 형식의 의뢰를 해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천호의 자리에 오르고부터는 직접적인 무력이 아닌 정치적인 일을 해야만 했다. 때론 동창의 견제를 받기도 했고, 몇 날 며칠을 고생해서 입안을 하면 윗선에서 엎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숨이 탁 막혔다.
거기에 무공 수준을 올리는 일도 힘들었다. 천호의 상위 등급은 부영반이다. 천호 수준의 무공은 다 섭렵했지만, 보다 상위의 무공을 닦으려면 부영반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뇌물도 많이 바쳐야 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부영반만 된다면 강호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지만, 육손의 성격은 그런 이야기하고도 거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는 항주의 화항루주 추수에게 그간 모은 돈을 다 쓸어 붓고 있었으니, 부영반이 된다는 가능성은 더욱 멀어져 갔다.
결국, 육손은 금의위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무공이 폐지되고 맨 몸뚱이로 나와야 했지만, 별로 후회하지 않았다. 금의위에서 얻은 정보만 있으면 재기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예전의 수준까지 도달했을 때엔, 강호에서 그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강호인들은 더 이상 황룡을 입에 담지 않았다.
“…육손은 자유인입니다. 거경방과의 싸움에서 고락을 함께한 사이였지만, 그가 태극문에 가입하겠다고 찾아왔을 땐 솔직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사람이 항상 자유롭진 못하지. 더구나 지금의 강호처럼 대문파의 행패가 심한 곳에서는 더더욱.
“도림 씨는 그럼 어떻게 가입한 거야? 그쪽도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육손이 태극문에 가입하고 나서 데려왔습니다. 그가 바깥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였죠. 그리고 지금 도림이나 육손이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절 능가한 지 오래죠. 육손은 심결삼재검 요결을 7단계까지 이루었고, 도림은 섭혼술에 최절정 부적술까지 익혔습니다. 우리 소요파가 익힌 천사교 북종의 것뿐만 아니라 남종의 것까지 얻었지요.”
“남종? 천사교 남종을 찾았나?”
“네. 남쪽으로 내려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천사교 남종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강서성 용호산(龍虎山)에서 찾았습니다. 물론, 입수한 비급은 각룡이 형님하고 같이 있는 고현에게도 보냈습니다.”
“잘했어.”
“뭘요, 고생은 자건이가 더 하고 있죠.”
태극문은 조립산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쌍둥이 동생 조자건은 바깥에서 사냥해 얻은 쓸 만한 아이템과 비급들을 꾸준히 태극문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좋아. 그럼 자건에게 들은 바도 있을 테니 간단히 말할게. 앞으로 태극문은 자건이 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하면 돼. 공격로는 동남쪽에서 감숙 방향으로. 진로상의 모든 문파를 교란하려고 무리할 필욘 없어. 날짜를 맞추는 데 신경을 쓰고. 음… 이제 딱 19일이 남았군.”
“알겠습니다. 문주님 출도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 미리 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다들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오히려 잘된 셈이네요.”
“그 말은, 일반 문도들도 소요파를 인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지금은 부문주인 육손만 알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문도들이 이탈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조립산의 얼굴엔 걱정 말라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 소요파의 제2군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바로 출진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태극문의 해산 작업이었다.
해산 작업과 더불어 진공로에 대한 검토가 다시 이루어졌다. 처음에 내 생각으론 조립산 일행을 조자건과 합류시키려고 했지만, 의외로 태극문의 병력만으로도 독자적인 운용이 가능했기에 따로 2군을 편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호단의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조자건에겐 전서구를 날려서 사천성을 휘저으라고 전했다. 대신 백호단의 진공로를 태극문이 위임받았다.
그러는 사이사이 난 따로 시간을 내어 육손과 신도림을 단련시켰다. 아니, 육손의 경우는 그저 손속을 교환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육손은 과거 팔룡의 일원. 그 말은 내가 진진에게 얻은 안법(眼法)을 그도 습득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난 그가 안법을 익히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처럼 안법 퀘스트를 받은 그가 왜 진진을 모르고 있냐는 것이다.
그런 내 질문에 육손이 되레 물었다. 자신은 퀘스트를 금의위 최고 교두에게서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그 교두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그 금군교두가 진진의 또 다른 화신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진진이 강호팔룡의 마지막 인물인 날 만나러 왔을 때, 내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 말은, 날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대문파 소속이거나 거대 단체 소속이었던 탓에 그 배경을 이용한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내겐 그런 방식을 적용할 수 없어서 따로 공간을 만들어 퀘스트를 진행해야만 했던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육손에게 진진은 모르는 사람이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진진이라는 이름은 나만이 알고 있는, 내게만 의미 있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신안은 그 당시만 해도 내가 유일했다. 하지만 지금 육손은 나와 마찬가지로 신안을 익힌 상태였다.
그가 처음에 얻은 안법의 등급은 심안(心眼). 최종 진화형인 신안과 달리 심안은 단계가 존재했는데, 12성 대성을 한 이후 500레벨에 도달하면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개인 퀘스트가 발동됐다. 퀘스트는 마치 FPS(First Person Shooting) 게임을 하는 것처럼 빠른 순발력을 요구했지만, 순간순간 행동에 우선순위를 줘야 하는 두뇌 플레이도 필요했다.
어찌 됐든 퀘스트를 완료한 후 심안은 신안으로 업그레이드되었고, 거기에 심결삼재검도 묘자 결까지 얻었다. 소요파 해산 전, 당시의 내 실력에 육박해 있었다.
실력 확인에 그친 육손과 달리 신도림의 경우는 손봐줄 게 많았다.
그녀의 주종목은 섭혼술과 같은 주술이었다. 부적술과 달리 주술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법구(法具)를 가지고 행해지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부적술에 비하면 위험도가 높았다. 시전 시간이 길었고, 그동안 무공을 사용하지 못했다. 즉, 적이 공격해올 때 무방비의 상태였다.
또한 같은 천사교의 부적술이라지만, 북종과 남종의 부적술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북종의 부적술이 보조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남종의 것은 마치 무공 초식과도 같았다. 명부의 환영을 소환해 공격한다거나, 업화(業火)를 끌어다 붙인다거나 하는 따위의 살상력 높은 부적술이 주를 이루었다.
신도림이 보통 처자가 아니긴 했지만, 이 세 가지 전혀 다른 종류의 잡기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참! 보타암에서 배운 건 잊으래도!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나 확실한 수비 보장 없이는 절대 주술 쓰지 말라고 했잖아!”
“아아, 그래도… 문주 오빠의 능파미보만 아니었다면 확실하게 걸리는 거라구요.”
그놈의 고집이 문제다. 똑똑한 데다 강단까지 있는 신도림은 세 가지 기술들들 전부 마스터하겠다는 욕심을 풀지 않았다.
“그래? 능파미보만 아니면 된다 이거야? 그럼 해봐!”
도림이 입술을 꼭 깨물며 던진 첫 번째 수는 남종의 부적술인 초혼령부(招魂靈符)였다. 소환된 혼령은 술사를 보호하는 일종의 호위병.
‘시작은 항상 똑같네. 뭐 나쁘지는 않아.’
그다음으론 명부의 판관을 부르는 집전원채부(執典原採符)가 행해졌고, 판관의 공격이 시작되자 무간지옥의 불꽃을 소환하는 무간업화(無間業火)의 부적이 수비벽을 비어져 들어왔다.
‘능파미보는 안 쓴다고 했으니.’
안 쓴다고 했으니 얌전히 공격을 받아주었다. 업화부(業火符)가 몸에 달라붙자, 서서히 체력이 소모되기 시작했다.
업화에 당하면 데미지도 문제지만, 더 골치 아픈 건 불길 때문에 눈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도림의 기지가 엿보이는 공격이 더해졌다.
“흔폐(痕廢)! 업화! 업화! 흔폐!”
북종의 주술인 흔폐는 기운을 묶는다. 일반적인 물리 공격엔 통하지 않지만, 탄강이나 주술 같은 생명체 외부의 기운은 흔폐막을 통과할 수 없었다. 도림은 그 흔폐와 남종의 업화를 교묘히 섞어 내 주변에 불의 장막을 쳤다.
내가 옴짝달싹 못할 거라고 확신한 그녀가 예의 보타암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나모 하라 다냐다라야야 나모알야 바로기뎨 새바라야 모디…….”
이번엔 날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문을 외는 그녀의 입가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지만, 져 줄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원래 배움의 길은 고통스러운 법이나니.
만약 상대가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꼭 이런 방법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 어…….”
대련을 지켜보던 문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문을 외던 신도림의 눈도 화등잔만 해졌다.
‘후후.’
하늘을 난다는 건, 땅만 딛고 사는 자들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오직 인덕과 능력을 겸비한 자만이 그런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
비학승천의 신법으로 솟구친 나는 공중에서 금응 비익을 등에 착용했다. 비익을 착용했다고 해서 슈퍼맨처럼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떠오르면 마음먹은 대로 허공에 머무를 수 있었다.
허공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의 얼굴은 볼 만했다.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이 섞인 그 모습은 코흘리개 꼬마가 친구네 집에 있는 값비싼 변신 합체 로봇을 가지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을 연상시켰다.
금빛 날개를 퍼덕이며 업화의 포위를 발아래에 둔 지 30여 초 정도 지났나 보다. 슬슬 사람들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가시는 기미가 보이자,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도림은 주문 외기를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게… 뭐죠?”
도림이 기가 차다는 듯이 물어왔다.
“우선은, 이제 알겠어? 난 분명 능파미보 안 썼어. 그리고 넌 안심했고, 난 허점을 찌를 수 있었지. 아이템을 이용한 수법이 마음에 안 든다면 또 시도해도 좋아. 다른 수도 많으니.”
“음… 알았어요. 오빠 말은 그러니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방심하지 말라 이건가요?”
잘 알아듣는군.
“매사에 완벽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 주술은 아니야. 완전히 무방비에 빠지고 마니 말이야. 마찬가지로 섭혼술도 가급적 마음에서 잊는 게 좋아. 그것만 믿다 보면 결국 발등 찍히게 될 거야.”
도림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비무가 끝나자 그녀를 비롯해 주위에 있던 문도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익이라는 물건의 정체에 관해서 말이다.
결국은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다시 한 번 플라잉 쇼를 펼쳐 주어야만 했다.
사실 신도림을 놀래켜 줄 의도이기도 했지만, 문도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비익을 꺼낸 것이기도 했다. 과거 소요파 시절의 내 실력을 모르는 이들에겐 이런 모습을 보여서라도 마음을 끌어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전은 주효해서 태극문 문도들의 눈에서 어느 정도 의구심이 가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전 중엔 그렇게 도림과 다른 문도들의 수련을 도와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조립산과 육손은 문파 해산 작업을 하러 관청에 가고 없었다.
문파를 해산하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증축 비용이나 설립 신고서에 사용된 비용은 그대로 날리게 되고, 회수 가능한 건 문파 부지 매각 대금밖에 없었다. 조립산은 그 문파 부지를 팔러 간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면 난 또다시 길을 떠날 예정이었다. 남쪽의 일은 이것으로 끝났고, 이젠 북쪽에서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사건 하나가 내 발길을 지체시켰기 때문이다.
“문주님!”
연무장에서 문도들과 잡담을 하고 있는데, 조립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입구에서부터 날 부르는 폼이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들뜬 음성인 걸로 봐선 좋은 일인 것 같았다.
육손과 조립산은 사내 셋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는 모습이 익히 알고 지내던 사람 같았다.
‘어쩐지 낯이 익는걸?’
사내 둘은 희미하게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유독 한 사내는 낯이 익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소요파 사람으로 보였다.
“문주님! 소봉입니다, 소봉이!”
그랬던가?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그 소봉이였던가?
철없이 앳돼 보이기만 했던 녀석도 이젠 제법 분위기가 의젓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냐?”
간만에 봐서 반갑기는 했지만, 조자건이나 조립산을 본 것처럼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잠수를 탄 이후, 독각룡 형은 각 단주급과의 연락을 계속적으로 취하고 있었다. 그중에 고현과 소소 누님은 각룡이 형과 함께하고 있었고, 이광과 조자건, 조립산, 그리고 소봉이는 밖을 주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소봉이와의 연락은 근 석 달 이래로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그래서 형과 나는 소봉이가 소요파와의 관계를 정리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심히 불쾌한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소봉이는 내가 난주에 있을 때 직접 거둬들여 키운 제자와도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연이 형은 전보다 더 멋있어지셨네요.”
소봉이가 의례적인 칭찬을 했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어쩐 일이냐?”
내심 그가 이젠 외부인이 됐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점잖지 않았다. 강호에서 전서구를 보내는 것 하나 못할 정도로 바쁜 사람은 없다. 그가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은 의도적이었다는 소리밖에 안 됐다.
소봉이는 내 질문 속에 담긴 냉정함에 적잖이 충격을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제 그와 난 용건이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걸 그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한참을 우물쭈물할 뿐, 소봉이는 입을 떼지 못했다.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조립산이었다.
“이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주님도 안으로 들어가지요. 이제 정리를 완전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립산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각룡이 형이나 나나, 그에게 소봉이가 연락을 끊고 살았다는 것을 말했던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밖에서 문도들 눈길을 받으며 이야기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일단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취의청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좋지 않았던 분위기를 눈치 챈 조립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연락 못해서 미안하고. 그리고 너도 이 녀석아, 형들이 연락을 안 하면 너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어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냐. 안 그래?”
“네, 잘못했습니다.”
소봉은 고개를 숙여 조립산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게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조립산을 아직 형으로 인정하는 것 같아 약간은 마음이 풀렸다.
그런데 소봉이와 함께 온 두 친구는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인사치레조차도 하지 않는 모습이, 소봉의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요즘 해남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까지 영입했으니 앞으로 더더욱 그렇겠죠? 어떻게 저희가 해남하고 잘 지낼 방도는 없겠습니까?”
육손이었다. 능청맞은 말 같았지만, 뼈가 담겨 있었다.
아마 조립산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겠지만, 나는 해남의 문파 표식을 본 적이 없다. 저 소매에 새겨진 세 가닥 검은 줄무늬와 가슴의 파랑(波浪) 무늬는 바로 해남의 독문 표식이었던 것이다.
육손의 질문은 적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 주고, 거기에 상대가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듣는 사람들이야 호기심에 들떠 소봉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지만, 소봉 입장에선 퍽이나 난처한 질문일 것이다. 그는 쉽게 말문을 떼지 못했다.
“해남은 강합니다. 전 구대문파가 이렇게 강하리란 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혹시 여러 형님들이 아직도 구대문파를 상대로 싸움을 생각하신다면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건은 따로 장문인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태극문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참 시간을 끌다 나온 말은 그가 이젠 소요파가 아닌 해남파의 무인이 됐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장문인과 직접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는 문파의 중심인물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 말을 이후로 난 소봉에게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앞으로의 비전이 없는데 과거의 인연을 미끼 삼아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구대문파를 상대로 싸움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소봉과 나는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그가 아무리 내 밑에서 컸던 친구라지만, 그는 그고 나는 나다. 그가 미안해할 필요도, 괜한 위선을 떨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럼 재밌게 놀다 가라. 난 바빠서 이만 나가봐야겠다.”
홀로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문도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밖에서 안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누구며, 문파 해산 작업은 잘 진행된 것이냐 하는 따위의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연무장의 공터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심난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육손이 취의청에서 나와 내 곁으로 걸어왔다. 그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한 소리를 했다.
“저 친구들, 전에 한가락 하던 사람들인가요? 문주님이나 연이 형의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긴 합니다만…….”
육손은 아직 문파가 정식으로 해산되기 전까진 조립산을 문주로 부르겠다고 했다. 다른 문도들이 미리부터 날 문주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나도 그 모습이 더 기분 좋았다.
“전엔 그랬지. 서열로 따지면 조립산과 같았으니까. 소요파도 먼저 가입했었고.”
“네.”
짧은 대화였지만, 육손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배신과 실망, 승리에 대한 불확신이 어떻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를.
“그런데 해남파 사람들이 절강성에 자주 오는 편인가?”
“그렇게 자주 있는 편은 아니지만, 아예 없다고 하기도 좀 그러네요. 항주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도시거든요. 그리고 해남파는 자기들이 장강 이남에선 최강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딱히 아니다, 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바로 칼을 꺼내드는 인간들이 많은 편이라 심심찮게 녀석들의 행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다른 대문파하고도 충돌이 잦았겠네?”
“몇 번 있었습니다. 종남이나 점창처럼 약한 곳은 힘으로 누르고, 개방이나 소림, 무당처럼 강한 문파에겐 한 수 물러서죠. 아무튼, 요 근방에서 해남 놈들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광동의 황가장처럼 해남의 속가문파 같은 놈들만 빼면 말입니다.”
황비홍 패거리들이 해남파 하수인이었던가?
“말하는 투로 봐서는 육손 너도 몇 번 당한 것 같네?”
육손이 슬쩍 웃으며 답했다.
“당하긴요. 생긴 건 이래도 쫌 합니다. 지금이야 문파에 들어서 얌전히 지내지, 독고다이 시절엔 해남 놈들이 절 보면 알아서 줄행랑이었죠.”
“하하! 언제 한번 그 매운 손속을 견식해보도록 하지. 그나저나 이제 가나 보네?”
어차피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 일이 있을 것이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취의청에서 나온 해남 문도들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문으로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몇 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그 빠른 발걸음을 쫓아갈 수는 없었다. 달려가서 발걸음을 붙잡고 인사하기도 싫어서 그냥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이제 외부인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기에 일을 시작하면 될 일이다. 육손과 함께 도로 취의청으로 들어갔다.
“음? 립산이 어디 갔지?”
조립산이 취의청을 빠져나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로그아웃을 할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정전이라도 된 건가?”
기계적인 문제로 접속이 끊겼을 수도 있어서 한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조립산은 접속하지 않았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조립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정확히 4시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