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9장. 장강수로연맹 (51/62)

제49장. 장강수로연맹

동정호 군산(君山).

호남성은 강호 초창기엔 거의 유저를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2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이곳도 나름의 매력을 지닌 지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곳엔 그동안은 뻔히 존재를 알면서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사냥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몇몇 유저들은 그 사냥터에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날이 갈수록 유입되는 유저들의 수는 더욱 늘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바로 동정호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 군산이 호남성에 유저들이 찾아들게 만든 사냥터였다. 이곳에 장강수로연맹의 총타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바다 같은 동정호에 비하면 볼품없는 면적이지만 흔히들 칠백 리 군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넓은 군산도(君山島) 전체를 일개 도적 집단이 점거하고 있으니, 장강수로연맹이 얼마나 대단한 세력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정호에 접한 섬의 외곽으론 관의 토벌에 대비한 방책이 둘러쳐져 있고, 그 목책 사이사이로 높다란 망루가 또 즐비하다. 거기에 섬 북쪽에 위치한 군산 유일의 선착장엔 출행(出行) 준비 중인 거대한 투함(鬪艦)들과 크고 작은 누선(樓船), 주가 따위가 정박해 있는데, 그 수효와 위세가 여느 수군 병영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게임 속에선 이 위세당당한 군산도 결국 사냥터에 불과했고, 아무리 호기롭게 아니라고 외쳐도 수채의 도적들은 사냥감에 불과한 게 맞았다. 군산 전역에서 유저들의 파티 사냥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정박해 있는 전선(戰船)의 갑판에서도 마찬가지의 수적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 투함 위에서 사냥하는 무리 중 과거 난주의 소요파에 적을 뒀던 이들도 있었다.

“단주 형, 우리도 이러지 말고 어디 한 군데에 정착합시다.”

한바탕 사냥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또 그 소리였다. 벌써 며칠째 같은 소린지 모르겠다. 뭐라고 한바탕 혼구멍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그들에겐 자신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조자건은 또 한 번 일개미의 칭얼거림을 달래야만 했다.

“야, 일개미! 일단 여기서 500레벨 찍고 움직이기로 했잖냐. 지금 우리처럼 어중간한 상태로는 어디 가서 제대로 대접받기도 힘들단 말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아! 또, 또! 그 소립니까! 자꾸 형은 그 500! 500! 노래를 부르는데, 지금이나 나중이나 어차피 매한가지 아닙니까! 지금 우리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라고요!”

처음엔 군산이 지겨워서 나오는 투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듣다 보니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엔 다른 때보다 더 언성을 높이는 모양이, 크게 작심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조자건은 난감했다. 사실 일개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가 500레벨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은 그때쯤이면 조연과 약조했던 6개월이라는 시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개미가 어떻게 말하든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뻔했다.

“야, 지금 우리가 어딜 갈 수 있겠어? 중소 문파에 가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구대문파로 들어갈 수도 없는데 말이야. 설마 사황성에서 우릴 받아줄 거 같아? 끽해야 해남이나 장백파 정도가 전부라고. 게다가 거긴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수도 없고, 엔간한 사람은 받지도 않는다더라. 네가 보기엔 우리가 엔간한 부류가 아닌 거 같아? 그리고 말이 좋아서 정착이지, 거기 들어간다고 뭐 별다른 수가 생길 거 같아? 배운 무공 다 지우고 걔들이 던져 주는 삼류무공이나 배우고 싶은 거야?”

“아, 누가 무공 지우자고 했습니까! 그냥 이대로 가서 부대끼면서 살잔 말이죠. 형 말대로 지금은 특출한 사람만 받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좀만 더 지나면 아예 들어갈 자리조차 없지 않겠냔 말입니다.”

일개미의 말이 맞았다. 맞는 소리기에 반박하기 힘들었다.

다행이랄까, 옆에서 같이 쉬고 있던 전투개미가 편을 들어주었다.

“야, 일개미! 너 인마!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건데? 정 그렇게 문파 가입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가면 되잖아! 너 혼자서 말이야!”

편들어주는 게 맞긴 한데 어째 좀 과한 듯싶다. 아이디만큼이나 꽤 전투적인 언사였다.

“뭐, 이 자식아! 나 혼자서라면 진즉에 갔지 왜 굳이 형님한테 말을 하겠냐! 이 자식이 주둥이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일개미와 전투개미는 아이디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실에서도 친구 사이다. 각별한 사이다 보니 이렇게 막말을 하면서 싸울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대로 뒀다간 조자건의 처지 또한 난처하게 될 것이다.

“야!”

조자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서로 노려보며 잔뜩 대거리를 준비하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란다. 평소 워낙 조용한 성격의 자건이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조자건이 입을 열었다.

“너희 말이야, 일개미뿐 아니라 전투개미 너도. 그리고 저기서 사냥하는 딴 애들도 마찬가지야. 떠나고 싶으면 떠나. 괜히 선동하지 말고. 갈 사람은 가란 말이다.”

물론 진심이 아닌 단순히 겁주는 말에 불과했지만, 일개미뿐 아니라 전투개미마저도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능력만으로 따지자면 소요파 출신 유저들은 어딜 가도 환영받을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무공도, 아이템도 다른 낭인 유저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강호 어느 세력도 지니지 못한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요파가 해산된 이후, 지금까지 상당수의 문도들이 다른 문파에 가입한 상태였다. 문주 조연이 6개월 후에 복귀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건 간부들끼리만 공유한 정보였을 뿐 일반 문도들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문도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갔지만, 두 개미들은 가지 않았다. 실력도 간부급 못지않은 그들의 변심을 단주인 조자건과의 친분이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자건이 말하는 것을 보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형님이 내뱉을 말은 아닌 것이다.

일개미의 표정이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움츠러든 기색이었는데, 고심하는 표정으로 변했다가 끝내 화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화난 일개미가 따지는 것보다 조자건이 더 빨랐다.

“이놈들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유지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신의라는 거다. 그런데 신의라는 게 어떻게 쌓이는지 아냐?”

대답을 할 순 있지만 그게 조자건이 원하는 답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러자 자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이 신의가 있다는 말은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신의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사람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과 같다. 신의라는 건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은 온전히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못 믿어서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은 없다. 너희들이 날 믿는다면, 그리고 예전의 단주처럼 생각한다면 지금은 내 의견에 따라줬으면 한다. 난 정말로 500레벨이 되기 전엔 이 방식대로 살 것이다. 그게 싫으면 떠나면 되는 것이고 말이야. 떠나는 것에 미안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미련도 필요 없고 말이야.”

자건의 그럴싸한 말이 두 개미들의 심금을 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효과는 확실했다. 두 사람 모두 흥분한 기색이 사라진 것이다. 만약 자건이 의도한 게 그거였다면 성공한 셈.

한참 우물쭈물하던 일개미가 자건에게 물었다.

“그럼 형님은 우릴 신뢰하나요?”

대답은 짧았다.

“아니.”

할 말을 잃게 만든 대답을 내뱉은 자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신뢰라는 건 없다. 말했듯이, 네가 듣고 싶어 하는 ‘신뢰’라는 건 없다. 그건 내 문제이고, 내게 반문할 때 쓰는 단어이지, 남에게 이야기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어쩐지 이야기가 너무 진지해져 버렸다. 전투개미는 조금 따분해하는 얼굴이었는데, 일개미는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일개미가 말했다.

“형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전 형을 믿습니다.”

마치 반드시 해야겠다는 투의 말이었다. 지켜보던 전투개미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마치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구애 같지 않은가. 조자건은 무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그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곳은 투함 갑판의 선교(船橋) 언저리였는데, 그곳으로 웬 유저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세 사람 모두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다가오는 이의 발걸음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마치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듯이 말이다.

세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접근하는 이방인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들 코앞까지 접근한 이방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나도 믿는다.”

대화를 엿들었나 보다. 아깐 한 사람만 무안해했지만, 이젠 그 수가 세 명으로 늘었다.

낯선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남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제 갈 길을 가는 게 정상일 텐데, 그 사내는 도무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그쪽이 안 가면 이쪽이 가면 그만. 조자건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놀 만큼 놀았으니 사냥할 시간이다. 이방인은 무시했다. 두 개미들도 무안함을 떨쳐 버리고 같이 일어섰다.

세 사람은 함교 뒤 고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상갑판과 3층 선실로 통하는 사닥다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내려가면 바로 사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투함의 몹 배치는 일반적인 사냥터와 다르다. 실제 전투함의 계급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먼 곳인 최하층의 선실엔 노를 젓는 수부(水夫)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전투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고, 입구와 가장 가까운 최상층의 선실에 장교급인 수적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조자건과 두 개미들이 노리는 사냥감이었다.

“이번엔 좀 먹었으면 좋겠다!”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며 전투개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강수로연맹은 평범한 수채가 아니었다. 흔히 강호엔 3대 수적연합체가 있다고 하는데, 황화수로연맹, 동정십팔채, 그리고 이곳 장강수로연맹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활동지의 크기로 따지면 단연 장강수로연맹이 최고였고, 실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원 최고의 수적 집단인 이곳이다. 거기에 정박해 있는 투함 중에서도 조자건이 있는 투함이 가장 크다. 일종의 대장선인 것이다. 승조원 수만 해도 족히 천 명은 넘어갈 듯한 거대한 투함이니 간부들의 실력 또한 절대 녹록치 않았다. 그런 대단한 곳을 단 세 명이서 사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 이 투함을 공략한 지도 어느새 보름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상태라 선실 복도를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발걸음엔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고, 꺾어진 모퉁이에서 기습적으로 가해지는 수적의 공격을 마치 예견이라도 하듯이 받아넘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겨우 눈짓만 주고받고도 강한 몹들이 가득 찬 선실을 제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첵! 챠챠챠!

이미 십수 명의 수적들이 시체가 되어 선실 바닥에 어지러이 쓰러져 있었다. 졸개들을 정리한 자건 일행은 투함의 중간 보스급인 갑판장을 공략했다.

기실 크기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투함은 장강수로연맹 총채주의 기함(旗艦)이었다. 수채 최고의 전투함, 거기에 함선의 모든 전투원들을 지휘하는 갑판장이었으니, 그 무위가 최절정급인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갑판장은 뱃놈답게 강차를 들고 있었는데 그가 한 번씩 그 쇠꼬챙이를 내지를 때마다 예리한 강기가 빛살 같은 기세로 터져 나와 조자건 일행을 위협했다.

하지만 NPC는 어디까지나 NPC에 불과했다. 아무리 표홀한 신법에 강력한 공격기를 가진 놈이라 해도 그간 몇 번이나 되풀이된 전투는 놈의 약점을 샅샅이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이 자식! 그만 좀 죽어라!”

전투개미가 태산을 쪼갤 듯한 기세로 대도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만만찮은 상대를 두고도 전혀 겁먹거나 긴장하지 않는 투였다.

전투개미의 고함에 조자건이 응수했다.

“마지막이다! 일개미, 시작해라! 조심하고!”

조자건의 검이 갑판장 목에 갖다 대지더니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치명적인 급소 공격!

경동맥이 잘려 피분수가 솟구치는 장면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갑판장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틈을 타 일개미가 마치 지당도법(地堂刀法)을 구사하듯이 몸을 데굴데굴 앞으로 굴렸다. 그러자 갑판장이 대경해서는 급히 강차를 찔렀다.

챙! 챙캉!

하지만 강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자건과 전투개미의 합격에 밀려 튕겨 가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치명타가 가해졌다.

츄아악-

누운 자세에서 땅에 떨어진 먼지를 쓸 듯이 검을 휘둘러 친 일개미가 비룡재천의 신법으로 솟구치더니 재차 갑판장의 목줄을 그어버린 것이다.

“꾸… 꾸륵……. 내… 내가… 이… 이런 자식… 들에게…….”

쿵!

통나무 쓰러지듯이 갑판장이 뒤로 넘어갔다.

참으로 무서운 합격진이었다. 겨우 절정의 경지에 불과한 유저들 셋만으로 최절정급 무인을 간단히 해치워버렸다.

“뭐야? 또 통행령이야?”

갑판장이 쓰러지자마자 아이템을 주우러 달려간 전투개미가 볼멘소리를 했다. 자건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딴 건 없고?”

“쩝. 뭐, 맨날 주는 거죠. 그지 같은 귀식대법(龜息大法)이랑 혼벽강차(混碧鋼叉)만 나오네요. 이 자식이 정말 수상비(水上飛) 주는 거 맞아요?”

전투개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낸들 알겠냐. 먹었다는 놈이 있으니깐 믿어보는 수밖에. 그럼 대충 정리하고 올라가자.”

그런데 주섬주섬 아이템을 수거하고 뒤돌아선 세 사람이 흠칫 놀랄 일이 생겼다. 아까 갑판에서 만났던 낯선 사내가 팔짱을 낀 자세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사냥 장면을 구경하는 게 특별한 잘못은 아니다. 더구나 보스 잡는 데 껴들지도 않았고 방해도 없었으니 그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기척도 없이 구경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긴 했다.

세 사람 모두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더구나 지금 그는 구경거리가 다 끝났는데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복도로 나가는 입구를 틀어막은 자세로 말이다.

“무슨 일이오?”

전투개미도 그제야 이 사람이 그냥 과객(過客)이 아님을 느끼고 날 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사내의 반응이 좀 그렇다. 경계심이 묻어나는 질문에도 그저 웃음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이 작자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것도 아니고 웃어버리다니!

일개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평소 전투개미의 성격대로라면 조용히 넘어가긴 이미 글러버린 것이다. 그의 귀에 전투개미의 웃음 섞인 말이 들려왔다.

“흐흐! 한번 해보겠다는 거요?”

건방진 도발에도 사내의 얼굴에 새겨진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부웅-

말릴 새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투개미의 대도가 사내의 머리통을 향해 쏘아졌다.

하는 짓거리로 봐서 한가락 실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외였다. 상대가 너무 간단히 피해버린 것이다!

“어쭈!”

괴인이 대도를 피하면서 펼쳐 낸 동작은 흔히 보기 힘든 신법이었다. 상대가 만만찮다고 느낀 전투개미는 무기를 바꿔들었다. 중병기인 대도를 버리고 낭창낭창 휘어지는 연도(軟刀)를 꺼내든 것이다.

‘건방진 놈! 한번 당해봐라!’

연도, 혹은 연검을 강호에서 보기란 아주 힘들다. 기문 병기의 이점은 그 희귀함에서 나오는 것. 겪어보지 않은 이는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촤차차차착-

봄철 들판에 꽃이 만개하듯 도영(刀影)이 사내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꼭 정면에서만 도강이 펼쳐지는 게 아니었다. 왼쪽에서 그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오른쪽에서 새로운 칼 꽃이 피어올랐다. 목표로 삼은 공간을 전 방위에서 공격하는 게 전투개미가 구사하는 연도술, 잔백도결(殘百刀結)의 요체였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괴인은 이제 백 가닥으로 분시되는 일만 남았다고 여겼다.

“흡!”

순간 지켜보던 일개미가 침음성을 흘렸고, 조자건은 귓가에 음악이 흘러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도대체 저게 가능한 일일까? 저게 어떻게 인간의 몸놀림이란 말인가!

처음 전투개미가 대도를 휘둘렀을 때엔 빠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단순한 투로의 단 한 번의 공격이었다. 쾌(快)엔 쾌로 대응하면 된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 다만, 상대의 신법이 대도를 피할 정도로 빨랐다는 게 대단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괴인이 보여 주는 동작은 무엇이란 말인가! 좀 전의 쾌가 단순한 쾌가 아니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강호의 무공은 현실에 기반을 둔다. 아무리 동시간에 가해지는 공격처럼 보여도 인간의 눈으론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시간차가 존재한다. 그게 강호가 표방하는 현실성인 것이다.

사내는 그 시간차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강호 유수의 도법 중에서 쾌법으로 따지면 손가락 안에 꼽힐 잔백결을 완전히 농락하고 있었다.

띠링- 띠링-

띵- 띵-

조자건은 이제 환청이 아니란 걸 깨닫고 있었다. 정말로 괴인이 신법에 맞춰 금 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짓쳐 들어오는 칼 그림자들 사이에도 길은 있었고, 사내의 그림자가 그 길을 밟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건 아니었지만 사내의 몸이 기괴하게 꺾여 검화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저, 저게 무공이 맞는 건가…….”

무공이 아니었다. 사기에 가까웠다. 별다른 빠름이 느껴지지 않는 저 동작이 실은 극쾌에 기반하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얼마간 오기로 잔백결을 더 펼쳐 보이던 전투개미도 이젠 칼을 내려놓고 있었다. 무의미했다. 괴인은 천하제일의 신법 고수가 분명했다.

방금까지 흉험했던 기세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쌈이란 것도 서로가 한번 해볼 만하다고 여길 때 가능한 일이지, 이렇게 압도적인 상대 앞에선 성사되지 않는다.

사내는 여전히 잔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조자건 일행은 속으로 궁리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고수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진 않을 테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조자건은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용건이라면 괴인에게 있을 것이고, 힘이라면 그가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괴인이 먼저 입을 열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 조자건의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었다. 괴인의 허리춤에 눈에 띌락말락 매달린 물건. 그게 왜 이제야 보였는지 자신의 눈썰미를 탓해야 할 정도였다.

‘후후.’

조자건은 고개를 돌려 두 개미 형제들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는 상대를 향해 자세를 바로 했다. 자건의 허리가 반듯이 접혀지고, 그의 음성이 선실을 울렸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허리에 금강저를 매단 괴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사를 받았다.

* * *

언제 봐도 자건은 믿음직스럽다. 안 본 사이에 얼마나 단련을 했는지 얼굴선도 굵어지고 풍기는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를 감싼 오러의 움직임도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비록 절정급 수준이긴 했지만, 최절정급과 붙어도 밀릴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 그가 날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도 길거리에서 그를 스쳐 지나간다면 전혀 몰라볼 정도였다. 세월의 힘은 그래서 무서운 것일까? 내 복수 대상자들도 외양이 바뀌었을 텐데…….

“저, 정말 문주님이 맞으세요?”

방금 전에 내게 칼을 휘둘렀던 사내가 깜짝 놀라 물어왔다. 이미 반년이나 지난 터였다. 일반 문도들의 얼굴은 기억이 희미할뿐더러 사내는 지금 아이디를 띄워놓은 상태도 아니라 얼굴이 낯설기만 했다.

“맞습니다.”

잠깐 아이디를 켰다. 그러자 다른 사내 한 명도 화들짝 놀라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알아 봬서 죄송합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문주님!”

두 사람의 인사와 소개를 받고 있는데 자건이 물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은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문도의 시선에 의아함이 담겼다.

‘뭐, 차차 알겠지.’

“그래, 일이 생겨서 좀 빨리 나왔다. 그래도 계획엔 변함없을 거야. 이미 준비는 다 돼 있다. 움직이기만 하면 될 일이고.”

“어련히 문주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죠. 전 그저 따라만 가겠습니다.”

자건은 여전히 말이 짧았다.

그런데 아까 갑판 위에서 자건이 타인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건 내게도 통용되는 것일까?

“그런데 말이야, 다른 단원들은 다 어디 가고?”

그간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사람은 독각룡 형밖에 없다. 자건이 여기서 사냥하고 있다는 것도 형에게 들어서 안 것이다.

형에게 듣기론 그 단합 잘되던 청룡단도 지금은 스물 대여섯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자건의 백호단 역시 꽤 많은 수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을 빗나가도 너무 심하게 빗나갔다.

“아, 저쪽 배에서 사냥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피바다파하고 단하루, 절대초보 이렇게 셋이 말입니다.”

대답한 이는 자건이 아니라 내게 칼을 휘둘렀던 전투개미라는 그 친구였다.

그런데 기가 찬다. 사십이 여섯으로 줄다니. 백호단이라면 청룡단 못지않게 단합 잘되던 곳이 아니었는가? 백호가 이 정도라면 현무나 주작은 또 어떻겠는가?

“일이 좀 많았습니다. 문주님 떠나시고 거의 두 달은 지겹게 죽었으니까요. 여기 다섯 친구라도 남아준 게 고마울 정돕니다.”

자건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의문을 풀어주었다. 나만 노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지독한 새끼들. 해산했으면 멈춰야지, 맘에 안 든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겨우 두 번 죽은 나도 게임 접을 생각을 했던 상황이었으니, 이렇게까지 수가 팍 줄어든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왜 무풍객 그 개새끼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겁니까!”

‘응?’

자건 옆에 있던 일개미라는 문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말하는 투로 봐서는 배신을 한 것 같은데 말이다.

더구나 일반 문도라면 모를까, 무풍객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백호단의 수석 조장이었던 문도였으니 말이다. 기왕 듣게 된 거,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넘어가야 했다. 일을 시작하려면 배신자 처단부터 해야 할 테니.

자건을 조용히 노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애들이 섣불리 움직일까 봐 잊자고 했습니다만, 이제 문주님이 오셨으니 풀고 가야겠죠.”

그래, 그래야 했을 것이다. 역시 자건답다.

“두어 달 당하고 나니깐 더 이상 괴롭히진 않더군요. 그때만 하더라도 서른 명가량은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남은 기간 동안 버티려면 근거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문파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소는 한적한 광동성 불산에 자리 잡기로 하고요. 대충 문주님이 주신 돈하고 남은 애들끼리 탈탈 털어보니깐 조그만 문파 하나 만들 돈은 되더군요. 근데 그때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전 그 당시 살인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흉한(凶漢) 상태였거든요. 문파 설립 신고서를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입장이었죠. 그래서 무풍객이한테 돈을 주고 설립 신고서를 받아가지고 오라고 했죠.”

대충 알겠다.

“그래서 그놈이 그거 들고 날랐나?”

“네. 얼마간은 현금으로 팔아먹고, 남은 돈은 해남파 가입하는 뇌물로 준 듯싶습니다.”

“놈이 해남파에 가입했나?”

“네. 소문에 듣자하니 벌써 단주로 승진했다고 하더군요.”

기가 찰 일이다. 아예 다 정리하고 게임을 접었다면 모를까, 아직도 버젓이 강호를 횡행한다는 것은 나 조연이나 소요파를 핫바지 정도로도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런데 말이야, 그거랑 지금 문도가 적은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놈이 돈 들고 간 거는 돈 들고 간 거고, 문도가 떠난 건 별개 문제지 않나? 나머진 언제 떠난 건데?”

“아! 그때 같이 해남으로 간 놈들이 여덟쯤 됩니다. 무풍객이 동네 친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머지는 솔직히 제 부덕입니다. 하나 둘씩 핑계거리를 찾아서 떠나버렸습니다.”

꼭 자건이가 자책할 만한 일은 아니다. 신규 문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라면 어느 조직이라도 결국 와해되기 마련이니. 게다가 배신자마저 생긴 상황에 오죽 정나미가 떨어졌을까.

더구나 자건이가 말했듯이 복수를 하려고 해도 극구 말리고 있었다니 화를 못 이겨 떠난 문도들도 많았을 것이다.

“됐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 근데 손해 본 돈이 얼마나 돼?”

“십억쯤 됩니다.”

“그래? 그럼 일단 이거 받어. 떠난 애들은 신경 쓰지 말고, 남은 문도들끼리 쪼개서 가져라. 몫이 줄었으니 차라리 잘된 거네. 하하.”

돈이라면 많다.

자건에게 20억 냥을 건넸다. 10억은 피해 보상금 격이고, 나머지 10억은 활동 자금이었다.

“좋아. 그럼 저쪽 배에서 사냥한다는 세 친구들도 불러 모으지. 간만에 파티 사냥해보는 것도 재밌겠어.”

전투개미가 후다닥 뛰어나갔고, 난 조자건에게 수로연맹이라는 사냥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수로연맹은 방대한 조직 체계만큼이나 보스급 몬스터가 여럿이었다.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투함들 가운데에 유독 큰 거대 투함 세 척엔 이름을 가진 중간 보스급 몹이 상주해 있는데, 그들을 잡으면 수상비라는 절정급 신법 비급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이 투함은 총채주의 기함이라는 특성상 다른 투함의 함장들 대신에 갑판장이 중보스 역할 노릇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다른 두 함장들보다 조금 센 놈이어서 자건은 이 녀석이 수상비를 떨굴 확률이 더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행령은 뭐야? 무슨 열쇠 같은 거야?”

“네. 군산도 깊숙이 들어가면 총채주가 있는 건물이 나오는데 통행령이 있어야 총채주 본거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 보긴 했는데 바로 도망쳐 나왔죠. 수적이라고 볼 수 없는 놈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세?”

“총채주는 얼굴도 못 봤고요, 간부들 열여덟만 봤습니다. 전부 최절정급이었습니다. 거기에 절정급 수하들 숫자만 해도 오백쯤 되더라구요.”

“쫌 되네. 뭐 얼마나 센지는 가서 부딪쳐 보면 되고.”

자건과 일개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셨습니까!”

그때 갑자기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투개미가 데리고 온 나머지 세 문도들이었다.

아직 설립 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소요파의 새로운 역사는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

내가 먼저 그동안 행낭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푸른 학이 수놓인 과거 소요파 시절의 옷을 꺼내 입자, 다른 문도들도 하나 둘 나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모두 문파 도복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소요파가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기원하고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시작은 크고 화려할 것이다. 이번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고, 절대 무너지지도 않을 성을 쌓을 것이다. 기필코.

“뭐, 뭐야? 저 사람들, 저기 투함서 사냥하던 사람들 아냐?”

“그러게. 분위기가 보통이 아닌 거 같은데! 설마 총채주 잡으러 가는 건가?”

투함을 내려가 수로연맹 목책을 지나는데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저 문파 표식, 어쩐지 낯이 익지 않냐? 청학을 표식으로 삼는 데는 여태 한 군데밖에 없었잖아.”

“설마 소요파겠냐? 어떤 머저리 같은 문주인지는 몰라도 앞으로 고생깨나 하겠구만. 문파 표식이 저러면 금방 태클 들어올 텐데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유저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문도들은 다들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명을 하지는 않았다. 아직 자건과 나를 제외하면 그들 자신도 문파가 정식으로 부활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묵묵히 발걸음을 군산도 중앙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동안 자건과 문도들이 이곳에서 보여 준 무위를 인정한 탓인가? 동일한 복장인 데다 다들 꺼리는 총채주의 거처로 향하는 우리를 보고 새로운 볼거리를 기대한 유저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겨우 서넛에 불과했지만, 지나면서 만나는 모든 유저들이 가세해버리자 어느덧 서른 가까이 되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신경에 거슬리는지 개미 형제와 다른 세 문도들은 연신 뒤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공짜다, 공짜. 신경 꺼라.”

그런 그들을 보고 한마디 했다.

“뭐가 공짜인데요?”

전투개미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고 반문했다. 자건만 가볍게 웃으며 알아듣는 척을 했다.

군산도 전체가 사냥터이긴 하지만, 모든 곳에서 몹이 생성되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일종의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전지대를 따라 걷다 보면 성벽처럼 섬을 둘러친 목책들을 만나게 되는데, 깊이 들어갈수록 목책의 형태도 달라지고 있었다.

세 번의 목책 저지선을 통과하자, 드디어 진정한 장강수로연맹을 만날 수 있었다. 여태까지의 목책이 아니라 기와를 얹은 담장이 가로막고 있었고,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 몹이 아닌 진짜 NPC였다.

십 보쯤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자건이 날 보고 말했다.

“저 NPC한테 통행령을 보여 주면 일 분간 문이 열립니다. 그사이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행히 통행령은 1인용은 아니었다.

모두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무언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대로 들어가도 별 무방했지만, 따로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자건이는 잠깐 나 좀 보지. 다른 사람들은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발걸음을 떼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옮겼다. 자건이 곧 따라붙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 새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입을 열었다.

“대충 보아하니 최절정 중간급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맞아?”

타인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은 신안 외에는 없다. 자건이 어떻게 그걸 알아챘냐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그가 잠깐 계산을 때려 보더니 대답했다.

절정급 무공밖에 배우지 않았으면서 최절정급 경지와 호각을 이룬다는 것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그만큼 조자건이 뿜어내는 오러의 밀도는 촘촘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 심결 무공을 대성해보니깐 느껴지는 게 있더라구. 다들 알다시피 심결 무공의 경지는 절정급밖에 안 된다고 말들 하잖아. 그럼 심결 무공을 배우기만 하면 결국엔 모두 다 같은 수준의 절정급에 이르는 것일까? 물론 배운 요결의 숫자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다른 절정무공들을 보면 같은 절정급이라도 등급 차라는 것이 존재하잖아.”

조자건은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심결이 풀린 지도 벌써 반년이야. 대성한 사람은 수도 없지. 그리고 심결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굳이 다른 절정급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되지. 그런데도 이상했어. 왜 실제로 심결을 배운 사람들마다 그 경지가 제각각인 걸까? 너도 알다시피 요결은 일격기처럼 본신의 실력을 올리는 기술이 아닌데 말이야. 내 눈엔 심결밖에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수준이 모두 달라 보였어.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일 거야. 요결의 개수에 따라 심결 무공의 경지는 달라진다고 말이야. 이해하겠어?”

“네.”

‘후후.’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자건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봐. 그때 공동산에서 어디까지 얻었던 거야? 삼재검에도 묘자 결이 있던가?”

자건과 재회하고 나서 느낀 가장 큰 의문이 그것이었다.

강호가 오픈한 지 2년이나 된 지금에 와서 절정급 무공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안을 통해 본 조자건의 무공은 여전히 심결 무공에 그치고 있었다.

오러가 주변과 동화되는 현상 없이 마치 기가 단단해진 것처럼 높은 밀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분명 절정급의 경지를 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밀도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수준. 내 짐작으론 최절정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드문 경지였다.

조자건은 심결 삼재검 요결을 다섯 단계인 유자 결까지 얻었다고 했다. 그 당시엔 꽤 대단한 성과였지만 어느 정도 퀘스트 파훼법이 알려진 지금에 와서는 흔한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남들 다 배운 걸 가지고 더 높은 경지를 가지고 있다? 말도 안 된다.

이내 조자건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잘 숨기고 있었는데…….”

날 속인 게 그의 잘못은 아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이곳도 강호가 맞긴 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실력을 숨기는 것은 미덕이 될지언정 부덕이 되지는 않았다.

“괜찮아. 따지고 보면 나도 그러니까 말이야. 아마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숨기고 있겠지. 하지만 이제부턴 그러지 말았으면 해. 딱 한 달이야. 내 계획으론 말이야. 한 달만 지나면 아무도 우릴 넘보지 못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가 가진 밑천까지 다 드러낼 필요가 있어. 강력하고 확실하게. 각자의 재간을 십 할이 아니라 십이 할까지 드러내야 한다고. 알겠어? 더 이상 실력을 감춰선 안 된단 말이야.”

반년 전 그날, 문파를 해산할 위기에 처할 때조차 우린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않았다. 그땐 온전히 실력 발휘를 해봤자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록 사람 수는 줄었지만, 알짜배기들만 남았다. 모두 가슴속에 칼을 품고 열심히 단련한 지도 반년이나 되었다. 비록 그 경지가 최절정급은 아니더라도 전투 감각으로 따지면 이들은 모두 강호 최고수라고 자부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구대문파? 개인 대 개인으로 따지면 단주급이 아닌 한 저 일개미나 전투개미조차 능가할 수 없었다. 대문파에선 승급하지 못하는 한 문파 최고 무공을 배우지 못하니, 그들에게 남은 인생이란 어중간함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다른 애들에게도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 달 만에 그 일들이 가능할까요? 복수도 해야 하고 문파도 다시 세워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건 끝나고 이야기하지. 애들 실력을 확인하고 말이야.”

이야기를 정리하고 기다리고 있던 문도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조자건은 내게 말했던 대로 다른 문도들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개중엔 정말로 실력을 감춘 이도 있었을 테고, 여태 보여 준 게 전부였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변하기는 할 것이다. 같은 무공이라도 어떤 마음가짐이냐에 따라서 실력이 변하는 법이니.

“시작하지.”

조자건이 문지기 NPC에게 다가가 통행령을 비쳤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신표가 사라지자 우릴 가로막고 있던 차단막이 스르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앞장서 들어갔고, 다른 문도들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때까지 잘도 따라왔던 구경꾼들은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잘한 생각이다. 굳이 들어오지 않아도 밖에서도 구경은 가능하고, 괜한 욕심으로 아이템을 노렸다간 그 전에 사망할 가능성이 많으니 말이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자 수채의 진면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도저히 도적 집단이 머무르는 곳답지 않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판잣집과 움막, 그리고 끽해야 대충 만든 전각이 한 채 정도 서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여느 대문파들처럼 호화로운 전각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수적이 산적들보단 수입이 좋다는 강호의 속설이 맞는 것일까?

잠시 후, 그 전각들에서 온갖 수적 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쇠 그물을 들고 나오는 놈, 사슬낫을 휘두르는 놈, 강차와 박도 따위를 들고 나오는 놈 등 가지가지였다.

놈들이 들이닥치길 기다리는데 절대초보라는 문도가 부적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백호단에 남은 마지막 부적술사였다.

[천사연환진이 발동됐습니다. 1시간 동안 방어력과 회피력이 10% 상승합니다.]

[집원부가 발동됐습니다. 10분간 체력이 회복됩니다.]

[연신부가 발동됐습니다.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오랜만에 부적술을 받아본다.

“그럼 시작합시다! 빨리 끝내고 쉬러 갑시다!”

백호단은 자건을 첨두(尖頭)에 세운 쐐기 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선 돌파를 택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대단하다. 사전에 그 어떤 언질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신속하게 대열을 맞추다니 말이다. 대체 그동안 얼마나 험하게 살아온 것일까?

조무래기들 숫자가 오백이나 된다지만, 결국 놈들은 잡몹에 불과했다. 나 같은 고급 인력이 놀아줄 만한 상대가 아니다.

잡몹들은 여섯 문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난 몸을 띄웠다.

“헉! 저, 저게 뭐야!”

“어기충소(馭氣沖宵)다!”

너무 높이 솟은 탓일까? 뒤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그들에겐 초절정신법인 어기충소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비학승천(飛鶴昇天)이라는 절정급 일격기에 불과하다. 남만 야수맹의 중간 보스급인 쌍두홍학(雙頭紅鶴)을 잡아 배운 무공이었다.

“헉! 세상에 저런 신법도 있냐?”

“저거 수상비 아냐?”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돌려 공간을 가로지르자 다시 구경꾼들이 외쳤다.

이번엔 저들이 맞혔다. 수상비가 맞다.

과거 구대문파의 장로급 인사들이 구사했던 그 놀라운 신법들을 이젠 나도 똑같이 구사할 수 있다. 비학승천과 수상비, 그 두 가지 신법 무공만으로도 오백의 수적 떼를 뿌리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하고 싶었다. 허공을 가로질러 포위를 벗어나자마자 전각군 중앙의 대전(大殿)을 향해 달렸다.

등 뒤에선 자건 일행이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는지 요란한 굉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또 상당수의 수적 무리가 내 뒤를 쫓는 발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놈들은 없었다. 그들은 너무 느렸다.

축지법이나 다름없는 천리종무행은 공간 자체를 압축시켜 버리는 것과 같아서 어느새 내 몸은 취의청 앞에 자리했다. 조자건의 말마따나 열여덟이나 되는 최절정급 고수들이 대전 앞에 도열해 있었다.

누가 먼저 손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눈으로 놈들을 확인한 순간 이미 몸은 날고 있었다.

놈들의 손을 떠난 잡스런 흉기들이 내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을 훑고 있을 때, 보리금강저가 제일 앞에 선 놈의 목을 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구양신공의 염기(炎氣)가 시뻘겋게 보리금강저를 달궜다. 진홍빛 광채에 놈들의 강기가 부딪치는 순간, 그것들은 산산조각 박살이 나버렸다.

허공을 격하면 열양지공이 쏘아졌고, 병기와 부딪치면 화기(火氣)가 놈들의 무기를 타고 녀석들의 진원(眞元)을 불태웠다.

콰쾅!

화르륵-

피시식-

굉음을 내며 춤을 추듯 몸이 공간을 휘저었다. 여기서 손이 뻗치는가 싶더니 또 저기서 화염이 치솟았다. 금강저에서 시작된 빛무리는 빠른 속도로 전장을 붉게 물들여 버렸다.

놈들을 쓰러뜨리는 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수(一手)를 뻗으면 어김없이 한둘의 목숨을 뺏고서야 돌아왔다.

1 대 18로 시작된 전투는 채 다섯 동작도 펼치기 전에 반수로 줄어버렸고, 여덟을 세기 전에 모든 일이 정리돼버렸다.

“후우… 이것들, 말만 최절정급이지 야수맹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놈들이구만.”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겪은 야수맹은 확실히 이런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었다.

지금의 강호 유저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야수맹의 진정한 저력을 말이다. 그들이 보고 겪은 야수맹은 일개 지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단 떨어진 아이템들을 수거하고 뒤를 돌아보니, 백호단은 잘 견디고 있었다. 아니,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제법 멋있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여섯이 모인 첨진(尖陣)은 때에 따라 둘로 쪼개져 수적 떼들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갔고, 그들이 지나간 길엔 어김없이 몹들의 시체가 자빠져 있었다.

“이제 다들 정신을 차린 건가?”

아무리 본 실력을 올곧이 표출할 수 없는 NPC라지만 그 수가 무려 오백이다. 같은 절정급에 불과한 백호단이 저런 위용을 보일 수 있다는 건 다들 봉인해뒀던 기술들을 풀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지켜보는 사이에 수적들의 진영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남은 건 놈들의 수급을 목에서 떼어내는 일밖에 없었다.

“이런, 이런. 이러다가 내가 더 늦겠다.”

잠깐만 보자는 게 어느새 수삼 분이나 흘러버렸다. 서둘러 대전으로 들어갔다.

쉭! 쉭!

팍! 파캉!

컴컴한 대전으로 겨우 한 발자국 옮겼는데 검은 빛살 두 개가 쏘아져 왔다. 하지만 이미 암기는 힘없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훗!”

웃음이 나왔다. 야수맹주의 거처처럼 이곳에도 암살자가 숨어 있다니 말이다.

다른 이들에겐 어두컴컴한 방에 마치 유령처럼 스며든 놈들이 두려움을 줄지 모르겠지만, 신안을 지닌 내겐 그저 애들 장난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놈들은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다니 고마운 일이다.

석벽의 붉게 빛나는 지점을 향해 탄지신통을 날렸다.

픽- 쾅!

픽- 쾅!

석벽에 강기가 부딪치자 화염이 치솟았다. 암살자들이 전신에 불을 붙이고 튀어나와 몇 번 팔을 허우적대더니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대전을 곧장 가로질러갔다. 그 와중에 몇 번의 기관 장치가 작동되었고, 또 몇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장난 같은 일이었다.

“뭐야?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돼?”

장강수로연맹의 총채주 수룡왕과의 첫 대면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만큼 방대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수장이 겨우 최절정급밖에 안 된다니 말이다. 비록 최절정급 극상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초절정은 아니었다.

“제길… 그럼 괜히 왔잖아.”

굳이 백호단을 보러 올 이유는 없었다. 뭐, 이유를 붙이자면 붙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바쁘신 몸이 겨우 그들을 보러 그 먼 길을 수고할 이유는 없었다. 군산에서 사냥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바쁜 와중에 겨우 수룡왕 따윌 잡으러 오기에도 뭔가 좀 부족했다. 마치 50과 50이 합쳐 100이 됐다고 할 수 있을까?

“애들 떡값 수준밖에 안 되겠군.”

수룡왕은 수적 주제에 화려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벽옥(碧玉) 비늘 갑옷을 말이다. 어떻게 옥으로 치장된 갑옷이 존재하고, 또 그런 사치품을 무인이 걸치고 있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여긴 게임 속이니까.

날 보자 수룡왕이 뭐라 뭐라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아 전질보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콰르릉!

놈의 면전을 앞두고 막 강기 다발을 퍼부어주려는데, 갑자기 굉음과 함께 물기둥이 가로막았다.

‘이름값은 하겠다는 건가?’

몸은 이미 피했지만, 그 뒤로도 수룡왕의 수강(水쾝)이 폭풍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제법 넓은 범위의 강기가 그물처럼 날 에워쌌지만, 날 잡기엔 좀 부족했다.

돌은 쪼갤 수 있고, 물은 담을 수 있다지만 공기라면 어떨까? 날 잡고 싶다면 개미 한 마리 통과시키지 못할 철궤를 가져다 덮어씌워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알아차려도 옴짝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철궤를 말이다. 천리종무영을 감안하자면 아마 한 변이 500장쯤은 돼야 할 것이다.

‘역시 공력으로는 비슷한 수준이군.’

수룡왕이 뿜어내는 강기는 내 구양신공과 상극이었다. 속성이 극성이니 절대적인 공력의 크기만이 우열을 가릴 수 있었다. 몇 번 열양강을 발출해봤지만 매번 우열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만을 보여 주었다.

그건 곧 내 경지가 이젠 최절정급에서도 최상급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럼 그만 놀고 대충 정리해야겠다.’

열양강은 강기 발출의 묘만 적용된다. 염(炎) 속성의 강기에 불과했다. 거기엔 보리금강저의 이득도 없었고, 심결육합권의 요결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금강저에 강기를 주입하고 심결육합권의 충자 결을 덧씌웠다. 그리곤 내질렀다. 어떤 변화도 주지 않았다.

폭풍 같은 수룡왕의 강기가 거칠게 내 주먹을 울렸지만, 겨우 잠깐 지체시키는 데 불과했다. 강기들이 종잇장 발겨지듯 산산이 깨져 나갔다. 이리저리 푸른 강기가 튀는 가운데 금강저가 묵묵히 뻗어나갔다.

콰콰콰콰쾅!

파열음이 사방을 울리는 가운데 천천히 전질보만 밟았다.

강기 다발이 연거푸 눈앞을 가로막았지만, 결국 시전자의 목숨을 지켜 주지는 못했다.

푹! 팍! 파캉-

금강저가 가슴을 꿰뚫고 왼 주먹이 관자놀이를 때렸다. 뛰어올라 무릎으로 복부를 후려치고, 돌아온 금강저가 다시 목을 찔렀다.

딱 한 동작이었다. 그 한 호흡에 수룡왕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놈은 꼴에 보스 몹이라고 무릎 꿇은 상태로 죽었다.

“그럼 그렇지.”

수룡왕이 죽어서 흘린 아이템은 세 개. 역시 최절정급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원하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놈이 걸치고 있었던 벽옥린갑(碧玉鱗鉀)이라는 갑주가 한 벌, 나머지는 이미 익힌 일격기 신법인 수상비(水上飛)와 대해수(大海手)라는 권갑이었다.

그 먼 길을 돌아온 고생에 비하면 썩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다.

“팔아서 살림에나 보태야겠다.”

그런데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한 후 뒤를 돌아본 난 조금 당황스런 상황에 처했다. 대체 언제 들어온 것인지 일반 유저들이 두 눈 동그랗게 뜬 상태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저들 중에도 자건처럼 통행령을 가진 사람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걸 깜빡했다. 시작하자마자 열여덟의 최절정급 몹들을 정리해버린 데다 오백의 수적들도 지금쯤은 거의 쓸렸을 테니, 그들이 더 이상 밖에서 구경할 까닭이 없어진 것이다.

“저 사람… 유저가 맞을까?”

“밖에 있는 사람들이랑 한패인 걸로 봐서는 유저가 맞긴 할 텐데…….”

“그게 말이 되냐? 보스 몹을 단방에 잡는 사람이 어떻게 유저야! 운영자가 뻔하다!”

난 운영자가 되었다.

‘후후.’

그들을 조용히 지나쳐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그들보다 늦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직도 백호단에게 목숨을 반납하지 않은 몇몇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몇 마리 채 되지 않았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곧 정리가 되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자건에게 다가갔다.

“그만 가지.”

“저, 아직 아이템을…….”

난 그냥 훌쩍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그에 백호단은 잡몹들이 흘린 아이템을 수거도 못한 채 날 쫓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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