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장. 정체, 의문
내가 당해보니 왜 무진에 당한 저들이 그토록 날 싫어하는지 이해됐다.
혈접비기(血蝶秘技) 탈혼(奪魂)은 어찌 손 써볼 도리가 없는 압도적인 기술이었다. 세상에 어떤 민간인이 독 내성을 절정까지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탈혼령이 발동되면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여간, 강호제일은 제법 머리를 잘 굴렸다.
시작을 철질려로 선택한 것도 그렇고, 거기에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는 독강을 보인 것도 일종의 떡밥이었다. 모두 탈혼이 완성될 때까지 다른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전 작업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내 편의를 봐주지 않은 것도 같다. 내가 체력을 채우든 말든, 근접전부터 시작하든 아니든 탈혼을 겪어보지 않은 내가 죽음을 피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어쨌든 개놈의 자식. 그런 캐사기 기술을 쓰다니.”
훨씬 준비 시간이 긴 것에 비하면, 그리고 독 내성이 절정 미만이라는 조건까지 딸린 것에 비하면 무진이 훨씬 사기에 가까웠지만 일단 욕은 하고 보자.
“하아… 그나저나 공공의 적이 따로 없구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만 보면 잡아먹을 생각만 하네.”
그럴 줄 알고 인적 없는 청해로 들어온 것이지만,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죽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얼굴 한 번 못 본 엽사한테 죽은 것보단 분이 덜했다. 솔직히 다음에 만난다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강호제일이 이번 일로 혈접이나 독강만 믿는다면 다음번에 죽는 이는 그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엽사는 훨씬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는 과신할 기술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같은 일을 자주 겪게 되면 내성이 생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탈혼에 당한 다음 날, 오히려 편안 마음으로 접속할 수 있었다. 구대문파의 추격은 벗어난 것처럼 여겨졌고, 이젠 강호제일의 허명을 좇는 인물도 없을 테니 말이다.
며칠 새 두 번이나 죽은 인간에게 누가 달라붙겠는가?
“휴! 다행이다.”
유저 시작 도시가 없는 청해성의 특성상, 혹여 난주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이 됐었다. 다행히 이곳은 서녕이었다.
레벨은 또 10이나 떨어져서 394레벨이 되었다. 레벨만 보자면 강호에서 중상급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공 숙련치도 많게는 2성까지 떨어진 게 몇 개 됐다. 그나마 반야신공과 심결육합권이 사라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두 무공 모두 1성에서 간당간당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죽으면서 또 뭘 떨어뜨렸나 행낭을 열어 확인해보았다.
“제길, 완전 그지가 다 됐네.”
자동으로 짜증이 팍 일었다.
많고 많은 잡템들 중에서 하필이면 전낭(錢囊)과 육포를 떨어뜨린 것이다. 다른 한 개는 뭔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잡템만 50개가 넘게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뭐, 돈주머니를 떨어뜨렸다고 해서 크게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다. 전낭엔 겨우 삼십만 냥 정도만 있었었고, 황금전장의 내 계좌엔 수십억 냥이 예치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보자보자, 일단 전장을 찾는 게 우선이겠지?”
내 목표는 이 서녕이 아니라 곤륜산이다. 서쪽으로 예닐곱 시간은 더 달려야 도착할 테고, 청해성에 도시라곤 오직 이곳 서녕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사냥을 떠나려면 이곳에서 금강저나 환혼신단 따위의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서녕성을 한바탕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둘러봐도 끝내 황금전장을 찾을 수 없었다.
“없는뎁쇼.”
‘제길.’
간신히 찾은 서녕땅 유일한 객점, 청해객잔의 점소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촌구석이었다.
“할 수 없지. 이것들 좀 계산해줘.”
아이템 찾으려 도로 난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일단 안전해질 때까지 곤륜에서 버티고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아이템은 그렇다 쳐도 음식은 필히 장만해둬야 했다.
어제 관도에서 산적을 잡고 먹은 아이템들을 점소이에게 건넸다. 다행히 중원의 여느 장소처럼 여기서도 아이템 매각은 가능했다.
“모두 사만 칠천오백 냥입니다.”
돈을 챙기고, 그걸 또 음식으로 바꿨다. 바보 같은 상황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이번엔 가짓수를 늘려서 샀다. 육포 외에도 만두, 소면, 구운 오리 따위가 행낭을 채웠다.
미진하긴 했지만 어쨌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출발하면 된다.
청해객잔을 나와 북문으로 향했다. 곤륜산은 서녕에서 북쪽 길을 따라 시달목분지(柴達木盆地)를 지나면 갈 수 있었다.
“돌겠구만.”
인생 참 피곤하다.
어제의 그 당문 따까리들이 북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미 용건은 끝났을 텐데, 왜 아직도 남았을까?
뻔했다. 성문을 틀어막고 있다는 건 누군가를 잡겠다는 의미. 그 누군가는 나일 게 확실했다. 그리고 그 짐작이 들어맞았다.
내가 그들을 발견한 순간, 그들도 날 발견했다.
“왔다! 잡아!”
“저 병신, 또 왔네?”
이 자식들이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헛소리를 나불거렸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신세가 됐을까…….’
요 며칠 연달아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이런 허접한 놈들에게까지 무시당할 내가 아니다.
깝죽깝죽 도발하는 놈들을 향해 내가 먼저 몸을 날렸다. 어제처럼 괜히 시간을 끌다 강호제일이 합세하기 전에 돌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빌어먹을 상황이란 말인가!
뛰쳐나간 발에 뭔가가 채이더니 누렇고 퍼런 독무(毒霧)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신선폐(神仙廢)에 중독됐습니다.]
[적섬설매(赤蟾舌煤)에 중독됐습니다.]
‘진짜 돌겠구만.’
놈들이 독의 명가인 당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피독주도 없는 상황이라, 초급의 독에도 조심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에 엽사가 사용한 독궤라는 아이템과 비슷한 물건일 것이다.
그나마 그때보다 나은 상황이었다면, 놈들이 사용한 독이 칠보단장산보단 위력이 훨씬 낮았고 놈들이 엽사처럼 은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놈들에겐 연환노 같은 초장거리 아이템도 없었다.
얼른 쓸어버리고 운기로 해독하면 될 일이다.
“개눔의 자식들!”
제일 앞에서 깝죽대던 놈의 면상에 권강을 먹였다.
역시 독을 특기로 삼는 자들의 특성상, 놈들의 기본공은 젬병이었다. 그 한 방에 당문도는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피, 피햇!”
그제야 과거 조연의 명성을 상기한 놈들이 허둥지둥 놀라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놈들의 신법이 제법 표홀했지만, 아무래도 뒷걸음질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녀석이 내 주먹 아래 목숨을 잃었다.
내가 중독되고, 두 놈의 목숨이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십여 초 남짓. 단순 계산으론 남은 넷을 제거하기까지 삼십 초면 끝나겠지만, 슬프게도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네 놈은 언제라도 등 돌려 도망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다. 십여 장까지 거리를 벌린 놈들이 어제처럼 당문 비전의 암기들을 날리기 시작했다.
온갖 비침, 철질려, 수리표 따위가 쉼 없이 쇄도해왔다.
버티면 또 어떤 동조자들이 올지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든 놈들을 잡으려고 뛰쳐나가면 목표인 놈은 등 돌려 도망가고 다른 놈들은 암기를 날렸다. 더구나 이미 앞서 당한 두 가지 독이 내 목숨을 갉아먹고 있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천하의 조연이 이런 놈들한테 농락당해야 하다니!
‘제길! 때려잡기는 그른 것 같고, 도망쳐야 하는 것인가.’
비록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그건 놈들을 이길 방도가 없다는 의미지, 내가 죽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저들의 암기는 가소로운 수준이고, 독술은 내 막대한 내공과 체력을 갉아먹기엔 위력이 낮다.
‘얼른 이놈들 뿌리치고 내공심법을 운용할 수만 있다면…….’
다른 수는 없었다. 결심이 서자 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엇! 저 자식 도망간다!”
“저, 저 비겁한 자식 잡아!”
쪽수 믿고 핍박한 놈들이 날 보고 되레 비겁하다고 한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원…….
원래 사람 눈은 앞을 보라고 있는 것이다. 내겐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피할 재간 따윈 없었다. 푹푹 소리를 내며 암기들이 등허리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독과 암기에 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젠 체력이 겨우 반 정도나 남았을 뿐이다.
큰길은 절대 도주로가 될 수 없었다. 이제 8성까지 떨어져 버린 유운신법으론 당문의 경공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로 몸을 꺾었다.
골목길로 접어들어서야 놈들의 공세가 한풀 꺾였다. 반듯하지 않은 좁은 통로에선 경공의 수준보다 즉각적인 컨트롤을 요하는 반사 신경이 더 중요하다. 날 따라오기도 벅찬 놈들에게 암기를 날릴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서녕성 뒷골목에서 살벌한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중원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이 이곳, 서녕도 엄청난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호화로운 전각이나 주루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역(異域)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건물들이 많았다.
서장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라마교의 크고 작은 불사(佛舍)가 한 구획이 멀다 하고 나왔고, 심지어 회족들의 주거 지역엔 동관청진대사(東關淸眞大寺)라는 이슬람 사원까지 세워져 있었다.
당문도들과의 술래잡기는 티베트족 거주지에서 시작해, 한족 거주지를 거쳐 회족 거주지까지 계속됐다. 쫓는 놈도 쫓기는 놈에게도 이런 추격전은 모두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관병이 출동하지 않은 거야?’
아까 당문도들과 전투를 벌인 곳은 엄연히 서녕성 안쪽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나였지만, 공격은 저놈들이 먼저 시작했다. 일단 관병이 출동하면 양쪽 모두 페널티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정도만 돼도 내겐 안심이었다. 놈들을 떨쳐 버릴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라면 이미 봤어야 할 관병들이 아직도 출동하지 않은 것이다.
‘어라라, 그러고 보니 부중도 보이질 않았잖아!’
미치겠다. 생각해보니깐 아까 황금전장 때문에 서녕을 샅샅이 훑으면서도 서녕부중(西寧府中)을 봤던 기억이 없다.
그건 제길… 이곳 서녕은 가욕관 밖처럼 대명률(大明律)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 의미했다.
‘어쩐지 어제부터 강호제일이나 당문도들이 거리낌 없이 독수를 사용하더라니…….’
이쪽 상황이 그렇다면, 남의 손을 빌어 놈들을 떨쳐 버린다는 애초의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더구나 도주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됐던 탓에 중독이 심해진 상태였다. 내력이야 원체 많았으니 별 무방했지만, 체력은 이제 갓 3할도 안 남았다. 더 시간을 끌기엔 위험했다.
마침 눈앞에 꺾어진 골목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신형을 꺾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자식들도 방심하고 있을 터.’
피곤할 정도로 똑같은 패턴이 계속되면 필연적으로 방심이 싹튼다. 생사가 일순간에 갈리는 사지라도 말이다.
거친 숨소리에 섞여 요란한 발소리가 골목 저편에서 들려왔다.
온 신경이 소리를 좇는다. 점점 커진 발소리가 이젠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들려온 순간,
‘지금!’
사람 얼굴 따윈 확인하지도 않고, 벼락처럼 권강을 내질렀다.
펑!
‘다시!’
쓰러진 놈 뒤로 미처 서지 못한 다른 놈이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놈에게 다시 한 번 권강이 쏘아졌다.
콰앙!
‘젠장!’
타격감이 방금 전과 다르다.
이번 놈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충자 결까지 주입한 권강을 막아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그 막대한 권력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팔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겨우 두 사람이나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골목길은 좁았다. 순간 갈등했다. 이렇게 좁은 곳이라면 내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더구나 눈앞의 놈은 완전 무방비가 아닌가. 놈을 잡으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놈만 제거하면 나머지 두 놈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어쩐지 지금 내 공격을 막아선 놈의 면상이 낯설다 싶었더니, 골목길에 모습을 드러낸 녀석 또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신안을 통해 본 놈의 수준 또한 지금 놈보다 더 상승의 경지. 북문에서 만난 허접한 이들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도주하는 터라 뒤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어느 순간부터 흩어져 있던 놈들 무리가 합세한 것이다. 아마 남문에서도 날 기다리고 있던 놈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놈들이 그놈들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호제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그가 날 또 노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하는 것을 이미 얻었고, 이놈들처럼 현상금과 비급에 눈이 돌아갈 리는 없을 테니.
몸을 돌렸다. 미련은 버렸다. 내 공격을 막을 정도라면, 놈들이 구사하는 독공과 암기술은 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끙.”
미치겠다. 뒤를 돌아본 순간,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황금충, 그만 포기하시지.”
도대체 언제 놈들이 숨어든 것일까. 등 뒤에도 당문 고수들이 있었다. 완벽하게 포위당한 것이다.
‘제길, 완전히 오판했군.’
훨씬 빨리 놈들을 공격했어야 했다. 너무 시간을 준 것이다. 방금 전, 내 공격을 막아낸 녀석도 이젠 정신을 차리고 몸을 단정히 가누고 있었다.
새로 가세한 인물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처음 북문에서 손을 섞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아홉의 인물이 포위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뒤쪽에 다섯, 그리고 앞쪽엔 넷이 길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당문 소속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녀석들 중엔 대머리에 가사를 걸친 여승도 있었던 것이다. 설마 소림 출신일 리는 없었으니 여승은 분명 사천 연합의 한 축인 아미파 소속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기 검을 든 중년 수사도 보인다. 아마도 청성이나 점창에서 온 자일 터.
아마도 새로 가세한 인간들이 당문 유저들보다는 지위가 더 높았나 보다. 그 입 가벼운 당문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독 안에 든 생쥐라고 여겼음인가? 누구도 내게 손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번잡스런 추격전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조용한 대치 상태가 잠시 지속됐다.
어쩐지 모두 날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다. 며칠 전만 해도 저들의 눈은 다른 빛을 띠웠어야만 했는데.
침묵을 깬 이는 여성 유저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었다. 여자라면 절대 기피할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색의 머리칼을 지니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머리색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녀가 얼마나 지독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를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강호인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대가 전 소요파 문주, 조연 님이 맞나요?”
머리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반반한 얼굴은 호감을 주었다. 이제 와서 그따위 질문이나 하는 그녀의 뻔뻔함에 짜증이 확 일었지만, 그 얼굴 때문에 대답을 해줬다.
“모르고 그렇게 사람을 쫓는 인간들도 있나 보군요, 백발마녀님.”
강호 여성 유저 중에서 최고수. 현재 강호 공식 서열 10위에 랭크되어 있는 백발마녀가 그녀였다. 그녀와 강호제일이 속한 당문은 강호 서열 10위 안에 든 랭커를 둘이나 가진 유일한 문파였던 덕택에 현재 강호 최강 문파로 간주되고 있었다.
백발마녀는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내 대답에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 모습이 한층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호호! 조연 님, 모양새가 좀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여기 모이신 분들 중에 조연 님께 특별히 악감정 갖고 온 사람은 없답니다. 너무 날 세우실 필욘 없어요.”
‘훗, 웃기고 자빠졌군.’
무리 속에서 그녀를 확인한 순간에 난 이미 포기했다. 그녀와 함께 다닐 정도의 고수들이 다섯이나 더 있다. 과거의 나라고 할지라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음을 각오하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이미 신선폐와 적섬설매에 중독된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체력은 겨우 2할 남짓 남았을 뿐이다.
거기에 아까부터 화면에 경고 메시지가 계속 출력되고 있었다.
[중독 상태가 장시간 계속됐습니다. 1분 후에 주화입마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난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어차피 그냥 시간을 방치해도 주화입마인데, 그들의 공격 따위가 무슨 걱정이 되겠는가.
체력을 회복하고 나면 되든 안 되든 놈들 중 몇은 저승길 동무로 삼을 생각이었다.
반야신공의 황금빛 서기가 서서히 내 몸을 감쌌다.
그 모습이 너무 뻔뻔하다고 여긴 것일까?
이 자식들 면상 보기 싫어서 눈을 감고 있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훗, 아직도 지가 옛날의 그놈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냐?”
“부용아!”
“왜 그래? 내말이 틀렸어? 얘 말하는 싸가지를 보라고. 성질 같아선 지금 이 자리에서 때려죽이고 싶은걸?”
미치겠다. 백발마녀의 목소리는 아니니 아미파의 여승이라는 말인데, 말하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감히 누굴 때려죽인다고?
이러다 독 때문이 아니라 열 받아서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부용님, 저도 조연이 말하는 꼴이 같잖긴 하지만 조금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나중에 저놈이 복수하겠다고 졸졸 쫓아다니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푸하하! 학소 말이 맞아요. 더구나 저놈은 사악한 쪽으로 머리 굴리는 데는 업계 지존급이라죠? 나중을 생각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죠.”
“흥! 이런 작자가? 돈만 밝히고 사악한 계획으로 이간질 따위밖에 못하는 작자가 감히 날 어찌해본다고요? 믿는 건 그 무진인가 뭔가 하는 사기 스킬밖에 없는 놈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이젠 다른 놈들까지 가세해 날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나마 무리의 최고 고수인 백발마녀는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그녀도 딱히 착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어떡하실래요? 보아하니 조연 님 운공이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는데요. 그 전에 저희끼리 제비뽑기라도 할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 전 안 할랍니다. 그저 구경을 왔을 뿐이지, 손해를 보긴 싫거든요.”
“저도요. 괜히 죽였다가 명성 깎이고 싶진 않거든요.”
깐죽대던 두 사내는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아미파 여승, 부용이 소리쳤다.
“제가 먼저 하죠! 이참에 저도 조연이 잡고 강호에 이름 좀 날려 볼래요!”
아이고, 두(頭)야……. 이 잡것들은 나와 비무를 하겠다고 온 것이다. 천하의 조연이 이런 양아치들의 놀이 상대로 전락해버리다니.
당장이라도 이 연놈들을 죄다 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만일 뿐, 운기행공은 너무 더디게 진행됐다.
신선폐는 산공독의 일종. 내력을 흩트리는 데 탁월했고, 적섬설매란 독도 결코 수준이 낮지 않았다. 거기에 반야신공도 이젠 겨우 2성에 불과했으니 체내공이 아주 지루한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장장 삼십 분이나 운기가 계속됐다. 그사이에도 눈앞의 연놈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날 농락했다.
그들의 주둥아리에서 새어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리를 연신 강타했다. 덕분에 난 한 가지 결심을 해줘야 했다. 하남에 복수를 하고 나면, 바로 이놈들 문파는 멸문시켜 버리자고.
“훗, 얼마나 꼴같잖은 심법이면 삼십 분이나 잡아먹어? 그래도 용하네? 한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겨우 운기가 끝나고 기를 갈무리하는데 또 부용의 비아냥거림이 터져 나왔다.
‘뭐 어쨌든 좋다. 최소한 이년은 잡고 죽을 수 있으니까. 덤으로 다른 애들 멱줄 몇 개는 따줄 자신도 있고.’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부용이 팔을 내저으며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약속한 대로 내가 먼저 할게요. 자, 자! 다들 물러서시고 자리 좀 만들어 봐요!”
제 죽을 자리를 마련하는 부용의 소리를 듣고 다들 분분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좁은 골목길에 좁다란 비무장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제 강호인명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주위 사람들이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다는 허영에 도취되었음인가?
그녀가 화사하게 웃는다. 사갈(蛇蝎) 같은 비구의 미소도 있다는 걸 그녀가 보여 주고 있었다.
스르릉-
충분히 영웅심에 도취된 그녀가 이제 시작하겠다는 듯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중원 사대검파에 들어가는 아미파 소속답게 검이었다.
제법 잘 정련된 듯 보광(寶光)이 흘러나오는 기보급 아이템이었다.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을 보게 되는 건가.’
그녀가 먼저 공격하길 기다렸다. 어차피 부용은 곧 내게 죽을 것이고, 문제는 다음이었다. 백발마녀나 다른 당문의 인간들이 암기나 독 따위로 견제를 하기 전에 몇 놈이라도 더 저승길 동무로 삼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려면 섣불리 공격하기보단 부용의 공격을 역으로 이용하는 게 편했다.
“듣자하니 너 육합권 심결을 사용한다며? 요새 심결 무공이 대문파의 진산절기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바보들이 많아졌다던데 모두 너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오늘 네가 죽으면 더 이상 강호에 그런 헛소리하는 인간들도 사라지겠지?”
처음으로 제법 인간 같은 말을 뱉어내는 부용이었다. 반말만 아니라면 뭐라 대꾸라도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용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알고나 죽어라. 대(大)아미의 난피풍검법이다!”
얍삽한 성격에 맞게, 그녀가 내지른 검은 이미 내 머리를 쓸어오고 있었다. 검이 코앞에까지 이르러서야 그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의 난피풍검법은 하고 다니는 짓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위력이 뛰어났다. 정말로 바람을 쪼개버릴 수 있을 정도로 눈앞을 가득 메운 검영이 어지러이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단번에 때려죽이자는 계획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간신히 불영보를 시전해 그녀의 검을 피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됐다.
[군자산(君子散)에 중독되었습니다.]
누군가가 하독(下毒)을 한 것이다.
“개자식들!”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어느 정도껏이다. 실컷 해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 하독을 하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훗! 뭐라고 하는 거야?”
그녀가 더욱 검을 세차게 뿌리면서 코웃음을 쳤다. 하긴, 이런 성질머리로 남 몰래 독을 뿌리는 짓은 못할 것이다. 그런 꼼수를 부릴 정도로 부용이란 여중은 머리가 좋아 보이질 않았으니까.
누가 하독을 했든지 간에 중요한 건 범인을 색출하자는 게 아니다. 이젠 이런 개망나니 같은 여자에게마저도 죽게 생겼단 말이다!
아무리 심결 요결이 좋다고 한들, 심득을 쓰려면 몸이 튼튼해야 한다. 수십의 검영을 막기엔 불영보는 너무 느렸고, 육합권도 빠르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내 몸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군자산 때문이었다. 공방(攻防)의 능력을 떨어뜨리진 않았지만, 모든 동작이 방금 전보다 크게 떨어졌다.
“훗! 이따위 실력으로 강호를 주유했어? 하남 놈들 실력도 형편없었군!”
내가 군자산에 중독됐다는 걸 모르는 부용이 기고만장해서 큰소리를 쳤다.
정말이지 울고 싶은 상황이었다.
저 재수 없는 입을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녀 말대로 지금 난 내 한 몸 지키기도 힘들었다. 아무리 중독된 몸이라고 하지만 저런 인간에게조차 멸시를 당하는 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이래서 강호는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난피풍의 빠른 검세에는 유자 결도, 방자 결도 통하지 않았다. 묘자 결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결 요결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선 빠름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어떤 요결로도 그녀를 상대하기엔 부족했다.
칙- 치칙-
난피풍의 검기가 내 몸을 사정없이 훑고 지나갔다. 뱀의 혓바닥처럼 방어를 뚫고 요혈을 공략했다. 만약 내게 신안이 없었다면, 이 빠르고 변화 많은 검법에 일찌감치 난도질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인격에 어울리지 않게 부용은 제법 전투에 능란했다. 이런 인간쯤이야 간단히 제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내 착각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 오직 이 여자만 때려죽이기로, 모든 걸 지금 이 순간에 다 쏟아 붓기로.
무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무진의 시전 동작은 이미 강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부용이 아무리 머리가 나쁘다고 해도 몰라볼 리가 없었다.
더구나 군자산에 당해 속도가 떨어진 상태라, 그렇잖아도 느린 시전 동작이 더 느려질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이 여자의 시야를 가릴 수단이 필요했다.
무영각(無影脚)이라는 무공이 있다. 청말(淸末), 광동 지방에 살았던 의협 황비홍이 불산무영각(佛山無影脚)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사용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무공이다. 용아각(龍牙脚)의 연속 차기 형태의 이 무공은 중원의 다른 무공 초식처럼 숭산 소림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선 불패의 무공처럼 취급받는 무영각이지만, 강호에서는 사실 별 실속이 없는 무공이었다. 얼마나 쓸데없는 무공이냐면, 예전 고목문에서 처음으로 비급을 입수했을 때에는 기본공이었던 게 훗날 업데이트가 되면서 일격기로 강등당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개발사 측이 이 무영각을 계륵처럼 여기고 있다는 증거쯤 될까? 버리기엔 너무 유명하고, 넣자니 거의 쓸모가 없는 무공. 사실 허공에 몸을 띄워 장시간 체공하는 이 허점투성이 무공을 누가 쓰겠는가?
그런데 아마 무영각을 나만큼이나 잘 키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사냥이나 전투나 주로 심결 요결과 일격기만 사용했다. 다른 이들처럼 주력 무공의 기본 초식에 기대지 않았던 덕에 난 부용을 상대로 무영각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채찍처럼 휘감겨 오는 검기들을 무시하고 몸을 띄웠다. 이미 막가는 마당이다.
타타타타타-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무영각이 시전된 것이다.
“푸하하!”
“훗!”
이젠 완전 맛 간 놈의 발악 같다고 여긴 것인가. 둘러싸고 있던 적들의 비웃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무영각은 단순 공격의 연속 동작. 한번 시전하면 중간에 취소할 수 없다. 거기에 무공 성질 또한 불가의 양강인지라, 내가 시전하는 무영각은 도가 체질보다 발차기가 서너 번쯤은 더 행해진다. 공격력은 더 세지만, 그만큼 허점도 증가하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무영각을 본 부용의 몸이 옆으로 빙그르르 회전했다.
타격점을 잃은 내가 그녀의 좌측 허공을 격하면서 지나쳤고, 그녀의 매서운 공격이 내 옆구리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샤샤샤샥- 쉬쉭!
바람소리 이는 소리인지, 살점 갈리는 소리인지 모를 소음과 함께 내 몸이 허공에서 튕겨졌다.
어이없는 일격기에 당연한 패배가 장내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누구도 내가 이번 공격에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절로 일어나는 방심을 막을 수 없었다.
“잘하는걸, 부용님!”
“캬! 멋집니다! 멋져요!”
기고만장해진 부용은 시선을 내게서 떼어 동료에게 던질 정도였고, 그게 바로 내가 애써 무영각을 시전하며 의도했던 상황이었다.
“부용아, 피햇!”
백발마녀가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행하진 못했다. 무진은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무진의 준비 동작이 완성되기 전에 날 쓰러뜨려야 했다.
뒤처진 오른발이 앞으로 내딛어지며 어깨가 휘둘러졌다.
‘가라, 망할 년.’
슈웅-
꽝!
섬광이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무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 강렬한 빛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이제 죽을 차례군.’
골목길을 가득 메운 빛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지만, 모든 이가 시력을 회복하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골목길 한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내공이 조금만 남아 있었어도 이럴 때 몇 놈은 더 죽이고 갈 수 있을 텐데.’
목표가 대폭 낮춰지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죽음은 당연했다.
‘쩝. 일주일간 세 번 사망이라…….’
매번 죽을 때마다 피로가 가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강호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현실에서도 그렇듯, 게임이란 것도 희망이 담보되지 않으면 계속 해나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놈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내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무진의 허점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이게 내공을 완전 소모한다는 걸 알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눈치 좋은 녀석이 한둘은 있게 마련이다. 청성인지 점창인지 모를 한 녀석이 검을 치켜세우고 날 향해 쇄도해왔다.
‘제길…….’
죽는 것도 이젠 지겹다. 그래도 이번처럼 사지 멀쩡한 상태로 죽는 건 처음이다.
쐐애액-
이내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려오더니, 삼 척쯤 앞에서 검영이 산개한다. 꼴에 또 멋을 부리겠다는 심사.
‘그래, 넌 폼이나 세워라. 난 갈란다.’
다들 숨죽이며 내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놈들 면면을 다시 한 번 뇌리에 새겨 넣었다.
‘반드시 복수해준다.’
아무도 내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당사자인 나도 그랬다.
그르릉-
“뭐 해요? 어이, 형장! 그만 일어나시지!”
사망했다는 메시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주변 환경이 싹 바뀌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그 무엇보다 어떻게 저 양반이 여기에 있을 수가 있는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반대편으로 온 것인가?’
방금 전까지 등을 기대던 골목길의 토담이 마치 회전문처럼 움직여선 날 반대편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일어나세요. 아직 안전한 건 아니라구요.”
현운자가 다시 말했다.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왠지 꿈을 꾸는 기분이다.
설명 하나 없이 그는 몸을 돌렸고, 별수 없이 나도 그 뒤를 따라야 했다. 반대쪽으로 왔다고 해도 놈들의 추격을 뿌리친 건 아니다. 재수 없으면 잡힐 수도 있다.
어떻게 그리도 잘 알고 있는지 현운자는 복잡한 서녕의 골목길을 요리조리 잘 쑤시고 다녔다.
그는 별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묵묵히 길만 재촉했다. 열 몇 번이나 골목길을 꺾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로 들어가요.”
서녕성 서쪽 성벽 밑에 자리한 민가의 뒤뜰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곡물을 담아놓은 듯한 큰 항아리였다.
현운자가 먼저 몸을 집어넣었다. 도대체가 거칠 것이 없는 동작이었다.
“후우… 어쩐지 말려가는 기분이네.”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현운자건만, 지금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었다. 그토록 전서구를 날렸는데도 소식 하나 없던 그가 어떻게 날 찾아왔을까?
어쨌든 의문을 풀려면 일단 저 항아리에 들어가야 했다.
항아리 안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은근히 예전 용문객잔에서 강호를 만나러 갔을 때나, 무위에서 진진을 만나러 갈 때의 경험을 상기했던 난 평범한 지하 공간에 싱겁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상 탈출로 같은 건가?’
항아리 입구에서 빛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다. 지하 토굴은 서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그쪽으론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현운자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말없이 다시 길을 재촉했다. 잠시 후, 이젠 적들의 추격을 따돌린 것 같다고 생각한 난 그를 불러 세웠다.
“현운자 님! 잠시만 쉽시다. 저 지금 중독됐단 말입니다!”
그 말에 몇 발자국 먼저 걷던 현운자가 되돌아왔고, 난 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곧 운기가 시작되었다.
군자산을 해독하는 시간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운기한다고 해서 말을 못 듣는 것도 아닌데, 현운자는 내 의문을 풀어줄 만한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또 분위기 잡는 건가? 하여간에 사람이…….’
평소 날 골려먹는 일에 열을 내는 사람인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현운자는 결국 본인 입이 근질근질해서 실토할 사람이었다.
어쨌든 현운자 덕에 위기를 넘겼다. 문도들과 한 약속 때문에 지난 두 번의 사망은 견딜 수 있었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지금 반야신공이나 심결육합권은 겨우 1성이었다. 반야신공이야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있다 해도, 심결육합권이 문제다. 진결육합권 비급을 구해다가 12성까지 수련하고, 다시 심결 퀘스트를 해야 할 것이다. 시간적인 문제야 그렇다 쳐도, 전엔 진진 덕에 8개 요결을 다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행을 또 바랄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운이 좋은 놈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는다.
아마 이번에 또 죽었다면 강호를 계속 플레이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끝났으면 가죠.”
운기가 끝나자마자 현운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쩝. 뭐가 그리 바쁜 건지…….’
암로는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현운자는 불 밝히는 부적인 화광(和光)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금 이상했지만, 어차피 한 방향으로 뚫린 길이라 묵묵히 따라갔다.
그렇게 한 십여 분을 걸어가자, 드디어 막다른 벽에 도착했다. 고개를 쳐드니 머리 위에 푸른 구멍 하나가 보인다. 흰 구름이 보이는 걸 보니 하늘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녕성이 아스라이 보이는 황량한 들판의 우물이었다. 우물은 완전히 말라 있었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동아줄까지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탈출로였다.
‘그런데 이런 게 왜 필요하지?’
공성전(攻城戰)이라도 벌어진다면 모를까,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
놈들은 우리가 서녕성을 통과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현운자와 난 말라버린 우물을 등지고 서녕성을 바라봤다. 누가 먼저 입을 열 것인가.
“고생 많으셨습니다.”
현운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의 말대로 드디어 고생이 끝난 것이다. 현운자의 말 한마디에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감회가 새롭다. 그와 헤어진 지 겨우 스무날이었다. 겨우 스무날. 그 스무날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이제 그가 왔으니 다신 그런 꼴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문파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물어볼 게 산더미 같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질문은 그의 안부였다. 현운자의 도포는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민무늬 청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태극 문양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왔습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랐다.
문파를 나오는 방법은 무공을 온전히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추방과 모두 반납하고 나오는 파문, 그렇게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유저 문파가 아닌 이상, NPC 문파에서 나오는 방법은 오직 파문밖에 없었다.
현운자의 모든 무공은 무당의 것. 그는 무공에 부적술마저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파문을 자청한 이유는 오로지 나 때문일 테고…….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암로에서 부적술을 사용하지 못했는지, 왜 서녕성에서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 날 구출하는 데에만 집중했는지 말이다.
그는 그러려야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 다시 일어설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문도들에겐 넉넉히 말했지만, 내 계획으론 석 달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잦은 사망으로 석 달이란 목표는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짧게 답을 하고는 입을 다문다. 짧은 대답이 믿음직스럽다. 기다려 주겠다는 의미였으니.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이번엔 그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건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영역의 문제다.
비록 소요파 사람들만큼은 아닐 테지만, 그도 천사교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다. 설혹 도관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시의 적절한 순간에 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치 적당한 대답을 찾듯이 시간을 끌던 현운자가 겨우 대답을 했다.
“서녕으로 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오긴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이런 식의 성긴 대답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이란 건 묘해서, 차마 더 캐물어보기가 힘들었다. 더 이상 캐물었다가는 마치 내가 죄인을 심문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다. 현운자가 내 은인이라는 것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분위기를 돌리고 싶었다.
“하여간 강호는 정말 대단한 게임이에요. 얼마나 대단한 공성전을 벌이려고 이런 지하 통로까지 만들어둔 걸까요?”
내가 방금 지나온 우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름대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짐짓 웃음까지 지어 보였지만, 듣는 현운자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나 보다.
“오다가 발견했어요. 인가의 흔적도 없는데 우물이 있다는 건 의심을 살 만하죠.”
“…….”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현운자는 내가 또 넌지시 질문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탈출로를 알고 있는 거냐고 말이다.
사실 그것도 의문이긴 했다. 현운자는 방금 전에 부랴부랴 서녕으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파문으로 무공이 깡그리 사라졌으니 임시로 저급한 경공술을 배우고 달렸을 것이다. 당연히 시간도 엄청 많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급한 상황에서 우물을 살펴볼 생각을 했다?
아무리 의심이 가더라도 그 순간에서만큼은 호기심을 묻었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현운자라면 그래야 정상이었다.
방금 전에 은인을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현운자의 섣부른 대답이 결심을 깨뜨렸다. 나는 넘어가려는데 그는 날 속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면 오늘 그가 실수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갓 도착한 서녕의 복잡한 뒷골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나조차도 간신히 뚫고 온 청해성의 무식한 도적 떼를 무공도 없이 헤치고 건너온 것도 그렇다.
무엇보다 토담에서 날 구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비밀 통로야 있을 수도 있다지만, 그 회전식 토담은 뭐란 말인가?
그걸 그가 다 수습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기를 치고 싶으면 진실의 비중을 더 높였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그런 기미가 있었지만, 애써 부인하고 살았다. 내 꿈은 결코 남과 같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현운자가 내 추측 속의 인물과 동일인이라면 같이할 수 있을 거라고 가끔 환상 같은 착각을 하곤 했었다. 오늘은 추측이 확신으로 변해버린 날이었다.
난 공간을 창조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그를 믿는 마음이 컸지만, 그가 무엇 때문에 날 속이려 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이런 어설픈 거짓말까지 써가면서 날 구하러 온 것일까? 그토록 애써 감춘 일을 왜 나 때문에 풀어버린 것일까?
어쩔 수 없었다. 작은 의심이 큰 사단을 만들기 전에 답을 들어야겠다.
“현운자 님, 그거 알아요? 여긴 서녕성 서쪽이죠. 중원은 반대편이랍니다.”
중원에서 서녕으로 오다가 우물을 봤다는 말 또한 순 거짓말이었다. 그러려면 서녕성 동쪽 우물을 발견했어야 한다.
평소에 거짓말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겠지만, 현운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난 현운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핑계 찾기를 포기한 듯해 보였다.
“방금 전에 서녕성에서 탈출할 때 항아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 강호에선 매번 이런 식의 통로밖에 없을까 하구요. 현운자 님에겐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 같은데 말입니다. 전 벌써 세 번이나 겪어봤거든요. 한 번은 가마솥, 때론 마룻바닥을 뚫고도 가봤죠. 그중에서도 압권은 투명거울이었죠. 마치 마법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현운자가 쳐다보았다.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난 편하게 게임을 즐기고 싶었다.
“이번 건 좀 식상했어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젠 좀 다른 방법을 써주실래요, 진진 님?”
순간 적막이 무겁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괜한 말을 내뱉었나 싶었다. 그러나 난 후회하곤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차피 그녀도 이번엔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다.
난 물었고, 대답은 그가 해야 했다.
시간이 푸른 하늘을 따라 헤엄치듯이 흘러간다. 머리도 별로 아프지 않다. 그, 혹은 그녀가 뭐라 또 다른 핑계를 대더라도 나는 어차피 그 편이다.
병아리가 톡톡 알을 깨고 나오듯이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그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하하하! 쩝.”
“크크크.”
나도 덩달아 따라 웃다가, 그가 매섭게 째려보는 걸 느끼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현운자가 물었다.
“언제부터?”
이제 뒤바뀐 건가? 뭐 그건 중요치 않다. 그가 웃었으니 그걸로 됐다.
“그거 압니까? 게임은 현실이 아니라는 걸.”
“……?”
현운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게임 속은 욕망의 집합처라죠. 이유 없는 일이란 없답니다. 현실보다 더 노골적이고 더 선명한 인간관계랍니다. 좀 알겠어요? 현운자 님은 너무 욕심이 없어서 문제였죠.”
그의 눈썹이 팔자를 그린다. 인정할 수 없다는 걸까, 이해 못하겠다는 걸까?
“공동산에서 퀘스트할 때, 거기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죠.”
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뗐다.
“좀 그렇긴 했죠. 솔직히 생각 많이 해서 움직인 건데, 아무래도 의심을 피할 순 없었나 봅니다.”
“전 운을 안 믿거든요. 심결 요결 8단계까지 익힌 사람이 한 장소에 있다라… 그것도 익힌 사람이 모인 게 아니라 순서가 바뀌었죠. 참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습니까? 강호의 수백만 유저들 중에 어떻게 우리 두 사람만 심결 최고 요결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운을 믿을 필욘 없지만, 실력은 과신해도 돼요. 그때 조연 님이 무진을 배우게 된 건 온전히 조연 님 실력으로 얻은 겁니다.”
듣기 좋은 소리일 뿐이다. 내 실력을 과신했다면,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죠. 아직 진진 님은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고, 저도 굳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아쉽네요.”
현운자의 눈이 ‘뭔가요?’라고 묻는다.
“이제 한동안 같이 다닐 텐데 말입니다. 남자 둘이 돌아다니는 건 남들 보기에 좀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이건 백 프로 진심이다. 난 진정을 가득 담은 눈길을 보냈다. 뚫어지게!
그러자 현운자가 코웃음을 치더니 결국은 크게 웃고 만다.
“하하하하! 여태 잘 다녔잖습니까!”
윽.
“그리고 말입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현운자니까요.”
무슨 소리야?
“더구나 안타깝고 죄송하지만, 조연 님과 같이 다닐 수도 없을 것 같네요.”
“무슨 소립니까?”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전 지금 조연 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거든요. 훼방꾼에 가깝죠. 이곳, 청해성에서 버틸 능력도 없는 데다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려면 다른 곳에서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난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현운자는 진진인가 아닌가? 강호 메인프로세서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초울트라 사기 캐릭터인 그녀가 뭣 때문에 수련을 해야 하는가?
그가, 아니 그녀가 말하는 걸로 봐서는 알쏭달쏭 그 자체였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혼란 속에 진진인지 현운자인지 모를 그… 아니 그녀인가? 하여간 앞에 있는 인간이 물었다.
“곤륜산이요.”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대답과 함께 현운자는 곧바로 떠났다. 휭 하니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묵묵히 동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왜 날 속이려고 했냐는 질문은 끝내 던지지 못했다.
왜 날 구하기 위해 그런 무리를 감수해야 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