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장. 소항(蘇杭)
하늘엔 천당, 지상엔 소항(蘇杭)이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어본 말이다. 악양루에 올라 군산도를 감상하는 것으로도 제법 강호의 정취를 느껴 보았다 할 수 있지만, 소항을 보지 못했으니 강남땅에선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셈이다.
호남에서 출발하여 강서성을 거치고 절강성에 이르렀다.
괜한 말로 강남은 물이 많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강 하나를 지나쳤다 싶으면 눈앞에 호수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 경우가 허다했다.
강물이 어디로 꺾어갈지 어찌 알까?
시절이 옛날이라 다리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이어서 걸핏하면 진로를 꺾어야 했다. 그나마 항주가 있는 방향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니 작은 물줄기가 큰 강을 이루고, 드디어 전당강(錢塘江)을 가리키는 팻말까지 보였다.
전당강부터는 쉬웠다. 물줄기는 곧은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드디어 맘껏 천리종무영을 시전할 수 있었다.
언제 달려 봐도 같은 느낌이다. 그 빠르기란!
혹, 행인이 있었다면 눈을 비비며 헛것을 봤나 되돌려 생각해볼 것이리라. 달리는 나조차도 주위 풍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방금 지나간 게 인간이 맞나 의심을 품을 게 당연했다.
예전 유운신법이라면 족히 하루 반은 달려야 했을 그 거리를, 겨우 네 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소항이라 했으니 소주와 항주를 모두 둘러봐야겠지만, 그렇게까지 한눈팔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서호(西湖)의 풍취를 느낄 여유는 있었다.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항주에 이르기 전 서호를 만날 수 있었다.
괜히 시인 묵객들이 서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서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IGM의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저 눈요기일 뿐인 배경을 위해 호수 속 연꽃 하나하나를 개성 있게 그려 넣은 것하며, 호숫가를 둘러싼 버드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뿜어내는 한가로운 아름다움은 진곤륜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거기에 소동파가 지었다는 소제(蘇堤), 백거이가 쌓았다는 백제(白堤), 그리고 명나라 때 항주 지부 양맹영이 축조한 양공제(楊公堤)까지, 일개 방축에 불과한 구조물마저도 호수와 묘하게 어우러져 신비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또, 어디 물과 나무뿐이랴?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정자와 호수 속 화선(花船)에서 흘러나오는 가인(佳人)들의 웃음소리와 패옥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모두 월궁(月宮)에서 도망쳐 나온 미녀들 같았고, 용궁(龍宮)에서 나들이 나온 선녀들 같았다.
“이런 곳인 줄 미리 알았다면, 절대 난주 따위에 가진 않았을 텐데!”
이제 와 분개한들 되돌릴 수 있을까만.
그렇게 고운 색시들을 무료 관람하면서 서호를 뺑 둘러 가다 보니 사진으로 종종 본 적 있던 육화탑이 눈에 들어왔다.
육화탑은 겉보기엔 13층 누각이나 속은 7층으로 된 목조 건물이었다. 육화탑 앞에 세워진 비석을 보고서야 왜 육화탑이 악양루나 황학루 같은 누각이 아니라 탑으로 불리는지 알게 됐다.
이곳 전당강엔 음력 8월 18일 즈음만 되면 바다에서 조수의 역류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거세게 밀어닥친다고 한다. 육화탑은 그 조수의 피해를 막기 위한 염원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육화탑에 이르자 웬 유저들이 득시글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나 같은 외지인이야 잠깐 서호 구경 올 수도 있겠지만, 설마 저 수십이나 되는 떼거리 유저들이 그런 목적으로 왔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더구나 행색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뭔가 이벤트가 진행 중인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친구들 있는 곳에 가니, 대충 무슨 연유인지 짐작이 갔다.
“야, 얼마나 걸 거야?”
“글쎄다. 이번엔 예상 밖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세게 나가는 건 무리지 않겠냐?”
“크크큭. 네가 그러니깐 여태 그 모양인 거다! 조금 걸어서 평범하게 따느니, 팍팍 걸어서 대박을 쳐야 출세를 할 거 아냐!”
“뭐 넌 그렇게 걸든가. 난 안전제일 주의다.”
도박이었다.
강호엔 공식적인 도박 시스템이 없다. 현실의 모든 것을 담아낸 배경인 탓에 가상의 도박이 현실의 꾼들을 흡수할 가능성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루 시스템도 비슷한 형편이었는데, 지금은 그 용도가 어느 정도 풀린 상태다. 유저들은 기녀에게 술시중을 받아보는 시스템을 꿈꾸었지만 그런 게 실제로 적용될 리 없었다.
보통 IGM과 제휴한 연예 기획사의 신인들을 광고한다거나, 연예인들의 선호도 조사 등등이 기루를 통해 이루어졌다. 때론 특정 연예인의 지나간 뮤직 비디오를 선택해서 감상할 수도 있었고, 시중에 개봉 중인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강호 한 달 정액만 끊으면 무료였다.
수지 타산을 어떻게 맞추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루 시스템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이 유저들의 사용료보다 더 많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어쨌든 도박이 공식적으론 허용되지 않는다지만,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도박 시스템조차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강호에서의 유일한 도박은 공개 대련, 즉 비무 대회밖에 없었다.
특히 이곳 강남 지역의 비무 대회는 강호 랭킹 시스템에 비무 점수가 포함되는 게 알려진 이후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죽 유명했으면 저 멀리 장백이나 사천의 유저까지 참가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닐 정도였다.
“야, 배 왔다. 타자.”
누군가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사람들이 우르르 물가로 몰려갔다. 기녀들이 손님을 태우고 물놀이를 다니는 조그만 화선이 아니라 큼지막한 거룻배였다.
유저들이 자리를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매표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NPC에게서 표를 사야 저 배를 타고 어딘가로 갈 수 있는 시스템인 듯햇다.
산중 수련을 마친 이후론 일반 유저들의 실력을 살펴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알아서 이런 기회가 떨어진 상황이니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강호 제일의 비무 대회인데!
뱃삯 10냥을 치르고 얼른 배에 올라탔다.
3분쯤 지나자 사공이 천천히 노를 저었고, 배가 뭍을 떠나 호수 가운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캬! 소문만이 아니었구먼!”
배에 올라타고서야 서호의 진미(眞美)를 느낄 수 있었다.
호수 가운데에 이르렀어도 물은 깊지 않았다. 바닥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속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수면을 덮다시피 한 희고 붉은 연꽃들이란!
“하하! 서호 처음 오세요?”
나도 모르게 한 혼잣말에 옆에 있던 유저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 서호는 소문대로네요. 제가 살던 감숙에선 이런 풍광은 구경도 못해봤죠. 좋으시겠습니다. 이런 곳에서 게임을 하신다니요.”
“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자주 보면 무감해진답니다. 어쨌든 멀리서 오신 거 같으니 편히 즐기다 가세요.”
사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배가 뭍에 다다랐다. 호수 한가운데의 자그마한 섬이었다.
“인공 섬입니다. 소영주(小瀛州)라고 불리죠.”
그 사내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승객들이 내리자 배는 다시 육화탑으로 향했고, 난 그 승객들의 뒤를 쫓아 섬 가운데로 향했다.
섬 중앙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가가 비무 대회장이었다.
이미 시간이 무르익었는지 대회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얼핏 눈으로 헤아려도 족히 1천 명은 되어 보였다. 말이 1천 명이지, 시간을 금쪽보다 더 중요시하는 게이머들이 겨우 도박을 위해 이렇게나 모여들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항상 오늘 같은 건 아닙니다. 월말 결선이거든요.”
이 친구도 어지간히 할 일 없나 보다. 아니, 친구가 없는 건가? 방금 전 그 사내가 또 내 옆에 붙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는지 사회자가 참가자들의 신상 명세를 불러주었다. 매주 치러진 비무 대회의 우승자와 준우승자들만 참가하는 월말 결선이었던 탓에 그 수는 겨우 여덟밖에 되지 않았다.
뭐 내겐 숫자 적은 게 오히려 좋았다. 허접한 유저들의 악다구니 싸움을 본다는 건 고역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늦게 온 탓에 시간 버리는 일 없이 바로 비무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시합은 산동의 낭인 특공재연과 광동 황가장의 황비홍17이었다.
“황가장은 황기영이 만들었습니다. 그쪽 사람들은 모두 황씨죠.”
“그럼 17은 뭡니까?”
“처음에 황기영이 황가장을 세울 때 황비홍이라는 유저만 300명이 모였답니다. 모두 같은 이름일 수는 없어서 결국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내기로 했죠. 그런데 최후의 승리자가 그 이름을 쓰겠다고 하니, 승부에 졌던 사람들이 모두 문파에 가입을 안 한다고 생떼를 썼다고 합니다. 아예 문도를 받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받은 마당에 모두 돌려보낼 수는 없었죠. 결국 합의를 본 게, 우승자는 황비홍1, 준우승자는 황비홍2… 그렇게 된 거랍니다.”
“그럼 저 17호 황비홍은 가위바위보를 열일곱 번째로 잘한 친구겠네요.”
“뭐… 그렇겠죠.”
아이디를 지우고 새로 키운다는 것만큼 고욕은 없다. 그게 오픈 초창기의 저렙일 때라도 말이다.
더구나 내가 세운 소요파가 강호 최초의 유저 설립 문파였고, 그 이후 유저 문파가 세워지기까지는 3개월 정도가 흘러야 했다. 그렇다면 황기영이 문파를 세웠을 즈음의 유저들 평균 레벨은 200 정도였을 것이다.
고생 고생해가며 거기까지 올린 캐릭터를 지워야 했으니, 오죽 반발이 심했을까?
“그럼 지금 황가장에 황비홍은 몇이나 남았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300이나 되는 친구들이 모두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 키웠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글쎄요?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네요. 소문엔 스물 남았다고도 하고, 백 명이 남았다고도 하고. 숫자가 제멋대로라서 말입니다.”
사내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얼버무리는데, 등 뒤에서 까칠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 알려 주려면 똑바로 알려 주쇼. 황가장엔 황비홍이 143번까지 있고, 그중에 중간 중간 빠진 숫자를 제하면 그 수는 모두 스물. 그리고 원래 황비홍이었는데 성만 그대로 가져가고, 이름을 바꾼 친구들이 78명이오. 그러니 모두 합쳐서 98명. 황 문주까지 합치면 99명이 되오.”
고개를 돌려 보니 황비홍37이라는 아이디를 머리 위에 달고 있는 흉한이 보였다. 인간들이 바글바글한 비무장에 카오틱 상태인데도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보통 간이 큰 친구가 아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 친구 주위에 황비홍3을 비롯해 여러 황씨 가문의 자제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저 친구가 저번 달 우승자입니다. 제법 실력이 좋죠.”
이건 마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특히 ‘제법’이라는 말을.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뭣이라고? 제법? 주둥이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냐!”
37번 황비홍은 지금 당장이라도 싸움을 일으킬 기세였다. 하지만 함께 있던 동료들이 그를 말리고 나섰다.
“야, 야, 그만 해라. 저 친구가 육손이다.”
“…….”
육손이라는 그 말 한마디에 황비홍37은 순식간에 기세를 풀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데 월말 우승자라면 보통 실력이 아닐 텐데, 그런 상대를 이름 하나로 침묵케 할 정도라면 실력이 어느 정도란 소릴까? 생긴 건 여엉 미덥지 않은 이 허여멀건 한 사내가 그런 고수라니 믿기지 않았다.
“제1시합 종료! 승자 황비홍17!”
“와아! 그럼 그렇지!”
“아싸! 그래, 쭉쭉 이겨라! 이 기세로 가는 거야!”
육손과 황가장 사람이 벌인 신경전 때문에 제대로 구경도 못했는데 벌써 시합이 끝나버렸다.
그런데 제법이다. 캐릭터 지우고 새로 시작한 사람이 저런 고수가 될 수 있다니 말이다. 등 뒤의 37번도 그렇고…….
황가장 장주의 재간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무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매주 진행되었던 탓에 사회자도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고,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는 오버 액션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긴, 이 숫자 앞에서 그렇게 넋 나간 짓을 했다간 뭇매 맞을 것도 같았다.
첫 시합은 광동성에서 온 황비홍 시리즈가 이겼고, 두 번째 시합은 산동성의 낭인이 이겼다. 그리고 세 번째 시합에 들어서야 이곳 절강성 사람이 처음으로 이겼다. 태극문 출신의 신도림이라는 여성 유저였다.
이름이 신도림인지, 아니면 지하철역을 말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육손이 오랜 침묵을 깨고 조용히 말했다.
“동생입니다.”
‘엥?’
“친동생요?”
“아니요, 문파 동생입니다. 아, 강호에선 사매라고 해야겠네요.”
육손은 사매가 승리해서인지 얼굴이 환했다.
난 지금까지 비무자들의 무공에만 신경을 썼지,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젠 육손의 말 때문에 신도림이라는 처자에게 묘하게 신경이 갔다. 그리고 육손에게도 더더욱.
그의 사저가 태극문 출신이니, 그도 태극문 사람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태극문은 내 목적지였다. 그곳은 전 소요파 주작단주 조립산이 세운 문파였다.
네 번째 비무가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공개 비무라는 형식의 특이성 때문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시간 개념이 무뎌지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집중력은 올라가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비무자들도 그런 덫을 피할 수는 없어서, 아무리 요령 좋고 경험 많은 이들도 방어보단 공격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긴, 나라도 이렇게 많은 관중이 지켜보고 있다면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겠지.’
그러고 보면 시간을 잘 활용한 사람들이 줄곧 이기고 있었다.
열일곱 번째 황비홍은 권술가답게 방어 능력이 탁월했다. 권법의 특성상 일격 필살보단 허점을 유도하는 초식이 잦았고, 그 모습이 능수능란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두 번째 비무자의 검법도 상대의 도법에 비하면 방어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도림이라는 처자는 어떻게 이겼는지 이해가 안 가네.’
겉으로 봤을 땐 화려하기만 할 뿐 허점이 많은 검법이었다. 그녀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바보 같아서 이겼다고 할 정도였다.
어찌 됐든 비무는 계속되었고, 한 판, 한 판 새로운 승리자를 배출했다. 그리고 최종 결승전엔 황가장의 기린아 황비홍17과 태극문의 신도림 처자가 올라가게 되었다.
“사매가 이길 겁니다.”
육손이 나지막하게 호언장담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좀 그렇다.
‘이보게… 고백은 해봤나?’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황가장엔 여자가 없지요.”
육손의 뜬금없는 말이 이어졌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소요파에도 이백이나 되는 문도 중에 여자는 여섯뿐이었다고.’
“사매는 좀… 아니, 많이 예쁩니다.”
음… 중증 환자군.
환자의 말은 무시하고 다시 비무에 집중했다.
이미 두 번이나 봤던 무공들이라 별로 색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색다른 기술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상한 건 있었다.
“응? 왜 저래? 약 먹었나?”
황비홍의 무공이라면 눈여겨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어째 얘 하는 짓이 약 먹은 병아리 같다. 제법 날렵하던 몸놀림은 굼떠 있고, 날카롭던 공격은 초점 없이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방술 쪽인가…….”
그것밖에 없었다. 그게 진법인지 주술인지, 혹은 독술인지는 판별할 방법이 없지만, 어쨌든 정통 무공은 아니었다.
“제길!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아침밥도 안 먹고 왔나!”
“야, 십칠! 너 여자한테 지면 고추 떼고 집으로 와라이~!”
응원이 이어지던 등 뒤 관중석이 이젠 비난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제 와서 비난을 퍼붓든, 도로 응원을 하든 상황은 종결됐다. 방술 계열은 미리 알고 접근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시합 종료! 이달의 우승자, 태극문의 신도림!”
“와우! 대박이다!”
“크하하! 정말 이겨 버렸어? 스물여덟 배다! 푸하하!”
황비홍17이 장내 바닥을 뒹굴면서 비무 대회는 끝이 났다. 꽤 예상에서 벗어난 결과였는지, 대박 터졌다고 좋아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도림은 검을 한 번 번쩍 들어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해주었다. 이 많은 인파를 앞에 두고도 저런 행동을 하다니,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는 처자였다.
그리고는 사회자 앞으로 다가가 아마도 우승 상금일 두둑한 돈주머니를 받아서는 인파를 헤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남 구경 잘하고 돌아가세요.”
사매를 쫓아갈 요량인지 육손이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네왔다. 가볍게 목례한 그는 흩어지는 인파 속으로 몸을 담갔다.
* * *
“뭐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네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내 손바닥 안이지, 이 오공아!”
“내가 왜 오공이야! 난 도림이라고!”
한심한 대화. 평소 이 친구들의 상태를 엿보기엔 충분한 대화였다.
“그래그래, 도림아. 집에 가서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얼른 집에나 가자.”
“말하든가 말든가! 석 달 만에 탈출한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빠가 정녕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야!”
“허허! 떽! 오라비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다!”
“훗! 웃기는 소리 하셔! 사실대로 말해봐. 내 상금 때문이지? 내 상금 빼앗아 또 기루에 갖다 부으려고 찾아온 거 아냐?”
“흠흠. 돈이라면 그 쥐꼬리만 한 우승 상금 따윈 우스울 정도로 많다! 이젠 이래 봬도 제법 갑부라고!”
“뭐야? 또 어디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사람들 때려잡고 아이템 갈취한 거야? 또 그랬다간 문주 오빠가 파문시킨다고 했잖아! 어쩌려고 또 그 짓을 한 거야! 정말 쫓겨나고 싶어서 그래?”
불과 불이 싸우는 것인지, 아니면 물과 기름이 싸우는 것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섞이지 않는 대화 때문에 머리가 고통을 호소해오고 있었다.
“흠흠. 무슨 말을 해도 넌 의심을 풀지 않겠지. 좋다! 사실대로 말해주마! 아까 시합에서 천만 냥 너한테 걸었었다!”
‘호오, 제법일세.’
천만 냥이라면 가볍지 않은 액수다. 그게 28배로 뻥튀기되었으니 육손의 말대로 이젠 제법 갑부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됐다. 시골 내려가 장원 하나 사서 유지(有志) 노릇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육손의 이번 말은 꽤 적절했는지, 그녀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정당당한(?) 도박으로 벌었다는 게 증명돼서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그런 큰 액수를 배팅했다는 것에 감격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겨우 진정한 그녀가 또 한 번 빽, 소리를 질렀다.
“흥! 겨우 천만 냥이야? 내가 승리할 거라고 확신했다면 1억쯤은 걸었어야지! 내가 겨우 천만짜리로 보여?”
음… 물가에서 건져 놓은 오징어가 두 팔을 허우적대면서 어부에게 따지는 형국쯤 되려나? 육손 말대로 그녀가 제법 예쁘장한 처자가 아니었다면 이 개그 프로를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저 아가씨,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나저나, 거기 아저씨! 무슨 쌈 구경이라도 났어요? 뭐 볼 것이 있다고 계속 얼쩡거리는 거예요!”
신씨 처자가 날 노려보며 소리쳤다. 타깃이 나로 바뀐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육손의 눈도 돌아가더니, 다행히 그가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한마디 해주었다.
“도림아! 이게 무슨 짓이야? 오빠가 아는 사람이다! 어서 사과해!”
나도 나이 먹을 만치 먹었다. 육손의 행위가 도림을 꾸짖기 위해서라기보단 문파의 허물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것을 안다. 어쨌든 그는 해야 할 일을 한 셈이고, 난 받을 사과를 받았다. 제법 예쁘장한 처자의 사과를 말이다.
내가 껴서인지 상황은 금방 진정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거네요? 아저씨와 우리 오빠하고는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관계였다?”
“그렇죠.”
“그리고 지금은 딱히 갈 데가 없어서 우리에게 빌붙겠다 이거구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제법 말하는 것도 깜찍하다(원래 예쁘면 뭐든 용서가 된다).
“일단은 그렇게 말해둡시다.”
코웃음 치라고 답했는데,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좋아요! 맘에 들었어요! 우리 잘 지내봐요.”
역시 예쁘면 성격도 좋은 법이다.
그녀가 대범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난 그 희고 부드러운 손길을 한 5초간 즐길 수 있었다. 육손에게서 피어나는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면 한 10초쯤은 더 쓰다듬어줄 수 있었는데… 일단은 여기까지만.
소개도 끝났겠다, 살기를 안으로 갈무리한 육손이 내가 하는 작태를 다 지켜보고는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한동안 같이 다니시려면 늦었지만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제 이름만 밝히면 되겠군요. 육손 님은 아까 황가 애들한테 본의 아니게 성함을 들었습니다. 이쪽 신도림 소저는 말할 필요도 없겠구요.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숙성 출신의 낭인 적수공권이라고 합니다.”
나 적수공권 맞다. 난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환경설정창을 불러 저장해둔 별호 중의 한 개를 띄웠다.
“풋! 아이디가 그래서 맨손인 거예요?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가죽 수투라도 하나 장만하시지 그러셨어요?”
허 참! 이 아이디가 어때서 웃고 그러시나? 그리고 내가 가죽 수투 살 100냥도 없는 거지처럼 보이나?
음… 겉으로 봐서는 그렇군.
“도림이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라. 그럼 적수 님, 저흰 아무래도 며칠은 항주 근교에서 시간 보낼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겠어요?”
조립산을 찾아가는 일은 급한 게 아니다. 일단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문의 시작은 느린 법이니.
“저야 오히려 좋지요. 항주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좋은 안내자를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어수룩하다고 절 버리고 가지나 않았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제가 생긴 건 이래도 제법 돈은 있습니다. 두 분께서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내 말을 진실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호호! 괜찮아요. 무리하실 것 없어요.”
음… 어째 눈초리가 시골 촌놈 상경한 듯 보는 분위기다.
까짓것, 오해는 풀지 말라고 있는 법이다. 손해 보는 건 댁들이야!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알고 있는 강호와 내가 알고 있는 강호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곳인 줄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
육손과 신도림, 이 두 서울 남녀를 통해 촌놈 조연은 강호의 이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날 데리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화항루(花港樓)라는 5층짜리 기루였다.
기루 입구에서부터 입장료를 받는 게 신기했다. 감숙에선 공짜였는데.
어쨌든 입장료 1만 냥을 내고 거침없이 3층으로 올라갔다.
1, 2층은 도서관과 동물원이었고, 3층엔 사람 한 명이 들어가면 꼭 맞을 여러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척 봐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녀가 어느 기계 앞에 서더니 내게 말했다.
“여기에 10만 냥을 넣으면 시작해요.”
그러면서 10만 냥을 주머니에서 꺼내 내게 건네기까지 했다. 그녀는 여전히 날 거지로 알고 있었다. 뭐, 거지가 되어도 좋았다. 1초라도 그녀의 손을 만져 볼 기회를 얻었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일단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앞의 자판기에 은자 10만 냥을 넣었다. 그러자 비상이라는 이름의 롤러코스터 프로그램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컴퓨터 비전과 로봇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더 이상 테마 파크 형식의 놀이동산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덩치만 크고 위험한 물건들은 괴벽이 있는 부호들의 별장에나 설치되어 있을 뿐,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잊혀진 물건들이었다.
“꺄! 꺄!”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여자들은 이런 거 탈 때마다 고함을 지른다. 시끄럽다.
롤러코스터만 가상현실로 옮겨다놓은 게 아니다. 육손이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것은 가상 체험을 응용한 풍폭(風暴)이라는 무비 게임인데, 이것은 게임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었다.
소비자는 게임 속 머니만 집어넣으면 그걸로 끝이다. 특별히 조작할 것도 없이, 그저 편안히 감상만 하면 된다. 다만, 주인공의 시점이 소비자에게 그대로 투영된다는 점이 보통의 영화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즐기는 오락이었고, 대부분 위촉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적병 써는 맛이 확실한 시나리오를 즐겨 플레이했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는다고 해서 우습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중독성이 너무 커서 25세 미만 성인은 플레이하지 못했을 뿐더러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접속할 수도 없었다.
이런 액션물과 달리 멜로물도 인기가 많았다. 약한 건 멜로라 불렸고, 심한 건 연애 경험물이라고 불리는 무비 게임이었다. 사이버 섹스는 법적으로 불가였지만, 연경물을 플레이하면 그에 살짝 못 미치는 하드 코어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다. 음… 예를 들어,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짜릿한 키스 정도는 애교라고나 할까?
하여튼, 이거나 저거나 이런 체험물을 맛보려면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정신 상담도 받아야 했고, 복잡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18금도 아니고 25금이었다.
이 화항루에 오고서야 서호에서 있었던 육손과 신도림의 대화가 이해되었다.
육손은 화항루 주인 추수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도박에서 딴 돈뿐만 아니라 원금까지 합쳐 2억 8천만 냥 전부를 루주에게 쏟아 부었다. 그녀에게 패물을 사다주는 데 말이다.
굳이 설명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우호도 올리는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혜택이 뭐가 되려나? 화항루 평생 무료 이용권이라도 갖게 되나? 겨우 그 정도에 그 액수를 쏟아 부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호도 작업하면 특별한 일이라도 생깁니까?”
육손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직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저도 장가가야죠.”
“…….”
“우호도 100이 되면 기루 NPC를 영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 친척 누나가 IGM GM이라서 알려 준 거라구요. 근데… 근데… 이 망할 년이… 아이고…….”
믿어도 좋은 걸까?
“얼마… 부으셨는데요?”
“여태 한 7억은 들어갔나 봅니다. 그런데도 아직 79퍼센트밖에 안 돼요! 2년간 7억이니 앞으로도 1년은 더 이 짓을 해야 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누가 그 짓 하랬냐.
그런데 꽤 구미가 당기긴 한다. 더구나 루주 추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자 육손의 심정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진진에 비해서도 꿀릴 게 없네.’
예부터 소항 지방엔 미녀가 많다.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 2대 미녀로 불리는 서시도 이곳 항주 출신이었다.
추수의 미모는 서호와 항주에 들어서 만난 그 많고 많은 미녀들 중에서 단연 빼어났다. 우수에 젖은 그 눈매하며 자태가, 무슨 단순호치(丹脣皓齒)니 세류요(細柳腰)니 하는 무협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녀의 미모를 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양옥보다는 단연 낫고, 진진에 버금갈 만하다!”
들으라고 한 소리에 육손이 발끈했다.
“금양옥이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진진은 누굽니까? 난 인정 못하겠습니다! 세상에 추수보다 예쁜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패는 드러났지만, 내 패는 보여 줄 수가 없다.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도 인정하지 못하겠는걸요? 손 오빠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추수 씨가 아름답다는 건 저도 인정하는 바예요. 소항에서 가장 비싼 기루의 주인이니 그럴 만도 하구요. 어쩌면 강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언제부터 두 사내가 벌이는 삽질을 지켜본 것일까? 신도림마저 내게 반박을 해왔다.
“음… 어쩌면 진진이 추수보다 특별히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 추수는 죽은 목석과 다름없잖아요?”
그리고 난 손을 들어 눈앞에 있는 추수의 볼을 탁탁 쳐댔다.
“이, 이! 당장! 멈추지 못해요!”
내 행동에 육손이 버럭 화를 내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신도림마저 날 쳐다보는 눈이 바뀐 듯했다.
NPC에게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유저의 말실수에 대응할 수는 있지만, 이런 무례한 행동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리적 행위는 언어 행위보다 더 복잡한 뉘앙스이기 때문에 이런 죽은 생명체는 그 미묘함을 알 수 없었다.
“진진이라는 아가씨는 이런 목석(木石)과는 다른 사람이지요. 추수 씨 정도의 미모를 지닌 데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더구나 재밌기도 하구요. 좀 복잡하긴 해도.”
난 진실만을 이야기하는데, 역시나 이 두 친구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신도림은 시골 촌놈의 허풍이라며 코웃음을 쳤고, 육손의 반응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육손의 말엔 화가 가시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적수 님 말대로라면 그 진진이 유저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유저들 중에 우리 도림이보다 더 미모가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서호 소영주 비무장에서 했던 소리를 다시 하고 있었다. 이번엔 본인을 앞에 두고 말이다.
‘제법 예쁘고 귀엽긴 하지만…….’
확실히 은소소보단 낫다. 은소소의 얼굴엔 요염함이 깃들어 있는데 도림의 얼굴엔 그런 기색이 전혀 없고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함이 담겨 있었다. 뭐랄까? 밉지 않은 개구쟁이를 본다고나 할까?
“우리 오빠 말이 맞아요. 유저들 중에 저보다 예쁜 사람은 있을 수가 없어요.”
거기에 본인마저 뻔뻔한 말을 보탰다. 가관이었다.
“우리 도림이는 보타암주 구암신니의 속가 제일제자입니다. 섭혼술과 주안술을 연마한 지 벌써 2년째구요.”
보타암이라면 여기서 멀지 않다. 절강성 동쪽 주산군도(舟山群島)의 보타산도(普陀山島)에 있는 비구니 도량이다.
주안술과 섭혼술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배웠다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 계통의 것들은 대개가 천축에서 나온 것이니, 천축에서 유래된 종교인 불교 사찰에 그런 물건이 있을 수도 있다.
문젠, 저 얼굴이 어째서 강호 유저 제일의 미모라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후후, 한번 보여 드려야 믿을 표정이군요.”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기대했다. 도대체 섭혼술을 게임에서 어떻게 구현해냈을지.
두 남정네가 빤히 쳐다보는 사이에 그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골탈태처럼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골상은 좋았던 터라 아주 희미한 변화만 있었을 뿐이다.
피부색이 좀 더 뽀얗게 변했고, 코끝의 윤기가 조금 더 발해지며 볼엔 희미한 홍조가 어렸다. 장난기가 느껴졌던 입매엔 그윽한 정취가 담겼고, 눈동자는 더욱 또렷해졌다.
자그마한 변화에 큰 변화가 더해졌다. 그녀의 전신을 잔잔한 휘광이 감싸고돌았다. 오러를 살펴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효과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뀌었다. 앳됨은 젊음으로 바뀌었고, 귀여움은 신비함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바뀐 것인지 몰랐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희미한 변화였다.
“다 됐어요.”
빨랐다. 채 3초도 안 걸렸다. 그리고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신 소저의 미모는 강호 제일임에 분명합니다.”
자주 듣던 소리인지 도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할 뿐이었다.
“섭혼술을 전투 중에 사용하면, 대부분은 당황하게 되지요. 마음이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고 해도요.”
인정해야 했다. 이 얼굴에 어찌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자는 인류 공공의 적이자 문화 파괴자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빛을 발할 정도의 미모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추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생명력으로 인해 그녀의 미모가 더욱 의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육손의 심미안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이후로도 한참을 옥신각신 싸웠다. 진진이 낫네, 추수가 낫네 하고 말이다.
결국은 이렇게 될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고서야 해결이 되었다. 3억가량을 더 투입해서 화항루주 추수를 육손에게 안겨 준 것이다. 육손에겐 특수 스킬 마누라 소환 기술이 생겼고, 그 때문에 추수가 기루를 비우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마누라에게 특별한 기술은 없었다. 그냥 가끔 소환해서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몇 마디 말이나 섞어보는 것밖에 없었다. 혹여 있다면 솔로 유저들을 상대로 염장질하는 데나 쓰일까?
그쪽은 준비됐지만, 내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훗날 진진을 만나게 된다면 육손을 불러다가 그의 마누라를 소환하면 될 일이니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드디어 내 금전 상태를 알아챈 두 사람은 부지런히 내 주머니를 공략했다. 신도림은 보석상과 잡화상으로 날 끌고 갔고, 육손이 앞장설 땐 기루를 전전해야만 했다.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물욕(物慾)이 지치기 시작한 것은 사흘째에 접어들고부터였다. 항주의 기루는 전부 클리어했고, 최고의 장신구들은 신도림의 몸에 걸려 있었다.
더 이상 할 짓이 없어지자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화항루엔 기녀들이 손님을 모시고 뱃놀이를 갈 때 쓰는 전용 화선(花船)이 있었다. 그 화선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배를 골라 서호에 띄웠다.
남자 둘에 여자 둘이 조그만 배를 채웠다. 육손은 마누라를 소환해서 놀았고, 내 옆엔 신씨 처자가 자리를 잡았다.
영양가 없는 아양과 언젠간 반드시 보답하겠다는(그동안 흥청망청 쓴 돈에 대한) 호언장담이 귀를 시끄럽게 했으나, 서호의 아름다움에 손색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방님, 그런데 요즘 강호에 시끄러운 일이 있던데 혹 들은 바가 계세요?”
신도림의 무릎을 베고(돈의 힘은 세상일을 쉽게 만든다) 한가로이 하늘에 걸린 구름을 보는데, 추수의 음성이 들렸다. 귀가 쫑긋해졌다.
‘시작된 건가?’
“무얼 말이지? 궁금하구려. 속 시원히 이야기해보시오.”
육손은 추수만 소환하면 말투가 바뀌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추수가 느릿느릿 풍문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어제 안휘성의 제갈세가에 큰일이 벌어졌어요. 가주 문창검이 살해되고 세가의 원로들도 목숨을 잃은 이가 부지기수라고 해요. 어린아이부터 무공을 모르는 하인들까지 해를 피하지 못했다고 하니, 소첩은 강호에 살성이 출현한 게 아닌가 염려돼요. 혹, 서방님은 그자들이 무슨 의도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시나요?”
육손이 알 턱이 있나?
“음… 짐작 가는 바가 있소만, 말해줄 수 없소. 미안하오.”
엥?
“손 오빠! 나도 궁금한걸?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야?”
신도림도 호기심이 동했나 보다.
하지만 두 미녀의 협공에도 육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에이~ 아무래도 모르는 거 같은데?’
당금 강호에서 그런 짓을 벌일 사람들은 내가 보낸 자건 일행밖에 없었다. 일명 소요파 재건 남로군이다. 그들의 행로가 어떻게 그려질지는 나도 모른다. 전장에서의 판단은 조자건에게 전적으로 일임한 상태였다.
설혹 그들이 제대로 못해준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다만, 파급력이 조금 약할 뿐이다. 그들에게만 맡기고 있을 수는 없었고, 나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사흘 전에 악양에서 출발했으니 거의 쉬지도 않고 안휘성까지 내달린 셈이었다. 일단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됐다.
‘흐음, 그럼 이제 나도 일어나 볼까나? 어제 시작했다니, 오늘도 이미 한 건 하고 있겠네.’
놀 만큼 놀았다.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지요. 열심히 놀았으니 이제 또 열심히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