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묵은 약속
이지러진 달은 차게 마련이다. 꽃을 피운 나무는 열매를 맺는 게 자연의 법칙. 인간세의 형편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겨울을 이긴 개구리가 땅을 깨고 나오는 것은 봄이라서가 아니다. 강물이 둑을 흘러넘치는 것은 꼭 장마철이라서가 아니다. 날이 따뜻해져 개구리가 나오고, 비가 많이 내려 강이 넘치는 것이지 그것이 꼭 정해진 시기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감숙성 돈황의 세외 세력 사황성의 침공 또한 그러했다.
개발사에서 정해두었던 시기는 아직 1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예정대로 흘러가기를 거부했다.
꼭 조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곤 할 수 없었다. 비록 조연의 계략으로 인해 조금 빨라진 감은 있지만, 어차피 모든 일이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흑룡 때문만도 아니었다. 가장 진실에 가까운 분석이라면, 강호의 핍박받던 일반 유저들과 대문파 소속 유저들의 깊은 골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황성 소속 무사들의 수효는 모두 십만. 흑룡은 그중 최절정급 NPC 기천명을 제하곤 모두 일반 유저로 메웠다. 구대문파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당파의 총 문도 수가 2만에 불과했으니, 사황성의 전투력은 여느 강호 문파들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흑룡은 기다리지 않았다. 조연의 소요파가 붕괴되고 가욕관 이남의 감숙성이 공동파와 구대문파에 점령당하자마자 진군을 시작했다.
아무도 그가 그렇게 빨리 결정을 내리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만큼 구대문파는 지리멸렬하게 패퇴했다.
공동파가 가장 먼저 쓸려 나갔다. 한 달 내내 공동파는 패배를 거듭했다. 조연의 계략으로 기세등등하게 새외(塞外)로 출진하던 그 호방함은 없었다. 자금력은 바닥을 드러내 NPC 무사들을 고용하지도 못했고, 유연한 전술을 보여 줄 유저들도 없었다. 결국 마지막 문파대전으로 공동파는 그간 쌓아둔 문파 명성을 모두 소진하고 문파 등급이 하락하고 말았다.
강호의 모든 일은 실력이 대변해준다. 그렇잖아도 구대문파의 말석에 불과했던 공동파는 문파 등급 하락으로 인해 여느 큰 중견 문파 수준이 되어버렸다.
참새가 창공에서 노닐 땐 호랑이를 부러워하지 않는 법이지만, 땅바닥에 떨어지면 개구리보다 못한 신세. 공동파 사람들이야 겨우 1등급 하락했다고 자위할 수 있겠지만, 밖의 시선은 그러하지 않았다.
무림맹은 공동파를 구대문파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남해의 해남파가 차지했다.
사황성의 진군은 공동을 무너뜨리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십만 마인이 섬서로 밀려들어갔다.
종남이 무너졌고, 그다음은 화산이었다.
화산이 연달아 문파대전에서 패했을 즈음엔 사황성의 천하가 도래했다고 미리 짐작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짐작일 뿐,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화산을 넘어 하남으로 곧바로 쇄도해갈 것 같던 사황성의 진군이 멈춘 것이다.
강호의 일반 유저들은 사황성이 하남의 무림맹을 붕괴시키길 바랐다. 그들에겐 허울만 정파일 뿐 온갖 서러움을 겪게 한 구대문파, 오대세가들이 일거에 쓸려 나가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흑룡의 행보는 끝내 섬서에 머무르고 말았다. 겨우 공동을 복속시키고 종남을 무너뜨리는 데에 그쳤다.
사람들은 외쳤다. 이건 배신이라고!
하지만 그게 배신이 될 것인가? 흑룡이 그들에게 약조한 적이 없는데도?
흑룡에겐 애초부터 천하 통일이니 천하제일문파니 하는 거창한 꿈이 없었다. 사황성의 중원 침공은 늘어난 문도 수만큼 영역을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그 내면엔 구대문파와의 추잡한 협잡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건 감숙, 섬서, 신강, 영하성 네 지역을 제패한 사황성은 당금 무림의 제일세(第一勢)로 등극했다.
사황성이 한바탕 혼란을 일으켜 주길 바랐던 일반 유저들은 좌절했다. 은근히 기대했건만 결국 또 하나의 대문파가 늘어났을 뿐인 데다, 사황성이 받아들일 일반 유저들의 정원도 차버렸으니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중소 문파에 들어가 봤자 대문파의 발싸개 취급밖에 받지 못할 게 뻔하고, 문파를 키우자니 소요파 꼴이 나버리고 말 텐데!
공교롭다면 공교로운 것일까? 아니면 개발사의 발 빠른 대응이었던 것인가? 실망하던 일반 유저들에게 희소식이 생겼다.
강호에 새로운 세력이 출현한 것이다.
고비사막에서 발원한 북막(北漠). 그리고 남만의 야수맹(野獸盟).
비록 유저들이 가입할 수 없는 NPC 세외 세력일 뿐이었지만 그들은 중원의 제 세력을 적대시했고, 그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세외 세력인 사황성마저도 적대시했다.
유저들은 즐거워했다. 비단 핍박받던 낭인들이나 중소 문파의 유저들만이 환호했던 건 아니었다. 강력한 도전에 처한 구대문파의 유저들 또한 이 도전을 새로운 활력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 세력의 출현은 대문파보단 일반 유저들에게 더욱 호기로 여겨졌다. 북막과 야수맹의 고수들을 쓰러뜨리면 꿈에도 그리던 절정, 최절정급 비급을 구할 수 있었으니, 혼란과 희망이 교차하며 강호를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소요파가 멸문하고 채 다섯 달이 가기도 전에 일어났다.
조연이 약조한 여섯 달은 이제 한 달이 남았을 뿐이었다.
* * *
운남성 곤명(昆明).
“어서 오십쇼, 손님!”
간만에 사람 말소리를 들으니 이것도 어색하다. 무인도에서 탈출한 로빈슨 크루소가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손님,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술을?”
간만에 사람을 봤으면 반가워야 할 텐데 귀찮음이 앞선다.
“일단은 요기부터 하지. 자리 있나?”
“물론입죠!”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탁자 하나를 대충 훔친다.
‘그래도 명색이 성도(省都)라 이건가? 대리(大理)하곤 또 수준이 다르구만.’
이제 깨끗하다는 듯이 활짝 웃는 점소이를 지나쳐 탁자에 앉았다. 그러자 점소이가 주문을 받겠다는 듯이 내 옆에 찰싹 달라붙는다.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말이다.
아주 귀찮아 죽겠다.
“우선 고노육 한 접시하고, 술은 뭐가 있나?”
“저희 승파루에선 후아주를 팔고 있습죠.”
후아주? 요샌 원숭이도 양식하나? 니눔 말을 곧이들을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그래? 그럼 그걸로 갖다 줘.”
점소이는 한 건 했다는 표정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승파루는 시골구석에 어울리지 않게 3층짜리 주루다. 그나마 1, 2층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곳 3층엔 날 빼곤 아무도 없었다. 3층의 입장료만 1만 냥이나 되니 누가 쉬이 올라올 생각을 하겠는가?
조용한 분위기 탓에 잠시 신산스러웠던 마음이 다시 차분해진다.
‘허 참! 요 몇 달간 혼자 싸돌아다니다 보니 이젠 사람을 기피하게 되는 건가? 슬슬 인간 세상도 적응하긴 해야 할 텐데.’
따분한 시간이 계속됐다. 점소이는 금세 요리와 술을 내놓고 다시 일을 보러 갔다. 용건이 끝났는지 더 이상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너무 빨리 왔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의 시간이 흘렀나 보다.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한다.
“누구?”
생뚱맞다는 내 표정을 읽은 낯선 사내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진다. 그런데 뒤틀린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제법 그다웠다.
“님아, 장난하셈?”
하하, 장난이 맞긴 하지.
“일단 앉으세요.”
장난은 여기까지다. 그는 가볍게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현운자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실처럼 강호에서의 생활도 사람들의 얼굴을 바꿔간다. 착하게 살면 착한 얼굴, 못된 짓만 하고 살면 나쁜 놈 얼굴이 된다.
지금 내 얼굴은… 글쎄? 벽촌만 떠돌다 보니 거울 파는 잡화점도 없더라. 그래도 아직 얼굴에 자신은 있다. 기본 골상이 어디 가겠느냔 말이다.
내 얼굴이야 그렇다 치고 간만에 만난 현운자는 정말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했다. 미리 통지를 받지 않았다면, 방금 전 인사를 건넨 이가 현운자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디서 무슨 고생을 했는지, 그 청수했던 모습이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제법 청아한 맛이 있던 도포와 도관이 사라지고, 다 해진 넝마와 구멍 난 갓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명백한 폐포파립(?袍破笠)의 행색이었다.
“잘 살고 있었나 보네요?”
관찰을 다 끝냈는지 현운자가 나직이 물어왔다.
“이렇게 편하게 산 적이 없을 정도로 잘 살았죠. 그러는 현운자 님은 어째 신색이 별로입니다?”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서 쫓겨난 놈이 잘 차려입고 다니면 욕먹습니다.”
그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일까? 예전 같았으면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로 하루 종일도 때울 수 있는 관계였건만, 반 년 만에 봤는데도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뭔가 대꾸가 있어야 함직한데 내 태도가 너무 조용하자 현운자 역시 안색이 흐려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때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요?”
‘그때? 서녕성에서의 그 일을 말하는 것인가?’
어쩐지 그런 것도 같다. 아니, 그 때문일 것이다. 허 참! 바로 그때 일 때문에 예상보다 더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인데도 잊고 있었다니!
도대체 나란 놈은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내 머릿속 의도와 또 달랐다.
“굳이 걸리고 자시고 할 껀덕지라도 있습니까? 물어봐도 대답 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얼른 잊어버리는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까칠한 놈이다.
그런데 버럭 화는 안 내더라도 은근히 비꼬는 태도 정도는 보여 줄 줄 알았던 현운자의 대응은 내 예상과 꽤 달랐다.
“그게 문제라면 여기서 풀어드리죠. 그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듣다 보면 의구심이 많이 풀리실 겁니다.”
“……!”
차분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죽 끓듯 복잡해지려고 한다. 귓가에 현운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선 제가 찾아온 이유부터 밝힐게요. 지금 강호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는 계신가요?”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 그 정세라는 것이 굳이 밖에 나가지 않고 홈페이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설마 그런 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북막과 야수맹 때문에 정신없는 상태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혹 제가 모르는 게 또 있나요?”
“그래도 귀는 안 닫고 살고 계셨네요.”
‘비아냥인가?’
현운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본격적으로 설을 풀기 시작했다.
“짐작하시다시피 북막과 야수맹의 출현은 사황성의 진군에서 야기됐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어요. 그 시기를 개발팀에서 결정한 게 아니라 강호의 메인 프로세서가 정한 거라는 걸요. 지금까지로 봐서는 썩 괜찮은 결정이었죠. 다들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그게 문제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IGM에서 메인 프로세서에게 너무 과한 역할을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음…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젠 조연 님도 아시다시피 전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절 대할 때 어느 정도 사람을 상대하듯이 태도를 취하죠. 강호 메인 프로세서도 그렇게 여기고 생각해보세요.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에는 능력도 봐야 하고, 성격이나 형편도 고려해야 하죠. 특히나 큰일을 맡길 사람에겐 도덕심은 기본적인 잣대가 되는 법이라죠.”
말이야 그렇지만… 섣불리 동조할 수가 없다. 뭔가 요상야릇했다. 그리고 난 강호 메인 프로세서를 단순한 인공지능이라고 판단하고 있지 않다. 그간 강호에게 얼마나 당했던가? 놈이 계산기 따위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칩시다. 계속해보세요.”
그 말에 현운자의 이마가 찡그려진다.
“이해 못하시는군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지금 공동파가 사황성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한 건 아시나요?”
응? 공동파가 구대문파 자리에서 축출당했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만, 하부 조직은 또 무언가? 봉문(封門)했던 게 아니란 말인가?
“전대 문주인 해광이 자리를 내놓은 게 전혀 이상하지 않나요? 더구나 그 자리를 유저가 차지한 게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 점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구대문파의 경우 유저가 고위직에 오르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고, 시기상으로 유저가 장문인을 승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유저라는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그 참마단주 두통도 아니고 난생처음 들은 주호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현운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이제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유저가 장문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죠. 아마 조연 님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장문인이 된 사람은 그동안 적대했던 사황성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당장 급한 건 생존이니까요. 하지만 그 유저가 말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말입니까?”
어쩐지 짜증나는 대답을 듣고 말 것 같다.
“주호라는 캐릭터는 강호의 분신이라는 겁니다. 메인 프로세서 강호의 분신이요.”
‘허…….’
도대체가… 도대체가… 이놈의 게임은 뭐가 이렇게나 복잡하단 말이냐!
“메인 프로세서가 유저들처럼 위장해서 강호 플레이를 한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놀람에 앞서 어이가 없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습니까!”
“다르죠! 전 메인 프로세서가 아니라 서브 프로세서일 뿐인 걸요. 초기엔 그나마 오류를 수정하거나 퀘스트를 만드는 역할을 맡긴 했지만 지금은 할 일 없는 백수 신세나 다름없죠. 딱히 강호에 변화를 줄 사람이 못 된단 말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유유자적 강호행을 즐길 수도 있고 말입니다.”
역시 어이가 없다. 인공지능 주제에 재미를 느끼다니.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다. 이 궁금증을 다 풀려면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불가능할 것 같다.
“저 머리 나쁩니다. 더구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라는 것도 압니다. 그만 정리해주시죠.”
현운자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오래전에, 절 처음 봤을 때 말입니다… 혹시 기억하세요?”
“뭘요?”
“…언젠가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잖아요.”
기억하지. 지금 눈앞의 현운자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그 진진이 했던 말인데.
원래 미녀와의 대화는 뇌리에 깊이 박히는 법이다.
“지금이 그때입니까?”
“네.”
어차피 빚이었다. 진진은 끝내 내 실력으로 얻은 신안이라고 했지만, 별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이렇게나마 꺼림칙했던 문제를 풀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머뭇거리던 현운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단호하게.
“전 강호 메인 프로세서와 같이 존재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녀석을 이겨 주세요. 그게 제가 조연 님에게 바라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런 요구라니? 일개 유저인 내게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무찔러달란 소리지 않은가!
“지금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답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메인 프로세서로서의 그가 아니라 지금 주호라는 캐릭터로 변해 있는 그 강호를 말하는 거예요. 그 주호라는 캐릭터만 파멸시키면 되는 겁니다. 방금 전에 말했듯이 지금 강호가 하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아요.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또 분신을 만들어서 강호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죠. 균형이란 말… 실감이 가세요? 수십, 수백만의 유저들이 해야 할 역할을 그 혼자서 결정하겠다는 거죠. 엄연히 개발사와 유저들 간에는 서로의 영역이 있는 법인데 유저들의 몫까지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강호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이유뿐입니다. 그의 착각을 깨는 일은 주호를 파멸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믿고 싶을 정도로 그럴싸한 말이었다. 내가 만약에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전직 장사꾼이 아니었다면 깜빡 속을 뻔할 정도로 그럴싸했다.
게임의 밸런스를 맞춘다는 건 모든 게임 개발사에서 고심하는 부분이다. 개발진에서 예상하고 환경을 조절한다고 해도 막상 게임 속에서 어찌 될지는 일단 지켜봐야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호 메인 프로세서는 그걸 전후, 양 방면에서 관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컴퓨터가 하는 일이니 전에 비해 얼마나 더 철저하겠는가? 그게 과연 나쁘다 할 수 있는 일일까? 유저의 몫? 그런 게 어딨는가. 현운자는 이곳이 무슨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바깥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일은 일.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단순히 이기는 수준이 아니라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파멸을 원하는 거지요?”
“네, 그렇게 해야죠. 두 번 다시 게임 속까지 관여하지 못하게 말입니다.”
웃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의 속마음은 퍽이나 흡족할 것이다.
어쨌든 이걸로 됐다. 어차피 주호가 몸담고 있는 공동파는 내가 가장 먼저 복수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게 진진에게 진 묵은 빚을 해결하는 일이기도 하니 참 일이 편하게 됐다.
현운자는 이번 일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미리 준비해온 계획도 몇 가지 있었고,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수준은 되었다. 아무래도 강호라는 녀석은 그가 더 잘 알 테니 말이다.
몇 가지 자잘한 것까지 입을 맞추고서야 대강의 계획이 현실성 있게 바뀌었다. 현운자도 만족스러운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이대로만 한다면 가능성이 있겠네요.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세요?”
당신 말대로 가능성에 그칠 것이다. 어찌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움직이고 싶지만 그럴 순 없겠네요. 하여간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움직이도록 하죠.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소요파로 복귀하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그가 돌아올지 안 올지는 이제 기약할 수가 없게 됐다. 많은 걸 드러내버린 이상 이전 관계로 쉬이 돌아갈 것 같지가 않다.
“봐서요. 확답을 할 순 없는 문제 같네요.”
그래, 해줄 수 있는 말은 그 수준밖에 되지 않겠지. 그럼 이제 일어나자. 볼일은 끝났으니.
“그럼 또 보길 바라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승파루를 나왔다.
바야흐로 나도 이젠 정리를 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진진에게 다른 속뜻이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 비밀이 내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다.
“뭐,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겨우 게임에 불과한걸. 우선은 그놈이나 잡고 생각하자.”
운남에서 볼일은 끝났다. 몸을 띄워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