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백원과 설삼
‘이거 참, 끝내 사단을 벌였구만.’
이 대리는 힐끔힐끔 강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 재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급했다.
우물이나 골목길 담은 복구시킬 능력도 못 됐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 건 사라가 알아서 처리해놓을 것이다.
문제는 사라가 현운자 캐릭터를 강제로 무당산에서 서녕으로 이동시킨 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사라가 알아서 뒷정리를 해놓겠지만, 문제는 로그 파일이었다. 기록에 남는 것이다.
가끔 데이터 에러로 캐릭터 위치 정보가 엉망이 되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만, 정황이 문제였다. 조연은 요주의 인물이었고 현운자는 바로 의심을 살 것이다. 강호의 감시를 받게 된다는 소리다.
아직은 그래선 안 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강호 서버실로 우회할 수 있는 백 도어 프로그램을 깔아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김 실장님 아이디를 꿍쳐 둔 게 다행이군.’
파일 수정 권한은 오로지 서버 실장인 그뿐이었다.
로그 파일은 길었다. 당연했다. 지금 현운자는 일반 유저들 기록만 담은 로그 파일에 속했으니 말이다.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데이터베이스 공부 좀 해둘걸.’
이 대리는 어디까지나 관련 업계 종사자였지, 전문가가 아니다.
진땀을 빼가면서 삼십 분가량을 고민하고, 또 키보드를 두드리고 나서야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다행히 김 팀장의 눈길은 피할 수 있었다. 요새 김 팀장은 지뢰 찾기 최고 기록을 달성한 후, 스도쿠라는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어이, 이 대리! 밥 안 먹어?”
간 떨어질 뻔했다. 벌써 밥 때가 된 것이다.
“아, 지금 속이 안 좋네요. 죄송하지만 팀장님 혼자 드셔야 할 것 같네요.”
“그래? 간만에 해물탕 먹으러 갈 건데, 그래도 싫어?”
“네. 밥 들어갈 배가 아니네요.”
“그렇다면야… 그럼 이따 보자고!”
김 팀장은 혼자서 밥 먹으러 갔다. 김 팀장이 먼저 옵저버 팀을 나가자 다른 팀의 직원들도 하나 둘 일어섰다. 그리고 어느새 사무실엔 이 대리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됐다.
“여기가 어디야?”
운영자 모드로 접속하는 건 옵저버 No.4팀에겐 금지되어 있다. 다행히 지금은 보는 사람이 없다.
이 대리가 도착한 곳은 호북성의 이름 모를 산이었다. 현운자는 과거의 명성이 무색하게 산속의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흡혈박쥐를 때려잡고 있었다.
“사라야.”
처음 불러본다. 그의 음성을 처음으로 들려준다. 물론 그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녀에겐 모든 게 숫자의 조합일 테니.
현운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마지막 박쥐까지 잡고서야 이 대리를 돌아봤다.
“뭐 하러 왔어요?”
발칙한 동생이다.
이 대리는 갑자기 귀엽기만 하던 여동생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거예요!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제야 이 대리는 왜 그녀가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었다.
“다들 밥 먹으러 갔어. 그리고 지금은 운영자 모드야. 나 옷 입은 거 안 보여? 대화 기록도 꺼놨고 말이야.”
“으휴! 오빤 바보야? 강호는 어쩌고? 그 녀석 무시하지 말라고!”
어쩐지 참 웃기는 남매 같다. 겉으론 명백한 남성 캐릭터인 현운자가 여성 캐릭터인 이 대리에게 오빠라고 한다(운영자 캐릭터는 모두 여성이다).
“걔도 지금 너랑 같은 입장이지. 요새 바쁜가 봐.”
“그래요?”
그제야 현운자가 안심을 하는 눈치다. 그리곤 손을 털더니 이 대리에게 다가왔다. 오라비 코앞까지 다가선 그녀가 갑자기 팔을 벌린다. 그리고 껴안는다.
“흠… 포옹이란 게 이런 기분이군. 강호에서 냄새만 지원해주면 안성맞춤일 텐데.”
남자의 탈을 쓴 여동생의 농담이 설핏 가슴을 할퀴고 가는 것 같다.
두 사람은 드디어 만난 것이다. 비록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일 뿐이었지만.
아량 넓은 이 대리는 잠시 그대로 서 있어주었다. 촉감도 냄새도 느끼지 못하는 포옹이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근데 말이다. 난 남자한테 안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분위기 깨는 건 꼭 누구랑 똑같아.”
“크큭. 그 누구가 누굴까나~”
“…….”
잔뜩 눈썹을 찌푸리던 현운자가 갑자기 후다닥 멀어진다. 그리곤 빽 소리를 지른다.
“용건만 간단히! 편해지려면 아직 멀었다구!”
“지금 몇 시지?”
“몰라. 얼른 말해!”
“음… 12분이네. 곧 사무실 사람들 들어오니깐 얼른 말할게.”
“나도 바뻐.”
“로그 파일은 고쳐 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당분간 조연하고 접촉하는 건 자제해. 정 사장이나 강 팀장이야 알아도 상관없지만, 강호 이 녀석이 요즘 장난이 아니다. 어쩐지 우리 의도마저 알아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야.”
“오빠! 그러게 내가 너무 많이 키워주지 말라고 했잖아! 애써 애 바보 만들어놨더니만!”
정말 화났나 보다. 현운자 표정이 험악 그 자체였다.
“어쩔 수 없어. 인정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어쨌든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한 가지 묻자.”
“……?”
“조연도 우리 계획에 포함되는 거냐? 그 때문에 왔다.”
질문의 답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이미 조연은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데, 애초에 그 사실을 가지고 시작한 계획인데 말이다. 현운자는 오라비가 원하는 답을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아마도요.”
이 대리는 마치 소곤거리는 듯한 현운자의 대답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해. 하지만 명심해라. 조연은 능구렁이야. 우리가 그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도 우릴 이용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 일이 잘못돼도 손해 보는 건 우리지 그가 아니야.”
“그는 능구렁이긴 하지만 배신자는 아니에요.”
“배신자라고는 안 했다. 그가 이해심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그 사람은 머리가 너무 좋아. 위험한 사람이야.”
“오빠보단 제가 더 조연을 잘 알아요. 하여간 잘 알았어요. 그만 가봐요. 끝날 때까진 다신 들어오지 마세요.”
이 대리 말을 알아듣긴 했지만, 퉁명스런 말투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알았다. 수고해라.”
일이 잘못되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말을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곧 사람들이 올 시간이다.
* * *
곤륜산(崑崙山).
엄밀히 말해서 실체가 없는 가상의 산이다. 만산(萬山)의 조종(祖宗)인 이곳엔 불노불사의 신약을 가지고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궁이 있다고도 하고, 중국 최고의 신인 황제(黃帝)의 궁원(宮園)이 있다고도 한다. 곤륜에서 시작된 전설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신화와 곤륜옥(崑崙玉)만이 유명한 것은 아니다. 곤륜산은 일찍이 도가인들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여겨졌고, 그런 추종자들이 모여 하나의 문파를 열었으니, 이른바 구대문파 중에서도 최고의 신비지문(神秘之門)인 곤륜파가 그곳이었다.
내가 가는 곳이 곤륜파가 있는 그 곤륜인지, 혹은 신화 속의 그 곤륜인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곳의 이름이 곤륜이라는 것 하나뿐이다.
사풍 일행은 끝내 곤륜파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길이 험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접한 몹들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곤륜산의 둘레가 사방 8백 리라고 했으니, 그들이 일찌감치 계획을 접고 하산한 건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여겨야 했다.
곤륜산은 시달목분지(紫達木盆地)에서 남서쪽으로 천여 리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거대한 염호(鹽湖)와 곤륜산맥의 빙하 녹은 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은 이곳이 중원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비록 온도를 느낄 수 없는 강호지만,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가 완연히 느껴지는 지대가 이어졌다. 자갈이 반쯤 섞인 땅엔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초목들만이 났다. 그렇게 광활한 시달목분지를 세 시간가량 달리자, 드디어 저 멀리 흰 눈에 덮인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곤륜산맥(崑崙山脈)이었다.
곤륜산은 마치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형상이었다. 시달목분지는 기복이 없는 평탄한 지형이었고, 그 끝에 만길의 곤륜산이 하늘을 떠받치는 방벽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현대 중국에서 부르는 곤륜산맥은 전설의 곤륜산이 아니다. 히말라야를 설산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쨌든 그건 중요치 않다. 내가 원한 곳은 방해꾼 없이 적절한 렙업이 가능한 곳이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전설이 깃든 곳은 아니었다.
“흠, 여기서부턴 운이라고 했던가…….”
그나마 서녕에서 시작된 길도 끊겼다. 내 앞엔 풀도 제대로 나지 못한 험준한 돌산만이 놓여 있었다.
파도 일행도 여기서부턴 길 찾기를 포기하고 태산준령을 정처 없이 배회했다고 한다. 그렇게 헤매다가 우연히 백원(白猿)의 서식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뚜렷한 기준점이 없었기 때문에 파도는 그곳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별수 없이 그가 했던 방법을 나도 따라야 했다.
경공을 쓰지도 못했다. 그러다간 자칫 강력한 몹들에게 포위당하는 수가 있었다.
느릿느릿 평범한 속도로 바위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래도 곤륜산은 감숙의 삭막한 황무지보단 제법 풍광이 괜찮았다. 때론 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옥광맥(玉鑛脈)으로 이루어진 곳도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중원의 산에선 볼 수 없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감탄사를 토하게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꽃들을 아무 의미 없이 그려 넣을 정도로 개발팀이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분명 용도가 있을 것이다. 약재로 쓰이든가, 아니면 독의 재료든가 말이다. 여하튼 그런 기술을 배운 이가 왔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라붙었겠지만, 내겐 채약(採藥) 기술 따윈 없었다.
그나마 곤륜산에 나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빽빽한 원시림은 대개 인간의 출입을 거부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작은 관목들과 간혹 띄엄띄엄 나무를 볼 수 있었을 뿐이고, 그건 통행에 제한 없이 드넓은 곤륜산맥을 자유로이 수색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언젠간 반드시 좋은 사냥터를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찾기 어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폐관수련하고 싶었다. 요새 인간들에게 너무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종, 아니 대부분 현실은 희망을 외면한다.
“돌겠구만! 이 망할 놈의 원숭이 자식들 다 어디에 숨은겨!”
첫 봉우리를 넘고, 그리고 봉우리를 한 개 또 넘고……. 뒤돌아보니 그동안 넘은 봉우리가 수십 개나 된다. 물론 그동안에 백원이라는 원숭이는커녕 토끼 새끼 한 마리 보지도 못했다.
“사풍 이 양반, 돈만 날름 받아먹고 구라친 거 아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보통 중원의 산이라면 이쯤 되면 사슴, 아니 토끼라도 보여야 했다. 그런데 이건 뭐… 하늘에 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마치 죽어버린 산을 보는 것 같다.
“혹시 아직 공개가 안 된 건가?”
간혹 에피소드별로 지역을 공개하는 게임이 있다. 강호가 그런 식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천축이나 북해처럼 먼 곳도 아닌, 겨우 청해성을 막아놓을 리도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곤륜파까지 만들어놨는데 오픈이 안 됐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말이다.
“첫술에 배부르겠다는 나도 미친놈이군.”
최소한 사풍이 고생한 만큼은 하고 나서 불평을 해야겠지.
하지만 역시나 곤륜산에 도착한 그날, 어떤 네발 달린 짐승도 보지 못했다.
곤륜산은 정말 광대하다. 경공술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미 첫날에 접었다. 하지만 경공을 써서 돌아다녀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보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마치 김태희 같은 절세미녀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말도 없이 품에 안기며 ‘오빠, 우리 같이 살아요’ 그렇게 속삭이길 기대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한 사흘을 돌아다녔지만, 곤륜의 반의반도 탐색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흘의 끝은 곤륜산맥의 끝이자, 바다처럼 펼쳐진 티베트 고원(靑藏高原)을 발견한 일이었다.
대부분이 눈에 덮인 곤륜산에 비해 티베트 고원은 푸른 초지에 덮여 있었다. 곤륜의 눈 녹은 물이 저 들판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다.
한참을 내려갈까 말까 고민을 했다. 비록 신화를 믿지는 않았지만, 곤륜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더구나 아직 백원들의 서식처도 발견하지 못했고, 전설의 곤륜파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곤륜에 들어선 이후 최초의 생명체를 바로 밑에서 보게 됐기 때문이다.
만약 그놈이 곤륜산에 있었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놈이 저 푸른 초지에 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놈은 설표(雪豹)였다. 눈부시게 새하얀 털가죽을 가진 놈이었다.
처음엔 녹색의 초지에 하얀 점이 움직이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백여 장 거리까지 다가가서야 놈이 하얀 털가죽의 맹수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놈도 날 느꼈나 보다. 어슬렁거리던 놈이 동작을 멈췄다. 마치 날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냥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냥감에게 기척을 들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놈이 뛰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가 초지에 내려오자 방향을 꺾어 곤륜산이 있는 북쪽으로 몸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쩝.”
내가 찾던 백원이라는 몬스터도 아니었고, 곤륜의 도사도 아니었다. 중원에서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흔하디흔한 야수형 사냥감이었다.
하지만 내 몸은 어느새 놈의 뒤를 쫓고 있었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몹을 본 건데 어찌 그대로 놔둘 것인가.
놈은 무척이나 빨랐다. 마치 구름을 밟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녀석이 한 번 땅을 박차면 십여 장을 훌훌 날았다.
인간의 무공이 제아무리 빠르다고 할지라도 맹수와의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놈은 그 이유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돌산을 자유자재로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인간인 내 감각으론 그런 짓은 불가능했다.
설표는 날 놀리려는 듯 딱 적당한 만큼의 속도로 내 앞을 달렸다. 마치 나보고 잘 따라오라는 듯이 말이다.
곤륜산맥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난 거의 중간쯤의 산령(山嶺)을 넘은 셈이었고, 설표는 날 끌고 산맥의 서쪽 방면으로 도망쳤다.
때론 완전히 놓쳐 버릴 정도로 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꾸준하게 비슷한 거리가 유지됐다. 날 조롱하는 것인지, 원래 그 속도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한 세 시간쯤 달렸을 것이다.
달리면서 이 미친 짓을 왜 하나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그래봤자 곤륜이었다. 이렇게 수색하나 저렇게 수색하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설표라는 놈은 평범한 몹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활동 반경이 넓은 몹이 있을까?
예전 무영신투나 무림정의 구현단 같은 아주아주 특별한 놈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놈들이야 인간들이다. 그리고 ‘특수한’ 목적을 가진 놈이었다.
하지만 겨우 고양이과 동물에 불과한 저놈이 특별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지. 저놈 가죽이 10억 냥쯤 할지도.’
설표는 지금도 귀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만, 옛날에도 그랬다. 더구나 저놈처럼 눈부시게 새하얀 놈은 아주아주 희귀한 놈이 아니겠는가? 물론 게임이니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음?’
잠시라도 발을 멈추면 녀석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하지만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젠 설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이, 야옹아! 땡큐다!”
멀어져 가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우연이겠지만 결국은 놈이 길잡이가 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우측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온천이 보였다.
파도가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려 줄 순 없었지만, 한 가지 도움 되는 말을 해줬다. 백원을 만난 건 온천을 지나고서였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놈들은 일본원숭이처럼 뜨거운 물속에 몸 담그는 걸 즐겨하는 것일지도.
여기서부턴 조심해야 했다. 언제 백원이라는 놈들과 만나게 될지 몰랐다.
사풍 일행 셋이서 간신히 백원 한 마리를 당해낼 정도라고 했다. 아이템도 없는 데다, 무공 수준까지 급락한 나로선 무진만 믿어야 했다. 그러려면 무조건 놈들이 단독으로 움직일 때만 노려야 했고 말이다.
‘역시…….’
온천 주위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둘러본 곤륜산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똑같은 패턴의 그래픽 타일을 붙여 넣은 별 볼일 없는 지형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직접 그려서 붙인 티가 역력했다. 뭔가 있다는 소리.
일단 온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특별한 징후는 없었다. 단지 길이 있을 뿐이었다. 곤륜에 와서 길처럼 생긴 걸 보긴 처음이었다.
“흐음, 일단은 오른쪽으로 가볼까?”
온천에서 바깥으로 나 있는 길은 두 곳. 어차피 다 둘러볼 것이다.
길엔 온천 밑을 흐르는 지맥 탓인지 눈이 쌓여 있지 않았다. 기후도 온화하고 물도 풍부하다는 설정인지라 길가엔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다.
“이러다 무릉도원이라도 가게 되는 거 아닌가?”
무릉도원까지는 아니고, 조금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었다.
길을 따라 한 오 분가량 들어가자 조그마한 분지가 눈에 들어왔다.
분지 저 멀리엔 풀을 얹은 집이 몇 채 보였고, 사람으로 보이는 물체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설마 여기가 곤륜파? 에이,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저것들이 원숭이로는 보이지 않고, 원숭이가 집 짓고 살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곤륜파라는 건데, 그것도 좀 이상했다.
일단 구대문파의 하나인 곤륜파가 자리하기엔 분지가 너무 협소한 데다 도관이나 도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집들은 겨우 풀을 엮어 만든 움막에 가까웠다.
“궁금한 건,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
그러나 채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내가 들어온 분지 입구 좌우로는 아마도 농사를 짓는 땅인 듯, 몇 가지 작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좌측에 있는 건 쌀이나 보리 따위의 곡물이었고, 그건 관심 밖이었다.
문젠 오른쪽 한편에 심어진 것들이었는데 그 채소들을 본 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곤륜설삼?”
채마밭에 곤륜설삼이라고 적힌 작물이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곤륜설삼이라면 장백설삼에 버금가는 영물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영물을 밭에다 재배해? 이런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팔아먹은 개발자 같으니!
처음엔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했다. 정말이다. 하지만 어느새 내 몸뚱이는 설삼 밭에 가 있었다.
“크크큭. 개발자 센스 하난 죽이네. 설삼에 번호까지 붙여 놓고. 시험 재배지라는 식인가?”
재배되고 있던 설삼엔 모두 숫자가 붙여져 있었다. 곤륜설삼(119), 곤륜설삼(876), 곤륜설삼(552) 이런 식으로. 마치 연구소에서 새로운 품종 개발을 할 때 붙여 놓는 코드명 같았다.
설삼들의 크기는 모두 내 주먹보다 컸다. 어떤 건 사람 머리통만 한 굵기였다.
“맛이나 볼까?”
물론 내게 약초 캐는 스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볼까’도 아니었다. 그냥 심심했다.
“캑!”
조심스럽게 제일 앞쪽에 심어진 곤륜설삼(186)에 손을 갖다 댄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삼이 뽑힌 것이다!
그냥 손만 댄 것인데도!
그럼 이제 난 돈벼락을 맞게 되는 것인가? 영약 밭을 발견했으니?
돈벼락은커녕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됐다!
이내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곤륜설삼(186)이 죽었습니다.]
[곤륜설삼족과의 우호도가 하락했습니다. -10]
[백원족과의 우호도가 상승했습니다. +1]
그리고 시작됐다. 초가 쪽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다! 백원족 놈이야!”
“저기다! 저놈이다!”
이 마당에 어찌 된 영문인지 따져 보는 건 사치다. 바보 같은 짓이다.
냅다 몸을 돌려 분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죄를 지은 건 분명했다. 재미삼아 뽑아보긴 했지만, 사실 욕심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눈앞에 설삼이 완전 무방비 상태로 ‘나 잡숴줍쇼!’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뒤에선 요란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놈들의 달리기는 나보다 특별히 나은 편은 아니어서 온천에 도착할 때까지는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온천에 도착하자마자 설삼족 마을과 반대 방향으로 난 길을 택했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 설삼족 놈들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찰거머리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왠지 죽을 때까지 쫓아올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난 여기까지 와서 또 죽게 되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놈들이 엄청나게 강할 거라는 건 당연했으니까 말이다.
아까 올라온 시스템 메시지를 보면 이들과 백원족은 적대 관계임이 분명했다. 죽기 싫다면 저들과 적대 관계인 백원족에 들러붙어야 했다. 내 실력만으로 이놈들을 뿌리칠 순 없으니.
제발 그곳에 백원족이 있기만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왼쪽으로 난 길을 택하곤 내립다 달리기 시작했다.
산삼 마을이 있던 만큼의 거리를 지났다.
그리고 발견했다, 흰 원숭이 놈들을.
이곳이 바로 백원족의 서식처임이 분명했다.
산삼 마을이 항아리형의 계곡 분지였다면 원숭이 마을은 야트막한 돌산 지대였다. 아마도 저 돌산에 보이는 열 몇 개의 조그만 동굴이 녀석들의 집 같았고, 돌산 앞에는 크고 작은 백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야생 원숭이 집단 서식지였다.
백원들의 대응은 고려치 않고 달리던 발걸음을 돌산 정상으로 향했다. 녀석들이 날 공격해서 죽게 되나, 설삼족에게 죽게 되나 매일반이었다.
원숭이들은 특별히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돌산을 오를 때까지 날 없는 사람 취급했다.
녀석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건 설삼족이 백원 마을에 침입하면서였다.
“끼익-끼익- 적이다! 설삼족 놈들이야!”
“끽! 애들 모아! 침탈이다!”
한 놈이 외치자 다른 놈이 응수하는 식으로 소란은 일파만파 번져 갔다. 곧 동굴에서까지 원숭이들이 튀어나왔고, 그렇게 두 종족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난 돌산을 오르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큼지막한 바위를 골라 앉고선 싸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앞으론 이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 했다. 놈들의 공격 패턴을 조금이라도 미리 익혀 둬야 했다.
난입한 설삼족의 수는 총 오십 남짓. 그에 비해 원숭이의 수는 본거지인 덕에 족히 삼백은 돼 보였다.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숫자.
그러나 그 무엇보다 골 때리는 건… 말하는 원숭이도 그렇지만, 말하는 산삼들이었다. 설삼이 심어져 있던 분지에서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의 정체는 무협지에 흔히 나오는 인형설삼(人形雪蔘)이었던 것이다.
머리에 갓처럼 쓰고 있는 건 산삼 이파리였고, 가슴팍엔 눈과 입도 달렸다. 따로 머리통은 없었고, 코도 없었다. 녹색의 풀로 짠 옷을 입고 놈들은 민활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신화 속 곤륜이라는 원래 의도인지, 그도 아니면 개발진의 단순한 장난인지 알 수가 없다. 어차피 이놈들이 몹이라는 건 분명했고, 비록 우호도가 걸리긴 했지만 천사교처럼 특별한 해를 끼치는 우호도 같진 않았다.
한 곳을 편들면 다른 곳의 우호도가 깎인다는 건 다른 게임에서도 흔히 보였던 방식이었고, 그게 플레이어에게 특별한 불이익으로 작용되지는 않는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이제 앞으로 백원들을 잡으면 안 된다는 것. 오로지 저 산삼들만 잡아야 했다. 두 곳 다 건들다간 반드시 망한다.
‘그나저나 제법인걸?’
여태까지 보았던 그 어떤 몹들보다 놈들의 공격은 특별했다.
백원들은 날렵하게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산삼들을 할퀴는 무공을 구사했는데, 마치 후권(?拳)을 보는 것 같았다. 흡사 유저라고 착각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몸놀림이었다.
원숭이들이 무술을 구사했다면, 인삼들의 기술은 기공(氣功)이라고 해야 했다. 그것도 한눈에 보기에도 강력한 열양지공(熱陽之功)이었다. 인삼 뿌리가 한 번 휘적거릴 때마다 백원의 몸뚱이에서는 불길이 솟았다.
왁자지껄한 한판 어우러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산삼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시작부터 원숭이들 편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버티던 산삼이 완전히 으깨지자, 백원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동굴로, 돌산으로 다시 숨어들어갔다.
“쩝쩝. 정황을 보아하니… 양쪽이 적대 관계인 건 확실하고, 그나저나… 사풍! 이놈! 날 속이다니! 왜 산삼족 이야기는 안 한 건데!”
그러나 얼마 후 전서구를 받아보니 사풍이 딱히 실수를 범한 건 아니었다. 애초 그가 봤던 백원들은 이 온천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뿐. 그 말은 이곳, 곤륜에 백원 서식지가 최소 두 곳 이상이라는 걸 의미했다.
하긴 넓은 땅덩이를 생각하면 그럴 것도 같았다.
하여간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일이고, 일단은 요 이상야릇한 상황을 이해해야만 했다.
“일단은 족장이라는 놈을 찾아봐야겠지?”
아무리 원숭이라 할지라도 사회를 이루면 우두머리가 있는 법이다.
역시나, 돌산에서 가장 큰 동굴로 들어가자 백원족 족장을 만날 수 있었다.
놈의 이름은 천원(天猿)이었다.
녀석은 다른 원숭이들과 달리 이방인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겨 주었다.
다른 원숭이들의 털빛이 흰색이었다면 천원은 족장다웠다. 이름처럼 푸른 털빛을 가지고 있었다.
“오오, 인간! 인간이 설영동(雪瑩洞)을 찾은 게 얼마 만인가! 한 삼백 년쯤 됐나?”
제법 넋두리가 심한 원숭이였다.
제 나이 자랑을 끝낸 푸른 원숭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백원족의 역사는 이 장엄한 곤륜과 함께한다네. 보통 인간들은 우릴 저 미개한 원숭이들과 같은 것들이라고 취급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우린 인간들보다 더 뛰어난 종족이라네. 그건 거짓 하나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 생각해보게. 어느 인간이 원숭이 말과 사람 말을 모두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백원족만이 가능한 일이야.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우리가 인간보다 월등한 종족이라는 건 확실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렇다 치자. 네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냐.’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오다가 곤륜설삼이라는 이들과 다툼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떤 놈들입니까? 백원족과는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던데요.”
천원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졌다. 그렇잖아도 쭈그렁탱이 얼굴에 수십 개의 주름이 그려졌다.
“그놈들은 아주아주아주 나쁜 놈들이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놈들이야. 우선 이것부터 알아둬야겠군. 자네 앞으로 그놈들 부를 때 곤륜설삼이라고 하지 말게. 잡초야, 그놈들 이름은. 하여간에 들려주지. 자네도 이제부턴 그놈들을 조심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이미 사이가 틀어졌지?”
천원은 숨겨진 비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비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일종의 퀘스트 설명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웃기고도 기이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설삼족은 원래 온천을 경계로 그저 그런 관계였다고 한다. 좋은 관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딱히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문제의 시작은 어느 날 느닷없이 시작됐다. 그때가 아마 천 년 전쯤이었고, 그 당시엔 천원도 족장이 아닌 평범한 흰 원숭이에 불과했다.
그 어느 날에 설삼족 족장인 곤륜설삼(10000)이 찾아왔다. 아! 곤륜설삼들은 이름이 없다. 숫자가 일종의 이름 역할을 대신했는데 그건 산삼의 나이를 뜻했다. 즉, 곤륜설삼(10000)은 만년설삼이었다.
하여간 만년설삼은 대뜸 ‘구양진경’을 내놓으라고 했단다. 누가 훔쳐 가지도 않았는데 내놓으라니! 당시의 족장은 대노했다. 하지만 설삼들은 가볍게 볼 놈들이 아니어서 일단은 잘 타일러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뒷조사를 했는데… 알아보니 당시 곤륜설삼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병(冷病). 특히 나이 어린 설삼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산삼이라면 뜨거운 성질의 약초인데 냉병이라니! 어린 설삼들이 나이 천 살이 되기도 전에 족족 냉병에 걸려 곯아버리고 말았으니, 종족의 앞날이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였다.
다행히 사방팔방 분주히 뛰어다닌 만년설삼은 간신히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구양신공을 익히면 이 절한증(絶寒症)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양신공은 구양진경이라는 희대의 비급에 적힌 심법이었다.
만년설삼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눈물을 머금고 곤륜설삼 10뿌리를 소림사에 주고, 장경각에 비치되어 있던 구양진경의 필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종족을 팔아먹고 구한 그 비급을 곤륜산 초입에서 강탈당한 것이다. 바로 흰 원숭이 놈에게!
“그럼 백원족이 잘못한 거잖습니까?”
어째 이야기가 그랬다.
“어허, 성질머리 참 급하네. 말 끊지 말고 계속 들어봐.”
하여간 우선 상황이 급했던지라, 결국 어린아이를 잃은 엄마 설삼들이 주동이 되어 다음 날부터 설삼족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방비도 안 한 백원족은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삼족은 백원족의 거처에서 구양진경 비급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지금도 설삼족은 절한증에 걸린 상태입니까?”
난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천원은 마치 날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지 못한 친구구먼! 이런 간단한 것도 모르다니! 아까 필사본이라고 그랬잖아, 필사본! 또 동족 열 마리 팔아먹고 비급은 구할 수 있었지. 참 천인무도한 놈들이 아닐 수 없지. 동족을 뉘 집 개새끼 팔아먹듯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다니 말이야. 하여간에 말이야 그렇게 놈들은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이놈들이 전쟁을 그만두지 않더란 말씀이야.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날뛰었지. 구양신공을 배워서 이젠 우리보다 더 힘이 세졌으니 말이야.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고 떠나곤 하지. 아주 나쁜 놈들이야. 세상에 흰 원숭이가 어디 우리 백원족만 있으란 법이 있냐고! 더구나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제 놈들 힘만 믿고 착한 백원들을 핍박하는 꼴이라니!”
드디어 끝났다. 연신 스스로 화를 돋우던 천원은 어느새 보통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긴 이야기 끝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장시간의 대화 속에서 특별히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혹시 설삼을 잡다 보면 구양진경 비급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까 쳐들어온 설삼 50마리 중에서 아이템을 떨어뜨린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죽어나간 백원도 마찬가지. 종종 그런 몹이 있다. 아이템을 안 주는 몹이.
“그런데 그 텃밭에 심어진 곤륜설삼들은 뭡니까?”
혹시나 영약류 아이템이 아닐까 싶어서 물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아주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거지. 세상에 제 자식들을 밭에다 심는 놈들이 어디 있냐고! 우리 백원들은 절대 그렇지 않지.”
또 한바탕 화를 풀어낸 천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어린 잡초들이라네. 잡초들 나이가 천 살이 되면 영통(靈通)을 해서 걸어 다닐 수 있지. 말도 할 수 있고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그 어린놈들이 문제였어…….”
하아…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천원의 장광설이 시작됐다.
텃밭은 일종의 인큐베이터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거 캐서 무슨 영약 만드는 재료로 삼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야기를 다 들어준 덕택에 이젠 설삼들을 잡아도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사냥을 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평소 사냥하던 방식대로 대책 없이 난입할 수도 없었다. 아직 설삼들의 실력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한 번 겪어보지 않았는가? 한 마리만 공격해도 부족 전체가 떼거리로 몰려든다는 걸 말이다.
일단은 놈들의 실력을 안전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다시 곤륜설삼족 마을에 가서 어린 설삼을 뽑기만 하면 됐으니.
백원족 마을에 다시 설삼들을 데려오고 원숭이들 틈에 몰래 설삼들을 공격해본 난 드디어 양쪽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 혼자선 끽해야 오천 년 묵은 설삼 한 마리를 감당할 정도였다. 무차별 난입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다행히 내겐 무진이라는 원거리 필살기가 있었고, 이참에 무진으로 사기적인 렙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설삼을 뽑아죽이고 어른 설삼을 원숭이 마을로 데려오는 일이 반복됐다. 난 돌산 위에 주저앉아서 제일 오래 묵은 설삼들 위주로 무진을 날렸다.
처음엔 한 번에 끽해야 두 마리를 죽이는 것에 그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요령이 붙어서 네 마리쯤은 거뜬히 잡을 수 있었다.
비록 느리긴 했지만, 일단은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