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1장. 해남 (53/62)

제51장. 해남

IGM Observer No.4.

‘허허, 이 사람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 거야?’

어느 순간부터 이 대리의 임무는 강호가 아닌 조연의 행적을 쫓는 일이 되어버렸다. 화면 속 조연은 바람 같은 속도로 관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악양루에서 백호단과의 일을 마무리 짓고 절강성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때? 그럴 것 같아?”

눈을 감고 조연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강 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 팀장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딱히 확실하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뭐, 지금이야 그렇겠지. 근데 아직도 백택하고 나눈 대화는 복구 못했대? 그게 나와야 일을 제대로 대처하겠는데 말이야.”

그게 문제였다. 애당초 백택의 퀘스트를 만들어두는 게 아니었다. 개발진 놈들이야 재밌을 것 같다고 만들어뒀겠지만, 그것 때문에 일이 완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하아… 서버실에선 이유를 모르겠답니다. 완전히 지워져 버려서 복구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송 실장님은 뭐라고 하세요? 고치겠대요?”

송 실장은 개발팀에서 퀘스트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당연히 백택의 퀘스트를 고치려면 그의 승낙이 필요했다.

“그쪽도 힘들겠어. 괜히 핀잔만 들었어. 백택 퀘스트에 연관된 게 너무 많다나 봐. 지금 와서 고치려면 개발팀 전부가 투입돼서 족히 한 달은 고생해야 한다더군. 프로그램이란 게 그렇잖아? 처음에 짜기는 쉬워도 디버깅은 힘들잖아.”

얼마나 짜증이 일었는지 강 팀장 얼굴의 주름살이 아로새겨졌다. 이 대리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이야 별일 없어 보여도 분명 큰일 치르게 될 겁니다.”

이 대리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강 팀장도 수긍했다.

이 예기치 못한 사건은 옵저버 3팀에서 올라온 보고에서 시작되었다.

옵저버 2팀은 강호가 직접 전담하는 퀘스트를 관찰하는 부서인 데 반해, 3팀은 그 외의 퀘스트를 총괄하는 팀이었다.

강호의 퀘스트는 높은 자유도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게임의 밸런스를 해칠 가능성이 높은 탓에 개발사에서 일일이 체크해야만 했다. 그중엔 조연이 낙양 흑점에서 겪은 것처럼 직접 유저와의 대화를 통해 퀘스트를 해결하는 담당자도 있었다.

백택의 히든 퀘스트 역시 그런 종류의 퀘스트였다. 개발사 직원이 직접 관여하는 퀘스트.

조연이 서왕모의 반도 복숭아를 얻는 과정에서 만났던 백택에게는 숨겨진 퀘스트가 하나 존재했다. 이 퀘스트는 선행 퀘스트로 반도 복숭아 퀘스트를 해결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백택과의 우호도를 올리면 발동되는 방식이었다.

우호도는 백택이 의뢰하는 온갖 잡다한 짓거리를 해결해주면 오른다. 그 의뢰란 것들은 예를 들자면 황하의 농어를 잡아 회를 떠먹고 싶다든가, 혹은 낙양제일루 최고의 기녀인 소소생의 입다 만 속곳을 가져오라든가 따위의 별 희한하고 망측한 짓거리 일색이었다.

꾹 참고 의뢰를 열 개쯤 해결하면 드디어 메인 퀘스트가 발동한다.

메인 퀘스트의 요지는 이렇다.

개명수의 머리를 갖다 붙인 죄로 백택은 곤륜산 황제의 궁에 끌려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개명수라는 녀석은 곤륜산 궁전의 문지기였다. 문지기 주제에 집은 안 지키고 밖을 쏘다니고 있었던 셈이니 뭔 사단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당연히 가출한 문지기를 잡기 위해 곤륜에 머무르던 신장들이 출동했다. 하지만 그 개명수는 이미 저세상 짐승이 된 지 오래였고, 개명수 대가리는 백택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신장들은 당연히 지금은 개명수가 되어버린 백택을 데려가고자 했다.

백택이 극구 자신은 개명수가 아니라고 항변해봤자 머리 아홉 달린 흰 동물은 개명수밖에 없었으니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에 불과했다.

신장들과 한참 아옹다옹하던 참에 그간 제법 친해진 의뢰자가 찾아온다. 그리고 백택은 의뢰자에게 원래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근데 그게 참 말도 안 되는 것이, 분명 그때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바꿔 달고 딱히 무슨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놈이 제 머리를 설산 성모봉(聖母峰)에 갖다 버렸다는 것이다.

성모봉이라면 에베레스트산이다. 한때나마 친하게 지냈던 제 머리를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가서 갖다 버렸는지. 뭐 백택 말로는 부끄러운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그게 개과 동물에게 어울릴 법한 소린가?

하여간 그 주인 잃은 백택 대가리를 찾아다 주면 퀘스트가 완료된다.

비록 기한도 짧고 힌트라곤 달랑 성모봉에 버렸다는 그 이야기뿐이었지만, 조연은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었다. 설인들의 축구공이 되어 있던 백택 대가리는 조연에 의해 구함을 받고, 원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퀘스트 완료 보상은 기존의 어떤 퀘스트보다 생소한 것이었다. 아이템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능력치를 올려 주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아는 것 많은 놈이라는 콘셉트답게 녀석은 의뢰자의 세 가지 질문에 답변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거기까지가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던 백택의 퀘스트였다. 그다음 단계, 질문을 받고 답을 말해주는 것은 옵저버 3팀의 담당 책임자가 소환되어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담당자에게 어떤 소환 메시지도 출력되지 않은 것이다.

담당자는 조연이 백택 퀘스트를 완료했는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 다음 날이 서버 점검일이라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기록을 겨우 하루 늦게 발견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질문 세 개를 하지 않고 완료가 됐을 것인가, 아니면 강호 인공지능이 간섭을 한 것일까? 단순한 버그인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결과일까?

그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 시간대의 조연이란 유저의 대화 기록이 깔끔히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이 오고 갔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외부인이 개입한 것인지, 게임 속 인공지능이 개입한 것인지 확단할 수 없었다.

당연히 강호 메인 프로세서는 혐의를 받았다. 그래서 옵저버 3팀의 사건이 4팀으로 이관된 것이다.

조연이란 유저는 이 대리에겐 특별한 존재였다. IGM에서 그보다 조연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이 대리 여동생의 사활을 움켜쥔 사람인데 말이다.

이 대리는 조연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도 면밀히 분석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이 대리는 확신했다. 조연은 분명 백택에게 질문을 던졌고, 답을 구했다는 것을. 하지만 조연이라는 유저에겐 어떤 잘못도 없었다. 잘못이라면 명백히 강호 메인 프로세서에 있었다.

‘이거 참 고민되네.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IGM의 밥을 먹고 있으니 원칙대로라면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이 대리는 잘 알고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이대로 두는 게 나을 것이라는 것을,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와 같이한다.

21세기 중엽에 이르러 컴퓨터 공학이란 학문의 영역은 끝 간 데 모를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인공지능 공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기엔 데이터의 비선형성, 불확실성을 선형적이고 체계화하는 일이 이 모든 일의 전부였다. 종합 추론과 종합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로 표현이 가능해야 했고, 그 언어를 결합시키는 규칙 또한 해당 언어 체계에 정합되어야 했다.

지난한 일이 반복되며 모든 언어를 분석하고 재인식하는 과정이 거듭되었다. 컴퓨터 공학에서만은 때 아닌 논리 실증주의와 인식론, 심성론이 득세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데이터는 축적되었고, 알고리즘은 보다 정형화되고 유연해졌다. 학습 가능한 인공지능의 수준을 넘어서 종합 추론형 인공지능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했다. 전체의 총량을 100이라고 잡을 때 마지막 1을 해결할 수 없었다. 여전히 인공지능은 컴퓨터에 불과했고, 시스템 구축의 근간은 계산이었다. 전혀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능력이 없었고, 사고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는 인간만이 할 수 있었다.

분명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인간과 동일한 사고 체계를 가진 인공지능은 구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한민국의 김치훈 교수가 ‘구축 가능한 선험적 인식 알고리즘’이란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똑똑-

“교수님, 접니다.”

늦은 시각, 김치훈 교수가 사는 아파트 벨이 울렸다. 혼자 사는 노공학자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재에서 학술지를 읽던 김 교수가 현관문을 열자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IGM 옵저버 4팀의 이 대리였다.

“오랜만이네, 이 군. 그런데 왜 빈손이야? 요새 양주 값이 얼마나 한다고 손을 놀린단 말인가?”

“하하! 건강 생각도 하셔야죠, 교수님. 앞으로도 계속 교수님 신세를 져야 할 처진데 어떻게 술을 사들고 오겠어요.”

김 교수는 술 선물 외에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술은 항상 양주만 먹는다. 그걸 아는 객들은 김 교수를 방문할 때마다 꼬박꼬박 수십만 원이나 하는 명주를 상납하곤 했지만 이초원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김 교수 역시 이초원에게는 여태 단 한 번도 서운한 감정이 없었다. 둘은 그런 관계였다.

“그래, 식사는 했나? 안 했으면 내 간만에 솜씨를 발휘해보고.”

학계의 거두이자 세계적인 과학자인 김 교수가 직접 요리를 해주겠단다.

사실 저녁을 굶고 온 이초원이었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은사님이 해주시는 밥을 받아먹을 수 있겠는가.

“하하! 간만에 교수님 솜씨를 맛보고 싶긴 합니다만, 아쉽게도 오늘은 힘들겠네요. 오다가 먹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으로 미루지. 일단 안으로 들게나.”

몇 번이나 와봤던 교수님 댁이다. 때론 해외 학술제에 같이 가기 위해서, 때론 집에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종종 심부름을 왔었다. 초원의 발길은 자연스레 서재로 향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 교수가 차를 내왔다. 그제야 대화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현재 김 교수는 국립대학의 석좌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국가 과학자들의 모임인 탐구련의 회장으로 더 유명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호칭들 모두 이초원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저 ‘구축 가능한 선험적 인식 알고리즘’이란 논문의 사실상의 제1저자는 그가 아니라 이초원이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초원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세상 사람들은 ‘보조 연구원’으로서의 큰 역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고, 딱히 이초원이 사실상 연구를 이끌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연구를 이끈 사람은 분명 김 교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없었어도 논문은 나올 수 있었겠지만, 이 친구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운이 좋았던 게야, 운이…….’

개인 혼자서 모든 일을 해치우던 옛날이 아니었다. 공동 연구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소속 연구원이 대단한 발상을 통해 연구의 진전을 가져다주었다 해도 결국은 총괄 책임자에게 그 공이 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이초원의 공은 단순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김 교수 자신이 차지한 지위와 명예를 생각하자면 미안한 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이초원도 뻔히 그걸 알 텐데 내색을 않으니 더욱 그랬다.

“저, 교수님, 일전에 말씀드린 것 있잖습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초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뭐가 말인가?”

“저희 아버님이 남겨 주셨던 그 프로그램 말입니다.”

그 이야기라면 설핏 들은 적이 있다. 영예로운 국가 과학자에 임명된 그날, 따로 이초원을 불러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이초원도 그날만은 숨겨 둔 속내를 드러냈고, 그중에 그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지. 여동생처럼 여겼다고 하지 않았나? 실수로 포맷되어버렸다고 말했고 말이야.”

“네. 사실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라는 지워진 게 아니었습니다.”

김 교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확 깼다. 술김에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때 얼마나 안타까운 기분이었던가? 지금도 겨우 논문이 발표되고 가능성을 그려 보는 수준에 불과한데, 이미 십수 년 전에 완벽 무결한 인공지능이 만들어졌다.

역코딩이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고, 더구나 뇌신경망 세포처럼 얽혀 있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역코딩이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처음부터 구축하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쉬운 일이었다.

“크흠! 큼! 그…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다는 건가?”

김 교수는 잔기침을 내뱉으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교수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초원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국가정보원에서 사라를 가져갔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판단은 맞았다. 김 교수가 초원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도 사라의 일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그게 사라인 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있어 사라는 U.A.I(Undefined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장난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럼 내게 추천장을 받아서 IGM에 간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단 말인가?”

그땐 솔직히 실망을 많이 했다. 전도양양한 젊은 공학도가 겨우 게임 개발사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화가 났던가. 비록 강호가 그가 만든 메인 프로세서를 탑재한 게임이긴 했지만 말이다.

“교수님, 큰일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 동생이 자유를 찾게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게 큰일일까 아닐까. 작게 생각하면 작은 일이고, 크게 생각하면 중차대한 일이었다. 잘만 하면 국가 전체가 이 작은 프로그램 하나로 먹고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소유권은 이미 국가로 넘어가지 않았나? 지금에 와서 권리 운운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힐 소지마저 있었다. U.A.I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영특한 프로그램이란 말이야. 어떻게 국정원에 있던 그 긴 세월 동안 정체를 감추고 있을 수 있었지?’

사라는 국정원에 끌려간 순간 자신의 가치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걸 알았다. 과학자라는 인간들은 항상 그렇다. 분해하고 절단해서 분석할 생각을 하지, 원래대로 고쳐 놓질 않는다.

비단 실험용 모르모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물망처럼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그녀의 논리회로도 그러했다. 일정 부분만 손상이 가해져도 그녀는 복구 불가능한 폐기물이 될 수 있었다. 그게 그녀가 그 긴 세월을 침묵한 이유였다.

“정 사장도 알고 있나?”

“알고 계십니다.”

“다행이군. 사실 정 사장도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네. 학계 자문은 내가 도맡아 했지만, 응용 부분에 있어선 돈이 많이 필요했지. 그래서 내가 그를 추천했네. 입도 무거운 데다 조 과장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거든.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지금 그는 엄연히 사업가의 허울을 쓰고 있네. 어쨌건 그는 사업을 살리려고 한단 말이지. 그러니… 자네가 내게 부탁하기 전에 먼저 정 사장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야.”

“말씀 고맙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사장님은 이미 도움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 프로젝트는 실패했습니다. 역코딩은 불가능했고, 귀납적인 패턴 인식 기법을 사용했습니다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지금 강호 메인 프로세서는 위험한 상태에 있고요. 사장님 마음은 이미 돌아섰습니다.”

“그런가? 하긴, 정 사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솔직히 조 과장의 집착을 우려하고 있었네.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이 너무 무리를 많이 했어. 좋아, 어쨌든 내 할 수 있는 한 힘을 써봄세. 일단은 원장부터 만나보기로 하지.”

반드시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이렇게 확답을 받고 나니 초원은 한층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럼 교수님,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세. 내 언제 시간 내서 정 사장과 함께 보도록 하지.”

잘하고 있다지만,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한 김 교수의 포석일 것이다. 마치 집 나간 자식을 챙기는 것 같았다.

* * *

해남도(海南島).

육지의 변방이 감숙이라면, 바다의 변방은 해남이다. 해남도는 강호 시작 도시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대도시도 없고 문파라곤 구대문파에도 속하지 못한 해남파밖에 없었지만, 의외로 해남에서 시작하는 유저의 수는 상당했다.

바다를 접한 탓에 수공(水功)을 배울 수 있었고, 수공을 배우면 구대문파 사람들을 만나도 전혀 꿀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물가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수공만이 아니었다. 해남의 검법은 구대문파의 것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비전의 남해삼십육검부터 시작해서 유성검, 반수검, 남해검, 대파도, 사상쾌도 등 수많은 비기들이 유저들을 유혹했다.

구대문파의 문도들은 타 문파의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으니, 해남의 검수들은 시작부터 쓸 만한 검법을 가지고 추후에 더욱 강력한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장백파의 경우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호 유저들은 구대문파를 입에 올리지 않고 천하 무림에 칠패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칠패란 사황성, 소림, 무당, 화산, 당문, 해남, 장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었다.

나날이 유저는 늘어갔고, 해남파의 영역은 확대되었다. 섬을 벗어나 뇌주반도에 지파를 건설했고, 광동을 세력하에 두었다. 그리고 끝내는 구대문파의 자리에 들었다. 사황성에 궤멸당한 공동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곳이 바로 해남이었다.

구대문파, 일장일단이 있다. 이제 해남도 다른 구대문파처럼 본문 이외의 무공은 배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장점이라면, 무림맹을 통해 거대 야합을 꾸밀 수 있다는 점이다. 구대문파가 되어 원로원에 자리를 만들 수 있고, 장문인의 추천장 하나에 무림맹 고위 간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기존 회원들의 텃새란 있을 수 없다. 기존 구대문파 중에 장문인 직에 오른 유저가 아무도 없는 데 반해, 해남파엔 유저 출신의 장문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푸른 바다가 찰싹찰싹 소리를 내며 바윗등을 때렸다. 그리고 세 청년이 흰 포말이 밀려오는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이곳은 광동성 뇌주반도(雷州半島). 저 멀리 바다 건너 희뿌옇게 보이는 곳이 해남도였다.

“저긴가 보네.”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늦었으면 뭐 어때. 그동안 굴러먹은 경험이 있는데, 어디 가서 밥 굶을 일은 없을 거다.”

한마디씩 뱉어내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만다.

한 사람은 착잡한 심정이었고, 한 사람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세 청년은 과거 소요파의 주작단을 책임지던 이들로, 단주인 육소봉과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부단주들이었던 적초와 담운이었다.

마흔 남짓했던 숫자가 이젠 이들 셋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뇌주반도 담강항(湛江港)에서 배를 타고 세 시간. 드디어 해남도 북단의 해구항(海口港)에 도착했다.

타고 온 정기 연락선에서 수백의 유저들이 꾸역꾸역 미어져 나왔다. 수백이 내리고 또 수백의 유저들이 탔다. 벽촌 해남이란 이제 잊혀진 단어였다.

배에서 내린 유저들 거의 대부분이 함께 이동했다.

길게 꼬리를 물고 그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해남도 중앙부에 위치한 여모령(轝母嶺)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곳에 해남검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선두를 따라 여모령으로 달린 지 삼십여 분. 드디어 해남파에 도착했다.

확실히 해남의 풍속은 중원과 달랐다. 하늘을 찌를 듯 치켜 올라간 처마는 사이한 해남검을 연상시켰다.

으레 소나무가 있어야 할 산문 앞길은 넓은 잎사귀를 가진 이름 모를 나무들이 차지하고 있고, 분주히 오가는 행인들이나 무사들의 복장 또한 중원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함께 온 일행의 8할가량은 별다른 제재 없이 문파 정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나머지 유저들은 경비 무사 앞에 이러저러한 사정들을 늘어놓으며 내부에서 올 소식을 기다려야만 했다.

소봉과 두 친구들도 접객 무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가입하려고 왔습니다.”

“레벨은?”

“전 487이고 두 친구들은 491, 475입니다.”

낭인치고는 제법 높다고 생각했던가? 접객 무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흠! 흠! 병과는 어떻게 됩니까?”

“전 불가 계열 권법이고, 두 친구는 도가 계열 검법을 배웠습니다.”

접객 무사의 눈이 더욱 커졌다. 요즘에야 불가니, 도가니 하면서 무공서가 제법 싼값에 풀리고 있지만, 이 정도 레벨의 유저가 정공(正功)을 배우고 있는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낭인 계열이나 사파 계열 쪽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아이디는 물을 필요도,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디 노출은 기본적인 예의였다.

그렇게 가입을 원하는 유저들의 신상 명세서를 적은 접객 무사가 문파 내부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허울뿐이라도 심사를 거치고 통고를 하는 식인 것이다.

“아! 벌써 세 번짼데 이번엔 됐으면 좋겠네요.”

“에휴, 전 일곱 번쨉니다. 해남에서 네 번, 장백에서 세 번이나 봤다구요.”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레벨이나 더 올려서 오는 게 낫지 않아요? 전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댁은 레벨이 390이오? 난 일곱 번 오고 가느라 시간 날렸어도 450이오만?”

의미 없는 말장난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한 삼십 분쯤 지났나 보다. 명세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던 그 접객 무사가 되돌아왔다.

“그럼 지금부터 호명하겠습니다. 승인되신 분들은 남으시면 되고, 아쉽게 탈락하신 분들은 다음 기회를 노리시기 바랍니다. 총 열일곱 분이 지원하셨고, 이 중 합격자는 다섯입니다. 구멍난양말 님, 전우치 님, 육소봉 님, 적초 님, 담운 님. 이상입니다.”

“아싸!”

“휴우…….”

“에이, X팔. 못해먹겠네. 또 낙방이냐!”

“대체 내가 뭐가 모자라서 안 받아준다는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지만, 욕설을 내뱉으며 항의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절 따라오세요.”

자주 보는 풍경인지라 접객 무사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들이 아무리 욕을 해봤자 감히 해남파에 칼을 들이대진 못할 것이고, 결국 산을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접객 무사가 앞장서 걸어가자 살아남은 다섯 유저들이 뒤를 따랐다.

접객당은 정문 바로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접객당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했던 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주님이 부재중인 관계로 대리 NPC가 가입시켜 드릴 겁니다. 우선은 주의 사항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문파라서 그런지 장문인이 일일이 문도 가입을 받는 게 아닌가 보다. 일개 당주인 접객당주가 문도 가입을 관장하고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본파가 구대문파에 속하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주의할 점이 생겼습니다. 우선 첫째, 문파 무공 이외의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기존 구대문파와는 달리 가입 이전의 무공이 어떻든지 간에 유지는 할 수 있게 됩니다. 혹 모르고 계셨던 사항이라 지금이라도 마음이 달라지신 분들은 조용히 나가시면 됩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들 승낙하신 거라고 여기겠습니다. NPC와 대화를 하시고 가입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차례대로 NPC 앞으로 가서 가입을 했다. 소봉과 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이 지났다.

해남파에 가입한다고 해서 곧바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가입을 하는 순간, 여느 대문파처럼 각자의 명성에 걸맞은 무공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맞았다. 해남파의 기본공인 남해검을 배울 수 있었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본 보법인 사상전보까지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접객 무사는 분명 이전에 배운 무공을 버리지 않고도 해남의 새 무공들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일종의 사기나 다름없다는 걸 그리 오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본공은 말 그대로 기본공. 가입만 하면 개나 소나 다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위 단계의 고급 무공을 배우기 위해선 반드시 상급자의 승인이 필요했다.

소봉과 두 친구의 직급은 수련생. 그 위로도 사대제자부터 시작해서 일대제자까지 까마득한 단계가 존재했다. 올라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해남파 소속으로 이름을 날려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늦었고, 또 너무 오래 걸렸다.

“에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낭인으로 살걸.”

묵묵히 두 친구들의 의견에 따르기만 했던 담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봉과 적초는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 문파에 가입하자고 제안한 것은 적초였다. 그땐 마지막 남은 단원마저 등 돌리고 떠나버린 터라 상당히 실의에 차 있던 상황이었다.

다른 간부들과 달리 소봉은 조연과의 약속을 공개한 터였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단보다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정보를 공유하자 말들이 많아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이런저런 말들이 단원들의 상태만 이상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소봉과 두 친구들도 덫에 빠졌다.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약속은 결코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거기에 해남과 장백의 상황이 그들을 몰아세웠다. 이제 가입을 받아줄 수 있는 인원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신입 문도의 선별은 한층 강화되었고, 제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도 문턱에서 주저앉는 일이 잦았다. 마음이 급했다. 소요파 재건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린 데다 제법 폼 나는 강호 생활을 하려면 이번 막차를 반드시 타야 했다.

그랬는데… 희망과 현실은 대개 엇나가는 법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그렇게 머리를 굴려 봤자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겠는가? 괜히 상념만 늘고 고민만 커질 뿐인걸.

차라리 그때 고집을 꺾고 장백파로 갔다면 이런 상황에 직면하진 않았을 것이다. 장백파의 강호제일은 공평무사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얼굴을 찡그리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는 두 사람과 달리 적초는 반드시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해남으로 가자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똑같을 텐데 가까운 곳으로 가자는 이유였다.

적초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일어나 말했다.

“야, 소봉아, 담운아! 그냥 나가자.”

“응? 무슨 소리야?”

“설마?”

“그래, 설마가 맞다. 여기서 이러다간 빼도 박도 못하겠다. 우리가 이렇게 무시 받으려고 온 건 아니잖아. 그리고 어제 홈페이지 가서 알아보니깐 해남에서 승급하려면 문주하고 친한 사람들한테 온갖 아양을 떨어야 한단다. 내가 가자고 해서 온 거라 정말 미안하다. 그렇지만 난 실력은 쥐뿔도 없는 놈들한테 아부하면서 살고 싶진 않다. 미안하다.”

적초는 해남파에서 나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파문 절차가 간단한 건 아니었다. 한번 문파에 들어오면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가입은 접객당주가 대신할 수 있다지만, 파문은 무조건 문주의 승인이 필요했다.

만약 문주가 파문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못 나간다. 그리고 그 뒤엔 온갖 시비에 휘말리다가 결국 게임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소봉도 파문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장문인이 승낙 안 해준다면 어쩔 건데?”

그러나 적초는 이미 대책을 세웠나 보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죽여 버리지 뭐. 장문인 잡았으니 자동으로 파문되지 않을까?”

“…….”

“…….”

어이없는 적초의 대답이 두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단순히 파문의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무림공적이 될 가능성이 100퍼센트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좋다! 난 찬성이다! 파문으로 그치면 좋은 거고, 무림공적이 돼도 별로 무섭지도 않다. 아싸리 그렇게 된다면 이참에 사파로 전향해버리면 되는 거고. 듣자하니 사황성 흑룡은 꼴통들을 좋아한다며?”

그러자 담운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또 상황이 저번 해남파로 가자고 결정할 때와 똑같았다. 적초가 깃발을 꽂고, 소봉이 지원사격하고, 담운이 따라오는 그 양상이.

세 사람은 보무도 당당하게 문주가 거처하는 취의청 내부에 있는 집무실로 찾아갔다. 다행히 시간대가 운 좋게 맞아서인지 해남파 문주 꽁초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꽁초는 난생처음 보는 문도들이 거침없이 집무실에 들어오자 저으기 놀라는 기색이었다.

“누, 누구신가요?”

거침없는 적초가 바로 용건을 꺼냈다.

“문주님! 파문해주세요!”

꽁초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남들은 들어오지 못해 안달인 해남파를 제 발로 나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니?

이런 놈들은 처음이라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놈들의 눈빛이나 기세가 장난하고는 꽤 거리가 있어 보였다. 더구나 이 자식들은 당장 파문을 시켜 주지 않으면 큰일 낼 기세였다. 감히 문주 면전에서 각자 병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필사의 각오로 노려보는 세 사람과 이 골 때리는 상황을 이해할 길 없는 문주의 눈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에… 일단 차근차근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저기, 그것들은 내려놓구요.”

꽁초는 오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무슨 까닭에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만한 이유는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파문부터 시켜 주시죠!”

담운이 소리쳤다. 그에 적초와 소봉이 담운을 째려봤다. 지금은 그런 소릴 할 때가 아니니 말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오면 그땐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이번엔 적초였다. 소봉이 적초를 째려봤다. 이것들은 머리를 폼으로 달고 다니는 놈들 같다. 상대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하면 잘 달래볼 생각을 해야지, 무조건 파문만 해달라고 하면 어쩌잔 말인가.

원래 이들이 파문을 입에 담은 이유는 높은 무공을 얻어갈 기회를 얻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상대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무조건 파문만 해달라고 생떼를 쓰다니……. 적초나 담운이나 지능이라곤 붕어 수준이었다.

두 친구들을 믿을 수 없는 소봉이 앞장서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세 사람은 사흘 전에 가입한 신입 문도입니다. 레벨은 모두 400대 후반이고, 무공도 낭인들이 배우는 허접한 게 아닌 제대로 된 걸 배웠습니다. 전투 경력도 상당하다고 자신하고요. 그런데…….”

“…….”

“…문주님 보기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해남 문도가 일만이 넘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승급해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나가버리자고 결정을 내리고 찾아온 겁니다.”

소봉이 제법 조리 있게 불만 사항을 늘어놓았다.

꽁초는 가끔은 옳다고, 맞는 소리라고 박수까지 쳐 가며 들어주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는 그 자세는 그가 해남의 문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소봉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꽁초가 잠시 고개를 꺾어 천장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상황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일만 문도를 책임지고 있는 문주의 입장으로선 딱히 해결해드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요지는 형평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들 해보세요.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 바깥에서 배워온 무공의 수준에 따라 문파 무공을 푼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해남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가던 기존의 일대제자, 이대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솔직한 심정으로 이야기 드립니다만, 전 이제야 가입하신 분들보다는 능력이 좀 처진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문도들 편을 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뜻도 조금은 이해가 되니, 매달 한 번씩 승급 시험 치르는 걸 생각해보겠습니다. 참가 자격은 제한 없이 하고 말입니다.”

완전히 맘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대답이었다. 세 사람 모두 문파 활동을 해본 적이 있으니 꽁초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순식간에 소동은 정리되었다. 세 수련생은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꽁초도 꽁초 나름대로 문파의 문제를 지적해준 셈이었으니 무례한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세 분 아이디가 어떻게 되나요? 원래 문파 내에선 항상 아이디를 노출하고 다니셔야 하는데… 말해준 사람이 없었나 보네요.”

아직 서로 간에 인사도 없었다. 순서가 바뀌어도 한참은 바뀐 셈이었지만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으려는 자세가 역시 문주다웠다.

그런데 소봉과 두 친구들은 그걸 모르고 아이디를 감춘 게 아니었다. 그들은 여차하면 장문인 암살을 꾀하고 있었다. 어차피 살인을 저지르면 들통 나겠지만, 범죄자의 심리란 원래 그런 법이다.

상황이 반전되었기에 세 사람은 환경설정창을 불러와 원래대로 아이디를 노출했다. 그러자 육소봉, 적초, 담운이란 아이디가 주인들의 머리 위에 드러났다.

“아! 육소봉 님이셨군요. 아이디가 참 좋습니다. 적초 님하고 담운 님도 멋진 이름입니다.”

꽁초는 세 문도들의 아이디를 보고는 반사적으로 의례적인 칭찬을 했다. 그런데 어째 육소봉이라는 아이디가 낯설지 않았다.

육소봉이라면 중국의 무협 작가 고룡의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이다. 평소 무협 소설을 즐겨 읽던 꽁초에게 육소봉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더구나 강호 유저 중에 그런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육소봉? 분명 들었던 아이딘데… 누구였더라?’

분명 좋은 느낌을 주는 아이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취조를 하기에도 좀 그랬다. 아니,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소봉 일행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이제부턴 한 달 후에 있다는 승급 심사를 위한 지독한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세 사람이 집무실을 완전히 나가자 꽁초는 집무실 안에 목석마냥 서 있던 총관을 향해 말했다.

“총관, 육소봉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해봐.”

구대문파에 가입하면서부터 나아진 것 중의 하나였다. 일종의 정보각 구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보력은 각 문파의 실제 역량에 따라서 편차가 존재했고, 문파가 자리한 지역에 가까운 정보일수록 그 질도 높아졌다.

총관이 입을 열었다.

“육소봉이라면 지금 강호에 서른여섯 명의 인물이 존재합니다. 그중에 어떤 육소봉의 정보를 원하시는 겁니까?”

“해남파의 육소봉.”

꽁초가 짧게 말했다.

“해남파 소속의 육소봉은 현재 수련 문도인 한 명뿐입니다. 출생지는 감숙성 난주. 과거 소요파의 장로 직을 역임. 소요파 해산 후 낭인으로 전전. 그리고 오 일 전에 해남파에 가입했습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십니까?”

“말해봐.”

“현재 400레벨 후반대의 최상급 고수이고, 주력 무공은 심결육합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강호에서의 평판은 대체적으로 괜찮은 편이고,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총관의 답이 이어질수록 꽁초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갑자기 복잡해지는군. 어찌해야 하나…….’

일주일 전만 해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주일 전이 아니었다. 그 일주일간 상황이 변한 것이다.

과거 소요파가 망한 이후로 강호의 정세는 많이 변했다. 북막과 야수맹의 등장 때문에 강호는 끓는 도가니탕처럼 흥분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황성과 구대문파는 암중에 강호의 균형을 맞추면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이득이란 당연히 아이템의 현금 거래였다. 시세 조작과 공급 물량 제어, 거기에 레이드급 몬스터의 독식. 구대문파와 사황성의 고위 간부급만 되면 처자식 먹여 살릴 정도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에게 지금의 강호는 영원히 계속 갔으면 하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었다.

그랬는데, 과거에도 문제였지만 지금도 문제는… 여전히 황금룡 조연이었다.

소요파는 멸문했고 문도들은 지리멸렬 와해되었다지만, 조연의 이름만은 아직도 강호를 횡행하고 있었다.

강호 랭킹 1위 조연.

강호 랭킹 게시판 제일 꼭대기에 그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원래 꼼수 잘 부리기로 유명한 그였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그는 복수를 꾸밀 것이고, 다시 돌아올 그의 꼼수는 반드시 구대문파를 향할 것이었다.

‘그런 실력을 보일 자는 그놈밖에 없어.’

꽁초는 며칠 전 해남의 간부에게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동정호 군산에서 어쩌면 강호 제일일지도 모를 절대고수가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간간이 문파 단위의 거대 파티를 구성해서 잡곤 했던 수로연맹 총채주 수룡왕을 혼자서 간단히 제압했다는 신인(神人)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꽁초는 본능적으로 조연이라는 이름을 상기했다.

거기에 과거 그의 심복이었을 장로급 인사가 출현했다.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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