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장. 악양루의 재회
군산도를 탈출하면 바로 악양이다. 중원 삼대주루인 악양루에 도착하고서야 나와 백호단은 한숨 돌릴수 있었다.
악양루에는 이미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 그게 아닌가?
“앗다, 문주 형! 잠깐 나갔다 온다는 사람이 왜 이제야 와요! 전서구 보내도 다 씹어버리고!”
저 자식들은 어째 세월이 흘러도 성질머리가 계속 저따위냐.
“어라? 이광이도 있었네?”
“엥? 혹시 자건이 형님?”
“그래, 자건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뭐, 그럭저럭요. 형은 어째 더 세진 것 같네요.”
두 망할 놈들과 백호단이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누구 할 것 없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순진했던 얼굴은 세월의 때가 덮여 이젠 모로 보나 강호의 칼밥을 먹는 강인한 사내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광은 드디어 흉한 상태를 벗어나 여전히 험악한 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살인마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얼굴이 되었다. 그놈의 주둥아리는 여전히 걸레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근데, 여태 뭐 하느라 연락도 안 하고 살았어?”
“앗다, 형님. 다 큰 남자들이 남사시럽게 뭔 놈의 연락입니까. 그냥저냥 지내다가 얼굴 보면 그걸로 된 거지.”
“그래그래, 니들 말이 맞다. 니들이나 나나 매일반이니 뭐 할 말은 없다.”
“근데요, 형님도 저 인간 날아다니는 것 보셨소?”
“문주님? 왜? 뭐 신법 대단한 거는 봤는데… 그게 왜?”
“에이, 못 보셨구만~ 저 양반 뛰댕기는 거 봤어야 이야기가 되는데.”
저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깐!
“야, 이 써글 놈들아! 깨진 뒤웅박이래도 나 문주다. 고만 해라, 이 망할 놈아.”
“요샌 뒤웅박도 입이 달렸네?”
“뒤웅박이 천 년 수련하면 그런갑드라.”
개놈들.
광우와 광견의 입심엔 솔직히 나라도 밀리는 감이 있다. 원래 말싸움은 무식한 놈이 지존 먹는 법이다.
대충 자리가 정리되는 기미가 보이면서 슬슬 모두 정색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늘어놔야 할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저으기 긴장을 타는 게 당연할 것이다.
녀석들은 내가 뭔가를 노리고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계획은 들보만 세웠을 뿐이지 벽을 메우고 서까래를 얹는 일은 너무 자질구레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난 반년을 어떻게 지냈던가. 가슴이 단단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무감각해지는 법이다. 내 가슴은 강철처럼 단련됐다.
곤륜에 도착하기 전 두 번의 사망 따위는 차 한 잔 마시며 흘려버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홀로 곤륜파와 싸우며, 야수맹을 휘저으며, 그리고 무량산의 퀘스트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죽었던가. 살아날 방도가 있다면, 재기할 방편이 있다면 죽음마저도 경험에 불과한 법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이들에게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까 자건이에게 말했듯이 기한은 한 달이야. 이광이는 지금 처음 듣겠지. 다들 조심해줘야 할 게 있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철저히 말을 아껴 줬으면 해. 소요파가 부활했다는 건 지금 당장 밝혀도 겁날 것 없지만, 우리의 큰 꿈을 생각하자면 그렇게 간단히 되어선 안 돼. 우리 입으로 하는 건 그저 광고에 지나지 않아. 저들 입으로, 그리고 일반 유저들 입으로 전해져야 돼. 그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야.”
나름대로 애써 착한 심성을 돋우어 이야기했건만, 역시나 놈들의 태클이 들어왔다.
“우리 대가리 나쁩니다. 알아듣게 좀 하쇼. 그리고 둘러치지 말고 확실하게 해줬음 좋겠소만?”
어째 광견이 이놈의 자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철이 드는 게 아니라 더 까먹나 모르겠다.
“미안합니다, 깡통님. 알아듣게 깡통을 두드려 드리죠. 그런데 치는 건 제가 합니다만, 깡통이 제대로 울릴까 심히 우려스럽군요.”
녀석의 눈썹이 팔자를 그렸다.
“제 입으로 ‘내가 일등이다’라고 하면 적만 생기지 결코 일등이 될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인정해주고 알아서 굽혀야 진짜 일등이지. 강호에선 혼자 아등바등해봤자 결코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등이 되는 방법이 꼭 지금의 일등을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그 위치가 되는 법도 있단 말씀이야.”
“그건 좀 맘에 드는구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러긴 힘들지. 우리가 구대문파를 일일이 깨부수고 다녀도 결코 일인자가 될 순 없어. 구대문파가 정말로 우릴 인정하게 만들어야 문제가 해결돼. 그때가 되면 좀 더 강호가 살맛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흠… 평소 문주 형 행실을 보자면 이 바닥 깨끗하게 하려고 수고할 사람은 아닌 걸로 아는데? 뭐 어쨌든 일단 따라는 주겠소!”
그런데 광견이 이 자식, 어째 오늘따라 유독 까칠까칠하네? 정도가 심한걸?
‘이 자식… 혹시?’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놈 이거, 이제 날 아주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다.
“야, 광견! 그러고 보니까 우리 한 따까리 해본 지도 꽤 됐지? 뺄 생각은 말고. 어차피 너네들이 얼마나 컸는지 확인해봐야 하니까. 수준이 돼야 일을 맡기지 않겠어?”
수준을 확인하는 게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거랑 일이랑은 사실 별 상관없었다.
“뭐… 붙는 거야 일도 아닙니다만, 싱겁게 그냥 해요?”
얘 또 왜 이런다냐.
“그럼 어쩌게?”
“이기면 나도 이번엔 단주 시켜 주쇼! 대충 돌아가는 꼴 보니깐 또 자건이 형님 밑에서 놀게 할 것 같구만!”
예리한 놈.
‘근데 이긴다고? 날?’
하기야 지금 저놈 상태가 딱 한창 기고만장할 때일 것이다. 놈이 날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겨우 야수맹 정벌을 막 끝낸 시점이었으니까, 그때의 나라면 맞먹어도 될 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
곤륜으로 떠나고 한동안 사람들과 어떤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귀찮기도 하고 바쁘기도 했지만, 굳이 딱 한 가지 이유만을 들자면 의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소요파를 세웠을 때는 문도들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관리자 격인 문주 한 명과 나머지는 NPC들로 채울 생각이었다. 비록 나중에 상황을 알고 나서 방향을 선회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때 문도 영입을 하지 않고 NPC로만 문파를 구성했으면 해산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천하제일문파라는 꿈은 접어야 했겠지만.
이왕 받은 문도, 그때는 시기상으로 어떻게든 수준을 급히 끌어올려야 했다. 문제는, 그게 조금은 쉴 틈을 주었어야 했는데 주변 상황이 계속 바쁘게 돌아갔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이 내 위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공서를 구해다 주는 것도, 새로운 사냥터 물색도, 문파의 진로를 모색하는 것 모두 나 혼자의 힘으로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문파를 세우려는 상황에선 더 이상 그래선 안 된다. 그때도 난 천하제일이었지만, 두 번이나 죽지 않았던가. 사실 세 번이 될 수도 있었다.
혼자만 강해져서는 안 된다. 정 혼자서 뭘 해먹으려면 그들 전체를 압도할 개인이 되어야만 했다.
여전히 천하제일문파를 원한다면 나 혼자서 이들을 먹여 살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대로 최고가 되어야 하고, 문도들은 문도들대로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체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이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에게 기대게 마련이니까.
딱 두 놈들만 빼고는 말이다. 광견과 광우, 이놈들 말이다.
아직 강호인들은 야수맹의 근거지를 모르고 있었다. 설령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갈 수가 없다. 그곳은… 허공답보나 어풍비행술 정도의 초절정신법을 배워야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오지인 운남성. 그 운남의 최남단에 란창강(瀾滄江)이 흐른다. 보산현(保山縣)과 란창강 사이 깊은 밀림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산이 존재하는데, 그곳이 야수맹의 근거지였다.
바위산 밑에서 보자면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생긴 지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모르고 지나치게 마련이었고, 설령 알고 찾아왔다고 해도 직접 올라가 확인하기 전까진 의심이 멈추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엔 적들의 침탈을 막기 위해 사닥다리조차 없으며, 강호의 은밀한 문파에서 종종 사용하는 바구니 수레도 이용하지 않았다.
그럼 야수맹 맹도들은 전부 허공답보를 사용하는 절대고수들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이곳을 출입하는 수법은 참으로 야수맹스러웠다. 녀석들은 거대한 독수리나 학 따위를 조련시켜 타고 다니는 것이다.
이 거조(巨鳥)들은 주인의 말만 듣기에 타인이 빼앗아 탈 수도 없다. 보안 하나는 완벽한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내가 비록 허공답보를 구사하는 초절정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경험은 종종 꼼수를 만들어준다. 만일 진곤륜에서 응룡비익이라는 아이템을 얻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야수맹에 들어가 볼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벨이 부족해서 응룡비익을 탈 수는 없지만, 그보다 낮은 등급의 비익류 아이템을 얻는 건 가능해 보였다. 능파미보를 얻기 위해 대리 무량산을 헤매다 뜬금없이 야수맹에 집착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강해지자고 하는 일, 당장은 야수맹에 집중하기로 했다.
곤륜과 운남을 샅샅이 헤맸다. 하지만 너무 센 놈은 기피해야 했다. 괜스레 용이라도 잡았다간 헛고생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저 날아만 다닐 수 있으면 족했다.
2주일이나 발품을 팔고서야 간신히 새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놈, 금응(金鷹)이라는 놈은 바로 바로 야수맹 절벽에 둥지를 튼 놈이었다. 내가 만약 딱 하루 동안만 진득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에 딱 10분이다. 놈은 그 10분 동안만 사냥을 했다. 그리고 지상의 몹들을 낚아채 자신의 둥지로 날아갔다. 때문에 놈이 사냥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올 때만 공격이 가능했다. 끽해야 몇 초에 불과한 그 시간에 결판을 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내겐 놈을 잡을 수단이 있었고, 무진 한 방에 모든 일이 해결됐다.
야수맹에 올라간 난, 두 달 동안 그곳에서 폐관수련하다시피 지냈다. 강기성형의 위 단계 강기발출을 얻었으며 수상비와 비학승천, 그리고 다시 천잠보의를 얻은 것도 거기서였다.
원체 보스급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곳이었기에 레벨은 하루가 다르게 급상승했고, 마침내 천리종무영까지 배울 수 있었다.
두 달이 지나 다시 능파미보를 찾기 위해 하산을 결심했을 때, 이곳을 물려주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이광이었다. 원래는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앞으로 진행될 계획을 위해선 몇 명의 절대고수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겨우 두어 달 남은 기간 동안 절대고수가 될 싹수가 있는 사람은 그 망할 놈들밖에 없었다. 자건과 독각룡 형은 남은 단원들을 추슬러야 했기에, 그리고 솔직히 이기심 만땅인 이놈들만이 이곳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에 그런 결정이 가능했다.
그렇게 놈들을 야수맹에 버려두었다 다시 재회한 게 바로 어제였다. 아직 얘네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수련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날 대하는 꼬락서니로 봐서는 분명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이 분명한데… 뭐, 이제 붙어보면 알겠지.
“좋아, 이기면 단을 하나 맡겨 주지. 각자 한 개씩 말이야. 대신 지면 군말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알아들었냐?”
“나중에 물리자고 하기 없기!”
“남아일언 중천금! 말 바꾸면 고추 떼기!”
니들 고추나 걱정해라.
악양루엔 우리를 빼곤 아무도 없었다. 원체 가격이 비싸기도 했거니와 주루 자체가 별로 인기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객잔을 가지 누가 더 비싼 돈을 치르고 주루에 올까. 기루처럼 눈요기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어찌 됐든 덕분에 그 넓은 공간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었다.
곧 대련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평범했다. 광견이 앞에 서고 광우가 뒤를 받치는 자세였다. 그 모습은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보았던 음양합벽진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양아치 같았던 그때에 비해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녀석들은 무림의 절대고수로 화해 있었다.
“그럼 갑니다! 함 잘 버텨 보쇼!”
광견의 건방짐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녀석이 익힌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은 극성에 달한 상태라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위세였다. 아무리 천잠보의를 걸친 상태라 해도 제대로 타격당한다면 좋은 꼴을 보긴 힘들 것 같았다.
촤촤촤촤-
쌔액-
손바닥만 한 장강(掌쾝)이 눈앞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손 그림자가 눈앞에서 폭죽 터지듯 만개하면서 그 자리에 장강이 새겨졌다.
장강 하나를 만든 손바닥은 금세 변화를 행하고 새로운 장강을 새겼다. 안력이 좋지 못하면 한꺼번에 십수 개의 장영(掌影)이 만들어진 거라고 착각할 만큼 폭발적인 빠르기였다.
광견은 그렇게 선공을 가하고 광우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제법!’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대력금강장엔 심결 무공 같은 요결이 없다. 순간순간 타격점을 바꿔주면 형편에 따른 초식기가 자동으로 시전되는 일반 무공이었다.
이런 일반 공격기는 컨트롤이 쉬워 사냥을 주로 하는 유저들에겐 심결 무공보다 더 인기가 있었지만, 전투용으론 적합하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상황에선 같은 방식으로만 대응하기 때문이다. 결국 몇 번 손속을 겨뤄보면 다음에 전개될 초식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고, 감각 좋은 싸움꾼은 그 순간을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타 유저들의 이야기였고 광견의 대력금강장은 아주 달랐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딱 그 양이었다.
어쩌면 강기를 허공에 남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녀석은 단순히 상대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상대의 투로를 예상하고 어이없는 타격점을 선택했다. 발끝을 노리기도 했으며, 보란 듯이 내 방어벽 중심에 충돌시키기도 했다.
무의미해 보이는 그 동작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의미를 만들어갔다. 내 투로에 혼선이 빚어졌으며, 힘이 격발되기도 전에 녀석이 덫처럼 깔아둔 강기에 충돌됐다.
웬만큼 머리가 좋지 못하면, 그리고 웬만큼 전투 경험이 없다면 시도할 수 없는 그만의 요령이었다. 시스템이 강제로 부여하는 무공의 제약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젠 고수가 다 됐다.
“후후. 조연 선생님도 이젠 한물간 거 아냐?”
제법 호탕하게 장담을 했지만, 광견도 처음엔 꽤나 긴장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의도한 대로 전개되자 슬슬 몸도 풀리고 입도 풀리는 듯했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여긴 것인지 그동안 뒤에서 엄호를 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던 광우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우가 사용하는 무기는 도였다. 녹색의 광망이 번득거리는 그 도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바로 야수맹 맹주의 독문 병기인 독도(毒刀) 혈기린(血麒麟)이었다.
나조차도 두 달간 야수맹에 칩거하면서 겨우 딱 한 개만 먹었을 정도의 희귀 아이템인 그것을 마침내 광우도 입수한 것이다.
따로 독을 준비하지 않아도 기본 옵션으로 최절정급 독 효과를 뿜어낼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 비록 손에 쥐고만 있어도 명성이 지속적으로 감소되는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강호 최강의 아이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짜식, 돈 벌었네.’
시세로 치자면 족히 수십억 냥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젠 상당히 평가 절하된 강호의 경제 사정을 감안해도 몇천만 원짜리 아이템인 것이다.
광우는 일격기 위주의 공격만을 구사했다. 광견의 장강들 때문에 흐트러지는 틈을 혈기린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보통은 맥을 짚는 단순한 찌르기 공격이었지만, 때론 도강을 발출해 섬뜩한 위협을 주기도 했다.
광우의 장강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혈기린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페널티가 있는 무기인 만큼 그 독기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피독주로도 해독하지 못하는 최절정급의 독기를 뿜어내는 물건이었다.
그렇게나 녀석들의 재간은 제법 쓸 만했다. 내게 심결육합권이 없었다면, 그리고 신안이 없었다면, 거기에 능파미보를 배우지 않았다면, 나도 조금은 팍팍한 대련을 할 수도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대련에 앞서 기본 보법을 불영보로 전환해뒀었다. 그걸 다시 능파미보로 돌렸다. 그러자 이광의 공격 속도에 간신히 대응하던 수준의 몸놀림이 삽시간에 변모했다. 놈들의 공격을 피하고도 오히려 시간이 남았다.
능파미보 하나로 광견의 노력이 모두 삽질로 변해버렸다. 몸이 저절로 위험에 반응해 시간의 틈 속으로 숨어버렸다. 틈을 노린 광우의 일격 필살도 의미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미꾸라지 보법을 파훼하려면 이광 같은 애들 열 명은 필요할 것이다.
“이게 다냐?”
“엑?”
능파미보를 처음 본 이광은 기겁을 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어떤 수단으로도 이겨 낼 도리가 없는 무공이니 말이다. 그러니 최절정이 아닌 초절정무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그게 뭡니까?”
광우가 혈기린을 떨구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핵 쓰지 마쇼! 누구야! 누가 유저한테 운영자 프로그램을 판 거야!”
광견은 또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알 거 없고, 더 없냐고? 없으면 그만 죽어라.”
보법은 회피공이 아니다. 모든 초식은 공방일체(攻防一體)의 묘를 가진다. 단순한 공격 투로인 전질보에도 따지고 들어가면 방어의 묘가 담겨 있는데, 하물며 초절정보법인 능파미보에 그런 묘가 없겠는가?
거침없이 전진하는 내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두 바보들의 발악이 맹렬히 쏟아졌다. 놈들은 남은 내력을 지금 이 순간 다 쏟아버리겠다는 듯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바람을 손안에 거머쥘 수는 없는 법. 녀석들의 공격은 헛되이 허공을 격할 뿐이었다.
파직-
금나수에 막 변초를 행하려는 광견의 우수가 걸렸다. 등 뒤에서 쏘아지는 광우의 독수는 자동적으로 상체가 흐느적거리듯 이동해 피해버렸고, 재차 감행되는 광견의 좌수는 강기로 충만한 금강저가 튕겨 버렸다.
파강!
녀석의 좌수를 퉁겨 낸 금강저가 기세를 잃지 않고 뻗어나가 관자놀이를 타격했다.
스르륵.
팟! 파각!
다시 광우의 휘돌려 베기를 피하고 이번엔 원앙각이 광견의 옆구리를 때렸다. 좌우 원앙각이 연달아 격중되자 광견의 오러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런데 어째 이상했다. 이놈들은 입은 걸어도 꽤나 소심한 놈들이라 나하고 대련하다 지게 되면(항상 그랬지만) 침울하거나 절박한 표정이 바로 얼굴에 그려지는 놈들인데, 여전히 뭔가를 노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광견의 찢어진 입꼬리가 슬쩍 말리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녀석의 기분 나쁜 썩소와 함께 놈들 최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질지권(蛭햼拳)! 흡(吸)!”
등 뒤에서 광우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판국에 뭔 또 새로운 무공이란 말인가? 그나저나 저런 무공은 나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번 놈들의 마지막 수를 구경해볼 생각이었다. 넓은 아량으로 견식해줄 마음이었는데, 내 생각이야 어떻든 봐야만 하는 지경이 되었다.
“어, 어… 뭐냐!”
살다 살다 이런 무공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뒤로 몸이 끌려가고 있었다.
“크하하하! 걸렸구나!”
“야, 야! 빨랑 조져!”
일종의 인도술(引導術)이었다. 질지(거머리)라는 이름답게 내 몸이 광우를 향해 슬슬 끌려갔다.
절대 우스운 무공이 아니었다. 마치 술법에 의해 민첩이나 회피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 행동에 제약이 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능파미보의 효용이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몸이 자유를 잃고 광우를 향해 점점 끌려가는 와중에 정신을 차린 광견의 대력금강장이 코앞까지 밀어닥쳤다.
‘이놈들 봐라. 정말 많이 컸는걸?’
녀석들의 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레이드급 몬스터를 단둘이서 잡았다는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놈들의 꿈을 깨는 일은 아주 아주 간단했다. 슬며시 컨트롤러의 단축키 하나를 눌렀다.
부아앙-
끌려가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한 힘으로 앞으로 달리면 된다. 난 강호 제일의 스프린터였다.
천리종무영이 순간적으로 공간을 압축했다. 경공을 시전하자마자 내 몸은 주루의 반대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억!”
광우의 질지공은 단박에 파훼됐다.
이제야말로 소원 성취를 할 수 있다는 듯, 질풍처럼 쌍장을 내지르던 광견의 얼굴은 안 봐도 뻔했다.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겠지.
녀석들은 꼭꼭 숨겨 놨던 비기까지 탈탈 털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광견 님이 항복했습니다.]
[광우 님이 항복했습니다. 비무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이길 줄 알았나 보다. 녀석들의 얼굴엔 참담함이 가득했다.
만약 자건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면 조금 안쓰러웠겠지만, 이 녀석들은 내게 즐거움만 주었다.
“제법 쓸 만했어.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짧게 말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광과의 대련은 자리의 분위기를 대번에 바꾸었다. 이번 대련을 보고서야 나와 이광의 성취를 확인한 자건과 백호단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좀 힘을 받겠지.’
아무리 과거 그들이 몸담았던 문파의 문주라지만 반년 만에 만난 사람을 어찌 전과 같이 믿을 수 있겠는가? 설령 자건은 날 믿어줄지라도 나머지 문도들에겐 그저 예전에 좀 알고 지냈던 관계 정도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걸론 부족했다. 그래서 굳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대련을 자청한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광이 자리에 착석했다.
문도들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나는 계획을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한은 한 달. 무조건 그날에 맞춰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리고 이광이 너네들은 자건이 말에 토 달지 말고 따라라. 괜히 호승심에 설치다가 죽지 말고. 그리고 방금 전 대련 결과에 너무 낙담하지는 말아라. 지금 너희 둘이라면 강호 최강이다. 질지공도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질지공에 너무 매달리지는 마라. 파훼할 수법은 많으니깐.”
“쩝.”
“그런데 저희들은 그렇다 치고 문주님은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글쎄? 산중 수련이 끝났으니 이제 때 좀 벗겨야 되지 않겠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 물 좋다는 소항(蘇杭:소주와 항주)에나 들러볼 생각이야.”
이제 웬만큼 내 정체를 아는 이들은 그 이면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만,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특히 이광이 이놈들은 말이다.
자건이만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라면 당연히 알겠지. 소항을 운운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났다. 이광과 백호단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줄 것이고, 설령 그들이 실패한다고 해도 계획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일부턴 소요파 남로군(南路軍)의 질풍 같은 행보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