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반도 복숭아
사냥 방법은 꽤 귀찮았다. 단 몇 번의 공격을 위해 왔다 갔다 하는 시간만 십 분이나 됐다.
하지만 짜증을 부릴 수도 없었고, 단순한 사냥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이곳이 아니면 대체 어디서 맘 편히 사냥을 할 수 있겠는가?
다른 곳을 찾아다닐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설령 다른 사냥터를 발견한다고 해도, 못해도 이곳 녀석들만큼 셀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나마 원숭이들의 도움 속에 안전한 사냥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우호도는 꾸준히 떨어지고, 또 꾸준히 올랐다. 어린 설삼들보다 고령의 설삼들을 잡을 때 백원족과의 우호도는 크게 올랐고, 또 그만큼 설삼족과의 우호도는 크게 줄었다.
설삼들은 예상대로 아이템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원래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탓인지, 아니면 아직 풀리기엔 너무 고급의 아이템이라서 봉인해둔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지금 내게 급한 건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경험치는 중원의 다른 곳에 비하면 눈에 띄게 좋았다. 확실히 달랐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천사교의 호교신장 정도의 경험치를 주었다. 덕분에 두 번의 사망으로 인한 레벨 하락을 복구하는 데는 보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벨 업에 비해 무공 숙련치를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공 숙련도는 사용 빈도수에 따라 증가했기 때문에 단순히 무진 몇 번 사용하는 걸로는 별 성과가 없었다. 겨우 반야신공이나 심결육합권, 유운신법 정도만 꾸준히 수련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더 이상 날 찾아오는 유저들도 없었고, 홈페이지에서도 별다른 내용은 볼 수 없었다. 소요파 문주 조연이란 인물은 잊힌 인물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을 즈음엔 설삼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백원족과의 우호도가 어느 정도 오르면 퀘스트가 출현하거나 다른 무언가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탓이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한 달이나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졌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곤륜설삼(7982)이 죽었습니다.]
[곤륜설삼족과의 우호도가 하락했습니다. -178,190]
[백원족과의 우호도가 상승했습니다. +10,002]
[레벨이 429에서 430으로 상승했습니다.]
“휴! 드디어 1만 점 돌파했네.”
8천 년 묵은 놈이라서 그런지 우호도랑 경험치를 많이 먹었다.
돌산 아래엔 이젠 익숙하다 못해 징글맞을 정도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마친 난 설삼 두 마리를 더 잡고서야 간만에 천원을 만나러 갔다.
우호도의 비밀은 아직도 풀지 못했다. 일천 점이 쌓일 때마다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천원의 장광설만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것 같다.
무려 한 달 동안 죽치고 사냥만 했다. 그런 노력으로 1만 점의 우호도를 쌓았다. 이런 노력을 아무나 할 수는 없을 테고… 더구나 1만이라는 숫자는 얼마나 의미심장하냔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천원은 내 기대에 부응해줬다. 한 달 만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여느 때처럼 동굴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푸른 원숭이는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푸른 털이 듬성듬성 빠진 데다 눈엔 진물이 흘렀다. 얼굴도 기괴하게 변하고 빨간 반점이 몸 구석구석에 피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쿨럭! 쿨럭……. 오! 일수경천… 친우가 왔구먼……. 미안허이. 온다는 전갈은 받았는데 지금 내 몸이 이래서… 마중 나가지 못했네…….”
‘아주 쇼를 해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팔팔했던 녀석의 연기를 보아주는 건 별로 즐겁지 않다.
그래도 맞장구를 쳐줘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 변화라는 건 좋은 것이다.
“천원!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갑자기 무슨 병에 걸린 것입니까?”
“쿨럭, 쿨럭! 오랜 지병이 심해진 것뿐이야. 그리 걱정하지 말게. 원숭이 수명은 하늘이 정해주는 법. 그냥 이대로 가면 되는 것이야. 이대로……. 다만… 후대를 남기지도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군……. 내 숨이 십 년만 더 길어도 새 천원을 키울 수 있는데… 이렇게 죽어서 어찌 조상님들 얼굴을 뵐지…….”
슬슬 퀘스트가 나올 조짐이다. 물론 내가 장단을 잘 맞춰야 했지만.
“살 방도가 있는데, 회피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천원! 그대가 살 수 있는 방도가 정녕 없습니까! 있다면 내가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쿨럭… 쿨럭……. 정녕 그래줄 수 있는가…….”
정말 퀘스트였다. 우호도 1만 점을 달성 시 발생하는 퀘스트.
퀘스트 정보창이 떠올랐다.
[퀘스트:반도 복숭아
도전 제한:백원족과의 우호도 +10,000
주의 사항:재도전 없음. 1달 안에 해결해야 함.]
[‘퀘스트:반도 복숭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네!”
승낙을 하자 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병은 평범한 방법으론 고칠 수 없다네. 오직 서왕모 님의 궁에 있다는 반도라는 복숭아만이 날 살릴 수 있다네. 그걸 가져다주게나.”
서왕모… 미치겠다. 거기에 신들의 음식이라는 반도라는 복숭아라니!
서왕모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번 퀘스트의 난이도가 특급이라는 걸 즉각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구해다주려고 해도 그곳이 어딘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죠. 그런데 난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곳을 모릅니다. 혹시 그대는 알고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네. 하지만 알 만한 녀석은 알지. 백택을 찾게. 그자는 여기서 북서쪽으로 백 리쯤에 있는 항산이라는 곳에 있다네.”
‘백택(白澤)?’
강호에서 주는 퀘스트는 여타 게임에서처럼 플레이어가 손쉽게 해결 가능한 그런 퀘스트는 전혀 없었다. 일단 퀘스트를 받기도 힘들었지만, 또 그걸 해결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내가 용문객잔 퀘스트나 심결 퀘스트를 완벽하게 클리어한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힘들긴 했지만, 물론 그만큼 클리어했을 때의 보상이 꽤 좋았기에 난 바로 반도 복숭아 퀘스트를 승낙했다.
하지만 이대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퀘스트 정보엔 분명 한 달 이내에 클리어하라고 했다. 단시간에 끝나는 퀘스트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곤륜산을 하산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천성 성도로 향했다. 난주보다는 성도가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도의 황금전장에 맡겨 둔 아이템을 되찾았다. 보리금강저와 환혼신단, 소림 소환단 같은 아이템들을 말이다. 그렇게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시 곤륜산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조연이란 인물은 이젠 완전히 관심 밖의 인물이 된 것인지 어떤 귀찮음도 없었다.
곤륜산 백원족 마을을 다시 찾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항산(抗山)이었다.
천원은 항산의 위치만 말해줬을 뿐이지, 항산의 모양새가 어떻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백 리쯤이라는 거리는 또 어떻게 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지도도 없고, 거리를 잴 줄자도 없는데 백 리쯤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열심히 헤매보라는 말이었다.
이 봉우리가 항산 같고, 저 봉우리도 항산 같았다. 퀘스트 기간이 왜 한 달이나 되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닷새를 헤매고서야 드디어 백택이라는 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땐 백택이라는 놈의 정체를 인터넷에서 알아둔 상태였다. 놈이 전설에 나오는 신수(神獸)라는 걸 말이다.
백택의 생김새는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희고 긴 털을 가진 사자였다. 다만 눈이 8개였다.
“무슨 일이지?”
산중턱에 교묘하게 숨겨진 바위 동굴을 운 좋게 찾아 들어가자, 백택이 거만하게 물어왔다.
정말 거만했다. 뒷발로 귀를 후비적거리는 모습이 날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택 님. 백원족 족장 천원의 소개로 왔습니다. 지금 그는 몹쓸 병에 걸려서 오직 서왕모의 궁에 있다는 반도 복숭아만이 유일한 약이라고 합니다.”
“크큭, 크크큭!”
백택이 갑자기 앞발 두 개를 모아 입을 가리더니 웃어버린다. 천원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오히려 죽음을 고소해하는 분위기라니?
한참을 웃어댄 백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죽을 놈은 죽어야지. 그런데 죽을 놈이 살겠다고 하고, 그 말을 또 들어주겠다는 사람이 생겼군그래? 세상일은 참 공교로운 법이야. 매번 그렇지. 그래도 이번 건은 너무 재밌군그래.”
혼자 헛소리를 해대는 백택이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서왕모의 궁궐이 있는 곳을 압니까? 천원은 당신이라면 알 것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알 것이라고가 아니라, 분명히 알지.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도 있던가? 이 백택 님이?”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놈이었다. 어째 이 곤륜엔 정상적인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단 말인가.
“그런데 말이야, 자넨 참 오지랖도 넓군그래.”
점점 가관이다. 이젠 짐승한테 인간이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알려 줄 겁니까? 말 겁니까?”
어차피 알려 줘야 한다. 그래야 퀘스트가 성립되니까.
“알려 줘야지, 물론. 그런데 맨입으론 안 되지. 좋아! 천원이가 자네를 이용했으니 나도 한번 자네를 이용해보지. 내 요구만 지켜 주면 기꺼이 알려 주겠어. 어때? 할 건가? 이런, 이런. 자네 입장에선 당연히 할 수밖에 없겠구먼.”
저놈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다.
혼자서 북과 장구를 다 치고 난 백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개명수(開明獸)라는 놈이 있어. 그놈 모가지를 베어와. 그럼 알려 주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참 번거롭게 한다.
“개명수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 주고나 잡으라고 해야죠! 그리고 놈이 어디에 있는지도요!”
“하긴 나하고 달리 자넨 모르는 게 많지. 미안허구만.”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다. 놈은 또 뒷발로 귓구멍을 후비고 있었다.
“생긴 건 나랑 좀 비슷해. 나보다 키가 좀 작고, 털도 희지. 다만, 그놈 대가리가 아홉 개야. 어때? 확실히 알겠나?”
대가리가 아홉인 백택. 확실히 알았다.
“위치는요?”
“몰라. 알면 내가 잡으러 갔지. 그럼 가보게나.”
끙! 역시 괜히 한 달짜리 퀘스트가 아니었다.
백택의 동굴을 나왔다. 그런데 갈 데가 없었다. 백택은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았다.
“돌겠구만. 차라리 직접 서왕모 궁궐을 찾는 게 더 빠르겠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퀘스트에서 중간 단계를 건너뛰면 퀘스트 진행이 안 된다.
그래도 믿을 놈은 천원밖에 없었다.
다시 백원족 마을로 돌아가 천원을 만나봤지만, 천원은 백택보다 아는 게 없었다. 개명수란 놈의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고 한다.
별수 없었다. 나 혼자서 머리 아홉 달린 백택을 찾아야만 했다.
다시 지루한 탐색이 계속됐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런 퀘스트나 하고 있을 때인지 회의가 들 정도로 성과는 없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허송세월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내 발길이 안 닿은 곤륜산 봉우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백택의 의뢰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다시 그놈을 만났다.
“응?”
이젠 제법 곤륜의 눈 덮인 산에도 익숙해져서 흰 물체라도 곧잘 찾아낼 정도였다. 그 익숙해진 눈에 하얀 짐승의 움직임이 걸려들었다.
흰색이 아니라 은색에 가까운 녀석. 녀석의 움직임은 예전에 한 번 봤던 놈과 흡사했다.
그때 그 설표였다.
“설마?”
설마가 맞을지도 모른다. 놈의 면상을 확인한 적은 없었으니 머리가 아홉 개인지 일곱 개인지 어찌 알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직감으론 놈이 개명수임이 분명했다.
세상에 어느 평범한 NPC가 저놈처럼 넓은 행동반경을 가질 것이며, 저렇게 도망만 치겠는가? 놈이 평범한 몹이었다면 내가 가까이 가면 무조건 달려들었어야 했다. 그게 진정한 몹의 자세였다.
저놈의 움직임이라면 이미 익숙하다. 만약 개명수라면… 내 신법으론 절대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난 원래 잔머리꾼이다. 그때야 겨우 설표 따위에게 무진을 날렸다가 다른 몹에 당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럴 순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요 부근에 몹이라곤 한 마리도 없다.
반대편 봉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설표인지 개명수인지 모를 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거리가 상당했던 탓에 놈은 내가 다가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곧 삼백 장에 다다랐던 거리가 백여 장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놈을 타깃으로 찍자마자 바로 무진을 발출했다.
슈웅!
‘됐어!’
무진이 발출될 때까지 녀석은 곧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죽게 된 것이다.
곧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고, 놈이 쓰러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운기를 끝내고 곧장 녀석에게 다가갔다.
“역시… 이놈이 그놈이었네.”
놈은 개명수가 맞았다. 무진에 당한 놈은 머리가 잘려진 채로 눈 위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개명수의 머리통은 큰 머리통 주위에 작은 머리들 여덟 개가 붙어 있는 형상이었다. 특별히 아름답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았다. 그냥 불량품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개명수의 머리’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놈 렙이 나보다 낮은 건가? 아니면 보스급이 아닌가?”
내심 새로운 별호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어쨌든 좋다. 일주일이나 걸렸지만, 일단은 순조롭다.
“에잇, 찌질한 놈 같으니.”
“가지고 왔습니다.”
“호오! 인간! 제법 쓸 만한걸!”
개명수의 머리를 들이밀자 백택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즐거워했다.
“좋아좋아! 아주 좋아! 이렇게 빨리 의뢰를 해결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네. 흠, 자네 소원이 뭐라고? 아차아차, 진곤륜(眞崑崙)에 가고 싶다는 거였지? 일단 잠시 기다려 주게.”
백택은 속사포처럼 시끄럽게 말을 내뱉더니 자세를 돌려 날 등졌다.
‘진곤륜? 혹시 그곳이 전설의 곤륜을 말하는 것인가?’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곳이니 맞을 것이다.
“자, 됐네. 따라오게나.”
다시 자세를 달리한 백택을 보고 난 뒤집어질 뻔했다.
‘이런 미친 개발자 같으니…….’
백택은 제 머리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개명수의 머릴 붙여 놓은 것이다.
백택은 느린 발걸음으로 동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 뒤를 따랐다.
“그 머리는 대체 뭡니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어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백택이 대답했다.
“난 개명수 이놈이 정말 맘에 안 들었지. 엄연히 신수(神獸) 서열로 봐도 내가 더 등급이 높거든. 그런데 이놈은 눈이 무려 18개야. 말이 되나? 천지간에 모르는 일이 없는 이 백택 님도 겨우 눈이 8개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야.”
미치겠다. 그런 이유라니…….
뭐,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라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살짝 개명수가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이미 죽은 놈은 죽은 놈일 뿐이다. 그저 묵묵히 백택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개명수랑 털빛도 몸도 비슷한 놈이 머리통까지 같다면 이놈은 백택인가, 개명수인가?’
고민은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저놈이 해야 할 것이다.
‘무슨 퀘스트가 시간 잡아먹는 데는 선수네.’
백택이 날 끌고 다닌 지도 벌써 네 시간이다. 그렇다고 느리게 달린 것도 아니다. 내가 겨우겨우 감당 가능한 속도로 달린 게 네 시간이었다. 백택은 꾸준히 북서쪽 방향으로 달렸다.
이놈이나 개명수나 달리는 일에는 타고난 녀석들이었다. 백색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은 애완견으로 삼고 싶을 만치 멋있었다.
곤륜의 설봉(雪峰)을 한 백여 개쯤 넘었을 것이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니만 결국은 청해성을 벗어나고 말았다.
[서장에 진입합니다.]
서장이라면 중국이 아니다. 애당초 다른 나라. 별무리 없이 통과가 가능한 걸 보니 진입 조건은 충족했던 것 같다.
서장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대략 두 시간을 더 달려야 했다. 장장 여섯 시간에 걸친 질주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다.
그러다 드디어 백택의 발이 멈추고는 녀석이 입을 열었다.
“여기다, 인간.”
백택이 고개를 들어 가리킨 곳은 곤륜산에 들어오고 나서 본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인간들에겐 목자탑격산(木孜塔格山)이라고 알려진 곳이지. 우리들 말로는 진곤륜이고 말이야. 따라와. 아직 조금 더 가야 한다.”
백택은 목자탑격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산의 7부 능선쯤에 이르자 드디어 진곤륜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는 바위에 가려 있었다.
바위 앞에 도착한 백택이 갑자기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몇 번 캑캑거리더니 입에서 보주(寶珠)를 토했다.
참 가지가지 한다.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는 보주는 일종의 출입패였나 보다. 보주를 입에 문 백택을 보고는 바위가 그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밀렸다.
대체 누가 여기에 그 진곤륜인가 하는 곳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 진곤륜은 퀘스트가 아니라면 백만 년을 보내도 절대 못 찾을 곳이었다.
“난 이만 간다. 나올 때는 안쪽에서 손잡이를 밀면 된다. 천원이라는 놈은 맘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성공하길 바라마.”
사라질 때는 제법 싹수 있는 말을 하고 가는 백택이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려 진곤륜으로 들어갔다.
진곤륜은 환상의 공간이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산의 내부, 땅속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광활한 대지와 강과 호수, 그리고 푸른 하늘이 있었다. 남쪽의 따뜻한 풍토에나 어울릴 법한 화려한 난초나 수국 따위가 온 들판을 수놓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지하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무릉도원이려나, 선계이려나…….
거기에 이것들이 죄다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엔 용과 봉황이 노닐고 있었다. 저기서 꽃잎에 머금은 이슬을 먹고 있는 건 기린이었고, 해태는 방금 전 지나간 백택 같은 녀석과 뒤엉켜 놀고 있었다. 움직이는 건 신수(神獸)였고, 움직이지 않는 건 기화요초가 아니면 금은 보주였다.
“뭐 하나만 들고 가도 일 터질 곳이구먼.”
성급한 행동에 후회 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더구나 보이는 것들이 죄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라서 감히 손이 뻗치지도 않았다.
다행히 궁은 찾기 쉬웠다. 저 멀리, 까마득히 먼 곳에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궁궐이 보였다. 높이는 얼마나 높은지, 그 넓이는 또 얼마나 거대한지 족히 수십 마장은 될 것 같은 거리인데도 또렷이 보였다.
“일단 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신수들은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았다. 나도 몸조심을 했다. 지금 실력으로 어찌 해태나 기린 같은 애들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난 내 비천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진곤륜 입구 앞에는 작은 강이 하나 가로놓여 있었다. 문제는 강에 다리가 없다는 것.
신수들은 워낙에 급이 다른 놈들이라 그 강을 자유자재로 오고 갔지만, 인간의 몸인 내가 그런 신위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강에 몸을 담가봤지만 이런, 제길! 빠져 죽을 뻔했다.
“이거 참, 설마 이 퀘스트… 허공답보를 할 수 있는 고수급만 도전 가능한 거였나?”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아무리 개념 없는 개발자라도 허공답보 같은 사기 무공을 집어넣을 리는 없다.”
일단은 혹시 발견하지 못한 장치가 있는지 둘러보기로 했다. 혹시 아나? 방문객을 위한 도개교가 설치되어 있을지 말이다.
물론,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한 번 둘러보고 또 한 번 둘러봤지만, 터럭만큼도 의심스런 물건이나 장치는 찾지 못했다.
“돌겠군.”
아마 그놈은 알고 있을 것이다. 개명수 머리를 달고 있는 그 백택이 놈은 말이다. 제 놈 입으로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고 했으니.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이거 순 악질이네. 알면서 안 가르쳐 줘 놓고는 뭐, 성공하길 기원한다고?”
놈은 아마 속으로 한껏 비웃고 있겠지.
그렇다고 당장 쫓아가서 물어볼 수도 없다. 답을 알았다고 해서 놈이 다시 진곤륜 입구를 열어준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짓 했다간 또 비웃음만 당하고 말 것이다.
시간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간다.
‘저놈들은 잘만 다니네.’
날개 달린 주작, 봉황이야 그렇다 쳐도 육지동물인 해태나 기린이 강물 위를 땅 밟듯이 지나가는 게 꽤나 밉살스럽다. 크기도 나보다 더 큰데 말이다!
한동안 이름 모를 나무에 몸을 기대 신수들을 구경했다. 지금 여기서 보지 못하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다시 올 수 있더라도 아주아주 먼 훗날이거나, 아니면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 정말이지 그래픽 하나는 업계 최고다. 저 색감, 저 몸놀림!
기린의 걸음걸이는 능파선녀의 그것 같고, 봉황의 날갯짓은 구천현녀의 춤사위를 보는 것 같다.
그렇게 한 삼십 분을 화려한 그래픽에 취하다 보니 슬슬 다시 의욕이 솟구쳤다.
‘아직 자세히 쳐다보지 못한 게 있을 것이다! 이번엔 백사장에서 바늘 찾듯이 철저하게 해야지!’
의기소침을 떨쳐 버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수색에 나섰다.
이번엔 수상쩍은 바위나 돌 따위를 일일이 두드려 가면서 느릿느릿 꼼꼼하게 조사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 날도 수색은 계속됐다. 한번 하다 지치면 신수들 노니는 걸 구경하다 다시 수색했다. 지루하고 짜증났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위험에 처해 죽기라도 한다면 포기할 수 있다지만, 겨우 이런 상황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분명 이 안에 힌트가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안에 무언가가 저 다리를 건너게 해줄 것이다.
진곤륜에 들어온 이후 첫 번째 변화는 수색 사흘째 되는 날에 벌어졌다.
끼익! 끼익-
우르르릉-
여태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째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었다.
“왔다, 왔어!”
“다들 준비해!”
소음은 무슨 특별한 징조였던 걸까? 신수들이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엉켜 놀던 해태나 기린이나, 혹은 창공을 노닐던 용이나 봉황이나 할 것 없이 일사불란하게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뭔 일이지?”
내 눈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특별한 침입자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신수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끼익- 끼익-
다시 또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게 문젠가?”
저 멀리 하늘에서 용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다만, 여태 보아왔던 다른 용들과 달리 그놈에겐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게 특별했다.
비룡(飛龍), 혹은 응룡(應龍)이라고 불리는 신수였다.
정말 그놈이 문제였던 것 같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신수들은 응룡이 도착하자 놈과 어울려서 싸우기 시작했다.
번쩍! 번쩍!
우르르릉! 콰앙!
슈아아아악-
현란하고도 스펙터클한 이펙트가 연이어 터졌다.
공중전이었지만 지상의 신수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백택은 무슨 버프 마법을 거는 것 같았고, 기린은 도약을 해서 공격했다. 해태는 입에서 백색 광선을 쏘아댔다.
숫자상으론 일 대 삼십의 전투였다. 하지만 응룡은 거의 일당백의 고수 같았다. 삼십이나 되는 신수들의 합공에도 놈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주작 한 마리가 응룡의 공격에 날개가 뜯겨 추락했다. 응룡의 다음 공격은 무시무시한 독공이었다. 놈의 주둥이가 열리자 짙은 녹색의 독무(毒霧)가 흘러나와 지상을 뒤덮었다.
한순간에 지상의 신수들 반이 전멸해버렸다. 응룡은 차원이 다른 신수였다. 나도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그 독무에 몸이 녹아버렸을지도 몰랐다.
단 몇 분 만에 신수들은 반 토막이 나버렸다.
‘혹시 저놈이 힌트인 건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저놈을 잡는다고 해도 강에 다리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저놈은 너무 셌다. 이건 신수가 아니라 거의 신(神)이라고 불려도 될 것 같았다.
무진이 아무리 대단한 기술이라고 해도 감히 저놈을 상대로 시전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괜스레 건드렸다 쪽박 찰 소지가 다분했다.
응룡의 일방적인 승리가 점쳐졌다. 난 거리를 더 두어야 했다. 신수를 전멸시킨 놈의 눈에 띄어봤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곤륜엔 꼭 신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요 앞에서만 놀다 보니 잠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신수들만 보았지, 곤륜에 살고 있다는 그 신들은 보지 못한 상태였다.
아스라이 보이는 서왕모의 궁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응룡을 향해 날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허, 가지가지 하는구먼.”
날아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검선(劍仙)이라고 해야 했다. 궁에선 세 명의 도사가 왔는데 그들은 모두 검을 타고 날아다녔다. 전설 속 검선 여동빈이 저런 신위를 보일까?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 주던 응룡도 세 검선들이 도착하자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 못했다.
크아앙!
응룡이 창룡음과 함께 독무를 뿌리고 꼬리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독무는 백색 광선에 당해 소리 없이 스러져 버렸고, 응룡의 꼬리 공격은 애꿎게 허공을 때렸다.
세 신선들은 놀라운 속도로 공간을 점령해갔다. 신선들 앞에서 응룡은 발가벗겨진 꼴이었다. 놈은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은 제법 날카롭게 반항을 하던 응룡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말았다.
검선들은 그런 응룡의 뒤를 쫓았다.
살아남은 신수들은 감히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축 늘어져 기력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한 편의 멋진 애니메이션을 본 기분이었다.
“흠, 뭔가 재밌는 뒷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말해주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대책 없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더 이상 여기서 죽쳐 봤자 뾰족한 수는 나올 것 같지 않고… 일단 저기로 가봐야 하는 건가?”
응룡이 도망친 곳은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었다. 거기에 산 정상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화산이 분명했다. 여태까진 입구에서 꽤 먼 곳인 데다, 강가에 접해 있지도 않아서 눈길조차 보내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등장인물이 출현하고 또 그쪽으로 사라졌으니 일단 살펴는 봐야 할 것이다. 응룡은 아마 검선들이 잡아갔을 테니, 위험도 없을 것이다.
맘 편히 화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때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일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내 경우가 딱 그 꼴이었다.
응룡의 화산으로 가는 길은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제법 멀었다. 경공을 시전해서 한 시간을 달렸는데도 겨우 반 남짓밖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진곤륜 계곡 입구와 응룡의 화산의 딱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다. 바깥세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진곤륜에선 그렇지가 않았다. 기화요초는 눈에 밟힐 정도로 많은 이곳이었지만 나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구나 나무에 달린 열매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마치 푸른빛을 발산하는 야명주 같았다.
더구나 나무에 이름까지 달려 있었으니…
<사당목(沙棠木)>
“이걸 안 따면 바보겠지.”
이름 달린 나무는 강호에서 처음이다. 응룡에게 기대하기보다는 이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지금의 정체된 상황을 벗어나기엔 말이다.
푸른 과실에 손을 뻗자 열매가 바로 스르르 내 손으로 건네졌다. 그리고 메시지가 올라왔다.
[사당목 열매를 1개 획득했습니다. 명성이 100 하락합니다.]
‘뭐, 겨우 100쯤이야.’
차라리 뒤통수치는 페널티보다는 이쪽이 한결 마음이 놓인다.
이어 아이템 정보창을 열었다.
[사당목 열매
곤륜산에만 산다는 사당목(沙棠木)의 신비한 열매.
사용 효과:10분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쩝. 이렇게 간단한걸.”
허탈하다. 알고 나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 고생을 하다니……. 이래서 선구자들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인가.
이제 강을 건너는 방법을 알았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얼른 퀘스트를 끝내고 다시 레벨을 올리러 가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사당목 열매를 먹고 강을 건넜다. 비록 잠깐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난 강호 최초로 일위도강(一葦渡江:달마가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넜던 고사)을 선보인 사람이 되었다.
한 시간가량을 달리자 궁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궁엔 문지기도 없어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서 들여다본 서왕모궁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눈이 부셨다. 주춧돌부터 기와에 이르기까지 보옥이 아닌 게 없었다. 심지어 정원의 연못에 담긴 물은 금 녹인 물 같았다.
또한 정원수로 쓰이는 나무들은 모두 이름이 달려 있었는데, 나무마다 신기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분명 사당목과 같은 특수 효과를 주는 열매일 것이다.
물론 손을 대지는 않았다. 밖에 있는 사당목이야 주인이 없는 것이지만, 이 안의 물건들은 엄연히 임자가 있는 것들이었다.
정문 바로 안쪽은 정원이었고, 정원을 지나면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어떤 인간들이 살고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궁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중간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큼지막한 분홍빛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였다. 나무 이름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드디어 반도 복숭아를 발견한 것이다.
“쩝.”
당장 따도 됐다. 퀘스트 아이템이니 혹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흘리진 않을 것이다.
“다음에.”
서왕모궁에 들어설 때부터, 아니 진곤륜에 발을 들일 때부터 이미 지뢰밭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여태 조심해왔는데 섣불리 움직여서 괜히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지난날 제천대성이 이 복숭아 하나 손댔다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난 알고 있었다.
혹, 나중에 잘못되면 그때 가서 도둑질을 하면 될 일이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선녀들이라고 해야 하나?
천의(天衣)는 무봉(無縫)이라는 말처럼, 궁의 시녀들이 걸친 날개옷은 도저히 인간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
범상치 않은 복장을 한 시녀들 주위엔 선계의 신장(神將)이나 신선, 도사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상하네? 서왕모가 산다는 곳은 여인들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전설에 의하면 그랬다. 아무리 신선들이라지만 남자들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시녀나 도사들이나 모두 날 무시했다. 나도 처음엔 그들을 무시했지만, 결국은 누구 하나 잡고 물어봐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아무래도 반도 복숭아를 내 맘대로 가져갈 순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궁의 주인인 서왕모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그런데 서왕모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 양반이 말 걸기가 좀 편하겠군.’
선녀들을 상대로 담화를 나누고 있던 도사 둘이 있었다. 다행히 그 둘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도교팔선 중 여동빈과 종리권이 그들이었다.
“순양 진인, 일이 있어 발을 들인 속인입니다. 혹 제게 서왕모 님이 거처하시는 곳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여동빈의 호는 순양(純陽)이다.
시녀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여동빈이 날 쳐다보았다. 종리권도 이게 웬 인간인고? 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어렵게 온 사람이군. 어려운 일도 아니지. 따라오시게나.”
내가 운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 동네 NPC들은 다들 친절한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운 좋게 여동빈의 안내를 받아 편하게 서왕모의 거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의외로 서왕모는 대전에 있지 않았다. 여동빈은 날 데리고 궁의 뒤편으로 나갔다. 그리고 후원(後園)을 가로지르고, 또 작은 동산 하나도 건넜다.
그곳엔 9층짜리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항주에 있다는 육화탑같이 생긴 건물이었다.
“제일 위층에 있으니 올라가 보시오.”
여동빈은 거기까지라는 듯 총총히 사라졌다.
복숭아 하나 가져가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다행히 9층 전각에서도 특별한 제지를 받지는 않았다.
마지막 층까지 올라가자 드디어 서왕모를 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여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서왕모의 미모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엔 호박으로 만든 주렴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 인간, 무슨 일로 날 찾았는가?”
진기가 충만한 소리라고 해야 할까? 강단이 묻어나는 여성의 목소리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지금까지 겪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부 풀어냈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끝내자 서왕모가 두 번째로 물었다.
“반도 복숭아야 정원에 널리고 널린 물건. 그냥 가져가면 될 것이지 굳이 날 찾다니, 참으로 아둔한 인간이구나.”
끙! 나름대로 조심한 걸 가지고 아둔하다고 하다니.
그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숭아를 따가지고 가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서왕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평범한 반도 복숭아를 원하는 것은 아니렷다? 좋아, 그대 뜻에 따라주도록 하지. 삼천과(三千果)가 아닌 일만이천과(一萬二千果)를 하사하겠어. 단,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줬을 때 말이야. 인간, 그래줄 수 있겠나?”
하아… 미치겠다. 또 의뢰라니!
차라리 서왕모를 만나지 않고 그냥 복숭아만 따가지고 갔으면 될 일을, 괜히 여기까지 왔다가 시간을 지체하게 생긴 것이다. 물론 죽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미 들은 이상, 이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서왕모가 의뢰 보상품으로 내건 일만이천과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 다시 구하기 힘든 물건임은 분명했다.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성심성의껏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자동으로 아부성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대도 오다가 본 적이 있을 것이야. 약수(弱水) 앞은 내가 거둬들인 신수들과 신선들이 잡아들인 영물들이 노니는 곳이지. 가끔 순양자나 광성자 같은 신선들이 적적할 때 데리고 놀아줄 뿐, 보통은 그냥 저대로 시간을 보내는 게 녀석들의 유일한 소일거리지. 그런데 요즘 문제가 하나 생겼어.”
그 문제란 게 무언지는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날개 달린 용, 응룡이 문제였다.
서왕모의 말에 따르면, 저 응룡은 과거 황제(黃帝)를 도와 치우군을 궤멸시켰던 그놈이었다. 그러나 호풍환우(呼風喚雨)의 능력까지 지닌 놈이었건만, 탁록의 전투 이후로 성정이 포악해지고 온갖 사특한 짓거리만 골라 해서 결국 상제의 진노를 사 다시는 선계에 들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 일도 이젠 오천 년이나 지난 일이 되어서, 최근에 인간세에 남겨 혼란을 조장하느니 차라리 곤륜으로 데려오자는 신선들의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데려오자는 결정이 났고, 광성자와 여동빈, 종리권 삼선(三仙)이 직접 남방으로 가 녀석을 데려왔다고 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오천 년이나 지났건만, 응룡의 포악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놈은 일부러 힘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진곤륜에 들어왔고, 그다음부터는 깽판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힘 약한 신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신선들은 왜 신수들의 수가 줄어드는지 알 수 없었고,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신수들의 내단을 취한 응룡의 힘은 이제 남은 신수들 전체를 압도할 정도였다. 다행히 서왕모의 궁엔 법력이 탁월한 신선과 신장들이 무수했던 터라, 응룡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라면 신수들이었지, 그들 신선들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긴긴 이야기를 들어줬건만, 서왕모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자네는 나, 서왕모의 수레가 봉황거(鳳凰車)라는 걸 모르고 있었나? 이래서야 어디 내 수레를 끌겠다는 봉황이 남아 있겠어?”
허… 허……. 역시… 이놈의 곤륜산엔 제정신 달린 족속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원숭이나, 개나, 신선이나 가릴 것 없었다.
그래도 이미 나도 이 미친 짓거리에 동참하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겨우겨우 치솟는 황당함을 누르고 서왕모에게 다시 물었다.
“오다가 삼선이 응룡과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삼선이라면 충분히 응룡을 제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굳이 제게 명하시는 겁니까?”
서왕모의 대답도 종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계의 서열상 그들과 난 우열을 논할 수 없는 입장이지. 때론 그들 지위가 나보다 높을 수도 있다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응룡을 잡아달라고 명한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되지. 그들이 응룡과 싸우는 이유는… 그냥 노는 거야. 그러니 응룡을 죽이지도 않고, 그저 쫓아내기기만 할 뿐이지. 사실 곤륜은 겉은 화려할지 몰라도 무료하기 그지없는 곳이네. 난 왠지 처음부터 응룡을 데려오기로 한 신선들의 결정은 그들의 농간이 아닐까 싶어. 허허, 참. 신선들이 한다는 짓이 이렇게 한심하다니, 내가 되레 미안해지는데.”
걔네들이나 너나 똑같지.
“알겠습니다. 그럼 응룡을 해치우기만 하면 되는 거죠?”
“맞네. 인간의 몸으로 여기까지 온 그대 실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지.”
“좋습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어이 인간, 그냥 가려고? 응룡이 머무는 염화산(炎火山)에서 버티려면 정원에서 피화과(避火果)를 넉넉히 챙겨 가야 할 거야.”
그나마 백택과 달리 서왕모는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시작부터 용이니 봉황이니 하는 놈들을 봐서인지 몰라도, 나도 단단히 허황기에 중독됐나 보다. 거침없이 서왕모의 의뢰를 받아들이다니 말이다.
그리고 잠복근무가 시작되었다.
장소는 응룡의 서식지인 염화산(炎火山). 그곳은 피화과가 아니었다면 잠시라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열기를 뿜어대는 곳이었다.
응룡이 머무는 곳이 산의 어느 곳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애당초 내 힘만으로 놈을 잡는 건 생각지도 않았다. 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만약 서왕모의 의뢰를 받기 전에 응룡과 삼선의 대결을 보지 않았다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난 검선들에게 쫓겨 들어오는 놈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라면 분명 체력이 거의 간당간당할 것이고, 어쩌면 무진이 통할지도 모른다.
만약 무진이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그냥 죽으면 될 것이다. 서왕모의 정원에서 몰래 반도 복숭아 한 개를 따왔으니, 죽어도 손해 볼 건 겨우 레벨 하락밖에 없었다.
지루한 기다림이 며칠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다시 응룡이 집 밖으로 나온 건 의뢰를 받은 지 나흘이 지난 후였다.
이제 상처를 다 치료했는지 응룡은 기세등등하게 신수들이 몰려 있는 골짜기 입구로 날아갔다.
그리고 삼십 분가량이 지나자 저번에 봤던 대로 응룡이 쫓겨 들어왔다. 그 뒤로는 세 신선이 쫓아오고 있었다.
마치 서핑보드를 타듯이 검을 타고 쫓아오는 세 검선은 처음엔 제법 멋있게 보였다. 그러나 서왕모의 말대로 결코 믿음직스러운 신선들은 아니었다. 염화산 근처까지 오더니만 곧 깔깔거리며 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게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의 전부였던 것이다.
응룡의 거처는 놈이 돌아올 때 대충 파악했다. 놈은 염화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상처 입은 몸으로 헐떡이는 응룡이 보였다.
녀석은 분명 나라는 존재를 확인했을 텐데도 하찮은 인간 따위에겐 볼일이 없다는 태도였다. 하긴 혼자서 용 삼십 마리와 대적해도 이길 놈이 나 같은 걸 신경 쓸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착각해줘라.’
무진을 시전했다.
제 죽을 날이 오늘이라는 것도 모르는 놈은 숨만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뒈져 줘!’
무진이 발출됐다.
쾅!
굉음과 함께 익숙한 섬광이 터졌다.
안 통하면 당연히 죽음이다. 터무니없는 존재였기에 죽음에 대한 부담도 덜했다. 차라리 얼른 죽어서 반도 복숭아를 반납하고, 이 지겨운 퀘스트를 종료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당분간 곤륜에 더 머물러야만 했다.
[레벨이 430에서 436으로 상승했습니다.]
무진에 응룡이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허허, 무진이 대단한 건가? 아니면 저놈 피가 얼마 안 남았던 걸까?”
둘 다일 것 같다.
“쩝. 생각보다 경험치도 얼마 안 주네? 역시 딴 놈들이 피를 빼놔서 그런 건가.”
이 레벨대에서 6이라면 대단한 편이지만, 응룡의 신위를 충분히 본 나로선 성에 차지 않았다.
경험치를 짭짤하게 준다면 서왕모에게 보고를 하고 나서 남은 퀘스트 기간 동안 응룡 사냥이나 할 생각이었지만, 겨우 이 정도라면 포기하는 게 나았다. 나흘 동안 겨우 6레벨 오르는 것도 문제였고, 달랑 무진 한 번 써서는 무공 숙련치도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응룡의 시체로 다가갔다. 퀘스트 몹에 불과했지만, 혹시 아나? 아이템이 떨어져 있을지.
“이, 이게 뭐냐…….”
죽어 널브러진 응룡의 주위에 거대한 날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놈의 옆구리에 달려 있던 날개와 똑같았다.
“끙.”
아이템을 살펴본 난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뭐… 뭐냐…….
[비익:응룡(飛翼:應龍)
응룡의 날개. 모든 비익류 아이템 중에서 가장 빠르다. 퀘스트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사용 제한:Lv 1,000]
“대체 이 게임 개발자들 머리엔 뭐가 들어 있는 것이냐. 용 날개라니!”
더군다나 ‘모든 비익류 아이템?’ 그럼 다른 놈의 날개도 있다는 것인가? 주작, 봉황, 혹은 대붕이나 참새 기러기까지?
더구나 레벨 제한이 일천? 지금 장난해? 강호 생활 1년 반이면 아무리 빨라도 400레벨밖에 못하는데 일천? 이 게임만 한 10년 하라는 소리냐?
“에이, 눈만 배렸다.”
개발자의 터무니없는 농간일 뿐이다. 난 이 게임 10년이나 할 마음이 전혀 없다.
곧장 서왕모궁으로 돌아갔다.
“호호! 대단한걸? 인간세에 당신 같은 인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당연히 응룡의 밥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쨌든 좋아. 골칫거리 문제는 해결됐고, 약조를 한 이상 지킬 건 지켜야겠지.”
서왕모의 말이 끊기더니 주렴이 걷어 올려졌다. 드디어 서왕모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서왕모의 얼굴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머리에 꽂은 봉황 깃이나 진기한 패옥과 보석이 달린 궁장이 분명 화려하게 그녀의 미모를 치장해주고 있었지만, 글쎄? 내 눈엔 진진이나 금양옥보다 못해 보였다.
하여간 그녀가 나근나근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붉은 복숭아가 섬섬옥수에 올려져 있었다.
일만이천과는 퀘스트용 반도 복숭아와 달렸다. 정원에서 딴 반도 복숭아는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냥 퀘스트 아이템이라는 설명만 있었지만, 이건 분명히 효능이 명시되어 있었다.
[반도:일만이천과(蟠桃:一萬二千果)
일만 이천 년 만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고 한다. 퀘스트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사용 제한:Lv 1,000
사용 효과:내력이 2배로 증가한다.
특수 효과:NPC와 거래를 할 수 있다.]
응룡 날개나 이 복숭아나 그림의 떡인 건 매한가지였다. 어찌 된 게 선계의 아이템은 죄다 1,000레벨짜리란 말이냐?
그나마 일만이천과가 좀 낫긴 했다. NPC한테 팔아버릴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왜 특수 효과냐?
하여간에 서왕모에게 볼일은 다 끝났다.
인사를 하고 궁을 나온 후, 곧장 진곤륜을 빠져나왔다.
장장 스무날에 걸친 퀘스트도 끝이 머지않았다. 반도 복숭아만 천원에게 건네주면 이 재미없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퀘스트도 끝이 나는 것이다.
현실 시간 스무날이면, 게임 시간으론 거의 9개월이다. 그런데도 곧 죽을 것만 같았던 천원은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뭐, 게임이니까…….
“쿨럭… 쿨럭! 기다리고 있었네… 쿨럭! 그래, 구해왔는가……?”
반도를 건넸다. 물론 일만이천과가 아닌 그냥 반도 말이다.
“오… 오! 자네라면…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네…….”
자, 자, 얼른 먹어라. 그리고 퀘스트 보상템을 줘야지! 좋은 걸로다가.
이번에도 또 사용하지도 못할 쓰레기 아이템을 주면 천원 이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천원은 끙끙대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반도를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녀석이 복숭아를 한입 베어 먹을 때마다 빠진 머리털이 새로 났고, 피부에 꽃핀 붉은 반점도 하나 둘 지워져 갔다. 병이 치료되고 있는 것이다.
한 일 분에 걸쳐 맛있게 복숭아를 전부 먹어치운 천원이 날 바라보았다.
‘얼른 줘라! 퀘스트 보상 아이템!’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군. 자네, 시간이 된다면 내 이야기 좀 들어주겠나?”
아직도… 안 끝났단 말이더냐!
별수 있나? 하겠다는데 들어줘야지.
고개를 끄덕이자 천원이 입을 열었다. 곧 숨겨진 비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네. 그 당시 난 백원족의 수장이 되고 싶었지. 하지만 수장이 되려면 그 어떤 백원들보다 힘이 세야 했다네. 물론 내가 약한 백원은 아니었지만, 감히 천원에 도전할 실력은 되지 못했지. 실력이 못 되면 꿈을 꾸지 말아야 하는데… 내 욕심은 그렇지가 못했다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백원들은 예로부터 찬 기운에 익숙했다네. 곤륜설잠(崑崙雪蠶)을 맨손으로 만져도 별 이상이 없었지. 심지어 설잠독(雪蠶毒)을 만져도 말이야. 내가 설삼족들에게 병을 일으켰다네. 그들 어린 설잠들이 자라는 텃밭에 설잠독을 뿌렸지. 거기에 설삼족 족장에게 구양신공이 해결책이라고 알린 것도 나라네. 그 모든 게 강호 최강의 신공이라는 구양신공을 얻기 위한 계책이었지.”
기가 찬다. 겨우 원숭이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서 종족 전쟁을 일으켰단 소리였다. 더구나 애들 자라는 땅에 맹독을 뿌릴 생각을 하다니!
현실이었다면 죽도록 패주고 싶을 그런 원숭이였다.
“왜 직접 구할 생각은 하지 않은 거지?”
놈의 진면목을 보자 당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그럴 수 없었다네. 예로부터 소림과 우리 백원들은 사이가 좋지 못했거든. 그들은 절대 우리 백원들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지 않는다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백원의 선조님께서 도움을 준 강호인이 마교의 교주가 되어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모른다네. 하여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게나. 비급을 강탈하고 난 무공이 월등히 강해졌지. 천원 자리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네.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 같았지. 그런데 나쁜 짓을 하면 결국 벌을 받게 되는 것이더라고. 지금에야 생각하건대 우리 백원들은 음한체질인 것 같네. 그러니 설잠독의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고. 그런데 지독한 양강무공인 구양신공을 익혔으니 몸이 잘못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결국 내가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 들어줘서 고맙군. 조금 홀가분해진 것 같아. 후유… 내 이야긴 다 끝났다네.”
날 죄악의 배설 창구로 써먹는 게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 일단은 죗값을 받았다니 참으로 쌤통이다. 그런데… 이걸로 다 끝이냐? 보상 아이템 달라니깐!
내 생각을 읽었던 걸까?
“그리고 이걸 받게나. 더 이상 내겐 필요 없는 물건 같으이.”
드디어 보상 아이템이었다. 드디어!
천원이 건넨 건 비급이었다.
[구양진경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최강의 내공심법 구양신공이 수록되어 있다. 대성하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다.
수련 제한:Lv 500
수련 제한:불가체질
수련 제한:양강체질
특이 사항:모든 공격에 염(炎)의 기운이 깃든다.]
[‘퀘스트:반도 복숭아’를 완수하였습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퀘스트가 끝난 것이다!
6권에 계속
작가 註
반도 복숭아 퀘스트에 나오는 용어 설명
개명수(開明獸):산해경에 묘사되길, 호랑이 몸에 머리가 아홉인 짐승이라고 함. 곤륜산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궁궐의 문지기로 표현되고 있음.
백택(白澤):사자의 몸에 눈이 여덟인 신수. 때론 사자를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임. 어느 날 황제가 곤륜산 동쪽 항산이라는 곳에 놀러가 이 백택을 만났다고 함. 백택은 천지간의 요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신수로, 그가 말한 11,520가지의 요괴 이야기는 백택도(白澤圖)라는 이야기로 엮어졌다고 함. 조신시대에 왕자의 흉배(胸背)로 자주 쓰임. 기린과 마찬가지로 성인(聖人)을 상징함. 본문에선 모르는 게 없는 신수로 그려졌음.
반도(蟠桃):서왕모의 정원에 있다는 전설적인 복숭아. 보통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때론 3천 년, 6천 년, 9천 년짜리 반도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함. 본문에서 등장한 1만 2천 년 만에 열리는 반도는 없음. 유사 품종으로 천도(天桃), 선도(仙桃)가 있음.
사당목(沙棠木):곤륜산에 있다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물위에 둥둥 뜬다고 함.
약수(弱水):곤륜산의 앞을 흐르는 강. 부력이 약해서 깃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본문에선 헤엄치지 못한다고 표현하는데 그쳤음.
염화산(炎火山):곤륜산 약수 바깥에 있다는 산.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뒤덮여 있다고 함.
응룡(應龍):비를 부르는 재주가 있는 날개 달린 용. 황제 헌원씨를 도와 탁록에서 치우군을 대파하는 데 일조한다. 탁록 전투 이후 선계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함.
여동빈, 종리권:도교 팔선의 인물들. 여동빈은 종리권에게 도를 전수받고 신선이 되었음. 여동빈은 흔히 검을 등에 메거나, 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
서왕모(西王母):산해경엔 호랑이 이빨에 표범 꼬리, 인간의 얼굴을 한 괴물로 그려지고 있으나, 보통은 선약(반도)을 가진 신녀로 그려지고 있음. 산해경 이후엔 미모의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질병을 주관하는 여신으로도 표현됨. 남편은 서왕모라는 이름과 대조하여 동왕군(東王君)이라고 함. 두 사람이 모두 곤륜에 궁을 짓고 살면서 선계와 인간계의 잡다한 일을 관장함.
본문에서 서왕모의 궁에 남자가 있다고 표현한 것은 동왕군과 결혼한 이후의 서왕모의 궁을 묘사한 것임. 조연은 모르고 있었던 사실.
목자탑격산(木孜塔格山):중국 곤륜산맥의 최고봉. 소설에 진곤륜이 위치하는 산이라고 묘사되었지만, 전혀 연관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