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2장. 투명장 (54/62)

제52장. 투명장

한창 잘나가는 해남파였고, 유저 중에 구대문파의 장문인까지 오른 이는 자신이 유일했다.

그에게 견줄 만큼의 권력자란 무림맹 총사인 단풍, 그리고 사황성의 소공자인 흑룡밖에 없었다. 장백파 문주 백두산호랑이나 공동파 장문인 주호라는 사람들은 구대문파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위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흑룡이 사황성을 확실하게 쥐어 잡고 있다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소공자였지 성주가 아니었다. 무림맹 총사인 단풍은 더더욱 그랬다. 그는 의견의 취합자이자 조율자였지, 사안의 주재자나 결정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 며칠 그의 머릿속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고민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저 소봉 패밀리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요파와 완전히 선을 끊고 가입한 평범한 문도의 신분인지, 아니면 조연이 해남파를 복귀전의 제물로 삼기 위해 보낸 프락치인지 알 수 없었다.

“무공을 훔쳐 갈 이유는 없을 테고… 단순히 정세를 파악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겨우 수련 문도 신분으로 고급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테고… 도대체 저놈들 정체가 뭐야?”

꽁초는 머리가 좋다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었고, 문파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했다. 문제는 소봉 일행에게 있는 게 아니라 꽁초에게 있었다. 쓸데없는 일에 심력 낭비를 하는 게 꽁초가 자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원래 의심이란 잡초와도 같아 한번 뿌리를 내리면 야무지게 잘 자라는 법이다.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결국 꽁초는 무언가 결단을 내렸다.

“총관! 광해단 질풍조 애들 당장 여기로 오라고 연락해!”

광해단은 간부급 유저들만으로 구성된 전투 집단이었고, 그중에서도 질풍조는 모두 최절정급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해남의 핵심 전력이었다.

질풍조원들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원래 총원은 모두 오십이나 됐지만, 그중에 해남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스물셋의 조원들만이 도착했다.

꽁초는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그들을 데리고 본산을 떠났다.

꽁초는 해남파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이였고, 왕왕 이런 일을 벌이곤 했기에 질풍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여태 꽁초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야, 그게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해야 돼? 허점이 보인다고 그렇게 막 달려들면 안 된다고!”

사람 하나 찾아들지 않는 해남도 오지산(五指山)의 공터. 그곳에서 소봉과 적초, 그리고 담운은 맹연습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달 후에 있을 승급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다. 500레벨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들에게 레벨 업은 별 의미가 없었다. 겨우 한 달 동안에 올릴 수 있는 레벨은 잘해야 10레벨도 채 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전투력의 향상을 가져오진 않는다. 무공 비급이나 아이템으로 실력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소요파는 사라졌지만, 그들에겐 아직 소요파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간부급인 그들은 상당히 고가의 비급인 강기성형을 배웠다. 거기에 화양어린갑이라는 보갑을 걸치고 있었고, 절정의 심법과 공격 무공, 잡기들을 배워둔 상태였다.

강호에선 최절정급 이상의 비급을 평범한 방법으론 구할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레벨 업이나 장비를 맞추는 것을 포기하고 실전 감각을 쌓는 데 매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여기서 원앙각으로 돌려 차면 보통은 그 뒤를 노린다고. 그런데 그건 공격한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 뒤를 노릴 걸 알고 대비한다는 거지. 그럼 뭐 해? 짜고 치는 대련인데. 그러니깐 공격을 회수할 때를 노려서 들어가라고. 반 박자 빠르게!”

적초가 담운에게 실전 요령을 가르치고 있었고, 소봉은 옆에서 둘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소봉에게 있어 적초의 이야기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는 두 사람과 달리 권법을 배웠고, 그가 배운 심결육합권엔 저런 유연함이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강기성형에 충자 결이면 웬만한 상대는 몇 대 맞지도 않아 엎어지니 말이다. 소봉이 생각하기에 심결육합권의 최고 묘는 역시 파괴력에 있었다.

<길을 나서면 되돌아보지 않는다.>

심결육합권 비급에 적혀 있던 그 문구를 소봉은 너무나 맘에 들어 했다.

‘쟤들은 연습이라도 하는데 난 여기서 뭐 하고 있나……. 그냥 사냥이나 갈까?’

그제부터 시작된 수련이다. 한 달간 맹연습을 하기로 했지만, 처음의 그 열정은 그새 팍 시들어 있었다. 소봉이 두 친구보다 조금은 실력이 나은 편이어서 애초 대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 대 2로 대련하기도 좀 그렇다. 승급 심사는 일 대 다수의 형식이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소봉이 맡은 역할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는 일이었다.

“오호라! 여기 계셨군요!”

‘에?’

일부러 사람 없는 곳을 찾아 들어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비무를 하던 두 사람도 어느새 손을 놓고 꽁초와 질풍조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 사람들은 누구고?’

소봉은 척 보기에도 꽁초와 함께 온 사람들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쉽게 보기 힘든 고급 아이템을 줄줄이 걸친 데다가 얼굴에 칼자국이 죽죽 그어진 모습이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중 몇몇은 선명한 붉은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다.

‘해남에 질풍조라는 꼴통 집단이 있다고 하던데 저 사람들이었나?’

해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광해단과 질풍조를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다른 구대문파에 척살단들이 있다면 해남엔 이 질풍조들이 궂은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승급 심사 준비신가요? 준비성이 좋네요.”

일부러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뱉어내고 나서야 본인도 느꼈는지 꽁초가 바로 말을 이었다.

“우선 이쪽 분들 소개를 하죠.”

꽁초가 뒤를 돌아보며 함께 온 유저들을 앞으로 내세웠다.

질풍조원들은 아까부터 입이 근질근질했다. 질풍조 전원를 호출했다. 가벼운 일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누굴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레이드 몹 사냥을 나선 것도 아니었다. 겨우 본파의 수련 문도 셋을 만나러 온 것이다. 더구나 이제 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라니?

“질풍조 조장 응풍이라고 합니다.”

악수를 청하며 응풍이 유심히 소봉을 살폈다.

‘실력이 대단한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요새 각지에서 유저들이 해남에 가입하겠다고 몰려들고 있었다. 그중엔 질풍조에 버금갈 정도로 실력이 대단한 자들도 종종 있었고, 혹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사냥터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때론 그 둘 다인 경우도 있었다.

질풍조는 가끔 그런 유저들과 업무상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바깥세상 실력을 믿고 깝죽거리는 인간이 있다는 말이 들리면 일부러 비무를 걸어 기를 꺾는다거나, 혹은 유저가 제보한 신규 사냥터가 정말 쓸 만한지 문파 차원의 탐색을 나가기도 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응풍은 도리질을 했다. 겨우 그 정도라면 자신들이 총출동할 필요는 없었다.

응풍의 뒤를 이어 질풍조 부조장 날폐인이 인사했다. 그 뒤로도 몇몇이 인사를 했고, 또 몇몇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소봉과 두 친구들까지 인사를 마치자, 다시 꽁초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요즘 강호는 참 바쁩니다. 저 위에선 북막이, 그리고 남쪽에선 야수맹이 출현했지요. 비록 지금 우리 해남이 지리적인 불리함 때문에 북으로도, 남으로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 강호 세계의 세외 세력이 단지 저 둘뿐이겠습니까? 동해엔 자부도가 있고, 서쪽엔 소뢰음사나 혈교가 나오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지금 꽁초가 하는 이야기는 강호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꽁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IGM의 속사정이란 것도 알고 보면 일리가 있었다. 한꺼번에 네 개의 지역을 풀었을 때보단 두 개만 풀었을 때가 나중을 위해 나았기 때문이다. 밸런스나 컨텐츠 재고나 여러 면에서 말이다. 원래 온라인 게임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것일까?

“자부도가 나온다면 분명 최절정급 이상의 유저들만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 될 겁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최절정급 무공서의 수란 한계가 있죠. 문파에서 최절정무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백 명을 넘지 못합니다. 밖에서 얻는 숫자는 더욱 줄겠죠. 그렇다면 오직 하나! 절정급 무공만으로도 최절정급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전 무공! 확실한 개인기! 그게 필요하다, 이겁니다. 사냥할 때 쓰는 감각을 전투에 적용하기엔 미흡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자부도도 해남파가 독식할 수 있을 것이고, 차후에 정사대전이 발발해도 해남이 주도적인 자리를 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저걸 이해하라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에… 저는 며칠 전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과거 그 이름도 높았던 소요파의 세 고수 분들이 우리 해남파에 몸을 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해남이 구대문파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있긴 하지만, 피 튀기는 실전은 거의 겪어보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소봉 님과 적초, 담운 님이 소요파에서 겪었던 그 경험들이 우리 해남의 힘찬 날갯짓에 힘을 불어넣게 되길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조례 시간에나 할 법한 어조의 일장 연설이 끝났다.

어이없기는 소봉뿐만이 아니었다. 질풍조원들도 꽁초의 이런 말투는 난생처음이었다.

하지만 꽁초의 말이 웃기기는 해도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소봉과 그 친구들 대 질풍조의 대련을 강요하고 있었다.

‘우리 실력을 보겠다는 것인가?’

소봉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꺼림칙했다. 꽁초는 소요파에서 겪은 실전 경험을 해남파에도 알려 주길 원한다고 했지만, 그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일대일의 대결이란 문파대전을 할 때나 비무를 할 때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중요한 건 집단전이었고, 지휘자의 작전 능력이었다. 과거 소요파가 공동파에 패배를 안길 수 있었던 것은 문도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문주 조연의 계략이 적확했기 때문이다.

대문파의 우두머리인 꽁초가 그걸 모를까?

하지만 상대는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파의 대장. 명을 따라야 했다. 더구나 이미 상대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와 있었다.

“호오~ 갑자기 호출당해서 기분이 좀 그랬는데 소요파 분들을 만나게 해주려고 했군요? 하여간 꽁초 형은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제법입니다. 아, 어느 분이 나서실 겁니까?”

얼마나 살인을 저질렀는지 과거 이광의 얼굴만큼이나 지저분한 면상을 가진 녀석이 나와서 이죽거리고 있었다.

사내는 폭이 넓은 면도를 꺼내들고 있었는데, 칼과 얼굴이 묘하게 잘 어울려 마치 망나니 같았다.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적초였다. 소봉이 말릴 새도 없었다.

적초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로 꽁초가 자신들의 실력을 보자고 한 것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됐든 실력만 보여 주면 지금 위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되어간다. 세상과 호흡하지 않고 사는 이는 모두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버린다.

셋의 경쟁보단 삼십의 경쟁이 낫고, 삼백, 삼천 속의 경쟁이 실력 쌓기엔 더 좋은 법이다.

더구나 그들, 질풍조에겐 노력을 보인 만큼 성과가 주어졌다. 지독한 폐인들만이 해남 최강의 무공을 사사받을 수 있었다.

질풍조는 그런 인간들만이 모인 곳이었다. 문도 1만의 경쟁 속에 추려진 오십의 폐인 집단이 질풍조였다.

망나니의 도법은 해남 제일의 도법인 과해도법(過海刀法)으로, 강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절정의 쾌도술이었다.

그에 맞선 적초의 무공은 심결삼재검이었다. 보통 심결 무공은 최절정에 약간 못 미치는 절정상급의 경지라고 이해되고 있었다.

적초는 요결만 적시에 사용한다면 절대 눈앞의 망나니 따위에게 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라면 분명 적초의 판단대로 진행됐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라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있다. 이들 오십의 질풍조는 최절정무공의 상대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데 절차부심 했다.

충자 결보다 약한 공격력, 방자 결과 유자 결보다 약한 방어력과 회피력, 그걸 보완하려면 평소의 습관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했다.

자동적인 초식의 연계라는 패시브 무공의 이점을 버리고, 과해도법은 일격기로 격하되었다. 한 초식을 사용하면 도법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거나 무기를 바꿔들었다. 그러면 연이어 자동으로 시전되는 초식이 멈추게 되었고, 그 순간 동작의 간극은 잡다한 일격기가 막아주었다.

그렇다고 패시브 무공의 이점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재지정된 타격점에 따라 초식의 자연스런 흐름은 끊겼지만, 예기치 못한 변초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매끄러운 흐름이 아님에도, 상대는 그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적초의 패배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쉽게 됐군요. 뭐, 이럴 수도 있는 일이니 너무 마음 상해하지는 마세요. 시간은 많잖아요?”

아무 말 없이 히죽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간 망나니보다 꽁초의 그 말이 적초를 더 비탄에 빠뜨렸다.

대련은 계속되었다.

담운이 적초가 섰던 자리에 섰다. 그리고 담운도 패배를 피할 순 없었다. 남해삼십육검 앞에서 그는 제대로 반격 한 번 못하고 일패도지 당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소봉뿐.

소봉도 자신이 승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태 나왔던 상대라면 한번 붙어볼 만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아직 저쪽도 최고수가 나오지 않았다. 적초와 담운이 상대한 이들은 일개 조원일 뿐이었지, 조장도 아니었고 두 명의 부조장들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당연히 이번엔 제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봉을 구원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질풍조는 그만 사냥들 가시기 바랍니다. 자, 자! 어서 가세요!”

처음엔 소요파의 그 소문난 실력을 떠보려고 온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번의 대련을 거치면서 그것은 순전히 착각일 뿐이라는 걸 알았고, 전직 소요파 출신인 자신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온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비무를 중지시키는 것일까? 완전히 깔아뭉개려면 소봉 자신까지 짓밟아야 할 텐데.

세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질풍조는 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그들 얼굴엔 가벼운 경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한 고요함만이 공터를 감싸고돌았다.

꽁초의 얼굴엔 지금 상황이 의도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나타내듯 흡족한 기운이 가득했다. 제 부하들이 말끔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던 그가 소봉을 향해 물었다.

“어떻습니까?”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소봉은 그저 꽁초의 입만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해남파도 제법이지 않습니까?”

“…….”

소봉은 꽁초가 당최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물론 심결 무공은 좋습니다. 심결 무공을 배우면 강호에서 일류 소리를 들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지요. 하지만 엄연히 무공엔 급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급수 높은 무공은 우리 해남 같은 대문파에서나 배울 수 있는 겁니다.”

대련 이전에도 들었던 그 장광설이 시작되려나 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기분이 다르다. 꽁초의 의도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터였기 때문이다.

소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작작하시고 그만 본론을 꺼내시죠? 또 우릴 희롱하겠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제법 야무진 경고였지만… 글쎄? 꽁초는 흘흘 웃을 뿐이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무림맹엔 독특한 시스템이 하나 있지요. 무림첩 발동이란 시스템인데, 그것 때문에 문파들이 기를 쓰고 구대문파에 들려고 노력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두루두루 쓸 수 있는 기능이죠. 맘에 안 드는 문파를 이단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고, 좀 아니다 싶은 사람을 무림공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요. 하지만 꽤 위험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발동 조건이 좀 까다롭습니다. 구대문파 장문인들만이 안건을 제시할 수 있고, 또 모두의 찬성을 받아야만 발동이 되지요. 그리고… 안건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오직 저밖에 없기도 하네요.”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그 모습이 일파의 종주가 아니라 뒷골목의 양아치 같았다.

하지만 녀석이 하는 짓이 양아치 같다고 해서 깽판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봉은 그런 식으로 게임을 접고 싶지는 않았다.

소봉과 두 친구들은 벙어리마냥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제법 협박이 먹혀 들어갔다고 여긴 꽁초가 이번엔 정색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뭐, 그걸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 제가 이렇게 여러분의 실력을 보고자 한 건, 정말 이유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별로 마음 쓰지 마세요. 지금 강호에서 대문파의 이득을 보지 않고도 소요파 분들 만한 사람들이 또 있겠습니까? 솔직히 적초 님이나 담운 님이 방금 전 보여 준 경지에 많이 놀란 상태입니다.”

때린 놈이 이젠 다독인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미련한가 보다. 욕지기가 나올 만한 상황인데도 꽁초의 말이 안도감을 주는 건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더 이상 오갈 데도 없는 그들이었기에 아직 필요가 있다는 말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특히 실의에 차 있던 적초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백파 아시죠? 백두산호랑이가 문주로 있는 장백파 말입니다. 최근에 그쪽하고 우리 해남하고 안 좋은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방금 만나셨던 질풍조 친구들 몇몇이 북막 사냥터에서 그쪽 친구들하고 벌인 가벼운 다툼이 문제였는데… 아니, 지금 이야기하자면 너무 기니 우선은 그 정도만 알고 계세요. 문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를 그쪽에서 계속 물고 늘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쪽에서 우릴 도발하고 있는 거더군요. 뻔한 이윱니다. 해남을 끌어내리고 자기들이 구대문파에 앉겠다는 속셈인 거지요. 음… 그 때문에 소봉 님을 보러 온 겁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쪽이 더 이상 크기 전에 싹수를 잘라버려야 할 것 같고… 그러자니 소봉 님의 문파대전 경험을 살려 보는 게 좋을 것 같더라는 겁니다. 알아보니 세 분들은 소요파에서도 간부였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지금 하는 이야기만 듣자면 썩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대련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무엇이고, 방금 전의 협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소봉의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세 분을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장로로 승격시키는 게 어떨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 말고를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불과 사흘 전의 그 난동을 부린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주신다면야 저희로선 고마울 따름이죠.”

소봉은 꽁초의 속셈은 알 수 없었지만, 넌지시 승낙한다는 뜻을 비쳤다. 하지만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그의 불안감이 맞았다. 꽁초가 다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장로로 승격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자니 보는 눈들이 너무 많네요. 그렇다고 승급 심사를 통해 하자니 그건 또 너무 시간이 걸리는 거구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확실하게 본파에 자리매김하는 방법이 무얼까 하구요. 마침 적당한 거리에 있는 사람이 있더군요.”

역시나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꽁초는 입을 닫았다. 그 뒷말은 직접 물어보라는 투였다.

“누구를…….”

소봉의 불안감은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질문에 잔뜩 배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꽁초가 말했다.

“절강성 소흥으로 가세요. 그곳에 가면 태극문이라는 별 볼일 없는 조그만 문파가 하나 있을 겁니다. 가서 그곳 문주의 목을 따오세요. 그 일만 치르면 소봉 님 일행을 정식 해남 문도로 인정하겠습니다. 장로 직도 바로 맡기도록 하지요.”

“대체 그 사람이 누구기에…….”

“소요파 주작단주였던 사람입니다. 이름이 아마 조립산이었던가요?”

강한 충격이 소봉의 머리를 강타했다.

‘허! 결국 배신자의 말로를 밟게 되는 것인가…….’

“일처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금 전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놨습니다. 소봉 님이나 적초 님, 담운 님 중 어느 분이 해결하셔도 무방합니다…….”

소봉의 멍한 머릿속으로 꽁초의 말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럼 잘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그게 꽁초가 소봉 일행에게 접근한 이유였다. 과거 한솥밥을 먹었던 형님을 배신하라고 종용하기 위해서.

만약 소봉이 조연의 프락치라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에 하나, 그들이 짜고 치는 연극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계를 위해서 일부러 조립산이 죽음을 자청할 수도 있고 말이다.

꽁초는 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 받아들이는 소봉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수호지에서 양산박의 주인 왕륜이 표자두 임충에게 요구한 투명장(投名狀)과 같은 의미라고 여긴 것이다.

구대문파의 장로라면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보게 된다. 때문에 뼛속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꽁초가 조립산의 목을 요구한 것은 해남파 내부에 들어오려면 우선 결백을 증명하라는 식이었다.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결론은 동일했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 꽁초는 잠시 더 머물렀지만, 아무도 그에게 흡족할 만한 답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는지 꽁초는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난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해남파에 가입한 순간부터 우린 소요파가 아니라 해남파가 된 거야! 배신이라고 불린다면 그렇게 부르라지. 그런 식으로 치면 우릴 버리고 소식을 끊은 연이 형도 배신인 거야!”

적초였다.

“하지만 우리 셋으로 가능할까? 거긴 문파라며? 어떻게 문파를 상대로 달랑 셋이 쳐들어가?”

“에이, 이 똘추야! 몰래 가야지, 몰래! 그냥 간만에 얼굴 보러 왔다고 하고는 접근해서 쓱싹! 알겠어? 하여간에 넌 거기 가면 입 다물고 조용히 구경만 해! 괜히 나서서 산통 깨지 말고!”

소봉의 입에서 긴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어떻게 어제오늘이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가 저 친구들의 본색을 여태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가까워서 친한 사람이 꼭 정의로운 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적초는 의욕이 앞서 실수를 자주 일으키는 친구지만, 그래도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친구였다. 담운도 나쁜 놈만은 아니다. 소봉과 적초의 의견이 갈릴 때면, 바보처럼 굴면서 심한 감정 다툼으로 가는 걸 막아주곤 했다. 소봉은 담운의 그 마음을 고맙게 여기곤 했다.

그런 착한 친구들이 왜 지금은 과거를 부정하고 뒤집어엎으려고 혈안이 돼버린 것일까?

“야, 소봉! 일어나라.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우리도 그 질풍조인가 하는 데에 들어갈 거 아니야!”

‘아! 그런 것인가…….’

적초의 고함을 듣고서야 소봉은 저 두 친구들의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적초와 담운은 그 앞에서 크게 내세우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겨우 게임에 불과했지만, 강호에서의 무공은 그 사람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깨졌다.

자신들보다 한 등급 높은 최절정급 무공을 배운 녀석들이라지만 심결 무공을 극성으로 익히면 최상급과 비등해질 수 있다는 게 강호의 통례였고, 그것은 달리 변명할 이유를 찾지 못할 명백한 패배였다.

그리고 실력 차를 어찌 타개해볼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둘은 해남파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몇 명만 와서 대련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대문파의 저력을 봐버린 거야.’

왜 꽁초가 그렇게 많은 수하들을 데리고 그들을 찾았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고수가 무려 스물셋이나 몰려왔다. 그들 외에도 많은 실력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해남은 그들, 적초와 담운이 맘껏 활개 쳐도 될 정도로 충분히 넓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소봉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 소봉의 마음도 크게 경동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봉은 여전히 꽁초의 진정한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꽁초가 의도했던 것은 더 깊숙한 이야기란 것을.

“그래, 가자! 기호지세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해남에서 큰 몫 잡아보자!”

소봉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던 적초와 담운도 그 기세에 놀라 뒷걸음칠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런데… 그 외침이 친우들에게 하는 소린지, 아니면 자신에게 기합을 불어넣는 소린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세 사람은 꽁초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론을 내렸다.

모두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해남도에서 절강성까지 달릴 수는 없었다. 복건성 복주에 이르자 셋은 여느 때처럼 함께 로그아웃을 하고 강호 속을 벗어났다.

그런데 그날 하루의 일과가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함께 강호를 빠져나간 지 삼십여 분이 지났을 때, 한 친구가 다시 강호에 접속했다.

그가 재접속한 자리엔 꽁초와 질풍조원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오라고 한 거죠?”

오지산 공터에서 꽁초는 그냥 자리를 비킨 게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리바리한 청년, 담운에게 전음을 날리고 사라진 것이다. 계획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 말이다.

“자네, 더 크고 싶지 않나?”

꽁초의 유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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